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이반지하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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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4 이반지하.

이 책 재미있다, 독특하다, 유쾌하다, 잘 쓴다, 책깨나 읽는 나의 이웃들이 치켜세우는 걸 한참 전에 들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오래 미뤘다. 관심은 갔지만 왠지 모르게 피했다. 이미 알았을 것이다. 이웃집/퀴어/이반/지하 이 단어들이 제목에 들어간 책을 읽으며 나는 웃을 수 없을 거야.

우울증에 걸린 광대 노릇을 해 본 사람은 그러니까 동류의식 내지 동종업계 사람 보는 기분으로는 웃을 수가 없다. 글도 삶도 그림도 흥미롭고 웃기려고 기를 쓰고 쥐어짜고 있다고 -아냐 난 자연스러운 거야 그냥 숨만 쉬어도 웃겨 그럴지도 모르지만, 숨쉬는 걸로 웃기는 게 얼마나 힘든 건데- 그간 쌓인 짬과 공력이 여기저기 비져나왔지만 나는 풉, 하거나 실실거리지는 않았다. 못했다. 아, 차 타고 가다 베그노스 이야기 하는 거 보고 글이랑 그림 마저 다 보기 전에 이름 특이하네, 이러고 검색을 했다가 그런 거 없잖아! 좀 더 읽고 흠, 좀 재밌군, 하긴 했다.

책 초반부 읽을 때부터 조금 의문이긴 했다. 나는 이 사람을 모르고 분명 이 사람도 나를 모를텐데, 그래도, 학교 다니던 시절도 조금은 겹치고 이 정도 포스를 풍기던 내 또래 사람을 왜 나는 인지하지 못했지? 근데 왜 아는 것 같지? 김소윤, 내가 아는 김소윤은 없는데 왜 자꾸 익숙하다…이러다가 기쁨과 성폭력이 있던 노래패 활동, 이 부분에서 딱 멈췄다. 어쩌면 나는 김소윤씨가 튀긴 침이 묻은 마이크로 노래 연습을 했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내가 동아리 들어간 즈음에는 태풍 같은 뭔가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의 느낌이라, 반성폭력 회칙도 마련되어 있었고 그걸 같이 읽는 자리를 가졌고(그러다 내가 집행부?되면서 그런 거 있었다는 걸 다 까먹고 잊혀짐…죄송…) 세미나 커리로 받은 첫 제본집도 여성주의라고 제목 붙여 묶어 놓은 것이었다. 똑똑하고 소처럼 일하는 언니들과 거기 묵묵 말 잘 듣고 잘 따라가는 오빠들을 보며 아, 성인이 된 이후 마주하는 세계는 저러하구만, 이 세계는 한층 평등해졌구나, 착각이었다. 그 인큐베이터 이후로 나는 바깥 세상에서 그런 공동체를 만난 적이 다시는 없었다...

나랑 같이 사는/자는 사람은 나보다 2년 전 먼저 동아리에 들어왔고(그리고 중간에 연애가 망하면서 탈퇴했다가 내가 들어갈 무렵 재가입), 나보다 더 심하게 오래된 물건을 못 버리는 성향이 있어서 그 시절 공연 팜플렛도 다 가지고 있다. 나는 그의 1학년 꼬꼬마 시절 가을 공연 팜플렛을 펼쳤다. 거기에는 공연에 참여한 구성원들의 사진과 소개가 간단히 담겨 있거든.

펼친 페이지 안 곁의 사람 바로 위에 김소윤씨가 노래를 부르는 얼굴이 있었다. 같은 페이지 안에는 아는 얼굴들도 많았다. 여태까지 활동하는 밴드 뮤지션 얼굴들도 있고, 유명 밴드 멤버이다가 이제는 (아 아직도 다른 밴드는 하네) 회사원인 사람도 있고, 곁의 사람의 직전/첫 여친 사진도 있다. 사연이 많은 페이지였다. 씻고 나온 곁의 사람에게, 01에, 김소윤님, 미대 맞아? 응 조소과였나…아냐 회화…아 맞다…
책 말미에 이자람님이 추천의 글로 이미 같은 동아리였습니다 인증글 남겨 두셨었다… 꼬꼬마 새끼였던 내가 창작 판소리 명창 대선배님도 몰라 뵙고 이제 룸은 금연입니다, 하고 동아리방에서 쫓아내던 생각 밖에 안 난다… 나중에 판소리 음반도 열심히 찾아듣고 아마도이자람밴드 공연도 쫓아다닐 거였으면서 그땐 그렇게 사생팬이 될 걸 모르고 모질었던 나를 용서해주세요…

아주 잠깐, 디지털 음반내고 홍대 앞 클럽들 전전하고, 그러면서 대학원도 다니고, 그러다가 심신에 병이 든데다 임신까지 해서 다 집어치우고 그냥 공무원으로 남았다. 끈질기고 꾸준하게 존버해서 유명해지고 사랑도 받고 좋아하는 일로 돈도 벌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시무룩, 이제 열정도 번뜩임도 다 잃고 평범해졌어…하는 내게 곁의 사람이 말했다. 그래도 이젠 행복해지기로 했잖아.
평범하게 애기 키우고 3년 쯤 살다보니 왜 또 충수염, 성대폴립 이런 자잘한 병으로 한 해 동안 수술을 두 번 받고, 그러고나니 지랄병이 도져서 멘탈도 갈 곳 모르고 방황했다. 그때 지드래곤이 허옇게 탈색한 머리를 하고 영원한 건 절대 없다고 뻔한 소리를 하는 게 그렇게나 멋있었다.
그래서 나도 이제 부임 1년차 된 학교 축제에서, 중학교 어린이들 사이에 단독 무대를 마련해달라고 떼(?)를 쓴다. 만 나이 28세에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탈색/염색이라는 걸 해 본다. 주책스러운 (지금 보면 내 눈엔 아직) 어린 아줌마가 지드래곤 흉내를 신나게 내고 무대에 드러눕는다. 발라당.

그게 다 살려고 하는 짓이잖아요. 세상 내향적인 인간이 굳이 무대에 서는 기분이 어떤 건지 느낌아니까. 이것 뿐 아니라 생애주기 마다마다의 비슷비슷 지긋지긋한 경험들이 자꾸 책 속에 겹치니까 이건 공감대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파수가 공명해서 나는 이명을 느끼고 가라앉은 밤을 보냈다. 그니까 나는 이런 책을 보고 아 시발 너무 잘 알지 하지 않고 그냥 안쓰러워하면서 남의 일처럼 웃고 싶다. 그렇지만 알잖아, 우린 이미 망가졌어.

+밑줄 긋기
-주인공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계속 실험해나가는 걸 보는 것도 좋았다. 성욕을 느끼고 표현하고 거절하고 이용하고 등등. 강간당하지 않고 그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보통 이러면 사회로부터 성性적으로 크게 혼나곤 하는데, 이 시리즈에는 그런 것이 나오지 않아서 좋았다.

-그러니까 잘난 여자를 감히 혼내지 말자. 제발 좀 그르지 말자.

버릇이 나쁘다 싶어도 제발 좀 내버려두자. 구린 구석 없이 정정당당하게 도와도 주자.

-나는 그 사람들이 나를 욕망한다는 것이 어쨌든 좋았다. 그 사람들은 적어도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에 감탄해주었다. 그것이 착취고 성폭력이고 불법이라는 것은 ‘지금’ 돌아보면 중요했다. 그중 한 명은 내가 부잣집 애라는 것을 알아보고 돈을 뜯어가기도 했다. 그건 아마도 내 절박함에 대한 죗값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그 아저씨들의 집이나 모텔에서 자고 아침에 등교하면 나는 내가 특별하고도 퇴폐적으로 느껴졌다. 학교에서는 서울대 갈 아이라고 선생들이 좋은 문제집을 주었다.

-검열을 당한다는 것은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것은 대단히 생산적이거나 발전적인 무엇이 아니라, 나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속의 장기와 세포 하나하나까지를 양말 까뒤집듯이 의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검열은 잔인하다. 검열하는 쪽은 간편하되 당하는 쪽에서는 정말로 내가 당당한 피해자인지를, 내 쪽에 정말로 한 점의 원인 제공도 없었는지를 지속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잔인함의 핵심이다. 검열은 저쪽에서 시작되었으나, 결국 그걸 지속하는 것은 이쪽, 나 자신이 된다는 것 말이다.

-한 학기, 그러니까 6개월 뒤 나는 레즈비언 관계를 주제로 한 작업을 졸업심사에 냈고, 아무도 레즈비언 얘기인지 몰라서 무사통과되었다. 그렇게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니미 시팔 다시는 학교 같은 건 다니지 말자고 다짐했다.

-오히려 나는 개개인의 개별성과 저마다의 다양한 관계 맺음을 훨씬 더 피부에 와닿게 경험한다. 나는 그런 면에서 퀴어와 헤테로를 대립구도로 보지 않는다. 그냥 우리는 다 ‘퀴어’라고, 실상은 헤테로가 퀴어의 하위범주라고 인지한다. 우리는 모두 개별적으로 이상한 변태들일 뿐이고, 그것은 헤테로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어느 날인가 당첨 복권 하나 없이 빈손으로 와 새 복권을 사면서 “아가씨가 복권을 잘 못 골라주는 것 같애. 저번에 아가씨 땜에 하나도 안 됐어”라고 했을 때는 속으로 시발아, 라고 생각했지만 말로 하진 않았다.

-나도 내 젠더도, 너도 니 젠더도, 세상도 세상 젠더도 각자의 입체적 회전을 하던 중에 잠깐 맞물렸을 뿐이다. 그 맞물림, 그 일시적 정상성은 그래서 그토록 달콤하다. 거의 세상에 없는 달콤함이라고 보면 된다. 드물다시피 없다.

-지금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말 좋은 것들은 전체 인구의 1퍼센트 혹은 0.1퍼센트가 누리고 있지, 우리 손까지 내려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섹스가 정말 좋은 거였으면 우리가 하고 있을 리가 없어……

그걸 명심하셔야 돼요.

-위험한 생각이 들 때는, 주변에 폐를 끼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진짜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엔 내가 쓸모없는 존재 같고, 민폐 그 자체인 것 같으니까요. 누구한테 전화하고 치대고, 이러기가 진짜 힘든 상태일 거거든요. 그래도 주변에 얘길 해놓는 게 좋습니다. 당분간 내가 많이 힘들 거야, 심할 때 전화할게. 아니면 이럴 때는 병원에라도 가야 해요. 응급상황이거든요. 우리가 갑자기 살 찢어지면 응급실 가잖아요. 똑같습니다. 이럴 때는 정기적으로 가는 상담 시간이 아니어도 응급이라 생각하고 가셔야 해요.

-나는 그때 한창 정신과 약발이 잘 받기 시작하여 제법 평온한 마음을 경험하고 있었다.

“남들은 평소에 이런 마음으로 살았던 건가요?”

나는 이렇게 정신과 선생한테 물었다. 그것은 어떤 평행우주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갑작스러운 감정기복과 닥쳐오는 우울 같은 것이 없는 평안한 마음을 누군가는 갖고 살고 있었다니……

아니, 인생 너무 쉽게들 사는 거 아녀?

-내가 무기력해서 뭐가 안 풀리는 게 아니라, 뭔가가 힘들기 때문에 무기력감이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기력감은 어떻게 보면 골절 같은 거죠. 난 지금 조금 다친 상태인 거예요. 그 상태를 받아들이고, 나를 돌보는 걸 더 우선순위에 두어야지, 나 왜 이렇게 무기력하지, 난 무기력해서 문제야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면 너무 힘들 것 같아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무기력감은 되게 큰 트라우마 이후에 오기도 하고요. 우리나라에서는 무기력감을 게으름, 나태함 같은 것과 많이 연결을 짓지만, 그럴 만해서 그런 거예요.

이럴 땐 제때 맞춰서 밥 먹고 머리 감고, 그런 것도 너무 큰 일입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게 일인 거죠. 내가 그 수고를 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잘 생각하고 달래주면 좋을 것 같아요. 산다는 것은 존나 많이 힘든 겁니다.

-아무렇게나 말하고 뒤죽박죽 섞어 말하고 이 얘기 저 얘기 붙여서 말하고 말도 안 되는 얘기 하고 그런 거 너무 재밌다. 실제로 우리 사는 것도 다 이렇게 엉망이다.

-고통 없는 웃음은 없는 겁니다.

집안이 화목하면 웃길 필요가 없지. 나와서 광대 짓을 왜 하냐? 내가 뭘 해도 엄마 아빠가 웃어주는디? 우린 눈치 보고 애를 쓰는 거지……

유머러스해지고 싶다, 그러면 어린 시절부터 큰 고통을 겪으면서 사춘기 때 크게 방황하고, 그러면서 내 살길 찾아서 단절도 경험해보고, 다양한 (성적) 경험과…… 차별과 억압을 통해서 어떻게든 웃을 일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들은 얘기예요.

-엄마가 순결에 대해 이렇게 묻잖아요.

“우리 딸은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 없겠지?”

그럼 이렇게 한 번만 돌려주란 말이에요.

“엄마는? 엄마는 어때?”

여기까지 가줘야 돼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고요히 기름이 끓다가,

밀가루가 들어가는 순간!

귀청이 나갈 것 같은 그,

대단한 폭포수 같은 그 소리,

그것이 시작된다!
(튀김 이야기이다…이 글 표현력에서도 좀 감탄)

-죽을 때까지 해야 되는 일은 없어요. 죽을 것 같으면 안 해야 돼요.

-다 해도 됩니다.

페미니스트 종류 되게 많습니다.

슈퍼마켓 같은 거예요.

자유롭게 맘대로 사십시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괜찮아, 별일 아냐.


+베그노스

+상처 헤집는 삽화 보고 생각나서 가져온 내 그림

+지드래곤 흉내내다 발라당, 10년 전 나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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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6-04 15: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제가 지금 보고 있는 분이 바로 열반인님이신 거죠?

저는 항상 수학 문제 풀고 또 풀고, 뭔가 차도녀 이미지로 상상했는데 사진 속 GD헤어님은 완전 정열의 여인이신데요. 조명때문인가요.
근데 어쩌다가 완전히 무대에 누우신거예요^^

그리고 이자람님을 금연이라고 내보내셨단 말예요 ㅎㅎㅎ아놔!!

2023-06-04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04 15: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04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04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04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04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04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미 2023-06-04 21: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탈색 잘 어울리는데요?!! 열반인님 너무 멋있다!!
뭐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후회가 덜한것 같아요.
저도 요즘 그런 것들을 적어두고 있습니다ㅋ 일단 적는 것부터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6-05 08:44   좋아요 1 | URL
미미님 말씀 듣고 생각해보면 저 하고 싶은 건 그럭저럭 다 하고 산 것 같습니다ㅋㅋㅋ적은 것들 궁금하고 하나하나 다 했다! 안 해도 그만- 하시며 후회 없이 행복하시길 ㅎㅎ

새파랑 2023-06-04 23: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가 상상(?)하던 그 열반인님의 이미지가 맞았네요 ㅋ 뭔가 잘 어울리시는거 같아요~!! 내향적이라고 하시기엔 좀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06-05 08:42   좋아요 1 | URL
제가 그 INFJ입니다…T에서 F로 변하긴 했지만 I는 굳건한 은둔자 입니다 ㅋㅋㅋ

Yeagene 2023-06-07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열반인님 의외의 모습!ㅎㅎ 탈색한 머리랑 패션 멋있으세요♡

반유행열반인 2023-06-07 22:49   좋아요 1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진님 ㅎㅎ저건 무대용이고 지금은 지극히 평범(?)하게 화장 머리 안 한지 거의 이 년 되어 가는 꾸질이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