어젯 밤 칼의 노래를 마저 읽었다. 

왜적 뿐만아니라 선조로 대표되는 조정과 명나라 군대에 둘러싸여  

외롭게 싸워야했던 장군과 그 군사들과 

죄 없이(그 당시에는 투표권도 없었으니 정말 죄없이) 당해야했던 백성들의 고통이 가슴을 쳤다. 

그나마 전쟁이 끝나고 억울하게 목 베어지지 않고 

마지막 전장에서 장렬하게(!) 숨을 거두었던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오늘 아침 남편이 노대통령이 음독 자살했다고 알려줬다. 

어찌나 엉뚱한 것들을 곧이곧대로 잘 믿는 못 말릴 나인지라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랬는데 사실이었다.  

자기 집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뒷산 바위에서 뛰어내렸다는 뉴스에서 귀를 떼지 못했다. 

착찹한 마음을 달래려던 담배도 한 대 못 피우고 그냥 가셨단다. 

몇 마디 짧은 글을 남기고 떠났단다.  

더 이상 난도질 당하기 전에 앞선 것이 잘한 일일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다 이렇게 죽는 것이 오히려 천만다행한 일일까?

눈물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안타깝고 애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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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가을에 엄마랑 미니,태민이 셋이서만 허브나라에 갔다. 

그 때만 해도 태민이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줄행랑을 놓지는 않을 때였고 

도저히 안 되면 엄마가 달랑 업고 다닐 수도 있던 때라 엄두를 냈던 것 같다.  

 

서울까지 버스로 4시간을 달려서 남부터미널에 도착하여 택시로 동서울터미널로 이동, 

다시 버스를 타고 원주 근처의 장평터미널에 내려 다시 택시로 허브나라까지 가는 

멀고도 복잡한 길을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고 두 아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기어이 갔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버스 안에서 거의 잠을 잤고 

번잡한 터미널을 오가는 중에도 미니는 엄마를 잘 따라와 주었다.  

그리고 휴가철이 지난 한산한 허브나라에서 닷새를 쉬었다.   

 

엄마는 아빠랑 싸울 일이 있었으나 싸움 대신 그 곳에서 푹 쉬면서 

결혼생활 5년간 쌓인 고운 먼지 같은 피로를 푸는 쪽을 택했다.   

때때로 지극히 일상적이며 간단하고 담백한 전화통화만 했을 뿐인데 

닷새 후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갈등은 사라지고 부부가 마주보고 웃을 수 있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그 조그만 공간을 떠나지 않고 닷새를 보내면서 

매일 한 끼는 어린이 세트가 나오는 레스토랑에서 해결하고  

또 한 끼는 빵집에서 맘에 드는 빵을 고르고 팥빙수나 핫쵸코, 아이스크림을 곁들여 넘기고 

나머지 한 끼만 방에서 밥이랑 달걀찜 같은 것 하나 해서 간단하게 먹었다.   

오전에 나가서 산책하고, 놀이터에서 모래놀이도 실컷 하고 방으로 돌아와

날마다 다른 허브 입욕제를 넣고 아주 조그만 욕조에서 복작복작 셋이서 목욕도 하고  

오후에 또 산책하며 꽃도 보고, 사진도 찍고, 가게에서 물건들도 구경하고

찐 옥수수나 찐빵같은 군것질을 하거나  

허브치킨을 시켜서 뜯어 먹는 것 좋아하는 미니 닭다리도 뜯게 해주었다. 

좁디 좁은 방안에서도  뒹굴뒹굴하면서 숨박꼭질도 하고 만화영화도 보고 그랬나보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자기는 이 곳이 좋다고 '추역'이라고 하더니만

가끔 생각이 나는지 허브나라에 가고 싶다고 했다.  

 

엊그제는 비바람이 심해서 유치원 가지 않고 집에서 하루를 보내노라니 따분했던지 

낮에는 허브나라에 좀 놀러가자고 아빠 휴대폰에 문자도 남기고  

밤에는 잠투정 삼아 언제 갈 수 있느냐고 눈물바람을 했다. 

그래서 도대체 왜 허브나라가 좋으냐고 물었더니 

넓어서 뛸 수도 있고, 엄마랑 숨박꼭질도 했고, 레스토랑에도 갔고, 빵이랑 아이스크림도 먹었고 

그런 일들이 좋았단다. 

너덜이에서도 실컷 뛰어도 되고, 숨박꼭질도 할 수 있고, 빵이랑 아이스크림도 사 오면 되고 

다 되는데 왜 꼭 허브나라여야 하느냐고 따지듯 다시 물었다.  

 

" 그렇지만 내가 말을 잘 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허브나라에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행복이 있었다구요!"

라고 소리치더니 팩 토라져서 누웠다가 잠이 들었다. 

 

커다란 여행가방을 밀고 끌고 간 덕분에 양말 한 짝도 빨지 않았고, 청소도 할 필요없고

식사준비도 거의 하지 않고 그러니 물론 설겆이 할 것도 없고, 읽을 책도 가지고 가지 않았고 

그리하여 그 가을의 닷새를 온전히 아이들을 바라보고 아이들과 놀아주며  

먹고 싶다는 것 다 사주고(먹는 일은 특히 우리 미니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다.^^)  

아빠에게조차 시간을 나누어 주지 않아도 되었던 날들이어서 아마도 미니는 행복했던 모양이다. 

 

재민이가 태어나고부터 아무래도 미니에게 더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을 해본다. 

올 되고 순순한 미니가 아니라 늦되는 태민이가 맏이였다면 정말 너무나 힘들었을 것 같다. 

같은 여성동지인 딸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맏이라서 그런지  

이제 겨우 일곱살 아이에게 나는 참 많이 의지하는 것 같다.

그런 고마운 맏이인데 안타깝게도 앞으로 여러 해 동안 허브나라 여행을 데려가긴 어려울 것 같다. 

온전히 미니만 바라보기엔 동생들이 너무 어린 탓이다. 

언젠가 미니랑 엄마랑 둘이서 어딘가로 오붓한 여행 길에 오를 수 있는 날이 오면

그 때에도 우리에게 그 표현하기 어려운 행복이 함께 하길 빌어본다.  

 

<나의 다짐> 아무리 동생들이 어려도 맏이에게도 관심과 사랑을 듬뿍 쏟는 엄마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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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9-04-23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 입장에선 이기적인 얘기지만 큰애가 딸인 게 진짜 복이죠. 민이 이뻐요.

2009-04-23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지만 또 거짓말이 아닙니다. 

어제 남편이 술을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것으로 믿어집니다. 

365일 중 단식을 하는 약 한 달을 제외하면 1년에 한 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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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랑주 2009-04-05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지만 거짓말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은 잔뜩 흐리고 무척 쌀쌀하였다. 

어제 게으름 피우느라고 군불을 때지 않았다가  

새벽에 식어가는 방바닥에서 허리, 팔, 다리 온갖 관절이 뻣뻣해지는 걸 느끼며 무척 후회한터라 

(그 와중에 7년을 같이 산 남편이라는 사람은 이불을 돌돌 말아가서는 혼자 드르렁거렸다. 

출산한지 만 5개월도 되지 않은 마누라 이불 깃을 여며 덮어줘도 시원찮을 판국에 !!!)

그래서 출근시키자마자 서둘러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그리고 들어와 인터넷 뱅킹을 하고 있는데 눈 앞에 통유리창 너머로 희끗희끗한 것이 날린다. 

눈이다.  

목련 꽃 그늘 아래여야  할 4월 하늘에 눈이 펑펑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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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1 2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열흘 정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사이사이 비도 내렸는데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아서 어디가 새는구나 했지만 

어딘지 찾을 수가 없어서 불편한 나날이었다. 

물독에 길어다주는 물을 퍼서 설겆이도 하고 밥을 하려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번거로워서 아무 일도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미니아빠는 아침마다 고양이 세수만 하고 집을 나서 목욕탕에 들러 씻고 출근을 했다. 

미니는 사촌언니들과 목욕을 가서 눈이랑 코랑 귀랑 물이 들어가서 힘들었어도  

머리도 감고 한 번 씻고 왔지만 나머지 세 모자는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이상고온을 견디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새는 곳을 찾아내어 물이 나오던 날 정말 천국이 따로 없었다. 

설겆이도 금새 끝나고 무엇보다 그릇이 깨끗하게 다 씻기는 느낌이어서 개운했다. 

물이 나오니 나도 에너지가 넘치는 기분이어서  

아침 나절에 위 아래 두 아궁이에 불 때고 재민이 씻기고 나니 땀이 나는데다 

태민이도 마당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들어왔길래 내친 김에 모두 씻었다. 

그런데 우리 집 삼식이는 아무리 반찬이 없어도 꼭 점심을 먹으러 들어오는터라 

시간 맞추느라고 어찌나 서둘렀는지 막 다 씻고 대야의 물을 버리고 있는데 집안으로 들어섰다.  

출퇴근 길에 빨래바구니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물 열 통 떠다 나르지 않으니 삼식이도 좋단다.

부랴부랴 챙겨 먹여 보내고 나니 오후엔 세상 모르고 셋 다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어제는 주문한 진공청소기가 왔다. 

언제든 살 수 있었는데 미루다가 7년 만에 산 것이다.  

청소기도 있는데 자주 청소하지 않을 나 자신에게 더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아서 미루고 미루었지만

막상 문 턱이며 창 틈, 그 밖의 온갖 틈새에 쌓인 먼지를 빨아들이고  

요며 이불도 따로 흡입기가 있어서 속 시원히 털어내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묵혀두고 쳐다만 보던 짐들을 대충 정리하고 나니

방들이 환한 것이 역시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 사이에도 물론 삼식이 점심 차려내고 

이불 하나랑 큰 바구니 하나 가득 빨래 널고 개고 하다보니 역시 넉 다운! 

 

재민이는 이 모든 일을 하는 동안 젖 먹이고 기저귀만 갈아주면  

마냥 누워있거나 뒤집으면서 놀거나 잠을 잤다. 

아기가 어릴 때는 아이가 일을 다 한다더니 덕분에 빨리 끝냈다.

천국이 따로 없는 것도 좋고 

평소에 불만인 게으른 내 모습을 청산하고 부지런히 움직인 것까지는 좋았는데 

요령껏 일을 나누어 하지 않고 몰아서 하게 되니 늙어가는 몸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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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3-27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자랐던 충청도 시골에선 마당에 펌프가 있어도 물을 아껴썼어요.
우린 너무 물을 낭비하고 살아요. 물부족 국가로 분류되었어도 홍보가 안돼서 그런지...
천국이라고 느끼는 그 마음에 축복을

miony 2009-03-29 16:36   좋아요 0 | URL
물이 나오지 않아서 고생을 하고나서야 아껴쓰게 되네요.
그래도 아랫마을에서 가져다 쓸 수 있어서 그저 불편한 정도였는데
요즘 물이 많이 부족하다는 태백에 사시는 분들은 어찌 지내시나 걱정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