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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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가루 날려야 은사시나무지




  첫새벽에 시를 쓴다. 껍질 벗겨진 은사시나무의 실존에 대하여. 아니, 반성문을 쓴다. 그 나무껍질 벗긴 내 죄에 대하여. 내 죄는 부끄러움이나 자책에서 끝날 수 있지만 상대의 실존은 치명타를 입거나 고사(枯死)할 수 있음에 대하여.

   어느 봄날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모 영내 은사시나무 삼십여 그루가 허리 껍질이 벗겨진 채 방치되어 있었단다. 은사시나무에서 꽃가루가 날려 식사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둥치에서 사람 허리만큼 올라온 부분의 껍질을 벗겨 방치하면 나무는 고사하는 모양이었다. 꽃가루 날려야 하는 건 은사시나무의 생존방식이고, 그게 방해가 되는 것은 인간의 실존이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자연을 이용해야 하는 입장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에 대해 뭐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거창한 생태주의자나 자연보호주의자 입장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실존’의 문제로 생각해봤을 때도 그 기사는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아무리 봐도 ‘방치’가 ‘고사’로 이어지는 일련의 파노라마는 은사시나무에게 너무 가혹한 형벌이다. 차라리 적법한 절차나 당국과 협의를 거쳐 은사시나무를 벌채했다면 이런 쓰라린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방치와 고사가 주는 비열한 끔찍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은사시나무가 말라가는 동안, 인간들은 아무 일 없이 그 주변에서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었을 것이다. 뿌리나 둥치의 고통에 대한 그 어떤 자책이나 미안함보다 제 밥그릇에 꽃가루 날리지 않는 무탈함에 대한 수다를. 

  은사시나무는 적어도 해목(害木)이 되기 위해 자라지는 않았다. 자라기 전 곧장 뽑아주어야 할 나무로는 ‘어린왕자’의 바오밥나무로 족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걷잡을 수 없는 뿌리 번식으로 어린왕자의 별이 파괴되어서는 안 되니까. 그에 비하면 은사시나무는 무죄다. 햇빛 아래, 앞뒤 다른 색으로 반짝이는 잎들은 뭇 사람들에게 노래가 되고 쉼터가 되어주었을  뿐이다. 제 생존 본능을 위해 봄 한철 꽃가루 날린 것이 유죄라면 그건 애교 정도로 봐줄 수 있지 않을까? 그걸 양보 못해 순한 죽음도 아닌 ‘고사하기 까지 방치’하는 그 비열함에 반성문을 쓰고 싶을 뿐이다.

  더러 비열하고, 자주 자책하는 게 인간이다. 의도하지 않은 죄이기에 양심 있는 자는 그 자책이 오래간다. 그 때 망가진 제 영혼을 순진무구한 풀밭에 마냥 풀어놓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이기도 하다.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아름드리미디어,2003)에서 우리는 잠시 위안을 얻어도 좋을 것이다. 성장소설이란 점에서는 ‘라임오렌지나무’와 닮았고, 자연 친화적 요소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어린왕자’에 가깝다. 인간 속성이 아무리 비열하다 해도 자연에의 향수를 쉽게 잊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영혼을 따뜻하게 데워주기에 충분하다. 주인공 ‘작은나무’는 자연의 이치를 할아버지로부터 배운다. 단순하지만 지혜롭게 살아가는 인디언의 모습은 ‘방치’와 ‘고사’를 일삼는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아침이 오고 있다. 은사시나무를 위한 내 시는 여전히 미완성이고, 다만 나는 밑줄을 그을 뿐이다. <할머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하셨다. 한 마음은 몸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것이다. 몸을 위해서 잠자리나 먹을 것을 마련할 때는 이 마음을 써야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과 전혀 관계없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 할머니는 이 마음을 영혼의 마음이라고 부르셨다. 만일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교활한 생각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칠 일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이익 볼 생각만 하고 있으면 영혼의 마음은 점점 졸아들어서 밤톨보다 더 작아지게 된다. 몸이 죽으면 몸을 꾸려가는 마음도 함께 죽는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영혼의 마음만은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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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9-10-06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사시나무가 무슨 죄란 말입니까. 사람의 눈에 띄인게 원통할 뿐이지요. 이 책을 읽고 생태와 작가의 이중성을 집중 타격했던 저와는 다르게 말간 감성으로 쓰셔셔 깊은 밤 편하게 읽습니다. 검은 눈동자님! 닉네임을 바꿨어도, 이렇게 간만에 간명한 글로 반갑고 웬만하면 자주좀 뵙고 삽시다.(응? 그러면서 파란여우는 서재 방치 중...--;)

다크아이즈 2010-02-05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을 어떻게 잊겠어요? 장정일과 박정만을 공감하던 님을...
대충 살다보니 서재질이 뜸합니다. 가끔씩 님 서재에도 들러야 하는데 사는 게 영 말이 아니네요. 얼른 들러볼게요. 왜 서재 방치하시는지도 알아낼겸...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리처드 칼슨 지음, 강미경 옮김 / 창작시대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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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걱정은 사소하다 




  오늘 하루 그대 일과는 위대하였고 거기에 파생하는 걱정은 사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그 사소함이, 충분히 위대할 수 있었던 그대 일과를 망쳐버렸다. 실은 일과를 망친 것도 아니다. 망쳤다고 생각하는 건 그대가 느끼는 ‘사소함이란 유령’ 때문이다. 대부분의 걱정은 사소한 것에서 출발하고 그것이 그대 하루를 번민하게 만들므로. 오늘 하루 얼마나  사소함이 그대 영혼을 너덜거리게 했는지를 증명해보자. 

  한 달에 한 번 봉사하러 가는 그대, 오늘도 상담자의 편지를 개봉한다. 기름을 먹인 듯한 반질거리는 편지지에 세로로 정갈하게 써내려간 글엔 가을을 맞는 사내의 우수가 담겨 있다. - 어김없이 가을이 왔네요. 입술은 바싹 말라가고, 책을 읽어도, 글을 써도 예전처럼 집중되지 않아요.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면담자의 아픔은 깊고, 그대 자질은 얕기만 하다. 최선을 다해 들어주었건만 결과는 그대의 이러한 사소한 걱정이 그대를 압도한다는 사실이다. ‘내게 누군가의 얘기를 들어줄 자질이 없는 게 아닐까? 영혼이 아프다는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왜 더 많은 것을 주지 못했을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책하고 자책한다. 하지만 자책은 불필요하다. 그대는 성실하게 그의 얘기를 들어주었고, 어쩌면 편지를 쓰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스스로 치유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봉사를 마친 그대는 급하게 공식 자리에 참석할 일이 생겼다. 그제야 그대는 복장을 살핀다. 살짝 찢은 청바지에 흰 점퍼를 입은 그대는 망설일 수밖에 없다. 공식의 밥상에 권위주의라는 주요반찬이 빠진 적이 없으므로 자기검열에 빠진 그대는 또 사소함에 목매기 시작한다. 가을 분위기에 맞는 갈색 원피스를 갈아입고 나오기엔 시간이 촉박하고, 운전대를 잡은 그대는 빨간 신호등에서 교차로를 건널 만큼 찢은 청바지 패션에 골몰한다. 허겁지겁 자리에 앉았건만, 마음이 편치 않으므로 꼬리뼈는 아파오고 지루한 시간이 지속된다. 옆자리 누군가가 흘깃 쳐다만 봐도 찢어진 청바지를 탓하는가 싶어 식은땀이 난다. 실은 갈색 원피스와 찢어진 청바지 사이엔 별 차이가 없다. 투명 비닐 따위를 첨단패션이라고 뒤집어쓰지 않는 한 아무도 그대를 주목하지 않는다. 그대의 고민은 그대가, 혹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허상의 지표를 따라야 한다는 부담에 지나지 않는다.

  행사가 끝난 뒤 그대는 지인들과 정담을 나누기 시작한다. 당신과 따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지인의 눈신호를 보면서 그대는 기꺼이 시간을 할애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사할 사람은 많이 남았고, 그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지인은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그대는 자책한다. 의례적 인사는 접어두고 지인의 얘기를 먼저 들어줄 걸. 하지만 이 역시 사소한 고민에 지나지 않는다. 지인은 그대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당신을 기다렸던 것이고, 그 부탁이라는 것은 꼭 오늘 이 자리가 아니어도 가능한 것이다. 그야말로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행복해지고 싶은 우리는 정작 그 행복을 위해 너무나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고 말하는 책이 여기 있다. 리처드 칼슨의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창작시대, 2000)는 알게 모르게 우리가 얼마나 사소한 것들의 일상에 얽매여 사는지를 곱씹게 해준다. 사소한 오해가 가져다주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 생각과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무분별성, 자기 능력을 의심하거나 회의하는 피곤함, 수시로 변하는 기분에 집착하는 자기연민, 스트레스를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환경 탓으로 돌리는 비겁한 자아 등은 모두 인간이 가지는 특질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일수록 이 허상의 우물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 우물에서 질퍽거리는 동안 우리 섬세한 영혼은 잘 보이지도 않는 우물벌레에게 야금야금 갉히고 만다. 작가는 말한다. ‘몸의 주인이 당신인 것처럼 감정의 주인도 당신이다. 행복은 현재 당신 마음속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소한 것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기엔 우리 생이 아직은 환희와 풍요의 나날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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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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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를 부탁해




  과히 신드롬이다. 아니,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는 이제 신화가 되었다. 언제나 불황이라는 출판업계의 투정을 가벼이 웃어넘기듯 백만부 판매라는 빅뉴스를 독자들에게 보너스로 주기까지 한다.

  올해 이 도시의 원북 역시 ‘엄마를 부탁해’이다. 원북 행사란 전국 몇몇 공공도서관에서 시행하는 범시민 책읽기 운동의 일종이다. 시민들이 접수한 후보 도서 중 한 권을 각계에서 위촉된 원북 심사위원들이 토론으로 선정하고 도서관측은 그 책을 올해의 원북으로 선포한다. 한마디로 ‘책을 가까이 하는 시민’이 원북 행사의 취지이다. 따라서 보다 많은 시민들이 원북을 읽을 수 있도록 도서관측에서는 도서대출 및 교환, 원북 작가와의 행사 그 외 공개토론회 등을 마련해 적극적인 홍보를 하고 있다. 

  ‘엄마를 부탁해’가 올해의 원북 도서로 정해진 도시는 서너 곳이 된다고 한다. 백만부가 팔리기까지 이러한 원북 운동도 일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많은 독자의 마음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책 그 자체가 주는 감동 때문이라는 건 의심할 필요가 없다.

  원북 행사의 일환으로 지난주에 공개독서토론회가 있었다. 나를 포함한 시립도서관  주부독서회팀이 주축이 되어 시민들과 자유로운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우선 출간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독자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이 책의 미덕은 무엇인가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역시 신경숙 소설의 문체미학과 감성미학이 빠질 수 없었다. ‘부엌 살강에 엎어진 밥그릇’이나 ‘흙담 밑에서 뻗어가는 호박넝쿨’도 놓치지 않는 작가의 미시적 눈썰미와 ‘엄마를 잃은 게 아니라 잊었다’는 감성적 성찰이 그미 소설의 특장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 외 시점 변화의 독창성과 다소 신파인 곰소 아저씨와의 로맨스 등이 충분한 공감과 대중성을 획득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음은 엄마의 희생은 과연 온당한가, 라는 의견을 나눴다. ‘엄마는 멀리서 생각하면 눈물 나고, 가까이서 보면 화가 난다’는 작가의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처음부터 (희생만 하는)엄마로 태어난 게 아’니라 애초에 엄마는 여자였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반어법일 것이다. 엄마의 희생이 전제되어야만 온전한 가정이 지탱될 수 있었던 시절에 대한 회한의 기록은 그대로 엄마에 대한 헌사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많은 독자를 울린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려이기도 하다. 혹여, 이러한 모성의 희생이 가부장적 혐의가 짙은 이들에 의해 현재진행형의 미덕으로 칭송되거나 강요되지나 않을까 하는.

  맏아들로 살아간다는 것의 힘겨움과 나머지 아들들의 정체성 혼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의견도 의미 있었다. 장자인 형철이 밖으로 도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동안 나머지 두 아들은 둘째놈, 또는 아우라는 보통명사로만 존재한다. 아버지가 쓰던 밥그릇을 큰아들이 물려받고, 장독에 숨겨둔 ‘귀한’ 라면을 큰아들만 먹고, 고구마 캐는 노동에서 맏아들이 면제될 때 나머지 아들들은 절규한다. ‘형만 장땡이냐’고. 남은 두 아들들을 보듬는다고 너희들도 장땡이다, 라고 엄마가 말한들 남겨진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릴 적 상처는 성장한 뒤의 트라우마가 되니까.

 가족애란 이름으로 한량이었던 아버지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타당한 것인가, 라는 주제도 패널과 방청객 모두를 몰입하게 했다. 신경숙 가족소설에는 빈번하게 ‘아버지의 부재’가 나온다. 그미의 책을 읽다보면 그 부분은 의도적이라기보다 경험적, 실체적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젊은 여자 때문이든, 역맛살이 낀 팔자 때문이든 집 나간 아버지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든든히 집안을 지키고 있는 아내 품으로 돌아온다. 그 어떤 아내의 힐난도, 이렇다 할 자식들의 반항도 없이... 집안에 아버지는 부재중이지만 언제나 그 아버지는 면죄부를 받는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그래서 감히 부탁해본다. 책 속에서 아버지가 맏딸에게 엄마를 부탁하고, 맏딸이 성베드로 성당의 피에타상에게 엄마를 부탁하듯 이제 아버지를 부탁해본다. 아니, 아버지께 부탁한다. 이 세상 아버지(남성)들아, 이 책을 읽고 싱겁다거나 뻔한 얘기라고 옆으로 밀어놓는 일만은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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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전인권 지음 / 푸른숲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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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씩 헛갈릴 때가 있다. 가족제도 안에서의 여성에 대한 내 연민의 근원이 제 게으름을 합리화하기 위한 구실 때문인지, 저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여성성에 대한 강한 자의식 때문인지.

  지난 주말에 친정 엄마의 팔순모임이 있었다. 이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나는 즐거움에 앞선 약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행사의 행동요원(?)격에 해당하는 여성들의 불합리한 상황과 그것에 대한 내 연민 때문이다. 우리집 여성 요원들의 간략한 행태를 소개해보자. 자유분방한 큰올케가 대안 없이 뒤로 빠지는 동안, 전통적 가부장질서에 충실한 둘째올케의 가없는 효부정신이 발휘된다. 좋은 게 좋은 셋째올케와 멀리 사는 언니는 묵묵히 대세를 따른다.  전 여성행동요원의 정신적, 노동적 민주화를 꿈꾸는 나는 나름 합리적 대안을 제시한다. 집안이 아닌 밖에서 모여, 여성들도 우아하게 즐기자는 내 의견은 효 문화의 온당한 기치 앞에서 막내라는 이유만으로 웃자란 신인류의 감성쯤으로 내몰리기 십상이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집안 어른들의 행동요원에 대한 평가가 이어진다. 유교적 가풍의 끄나풀을 놓을 맘이 전혀 없는 그들은 더 야무진 도리를 하는 요원에게 찬사의 입말을 아끼지 않는다. 뒷전에서 그 찬사를,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쪽에서는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겉으로 보기에 행사는 무사히 치러진다. 하지만 뭔지 모를 미묘한 앙금이 남는다. 관심과 노동과 시간을 많이 할애한 쪽에서는 본인이 아무리 부정한다 해도 제 맘을 다 보상받지 못한데 대한 서운함이 생기고, 그렇지 못한 쪽에서는 행사의 주체적 실체가 되지 못한데 대한 자격지심과 소외감 때문에 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합리적 대안은 애초에 있지도 않다. 또한 그 과정을 도출하는데 대한 위험부담 때문에 이런 갈등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일 뿐이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과정에서 남자는 제외된다는 사실이다. (여성들 스스로가 남성에게 면죄부를 준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런 미묘한 감정의 혼선에 있는 여성 행동대원들을 위해 (실은 나를 위해) 나는 기어이 잔다르크가 되기를 자청한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모든 식구들이 함께 즐기자는 내 요구가 받아들여져 우아한 잔칫상을 마주한 뒤에라도 그놈의 ‘도리’의 끝자락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여성(특히 며느리 입장)에게 집안 행사는 즐기는 자로서의 여유보다는 도리로서의 의무감을 요구하고 있다. 남자들이 여성에게 강요한 적도 없고, 심지어 그들은 이런 감정에 무신경하기조차 한데, 여성들만이 감지하는 이 부조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이유에 대한 답은 타계한 정치학자 전인권이 쓴 ‘남자의 탄생’(푸른숲, 2003)에서 얻을 수 있다. 그의 관찰에 의하면 유년시절부터 학습된 우리의 가족제도는 한국형 남성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주력해왔다는 것이다.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질서는 남성적 삶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었으며 이는 기본적으로 ‘동굴 속 황제’ 라는 인간형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여성에 대해 편협하고 왜곡된 정보를 전제하는 이러한 권위는 충격적이게도 여자 특히, 한 집안의 어머니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작가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적 가정에서의 남자의 권위는 아버지가 만드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주도한다는 사실이다. 어머니가 차린 동굴 속 황제를 위한 밥상에 아버지가 숟갈을 들면서 가부장질서가 고착되고 그 과정에서 모성의 희생과 여성의 도리라는 개념이 고착되어 왔다는 것이다. 별 비판 없이 여성들이 이러한 학습과정의 동굴에 머무르는 동안 남성들은 또 다른 자신들만의 동굴 속 황제로 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백적, 반성적 회고를 통해 작가는 말한다. ‘내 안의 남성을 죽여라’고. 이미 남성들 스스로 그 부담스런 ‘남성적 권위’를 반납하는 사회 구조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군림하려 하지 않고, 제 안의 부조리한 남성을 죽여 가며 고백하는 남성들 앞에서 여자들 스스로 통렬한 성찰을 할 수 있다면 이보다 나은 독서는 없을 것이다.

  여성적 의무 이데올로기라는 동굴을 벗어나려는 최적임자는 누구인가? 명쾌한 답이 여기 있다. 그 답이야말로 여성 스스로라는 것을 역설적이게도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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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1 - 개정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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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 치료 프로그램 추천 도서 목록을 찾고 있었는데 이 책이 대부분 추천 목록에 들어가 있다. 그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책이었다.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김형경 작가에 대한 애정(? 또는 관심)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그의 또 다른 장편인 <세월>에서 약간 밝힌 바가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도서관에 들를 때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제목도 긴 이 책이 얌전하고도 깨끗한 상태로 놓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언제나 다른 책에 우선 순위가 밀리곤 했다. 두 권으로 분권되어 있는 게 독자로서는 조금 부담이 됐을 수도 있겠다.  

  긴 제목만큼이나 사랑에 대해서 그만큼 할 말이 많아서 두 권으로 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한데, 그것도 잠시 그건 작가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겠다. 세월,을 읽을 때도 그랬고, 이 책도 그렇고 근본적으로 작가는 길게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다 읽고 나면 굳이 두 권짜리로 쓸 필요가 있을까 싶게 동어반복에 중언부언하는 면이 없지 않다. (예를 들어서 그렇지만 깔끔하게 접근하는 김훈이나, 천운영 스타일이라면 이렇게 글이 늘어지게 놔두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래도 별 불만없이 읽히는 건 글을 조직해가는 작가의 내공에 미더움이 가기 때문이다.  

  얼핏 제목만 보면 연애 소설인가 싶은데 그것보다는 이 땅에서 여성적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자기 정체성 찾기를 그리는 심리소설이라 할 수 있다. 삼십대 중반, 현재는 싱글인 세진과 인혜가 소설의 중심 인물이다. 우리에게 덧씌인 사랑에 대한 환상을 걷어내고, 삶의 겉치레인 휴머니즘의 장막을 벗어나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권력이라는 통찰에 깊이 공감한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권력 지향, 혹은 그 위계질서에 의해 조종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다. 인간 관계의 모든 뼈대는 욕망이고, 그 욕망이 주체적 삶이 되게 하는 건 자신에게 달렸다는 것을 성찰하게도 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사랑이란 말이 들어간 제목이지만 사랑의 실체는 환상이나 로맨스가 아니라 욕망에 가깝다는 그의 해석이 흥미롭다. 소설 전개 방식은 물론 일반 소설과는 다르다. 상처 많은 삼십대 여성의 심리치료 과정을 소설 기법으로 차용하고 있는데, 유능한 건축사 세진은 누가 뭐래도 작가의 분신이다. 정신 분석 내용을 토대로 여성들의 성과 가치관, 타인과의 관계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면담자인 의사와 세진의 정신분석 과정은 경직되어 있지 않고, 현실감있게  묘사 된다. 세진의 여러 문제, 예를 들면 어린 시절의 부모의 이혼과 이십대의 성폭행 에피소드 등은 여성들에게 충분한 공감대를 얻어내고 있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세진의 일부나마 독자들에게 투사되어 심리적 위안을 받기를 바라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세진의 심리치료 필요 조건은 유아기 이래의 상처와 결핍에 기인한다.  그녀로선 부모의 이혼이 가장 큰 트라우마가 되겠다. 언제나 인간 결핍의 원천은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주변인ㅡ특히, 부모라는 걸 확인시켜 준다. 심리치료책을 읽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었던 이런 공공연한 비밀을 깨칠 때마다 마음밭이 환해지는 걸 느낀다. 절대적 관계자들과의 상충 과정에서 자신의 콤플렉스가 형성되고 , 그것이 또 다른 욕망의 출발선이 된다는 점은 매우 공감이 간다. 예를 들면, 아버지 같은 무심한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 남성관이나, 엄마처럼 희생적인 길을 걷지 않겠다는 내면화 과정도 콤플렉스의 산물이라는 게 작가의 관점(아니, 심리학자들의 관점)이다.  

  이혼 경험이 있는 인혜는 단순하고, 관계지향적인 반면, 독신녀인 세진은 완벽주의자이며 자주적, 독립적인 캐릭터이다. 내가 볼 때 이 둘은 작가의 이중분신에 다름 아니다. 작가 자신이 체험한 것을 글로 썼기 때문에 상당한 리얼리티를 확보한 것이 느껴지지만 그 과정이 다소 동어반복되어 지루한 감도 없지 않다. 해서 책을 읽다 보면 몰입되어 공감할 때도 많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굳이 비판적 책 읽기를 한다면 세진과 인혜라는 인물에 완전히 공감하기는 힘들었다. 작가의 실제적 자아와 많이 닮은 세진과 그 대척점에 있는 또 다른 인물인 인혜는 경험의 다양성 측면에서 볼 때, 독자 역시 별개의 존재자이므로 완전히 공감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지나치게 완벽주의자이자 타인의 시선에 대한 장악력마저 지닌 세진이 그토록 자신이 겪은 상처를 동어반복으로 변주하는 것도 약간 지겨웠고, 세진에 비해 단순하고 온정주의자이자 남성 포용주의자(?)이기도 한 인혜가 세진의 입김에 좌지우지 되는 걸 보면서 현실감각을 놓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뭍 여성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에서 제목처럼 여성들이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있다. 두 주인공이 활동하는 모임인 '오늘의 여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란 오여사 클럽을 통해 여성들의 사랑에 대한 자의식을 건너다 보자. 어떤 이는 사랑을 <권력욕이라 하고, 어떤 이는 생존 본능, 어떤 이는 미적 체험, 또 다른 이는 인간 사이의 소통...>등등으로 다양한 사랑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다. 한데, 흥미로운 것은 심리치료를 받고 있는 주인공 세진이 명쾌하게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결국 사랑은 노이로제나 광기이며, 자기 콤플렉스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예를 들면 가난을 상처로 가진 사람은 부자를 찾고, 학력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고학력자를, 스스로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권력자를 선망한다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각자의 정의가 곧 자신의 상처나 콤플렉스가 된다는 작가의 그 말에 밑줄을 그었도다! 

  심리치료 전문가들이 권하는 책인만큼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부모의 이혼, 성폭행에 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을 작가는 밤송이에 비유하고 있다. <밤송이 하나를 받아들고, 그것이 인생이라 여기며 쩔쩔매게 됩니다. 손바닥 뿐 아니라 온몸을 찔러대는 그것을 버릴 수도, 감싸쥘 수도 없는 상태에서 심리치료라는 과정을 통해>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삶은 반복되는 시행착오의 부산물이다. 문제는 그 경험들을 통해 무엇을 배우는가 하는 일이다. 그 일련의 과정 자체의 기록이 독자들에게는 또 다른 방식의 소설 읽기를 경험하게 하고, 내면의 공감을 자아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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