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편 읻다 시인선 7
프랑시스 퐁주 지음, 최성웅 옮김 / 읻다 / 2022년 4월
평점 :
품절


-20230529 프랑시스 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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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어디로 가든 껍데기를 지고 다니기가 불편할 때도 종종 있겠으나, 그렇다고 불평은 않으며 결국에는 매우 흡족해한다. 어디에 있건 껍데기로 돌아가 성가신 것들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은 심히 귀중한 일로, 고생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러한 능력과 편리에 긍지를 느끼며 달팽이가 침을 흘린다. 어떻게 하면 그토록 예민하면서도 취약하고, 또 성가신 것들의 쇄도를 피하는 동시에 행복과 고요를 누리는 존재일 수 있는가. 드러나는 머리의 경이로운 모습을 보라.
단번에 그토록 땅에 붙고 그토록 뭉클하면서도 그토록 느리고, 그토록 점진적이면서도 그토록 땅을 벗어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나 죽고 대홍수가 찾아들든 무슨 상관이랴, 한 번의 발길질에도 어디로든 굴러갈 수 있는 나이건만, 분명컨대 나는 다시 바로 서고 다시 땅에 붙으니, 운명에 의해 내가 쫓겨나서 먹이를 찾을 그곳-대지다, 가장 보편적 양식이다.
그리하여 달팽이가 된다는 건 이 무슨 행복이요, 이 무슨 기쁨인가. 이 긍지 어린 침으로 달팽이는 자신이 가닿는 모든 것에 표식을 남긴다. 은색 자취가 달팽이를 뒤따른다. 그리고 이는 미식가인 날짐승 부리에 신호가 되리라. 즉 이것이 난점이요 문제이니, (허영으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위험이로다.
혼자, 틀림없이 달팽이는 혼자다. 달팽이에게는 친구가 많지 않다. 하지만 이는 그의 행복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달팽이는 자연에 그토록 잘 달라붙고, 그토록 가까이서 그토록 완벽히 자연을 만끽하고, 자신이 온몸으로 입 맞추는 땅의 친구이며 또 나뭇잎들의 친구이기도, 그리고 그토록 자랑스레 자신의 그토록 예민한 눈이 달린 머리를 들어 올리는 하늘의 친구이기도 하다-고결이요, 느림이요, 지혜요, 긍지요, 허영이요, 자긍인. (‘달팽이Escargots’ 중)


3월 2권, 4월 2권, 5월은… 지금 쓰는 독후감이 11번째라고 한다. 시집 4권에 만화책 2권이라는 치트키가 끼어 있긴 하지만 너무 맹렬하네…
마지막 공부한 지 보름 됐다. 힘들다…하면서도 수1 뉴런 한 강 꾸역꾸역 듣고 하나 더 들을까 하다 말고, 국어 학습지도 하루치 풀고 (알고리즘 지문이랑 기체 크로마티 지문은 이게 왜 국어인가…으아아아 하면서), 혈관 초음파를 찍으러 갔다가, 택시 잡아 타고 응급실에 갔다. 독한 것…입원하는 날까지 골골대면서 뭘 하긴 했네…

퇴원 직후에는 숨쉬는 것도 힘드니까 안 자던 낮잠도 자고 뭐만 하면 드러눕고 그랬는데, 열흘 전부터는 살 만했는지 만화책을 시작으로 몸을 살살 풀더니 독후감 일곱개를 써 놓았다.

책 좀 읽는다고 책상 머리 앞에 오래 앉은 날은 다시 다리가 붓는다. 다친 발목과 혈전 있는 무릎 쪽이 팽팽해진다. 그래도 이제 좀 나아졌으니 다시 공부를 해야 하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 곁의 사람들이 안 돼 안 돼, 그럼 못 이기는 척 다시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책을 보는 거지…

이렇게 되면 어차피 올해 수능 글른 거 같은데, 그럼 수능 끝나고 본다던 책들도 미룰 필요 없잖아? 하고 박상륭 전집 앞에 선다. 박상륭 선생님 존함 마지막 글자를 뒤집으면 욜이다. 욜로, 너는 한 번만 산단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을 기회는 이번 생 단 한 번. 아! 무릎은 안 치고 마음 한 구석을 치며 전집 마지막 권인 칠조어론과 주석책을 꺼냈다. 무거워가지고 바깥 케이스에서 끄집어내는 것도 일이었다. 무슨 바람인지 주석책의 말미부터 펼쳤더니, 거기 편집 교정보신 윤병무 시인의 후기가 있었다. 어쩌다 그 분 블로그 찾아서 책 만든 과정과 후기도 재미있게 봤었는데, (그러니까 책날개 없는 거나 떡제본이나 디자인이나 다 신중한 고민의 결과물) 직접 책을 펼쳐 편집 후기 조금 읽기만 해도 책의 만듦새가 다른 게 확 느껴졌다. 활자체도 특이하면서 가독성 좋고 종이도 너무 얇은 거 아냐? 했는데 고급지고 표지의 고무코팅 같은 것도 실제 만져보면 느낌 좋음 ㅋㅋㅋ살갗같음 ㅋㅋㅋㅋ

그렇지만 칠조어론 펼치고 본게임 시작도 전에 좌절… 한자 옆에 한글 병기가 안 되어 있어… 네이버 사전에 사진 찍고 한자어 문지르면 읽어주는 기능 있긴 하지만 이천쪽 가까운 책을 전부 찰칵찰칵하면서 볼 수는 없다. 맨날 한문 전교1등 했다고 자랑하더니 내가 이렇게 한자에 약했어 ㅋㅋㅋ하면서 그냥 읽어지는 건 읽고 아닌 건 말기로 하면서 조금 읽었다. ‘죽음의 한 연구’를 이십 년 간격으로 두 번 본 건 아무래도 이 책의 예비였겠다…싶게 -뎁지, -입지, 하는 촛불 시님 특유의 말투와 육조나 형장 나으리가 등장할 때면 조금 반가웠다. 죽이고 싶게 미운 변태 촛불 스님이지만, 골드문트님 말씀대로 죽을 똥 싸게 어려운 장광설을 펼치고 있지만, 궁금하긴 하니까 조금씩 읽어 보기로 했다. 이거 이천쪽 다 읽으면 수학 다시 한다 막 이러고 ㅋㅋㅋ(공부 안 할 생각인가 봄)

읽다 지치니까 박상륭 전집 위에 있던 사티리콘도 같이 꺼내놓았다가 읽는데 이 오래 묵은 책은 칠조어론 비하면 순한맛 고대 포르노 ㅋㅋㅋ그런데 전체 20권 중 다 소실되고 남은 14,15,16권, 그나마도 그 중간중간도 빠진 내용은 …말줄임표로 생략되어 있어서 뭔가 대여점에서 중간만 남은 만화책 빌렸는데 그나마도 이새끼들이 몇 장씩 찢어갔네…하는 기분이었다.

잠들기 전에는 시집이지, 주기율표 램프 켜고 프랑시스 퐁주의 시집을 들고 누웠다. 쪽수 보니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개나리 피던 3월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엄청 톡톡 튀는 참신함은 없지만 집요하고 끈질긴 느낌이었다. 식물의 줄기의 단면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하면서 면도날로 엷게 저미고 슬라이드 글라스에 얹고, 스포이드로 물 한방울 떨구고, 커버글라스까지 살살 덮어 프레파라트를 만드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퐁주는 시인보다는 과학자 같다. 안녕하세요, 사물과 언어의 과학자입니다. 과학 좀 한 문돌이임? 어려서 방학숙제로 하던 탐구생활 같기도 하고, 이것은 무엇일까요? 하며 수수께끼나 스무고개를 하는 것도 같았다. 나는 왜 자꾸 직유법임… 은유의 대가 시집을 앞에 두고…

말미에 붙은 옮긴 이의 글이 또 좋았다. 사실 이 시집을 보게 된 건 문장이 좋아 관심을 가지게 된 번역자 덕인데, 전자책으로 산 두이노 비가 시리즈가 생각보다 별로여서 좌절하다가 이달의 당선작으로 받은 적립금의 트로피로다가 이 책을 선택했던 것이다. ㅋㅋㅋㅋ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한 권의 책, 한 편의 시를 만나는 경험이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옮긴이는 우연히 헌책방에서 퐁주의 시 몇 편을 접하고는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고, 여러 언어의 글을 옮기고 언어와 번역을 가르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첫눈에 빠지는 사랑, 그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그런 것일까. 미생물책이랑 호르몬책이랑 색스 박사 짧은 에세이 한 권 보면서 나중에 그 책들 옮긴 번역가가 문과 회사원이었다가 약대 나와서 과학 저술 위주의 번역가로 활동하는 중인 걸 알게 되었다. 와, 이거다. 이렇게 살고 싶군. 워너비로 삼고 나는 번역이 목표는 아니지만 하여간에 전문직이 되어 적당히 일하고 나머지는 읽고 쓰는 삶이다, 했었는데. ‘이토록 굉장한 세계’도 읽다가 아 안 되겠다…나 생각보다 동물학(과 동물의 감각, 인지)에 관심 없음 ㅋㅋㅋ하고 보류. 전직을 위한 수학 공부도 일단은 보류…

굳이 캐고 들면 지금의 내가 되는 데 이런저런 영향을 준 것도 책일 것이다. 한 권은 아니고 여러 권이 조금조금씩. 장강명의 르포책에서 독서공동체 운운하는 걸 보고 클라우드 노트에만 끄적이던 독후감을 웹에도 올릴 생각을 했다. 야 나도 쓰고 싶어, 하게 만들던 소설 읽기와 그래서 이어진 몇 년 간의 소설 쓰기. 망한 연애 끝에서도 사랑타령하는 게이 소설가 독후감에 눌린 좋아요 몇 개. 비전문가용 과학책 몇 권 읽고 아 나 과학에 관심있나 봐 하고 시작한 이과 전향 도전…

지금은 여전히 소소하게 읽고 소소하게 독후감 쓰는 나만 남았지만…나쁘지 않다. 읽었거나 읽는 중이거나 읽을 책을 줄세워 놓고 읽다 말다 끄적이다 재미있잖아…



+읽은 읽는 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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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gene 2023-05-30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한문 1등 하셨군요...
저는 한자가 진짜 쥐약이라 한문 들어간 글이 질색이에요 ㅠㅠㅠ

반유행열반인 2023-05-31 09:20   좋아요 1 | URL
대입에도 안 들어가는 내신과목이라고 애들이 난 서울대 안 가 연고대 갈거라 내신 주요과목만 이럴 때 저는 그게 무슨 소리야…하고서 한문 화학 생물 이런거 1등하고 국어는 막 틀리고 하던 문과였습니다 ㅋㅋㅋ(그때 한문 이런 거 말고 주요과목 석차 잘 챙겼으면 지방약대 수시라도 쓰는 건데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