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이반지하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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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4 이반지하.

이 책 재미있다, 독특하다, 유쾌하다, 잘 쓴다, 책깨나 읽는 나의 이웃들이 치켜세우는 걸 한참 전에 들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오래 미뤘다. 관심은 갔지만 왠지 모르게 피했다. 이미 알았을 것이다. 이웃집/퀴어/이반/지하 이 단어들이 제목에 들어간 책을 읽으며 나는 웃을 수 없을 거야.

우울증에 걸린 광대 노릇을 해 본 사람은 그러니까 동류의식 내지 동종업계 사람 보는 기분으로는 웃을 수가 없다. 글도 삶도 그림도 흥미롭고 웃기려고 기를 쓰고 쥐어짜고 있다고 -아냐 난 자연스러운 거야 그냥 숨만 쉬어도 웃겨 그럴지도 모르지만, 숨쉬는 걸로 웃기는 게 얼마나 힘든 건데- 그간 쌓인 짬과 공력이 여기저기 비져나왔지만 나는 풉, 하거나 실실거리지는 않았다. 못했다. 아, 차 타고 가다 베그노스 이야기 하는 거 보고 글이랑 그림 마저 다 보기 전에 이름 특이하네, 이러고 검색을 했다가 그런 거 없잖아! 좀 더 읽고 흠, 좀 재밌군, 하긴 했다.

책 초반부 읽을 때부터 조금 의문이긴 했다. 나는 이 사람을 모르고 분명 이 사람도 나를 모를텐데, 그래도, 학교 다니던 시절도 조금은 겹치고 이 정도 포스를 풍기던 내 또래 사람을 왜 나는 인지하지 못했지? 근데 왜 아는 것 같지? 김소윤, 내가 아는 김소윤은 없는데 왜 자꾸 익숙하다…이러다가 기쁨과 성폭력이 있던 노래패 활동, 이 부분에서 딱 멈췄다. 어쩌면 나는 김소윤씨가 튀긴 침이 묻은 마이크로 노래 연습을 했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내가 동아리 들어간 즈음에는 태풍 같은 뭔가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의 느낌이라, 반성폭력 회칙도 마련되어 있었고 그걸 같이 읽는 자리를 가졌고(그러다 내가 집행부?되면서 그런 거 있었다는 걸 다 까먹고 잊혀짐…죄송…) 세미나 커리로 받은 첫 제본집도 여성주의라고 제목 붙여 묶어 놓은 것이었다. 똑똑하고 소처럼 일하는 언니들과 거기 묵묵 말 잘 듣고 잘 따라가는 오빠들을 보며 아, 성인이 된 이후 마주하는 세계는 저러하구만, 이 세계는 한층 평등해졌구나, 착각이었다. 그 인큐베이터 이후로 나는 바깥 세상에서 그런 공동체를 만난 적이 다시는 없었다...

나랑 같이 사는/자는 사람은 나보다 2년 전 먼저 동아리에 들어왔고(그리고 중간에 연애가 망하면서 탈퇴했다가 내가 들어갈 무렵 재가입), 나보다 더 심하게 오래된 물건을 못 버리는 성향이 있어서 그 시절 공연 팜플렛도 다 가지고 있다. 나는 그의 1학년 꼬꼬마 시절 가을 공연 팜플렛을 펼쳤다. 거기에는 공연에 참여한 구성원들의 사진과 소개가 간단히 담겨 있거든.

펼친 페이지 안 곁의 사람 바로 위에 김소윤씨가 노래를 부르는 얼굴이 있었다. 같은 페이지 안에는 아는 얼굴들도 많았다. 여태까지 활동하는 밴드 뮤지션 얼굴들도 있고, 유명 밴드 멤버이다가 이제는 (아 아직도 다른 밴드는 하네) 회사원인 사람도 있고, 곁의 사람의 직전/첫 여친 사진도 있다. 사연이 많은 페이지였다. 씻고 나온 곁의 사람에게, 01에, 김소윤님, 미대 맞아? 응 조소과였나…아냐 회화…아 맞다…
책 말미에 이자람님이 추천의 글로 이미 같은 동아리였습니다 인증글 남겨 두셨었다… 꼬꼬마 새끼였던 내가 창작 판소리 명창 대선배님도 몰라 뵙고 이제 룸은 금연입니다, 하고 동아리방에서 쫓아내던 생각 밖에 안 난다… 나중에 판소리 음반도 열심히 찾아듣고 아마도이자람밴드 공연도 쫓아다닐 거였으면서 그땐 그렇게 사생팬이 될 걸 모르고 모질었던 나를 용서해주세요…

아주 잠깐, 디지털 음반내고 홍대 앞 클럽들 전전하고, 그러면서 대학원도 다니고, 그러다가 심신에 병이 든데다 임신까지 해서 다 집어치우고 그냥 공무원으로 남았다. 끈질기고 꾸준하게 존버해서 유명해지고 사랑도 받고 좋아하는 일로 돈도 벌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시무룩, 이제 열정도 번뜩임도 다 잃고 평범해졌어…하는 내게 곁의 사람이 말했다. 그래도 이젠 행복해지기로 했잖아.
평범하게 애기 키우고 3년 쯤 살다보니 왜 또 충수염, 성대폴립 이런 자잘한 병으로 한 해 동안 수술을 두 번 받고, 그러고나니 지랄병이 도져서 멘탈도 갈 곳 모르고 방황했다. 그때 지드래곤이 허옇게 탈색한 머리를 하고 영원한 건 절대 없다고 뻔한 소리를 하는 게 그렇게나 멋있었다.
그래서 나도 이제 부임 1년차 된 학교 축제에서, 중학교 어린이들 사이에 단독 무대를 마련해달라고 떼(?)를 쓴다. 만 나이 28세에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탈색/염색이라는 걸 해 본다. 주책스러운 (지금 보면 내 눈엔 아직) 어린 아줌마가 지드래곤 흉내를 신나게 내고 무대에 드러눕는다. 발라당.

그게 다 살려고 하는 짓이잖아요. 세상 내향적인 인간이 굳이 무대에 서는 기분이 어떤 건지 느낌아니까. 이것 뿐 아니라 생애주기 마다마다의 비슷비슷 지긋지긋한 경험들이 자꾸 책 속에 겹치니까 이건 공감대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파수가 공명해서 나는 이명을 느끼고 가라앉은 밤을 보냈다. 그니까 나는 이런 책을 보고 아 시발 너무 잘 알지 하지 않고 그냥 안쓰러워하면서 남의 일처럼 웃고 싶다. 그렇지만 알잖아, 우린 이미 망가졌어.

+밑줄 긋기
-주인공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계속 실험해나가는 걸 보는 것도 좋았다. 성욕을 느끼고 표현하고 거절하고 이용하고 등등. 강간당하지 않고 그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보통 이러면 사회로부터 성性적으로 크게 혼나곤 하는데, 이 시리즈에는 그런 것이 나오지 않아서 좋았다.

-그러니까 잘난 여자를 감히 혼내지 말자. 제발 좀 그르지 말자.

버릇이 나쁘다 싶어도 제발 좀 내버려두자. 구린 구석 없이 정정당당하게 도와도 주자.

-나는 그 사람들이 나를 욕망한다는 것이 어쨌든 좋았다. 그 사람들은 적어도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에 감탄해주었다. 그것이 착취고 성폭력이고 불법이라는 것은 ‘지금’ 돌아보면 중요했다. 그중 한 명은 내가 부잣집 애라는 것을 알아보고 돈을 뜯어가기도 했다. 그건 아마도 내 절박함에 대한 죗값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그 아저씨들의 집이나 모텔에서 자고 아침에 등교하면 나는 내가 특별하고도 퇴폐적으로 느껴졌다. 학교에서는 서울대 갈 아이라고 선생들이 좋은 문제집을 주었다.

-검열을 당한다는 것은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것은 대단히 생산적이거나 발전적인 무엇이 아니라, 나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속의 장기와 세포 하나하나까지를 양말 까뒤집듯이 의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검열은 잔인하다. 검열하는 쪽은 간편하되 당하는 쪽에서는 정말로 내가 당당한 피해자인지를, 내 쪽에 정말로 한 점의 원인 제공도 없었는지를 지속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잔인함의 핵심이다. 검열은 저쪽에서 시작되었으나, 결국 그걸 지속하는 것은 이쪽, 나 자신이 된다는 것 말이다.

-한 학기, 그러니까 6개월 뒤 나는 레즈비언 관계를 주제로 한 작업을 졸업심사에 냈고, 아무도 레즈비언 얘기인지 몰라서 무사통과되었다. 그렇게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니미 시팔 다시는 학교 같은 건 다니지 말자고 다짐했다.

-오히려 나는 개개인의 개별성과 저마다의 다양한 관계 맺음을 훨씬 더 피부에 와닿게 경험한다. 나는 그런 면에서 퀴어와 헤테로를 대립구도로 보지 않는다. 그냥 우리는 다 ‘퀴어’라고, 실상은 헤테로가 퀴어의 하위범주라고 인지한다. 우리는 모두 개별적으로 이상한 변태들일 뿐이고, 그것은 헤테로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어느 날인가 당첨 복권 하나 없이 빈손으로 와 새 복권을 사면서 “아가씨가 복권을 잘 못 골라주는 것 같애. 저번에 아가씨 땜에 하나도 안 됐어”라고 했을 때는 속으로 시발아, 라고 생각했지만 말로 하진 않았다.

-나도 내 젠더도, 너도 니 젠더도, 세상도 세상 젠더도 각자의 입체적 회전을 하던 중에 잠깐 맞물렸을 뿐이다. 그 맞물림, 그 일시적 정상성은 그래서 그토록 달콤하다. 거의 세상에 없는 달콤함이라고 보면 된다. 드물다시피 없다.

-지금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말 좋은 것들은 전체 인구의 1퍼센트 혹은 0.1퍼센트가 누리고 있지, 우리 손까지 내려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섹스가 정말 좋은 거였으면 우리가 하고 있을 리가 없어……

그걸 명심하셔야 돼요.

-위험한 생각이 들 때는, 주변에 폐를 끼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진짜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엔 내가 쓸모없는 존재 같고, 민폐 그 자체인 것 같으니까요. 누구한테 전화하고 치대고, 이러기가 진짜 힘든 상태일 거거든요. 그래도 주변에 얘길 해놓는 게 좋습니다. 당분간 내가 많이 힘들 거야, 심할 때 전화할게. 아니면 이럴 때는 병원에라도 가야 해요. 응급상황이거든요. 우리가 갑자기 살 찢어지면 응급실 가잖아요. 똑같습니다. 이럴 때는 정기적으로 가는 상담 시간이 아니어도 응급이라 생각하고 가셔야 해요.

-나는 그때 한창 정신과 약발이 잘 받기 시작하여 제법 평온한 마음을 경험하고 있었다.

“남들은 평소에 이런 마음으로 살았던 건가요?”

나는 이렇게 정신과 선생한테 물었다. 그것은 어떤 평행우주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갑작스러운 감정기복과 닥쳐오는 우울 같은 것이 없는 평안한 마음을 누군가는 갖고 살고 있었다니……

아니, 인생 너무 쉽게들 사는 거 아녀?

-내가 무기력해서 뭐가 안 풀리는 게 아니라, 뭔가가 힘들기 때문에 무기력감이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기력감은 어떻게 보면 골절 같은 거죠. 난 지금 조금 다친 상태인 거예요. 그 상태를 받아들이고, 나를 돌보는 걸 더 우선순위에 두어야지, 나 왜 이렇게 무기력하지, 난 무기력해서 문제야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면 너무 힘들 것 같아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무기력감은 되게 큰 트라우마 이후에 오기도 하고요. 우리나라에서는 무기력감을 게으름, 나태함 같은 것과 많이 연결을 짓지만, 그럴 만해서 그런 거예요.

이럴 땐 제때 맞춰서 밥 먹고 머리 감고, 그런 것도 너무 큰 일입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게 일인 거죠. 내가 그 수고를 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잘 생각하고 달래주면 좋을 것 같아요. 산다는 것은 존나 많이 힘든 겁니다.

-아무렇게나 말하고 뒤죽박죽 섞어 말하고 이 얘기 저 얘기 붙여서 말하고 말도 안 되는 얘기 하고 그런 거 너무 재밌다. 실제로 우리 사는 것도 다 이렇게 엉망이다.

-고통 없는 웃음은 없는 겁니다.

집안이 화목하면 웃길 필요가 없지. 나와서 광대 짓을 왜 하냐? 내가 뭘 해도 엄마 아빠가 웃어주는디? 우린 눈치 보고 애를 쓰는 거지……

유머러스해지고 싶다, 그러면 어린 시절부터 큰 고통을 겪으면서 사춘기 때 크게 방황하고, 그러면서 내 살길 찾아서 단절도 경험해보고, 다양한 (성적) 경험과…… 차별과 억압을 통해서 어떻게든 웃을 일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들은 얘기예요.

-엄마가 순결에 대해 이렇게 묻잖아요.

“우리 딸은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 없겠지?”

그럼 이렇게 한 번만 돌려주란 말이에요.

“엄마는? 엄마는 어때?”

여기까지 가줘야 돼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고요히 기름이 끓다가,

밀가루가 들어가는 순간!

귀청이 나갈 것 같은 그,

대단한 폭포수 같은 그 소리,

그것이 시작된다!
(튀김 이야기이다…이 글 표현력에서도 좀 감탄)

-죽을 때까지 해야 되는 일은 없어요. 죽을 것 같으면 안 해야 돼요.

-다 해도 됩니다.

페미니스트 종류 되게 많습니다.

슈퍼마켓 같은 거예요.

자유롭게 맘대로 사십시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괜찮아, 별일 아냐.


+베그노스

+상처 헤집는 삽화 보고 생각나서 가져온 내 그림

+지드래곤 흉내내다 발라당, 10년 전 나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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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6-04 15: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제가 지금 보고 있는 분이 바로 열반인님이신 거죠?

저는 항상 수학 문제 풀고 또 풀고, 뭔가 차도녀 이미지로 상상했는데 사진 속 GD헤어님은 완전 정열의 여인이신데요. 조명때문인가요.
근데 어쩌다가 완전히 무대에 누우신거예요^^

그리고 이자람님을 금연이라고 내보내셨단 말예요 ㅎㅎㅎ아놔!!

2023-06-04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04 15: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04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04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04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04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04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미 2023-06-04 21: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탈색 잘 어울리는데요?!! 열반인님 너무 멋있다!!
뭐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후회가 덜한것 같아요.
저도 요즘 그런 것들을 적어두고 있습니다ㅋ 일단 적는 것부터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6-05 08:44   좋아요 1 | URL
미미님 말씀 듣고 생각해보면 저 하고 싶은 건 그럭저럭 다 하고 산 것 같습니다ㅋㅋㅋ적은 것들 궁금하고 하나하나 다 했다! 안 해도 그만- 하시며 후회 없이 행복하시길 ㅎㅎ

새파랑 2023-06-04 23: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가 상상(?)하던 그 열반인님의 이미지가 맞았네요 ㅋ 뭔가 잘 어울리시는거 같아요~!! 내향적이라고 하시기엔 좀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06-05 08:42   좋아요 1 | URL
제가 그 INFJ입니다…T에서 F로 변하긴 했지만 I는 굳건한 은둔자 입니다 ㅋㅋㅋ

Yeagene 2023-06-07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열반인님 의외의 모습!ㅎㅎ 탈색한 머리랑 패션 멋있으세요♡

반유행열반인 2023-06-07 22:49   좋아요 1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진님 ㅎㅎ저건 무대용이고 지금은 지극히 평범(?)하게 화장 머리 안 한지 거의 이 년 되어 가는 꾸질이입니다 ㅎㅎ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 - 유품정리사가 떠난 이들의 뒷모습에서 배운 삶의 의미
김새별.전애원 지음 / 청림출판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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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2 김새별, 전애원.

우연히 들어간 블로그에서 유품정리사, 특수 청소하시는 분의 기록을 발견했다. 우리나라판 ‘트라우마 클리너’가 있었구나, 책도 쓰셨다고 해서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처음에는 죽은 자의 집청소가 그건 줄 알았다. 생각보다 평이 안 좋아서 아…블로그에는 글 잘 쓰시던데 책은 아닌가? 그런데 저자 이름이 다르네…(바보야 다른 책이니까) 며칠 있다 다시 찾아보니 내가 엉뚱한 책을 찾았구나, 하고 전자도서관에 있어서 빌렸다.

사랑하던 사람들이 내게 질려 모두 떠나고 혼자 남는 미래를 상상한 적이 많다. 혼자 우두커니 앉은 외로운 방은 떠올렸지만 홀로 맞는 죽음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한스 팔라다의 홀로 맞는 죽음은 챙겨놨음 ㅋㅋㅋ
부족한 상상력을 메워주듯 이 책 안에 김새별님이 직접 경험한 청소 현장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청소팀 이름이 바이오 해저드라 뭐여 예전에 좀비랑 싸우던 게임 아니여 했는데 과연 돌아가신 분이 부패하며 나온 유기물, 파리, 구더기, 바퀴벌레, 온갖 것들(심지어 좀비는 죽었지 얘들은 살아서 계속 증식 중)과 싸우는 일이었다.

책을 다 보고 다시 검색하다 저자가 유튜브 하는 것을 알고 영상 하나를 보았다. https://youtu.be/UqxDwgOQqoE
고시원 좁은 방에서 돌아가신 흔적을 지우는 현장인데, 글로 읽을 때도 힘들고 먹먹한데 직접 청소하고 바퀴벌레 청소기로 빨아들이고 오염된 매트리스 검은 봉투로 싸고 치워도 끝없이 나오는 소주병 맥주병 치우고 벽지 장판 뜯어내는 거 보니 진짜…잘 사는 것만큼 잘 죽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

모두가 가장 꺼리는 더러운 곳, 제일 힘든 일 하는 사람들을 꺼리고 천시하고 편견과 불만으로 대하는 상황도 안타까웠다. 그런 힘든 환경에서도 꿋꿋 묵묵 할 일 하시고 심지어 글도 잘 쓰시는 작가님 존경스러움…나도 남들에게 뭐라도 쓸모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나(적어도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라도…)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밑줄 긋기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과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것, 세상을 떠난 이의 인생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보람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다. 고독사, 자살, 범죄로 인한 사망…… 이런 비극이 사라져 나의 직업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지기를 바란다.

-쓰레기가 생기면 내다 버리고,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고, 먼지 앉은 가구를 닦고, 바닥을 걸레질하는 것은 하찮은 일이다. 그러나 이 하찮은 일들이 우리의 일상을 지탱해준다. 삶의 의지가 사라졌을 때 가장 먼저 손을 놓아버리는 것이 이런 일들이다.

-삶도 죽음도 본질적으로 외로운 것이겠으나 친밀한 관계들에서 얻는 힘으로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세상을 살아나간다. 곁을 지키는 가족들의 사랑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마지막 순간을 평온하게 맞을 수 있다. 아무도 없이 홀로 맞는 죽음, 아무도 거두지 않는 죽음은 그래서 가슴 아프다.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는 것은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고, 먼지 앉은 가구를 닦고, 바닥을 걸레질하는 것처럼 사소한 일들에서 시작됩니다.
쓸모없는 물건은 과감히 버리세요.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사는 공간을 단순하고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떠나고 난 자리가 아름다울수록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은 덜어집니다.

-내가 죽고 난 후에 발견되어야 할 중요한 물품이 있다면 가족들이 찾기 쉬운 곳에 보관하세요. 죽기 전에 유언장을 미리 작성해놓거나 재산을 어떤 식으로 관리해왔는지 알려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내가 없으면 결국 버려져야 할 물건들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살아 있을 때, 아끼지 말고 충분히 사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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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3-06-02 2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책이랑 헷갈렸어요. 둘 다 안읽었는데 그 책 유명해서 헷갈리는.

그러네요. 반님 말씀대로 작가님 존경스러운데 동료 두분이 같이 쓴 거예요?(저자 소개 읽어보면 될 것을 괜히 말건다) 죽은 뒤의 슬픔을(이라도) 덜어줘야하는구나. 이 분들 보시는 광경 짐작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어요.

반유행열반인 2023-06-02 22:40   좋아요 1 | URL
그 유명하다는 책은 문장이 너무 과하다고 지적이 많던데 이 책은 진짜 깔끔한 문장에다 이건 찐이다, 하는 느낌으로 잘 썼어요. 주 저자가 사장님(?)이고 공저자는 사무보는 직원분인데 (책에도 소개됨 ㅋㅋ) 책 정리에 도움 주지 않으셨을까 싶어요.

2023-06-02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6-02 22:47   좋아요 1 | URL
예의바르고 경건하고 선을 넘지 않았다.

2023-06-02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02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Yeagene 2023-06-04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최근에 죽음을 경험해서인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시간이 지난 후 한번 읽어볼까봐요.

반유행열반인 2023-06-04 10:25   좋아요 1 | URL
제 예전 직장 동료분은 퇴근하고 문열고 돌아가면 죽은 멍멍이 눕던 자리 눈에 들어오면서 자꾸 울게 된다고 하시더라구요. 제가 막 시어머니 돌아가셔도 그렇게 안 울더니 삼년상 하신다고 놀리니까 막 웃으면서 우심(그분 저희 엄마 동갑인데 제가 좀 까붐…) 예진님도 웃으면서 울다가 좋은 기억만 떠올릴 날이 곧 오시길 빕니다. 🙏🏻
 
사티리콘 - 노먼 린지 일러스트판
페트로니우스 지음, 강미경 옮김, 노먼 린지 그림 / 공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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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2 페트로니우스.

 어느 책에선가 언급되어 갖췄을 것이다. 얼마전 읽던 음식과 죄악에 관한 책 ‘악마의 정원에서’에서도 이 책의 연회 장면을 언급해서 뭔가 반가웠다. 어린이 세계명작동화전집처럼 삽화가 아주 많았다. 100개 정도라고 했다. 노먼 린지…유명하신 분인가 봄…

 
 주인공 엔콜피우스와 그 친구들의 대모험이 이어진다. 엔콜피우스는 뭔가 전원일기의 응삼이(고 박윤배님…)를 닮게 그려졌다. 응삼씨가 좀 로마 스타일 미남이었지…

주인공 엔콜피우스. 응삼이 아님.



 원래는 20권 정도 쓴 책인데, 다 사라지고 14,15,16권 그것도 중간중간 소실된 일부만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읽다보면 만화대여점에서 빌린 책을 누가 사이사이 찢어 먹어 빡치는 기분과 비슷해진다. 
 엔콜피우스는 이 여자 저 여자 꼬시다 낭패 보고, 사실 여자보다는 미소년 기톤을 가장 사랑하고, 그래서 다른 남자들이 기톤을 이리저리 꼬시고 데려가면 아주 질투의 화신이 되어 바보짓을 하고 다닌다. 중간에 에우몰푸스라는 노시인과 동행하게 되는데, 시인이 자꾸 이상한 시를 읊으면 주변 사람들이 막 조롱하고 때리고 그런다. 이천년 전에도 시인은 핍박 받는 존재… 
 
 여러 역사적 사건과 이전의 문학, 서사들을 인용하고 아우르면서도 로마인들의 삶과 생활에 관해 비꼬고 풍자하는 게 흥미로웠다. 저자 페트로니우스는 나름 그 시절 로마의 실세 정치가였다가 황제 눈 밖에 나서 자살 당한(…)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스케일도 이야기 전개도 거침없다. 막 스릴러 로맨스 성인물 서사시 넘나듦…ㅋㅋㅋ
 이천 년 전 사람들 사는 모습도 지금이랑 별로 안 다르네 싶었다. 졸부의 사치 스케일은 트리말키오의 연회 장면 보면 어마어마하게 먹고 놀고 예나 지금이나 자기 과시의 끝은 어디인가…(그때는 인스타 없어서 직접 불러다 먹이고 보여줘야 했다…) 남자들끼리 사랑하는 남자 두고 으르렁거리고 죽네 사네 싸우는 거 보면 웃겼고… 퀴어는 유서깊다… 


+밑줄 긋기-누구를 혼내는 장면일까요?
-나는 팔꿈치를 괴고 누운 채 놈의 불복종을 야단쳤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아니냐, 이놈아? 인류를 모욕하고 하늘의 얼굴에 먹칠을 해? 이름이 아깝다, 이놈아. 네놈 때문에 내가 천국에 있다가 지옥으로 끌려가지 않았느냐? 한창때의 나를 배반하고 치매에 걸린 노인처럼 고자로 만들 작정이냐? 어서 말 좀 해 보거라.”
 나는 화가 나서 이렇게 쏟아부었다.
 
 등을 돌린 채 그녀는 계속 눈을 내리깔았다네, 
 이 말에도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으니
 축 늘어진 버드나무나 고개 숙인 양귀비가 따로 없구나.

 이처럼 심한 욕을 하고 나자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수치심을 망각한 채 신체의 일부에 점잖은 사람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말을 마구 퍼부은 게 내심 부끄러웠다.(387-388)

:정답은- 미모의 귀부인 키르케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서지 않던 자기 꼬추를 혼내는 장면이었다 ㅋㅋㅋ책 내내 줄곧 이런 식으로 풍자와 해학과 저질의 농담과 방탕한 연회와 싸움과 애증의 사투 같은 게 이어진다. 아 그런데 더러운 놈이 왜 꼬추에 여성대명사 붙임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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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3-06-02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퀴즈 무슨 일이죠 ㅋㅋㅋㅋㅋ 궁금증이 동한다 으어…..

반유행열반인 2023-06-02 22:29   좋아요 1 | URL
바로 아래 정답 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수 2023-06-02 22:30   좋아요 1 | URL
네네 답까지 봤더니. 책이 궁금해지잖아요. 비호감인데 눈 덮고 보게 되는.. 자꾸 시선이 가는 그런 소개… 너무하심

반유행열반인 2023-06-02 22:38   좋아요 1 | URL
제값주고 보긴 그렇구 제가 저렴하게 중고로 샀으니 나중에 빌려드릴게요 마음에 들면 드릴게요 ㅋㅋㅋ(이것은 다정한 이웃님의 대여법)

유수 2023-06-02 22:39   좋아요 1 | URL
오예..!!

반유행열반인 2023-06-02 22:48   좋아요 1 | URL
감각의 박물학도 개정판 안 사셨으면 이건 그냥 같이 드림 일단 저 좀 읽고 나서 ㅋㅋㅋ

유수 2023-06-02 22:54   좋아요 1 | URL
이 대여점 인심이 후하시다!! 맞다 그책 얘기도 했었죠. ㅋㅋㅋ 천천히 읽으시고 저는 즐겁게 리뷰를 기다리겠습니다.

Yeagene 2023-06-03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퀴어는 유서깊더라구요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06-04 10:23   좋아요 1 | URL
오늘 보는 책에서는 우리 모두 다 퀴어고 헤테로가 그 하위 범주다 ㅋㅋ까지 가더라구요…혼자 수긍하고 ㅋㅋㅋ
 

데드맨 새 표지랑 맨 얼라이브 원서 표지랑 너무 닮아서 읭…왜 따라해… 하는데 데드맨 본 친구는 내용이랑 일치하는 표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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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편 읻다 시인선 7
프랑시스 퐁주 지음, 최성웅 옮김 / 읻다 / 2022년 4월
평점 :
품절


-20230529 프랑시스 퐁주.

+밑줄 긋기
-분명 어디로 가든 껍데기를 지고 다니기가 불편할 때도 종종 있겠으나, 그렇다고 불평은 않으며 결국에는 매우 흡족해한다. 어디에 있건 껍데기로 돌아가 성가신 것들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은 심히 귀중한 일로, 고생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러한 능력과 편리에 긍지를 느끼며 달팽이가 침을 흘린다. 어떻게 하면 그토록 예민하면서도 취약하고, 또 성가신 것들의 쇄도를 피하는 동시에 행복과 고요를 누리는 존재일 수 있는가. 드러나는 머리의 경이로운 모습을 보라.
단번에 그토록 땅에 붙고 그토록 뭉클하면서도 그토록 느리고, 그토록 점진적이면서도 그토록 땅을 벗어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나 죽고 대홍수가 찾아들든 무슨 상관이랴, 한 번의 발길질에도 어디로든 굴러갈 수 있는 나이건만, 분명컨대 나는 다시 바로 서고 다시 땅에 붙으니, 운명에 의해 내가 쫓겨나서 먹이를 찾을 그곳-대지다, 가장 보편적 양식이다.
그리하여 달팽이가 된다는 건 이 무슨 행복이요, 이 무슨 기쁨인가. 이 긍지 어린 침으로 달팽이는 자신이 가닿는 모든 것에 표식을 남긴다. 은색 자취가 달팽이를 뒤따른다. 그리고 이는 미식가인 날짐승 부리에 신호가 되리라. 즉 이것이 난점이요 문제이니, (허영으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위험이로다.
혼자, 틀림없이 달팽이는 혼자다. 달팽이에게는 친구가 많지 않다. 하지만 이는 그의 행복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달팽이는 자연에 그토록 잘 달라붙고, 그토록 가까이서 그토록 완벽히 자연을 만끽하고, 자신이 온몸으로 입 맞추는 땅의 친구이며 또 나뭇잎들의 친구이기도, 그리고 그토록 자랑스레 자신의 그토록 예민한 눈이 달린 머리를 들어 올리는 하늘의 친구이기도 하다-고결이요, 느림이요, 지혜요, 긍지요, 허영이요, 자긍인. (‘달팽이Escargots’ 중)


3월 2권, 4월 2권, 5월은… 지금 쓰는 독후감이 11번째라고 한다. 시집 4권에 만화책 2권이라는 치트키가 끼어 있긴 하지만 너무 맹렬하네…
마지막 공부한 지 보름 됐다. 힘들다…하면서도 수1 뉴런 한 강 꾸역꾸역 듣고 하나 더 들을까 하다 말고, 국어 학습지도 하루치 풀고 (알고리즘 지문이랑 기체 크로마티 지문은 이게 왜 국어인가…으아아아 하면서), 혈관 초음파를 찍으러 갔다가, 택시 잡아 타고 응급실에 갔다. 독한 것…입원하는 날까지 골골대면서 뭘 하긴 했네…

퇴원 직후에는 숨쉬는 것도 힘드니까 안 자던 낮잠도 자고 뭐만 하면 드러눕고 그랬는데, 열흘 전부터는 살 만했는지 만화책을 시작으로 몸을 살살 풀더니 독후감 일곱개를 써 놓았다.

책 좀 읽는다고 책상 머리 앞에 오래 앉은 날은 다시 다리가 붓는다. 다친 발목과 혈전 있는 무릎 쪽이 팽팽해진다. 그래도 이제 좀 나아졌으니 다시 공부를 해야 하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 곁의 사람들이 안 돼 안 돼, 그럼 못 이기는 척 다시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책을 보는 거지…

이렇게 되면 어차피 올해 수능 글른 거 같은데, 그럼 수능 끝나고 본다던 책들도 미룰 필요 없잖아? 하고 박상륭 전집 앞에 선다. 박상륭 선생님 존함 마지막 글자를 뒤집으면 욜이다. 욜로, 너는 한 번만 산단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을 기회는 이번 생 단 한 번. 아! 무릎은 안 치고 마음 한 구석을 치며 전집 마지막 권인 칠조어론과 주석책을 꺼냈다. 무거워가지고 바깥 케이스에서 끄집어내는 것도 일이었다. 무슨 바람인지 주석책의 말미부터 펼쳤더니, 거기 편집 교정보신 윤병무 시인의 후기가 있었다. 어쩌다 그 분 블로그 찾아서 책 만든 과정과 후기도 재미있게 봤었는데, (그러니까 책날개 없는 거나 떡제본이나 디자인이나 다 신중한 고민의 결과물) 직접 책을 펼쳐 편집 후기 조금 읽기만 해도 책의 만듦새가 다른 게 확 느껴졌다. 활자체도 특이하면서 가독성 좋고 종이도 너무 얇은 거 아냐? 했는데 고급지고 표지의 고무코팅 같은 것도 실제 만져보면 느낌 좋음 ㅋㅋㅋ살갗같음 ㅋㅋㅋㅋ

그렇지만 칠조어론 펼치고 본게임 시작도 전에 좌절… 한자 옆에 한글 병기가 안 되어 있어… 네이버 사전에 사진 찍고 한자어 문지르면 읽어주는 기능 있긴 하지만 이천쪽 가까운 책을 전부 찰칵찰칵하면서 볼 수는 없다. 맨날 한문 전교1등 했다고 자랑하더니 내가 이렇게 한자에 약했어 ㅋㅋㅋ하면서 그냥 읽어지는 건 읽고 아닌 건 말기로 하면서 조금 읽었다. ‘죽음의 한 연구’를 이십 년 간격으로 두 번 본 건 아무래도 이 책의 예비였겠다…싶게 -뎁지, -입지, 하는 촛불 시님 특유의 말투와 육조나 형장 나으리가 등장할 때면 조금 반가웠다. 죽이고 싶게 미운 변태 촛불 스님이지만, 골드문트님 말씀대로 죽을 똥 싸게 어려운 장광설을 펼치고 있지만, 궁금하긴 하니까 조금씩 읽어 보기로 했다. 이거 이천쪽 다 읽으면 수학 다시 한다 막 이러고 ㅋㅋㅋ(공부 안 할 생각인가 봄)

읽다 지치니까 박상륭 전집 위에 있던 사티리콘도 같이 꺼내놓았다가 읽는데 이 오래 묵은 책은 칠조어론 비하면 순한맛 고대 포르노 ㅋㅋㅋ그런데 전체 20권 중 다 소실되고 남은 14,15,16권, 그나마도 그 중간중간도 빠진 내용은 …말줄임표로 생략되어 있어서 뭔가 대여점에서 중간만 남은 만화책 빌렸는데 그나마도 이새끼들이 몇 장씩 찢어갔네…하는 기분이었다.

잠들기 전에는 시집이지, 주기율표 램프 켜고 프랑시스 퐁주의 시집을 들고 누웠다. 쪽수 보니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개나리 피던 3월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엄청 톡톡 튀는 참신함은 없지만 집요하고 끈질긴 느낌이었다. 식물의 줄기의 단면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하면서 면도날로 엷게 저미고 슬라이드 글라스에 얹고, 스포이드로 물 한방울 떨구고, 커버글라스까지 살살 덮어 프레파라트를 만드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퐁주는 시인보다는 과학자 같다. 안녕하세요, 사물과 언어의 과학자입니다. 과학 좀 한 문돌이임? 어려서 방학숙제로 하던 탐구생활 같기도 하고, 이것은 무엇일까요? 하며 수수께끼나 스무고개를 하는 것도 같았다. 나는 왜 자꾸 직유법임… 은유의 대가 시집을 앞에 두고…

말미에 붙은 옮긴 이의 글이 또 좋았다. 사실 이 시집을 보게 된 건 문장이 좋아 관심을 가지게 된 번역자 덕인데, 전자책으로 산 두이노 비가 시리즈가 생각보다 별로여서 좌절하다가 이달의 당선작으로 받은 적립금의 트로피로다가 이 책을 선택했던 것이다. ㅋㅋㅋㅋ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한 권의 책, 한 편의 시를 만나는 경험이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옮긴이는 우연히 헌책방에서 퐁주의 시 몇 편을 접하고는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고, 여러 언어의 글을 옮기고 언어와 번역을 가르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첫눈에 빠지는 사랑, 그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그런 것일까. 미생물책이랑 호르몬책이랑 색스 박사 짧은 에세이 한 권 보면서 나중에 그 책들 옮긴 번역가가 문과 회사원이었다가 약대 나와서 과학 저술 위주의 번역가로 활동하는 중인 걸 알게 되었다. 와, 이거다. 이렇게 살고 싶군. 워너비로 삼고 나는 번역이 목표는 아니지만 하여간에 전문직이 되어 적당히 일하고 나머지는 읽고 쓰는 삶이다, 했었는데. ‘이토록 굉장한 세계’도 읽다가 아 안 되겠다…나 생각보다 동물학(과 동물의 감각, 인지)에 관심 없음 ㅋㅋㅋ하고 보류. 전직을 위한 수학 공부도 일단은 보류…

굳이 캐고 들면 지금의 내가 되는 데 이런저런 영향을 준 것도 책일 것이다. 한 권은 아니고 여러 권이 조금조금씩. 장강명의 르포책에서 독서공동체 운운하는 걸 보고 클라우드 노트에만 끄적이던 독후감을 웹에도 올릴 생각을 했다. 야 나도 쓰고 싶어, 하게 만들던 소설 읽기와 그래서 이어진 몇 년 간의 소설 쓰기. 망한 연애 끝에서도 사랑타령하는 게이 소설가 독후감에 눌린 좋아요 몇 개. 비전문가용 과학책 몇 권 읽고 아 나 과학에 관심있나 봐 하고 시작한 이과 전향 도전…

지금은 여전히 소소하게 읽고 소소하게 독후감 쓰는 나만 남았지만…나쁘지 않다. 읽었거나 읽는 중이거나 읽을 책을 줄세워 놓고 읽다 말다 끄적이다 재미있잖아…



+읽은 읽는 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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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gene 2023-05-30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한문 1등 하셨군요...
저는 한자가 진짜 쥐약이라 한문 들어간 글이 질색이에요 ㅠㅠㅠ

반유행열반인 2023-05-31 09:20   좋아요 1 | URL
대입에도 안 들어가는 내신과목이라고 애들이 난 서울대 안 가 연고대 갈거라 내신 주요과목만 이럴 때 저는 그게 무슨 소리야…하고서 한문 화학 생물 이런거 1등하고 국어는 막 틀리고 하던 문과였습니다 ㅋㅋㅋ(그때 한문 이런 거 말고 주요과목 석차 잘 챙겼으면 지방약대 수시라도 쓰는 건데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