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쓸모 -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
최태성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91012 최태성
큰별쌤은 나에게도 스승이시다. 몇 년 전 최태성 선생님 온라인 강의를 듣고 한국사시험 1급에 붙었다. 처음에는 별 목적 없이 시험공부를 시작했는데 선생님 수업은 어떤 긍지, 바른 삶을 일깨우고 감동을 주며 역사를 공부할 당위성을 내내 느끼게 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가르침 같다. 나는 자신 없고 확신 없는 부분이지만 배움과 가르침을 믿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지금 나는 완전 신을 부정하는 사제 꼴이다.
책 자체는 구어체 강의록 같은 서술이라 처음에는 오히려 잘 안 읽혔다. 새로울 게 없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역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라기 보다는 왜 역사를 알아야 할까?에 대한 긴 설득이다. 그 과정이 치열하고 다정하다. 큰 재미는 없지만 뒤로 갈수록 저자의 역사를 향한 애정과 열정이 느껴졌다.

역사와는 큰 관계가 없지만 종일 많은 생각을 했다. 내 선입견과 욕망이 만든 오해 오독 오류들이 많다. 바람을 인식인 양 착각해 많은 일들을 잘못 느끼고 잘못 받아들여 온 것 같다. 다 틀린 건 아니지만 많이 틀렸다. 개인의 역사를 돌아보고 그때 내가 틀렸어, 하고 이불킥할 일을 점차 줄이는 게 조금 더 나아질 방법 같다. 지금이라도 이런 생각을 하니 가망이 없진 않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나타 수이사이드 - Renata Suicide
레나타 수이사이드 (Renata Suicide) 노래 / 고금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레나타 수이사이드의 라이브를 마지막으로 본 건 무너뜨리는 자들을 버티는 두리반에서였다. 거기서 귀여운 다른 밴드(팀 이름 잊어버렸다...나새키 기억력 나쁘네...)사람들 만나 이야기 나눴던 것도 같고, 람혼님께 송동준 번역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선물로 받았고, 그 책은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보르헤스 덕후에게 선물했다. 딱 9년 전 이맘 때다.
그리고 나의 반시. 절망과 우울의 숲에 빠져 허우적대는 호빗 같은 나를 위로하던 갈라드리엘. 언제나 거기서 내 빛이 되어줄 줄 알았던 그녀는 발리노르로 떠나버렸다. 세 멤버 모두 한반도에 없다. 어느 섬에, 다른 대륙에. 그런 와중에 첫 앨범이 나왔다. 그들 음악이 듣고 싶으면 유튜브에서 이비에스 헬로 루키 출연분을 틀어보곤 했던 내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 땅을 떠날 수도 떠나지도 못하고 남은 내게 불운과 불행과 온갖 음울함이 독처럼 차오르는 날에는 매우 적절한 브금이 되어줄 익숙한 노래들을 물리적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겨우 이런 자본주의적 위로라니ㅋㅋㅋ
닿지 못하는 눈길 대신 그리운 베이스 라인에 집중해 본다. 나는 예전보다는 훨씬 밝고 덜 불행한 사람이 되었지만, 타고난 어둠은 희미한 빛이나 더 짙은 어둠에 안겨야 편안해진다.
문득 궁금해 찾아본 두리반 투쟁은 승리했고, 건재하게 만두는 삶아지고 국수는 끓고 있었다. 약간 어리둥절했다.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메시지인가요.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19-10-12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참 좋네요~
저 초록 속의 아치는 남이섬의 좋아하는 장소의 가지 같아요 ㅎㅎ
좋은 밤 되세요 ~

반유행열반인 2019-10-12 20:48   좋아요 0 | URL
으아니 사진만 보고도 위치를 아시다니...감사합니다. 좋은 밤 보내시길.

초딩 2019-10-12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방금 댓글과 라이크가 동시에 일어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ㅎㅎ
 
오직 한 사람의 차지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91011 김금희

어떤 목적으로 부리나케 읽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아도 잘 읽혔다. 읽다보니 나한테 신간 예고까지 해 준 사람인데 이미 샀을 거야, 부질 없다, 줄 게 참 없다 했다. 그래 줄 수 있는 건 말 뿐이라 원없이 수다를 떨고 왔다. 즐겁고 반갑다.
김금희를 되게 오래 많이 읽은 기분인데 사실 두 번째 읽는 단편집이다. 케이 픽션에 단편 하나 묶인 체스의 모든 것과 너무 한낮의 연애 실린 젊은작가수상집까지 하면 권수로는 네 권째이긴 하지만.
몇 개 작품 읽다보니 패턴화랄까, 그런 게 느껴졌다. 그건 좋은 일일까. 작가색이 느껴지는 것과 구조의 답습은 또 다른 문제이긴 하다. 패턴이 읽힌다고, 일부러 그렇게 쓴 것도 아니고 읽혔다고 그대로 따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소하고 사적인 지나간 것들을 돌아보고 한참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런 걸 여러 번 써서 마침내 잘 쓰게 된 사람이 작가가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아직 멀었어. 여러 번도 잘 도 까마득하다.
종교가 있어 제사를 안 지낸다는 인물이 자주 나오는데, 왜 기독교라고 말을 못하니. 제사 지내는 조상 숭배 자체도 종교인 것을. 어떤 사람들은 섬세하고 조심스럽다. 남을 다치게 하지 않는 쓰기에 대해.

-체스의 모든 것
두 번째 읽어도 줗았다. 주인공 아닌 목격자가 되는 건 참. 그런데 이젠 나도 그런 거 잘 할 수 있을 거 같다. 하하. 국화의 무심함과 선배가 느낀 모욕감.
이제 나랑은 체스를 두지 않는 딸래미는 여전히 아빠랑 자기 룰대로 잘 한다. 실력이 점점 는다고 한다. 져도 울지 않는 법을 배웠다. 아이 씩씩해.
-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
여기도 사랑의 목격자 하나. 몰래 신을 신어보고 고집하던 모자를 벗은 채 어울리지 않는 십이야 대사를 읊는 일. 카페인데 커피는 한 잔도 안 마시네. 내가 못 봤을지도. 무시무시한 비탈 꼭대기에 늘 살았는데 정말이지 누가 밧줄 같은 걸 매어 준다면 좋았을 것 같다. 지금도 높은 동네에 살아서 시월 밤에 고개 마루 근처에 가면 여의도 불꽃놀이가 멀리 보인다. 63빌딩 정수리도. 등장 인물 중에 미운 애가 하나도 없다.
-오직 한 사람의 차지
망한 출판사 사장, 교수 지망 강사 부인, 닭갈비집 사장 장인, 반품 진상 고객 낸내, 결이 다르긴 하지만 부녀 관계가 짙다보니 소설 오직 두 사람도 생각나고. 디테일한 부분들이 좋았다. 제목은 되게 낭만적일 것 같은데 답답하고 갑갑한 정서가 더 강했다.
-레이디
어린 시절 회상, 사랑인지 우정인지 모를 그것, 중2병 넘치는 엑스저팬 놀이, 나랑 세대가 약간 겹쳐 그런지 보편적인 성장기 정서나 서사가 있는건지 잘 모르겠다. 최은영 그 여름이 그냥 그랬던 거 보면 나는 김금희 쪽이야 역시. 비교하면 니들도 싫으면서 왜 자꾸 둘을 비교하니. 이거 누가 시작했어, 응?
-문상
분명 읽은 것 같은데, 내가 웹진 문장을 봤던 적은 없는데, 아 남의 독후감이나 평론 같은 걸 봤나, 했는데 디테일이 너무 살아 있고 그래서 뭐지 하다 보니 젊은 작가상 수상집에서 읽었었다. 그렇다면 다섯 권째였어. 두 번째 읽는데도 새로웠다. 희극배우는 하고 다니는 짓이 너무 비극적이었다. 가만 보면 연극이나 배우에 대한 소설도 많다. 양희가 그렇고 사장 떠나는 소설이 그렇고.
대구는 딱 한 번 가봤는데 그나마도 구석탱이 안심역 거쳐 연수원만 찍고 다시 역에서 역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우리 부장 다 좋은데 그 먼 데 자기 대신 연수 보낸 건 좀 못됐다. 그런데 거기서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을 만났었다. 헐. 어쨌든 책으로 읽는 노점 군밤 장수 할머니, 수성못, 앞산공원 케이블카. 사람 사는 데 다 똑같지 뭐.
-새 보러 간다
제목은 끝까지 봐도 잘 모르겠다. 운디드 버드. 예술가와 비평가와 편집인. 뭔 먹이사슬 같다. 내가 너를 이토록 보니까 너도 나를 좀 알아달라고 외쳐야 하는 사람의 처지는 어쩐지 제일 처량하다.
-모리와 무라
은퇴한 호텔 직원 숙부와 해경(엄마를 왜 이름으로 지칭할까)과 나와 드롭스를 사는 빚더미에 앉은 연인. 후쿠오카 여행. 친척들 모이면 웅성대는 분위기가 많이 나온다. 여기도 그렇고 다음 소설도, 레이디의 유나의 대가족도 비슷한 느낌. 웅성웅성. 불만. 옛날 타령. 한.
-누구 친구의 류
여행사 직원인 며느리?입장에서 시누이를 관찰하는 게 재미있다. 적당히 부자집, 가족묘의 이장, 그녀에게 결여된 것, 쿠바의 류. 패턴 패턴화.
-쇼퍼, 미스터리, 픽션
자전적 소설로 발표했다 한다. 우리집에도 그거 있어! 메르헨 전집. 삼촌 한 명이 얻어왔는데 너무 늦게 얻어왔다. 니벨룽겐의 노래 시지프스 신화 같은 거 읽던 고딩한테는 너무 늦었단 말야. 조금 더 일찍 가져다 줬으면 나에게도 꿈과 희망이 넘쳤을까. 다음 세대는 나보다 환상과 꿈을 가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직 소장중이다. 옛날책이라 애가 별로 안 좋아한다…
이런 것도 소설이 될 수 있을까요? 하고 묻기엔 너무 멀리왔다. 네 명에게 사랑을 나눠준 그놈 참 밉상이다. 따귀가 달다. 그런데 부족하지 않게 골고루 줬다면 안 들켰다면 그런 생각을 왜 할까.
학교 대문에 깔려죽은 아이. 비극적인 미스터리한 가족의 죽음(근데 이거 진짜 있는 건지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아우라만 만든 건지 끝까지 읽어도 헤깔렸다.). 소설쓰는 사람의 어린 시절 고백 같은 건 전에도 어떤 아저씨 무시하고 가는 소설로 읽은 거 같은데. 누구건지 기억이 안 난다.

어떤 평론가가 자기 홈페이지에 김금희는 이번에 묶인 2015-2017무렵 소설 말고 그 뒤가 더 기대된다고 했다. 그건 정말 기분 좋은 칭찬일 것 같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나는 이전 소설집의 세실리아가 자꾸 생각난다. 읽을 때는 그래 했는데 여운이 두 달을 가는 거니.

댓글(3)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19-10-12 0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시작한 것 같아요. 최은영 vs 김금희..... 최소한 알라딘에서는 그 판 내가 짠 것 같아....

2019-10-12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2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91008 정세랑
눈뜨고 코베인-외계인이 날 납치할 거야
https://youtu.be/3d0SCv2lyZQ?list=PLIx4Qns7amGlHKZyv_SgsW95uTcoz7as2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 두 한아가 있었다.
큰 눈에 볼록렌즈 안경까지 써서 외계인 안구 같은 걸 하고 있던 한아는 스쿨밴드 오디션에 기타를 지원했다 떨어졌다. 내가 쉬는 시간마다 빈 교실, 방송실, 과학실 같은 곳을 찾아 악을 쓰듯 노래를 부르면 한아는, 그 옆에서 가만히 들어주었다. 내 워크맨을 빌려 테이프를 감아가며 음악을 듣기도 했다.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멀어지고 연락도 끊겼다. 아주 오랜 후에야 한아가 트럭 때문에 다른 세상으로 간 것을 전해 들었다.
또다른 한아는 교내 봉사 동아리 소속의 남자애였다. 말이 좋아 봉사지 쓰레기장 분리수거라는 고된 일을 맡고 있었다. 한아는 그보다 선배인 연인과 늘 다정하게 쓰레기장 주위를 맴돌며 애정을 과시했다. 다른 한아와 나는 그애들이 일하고 부비대고 다투는 모습을 보며 괜시리 눈꼴셔했다. 그들이 지나가면 가비지 커플이다! 하고 놓치지 않았다. 지나고 보면, 예쁜 커플이었다. 그냥 부러웠던 것 같다. 둘은 이미 커플이 아니겠지만, 어디선가 각자 잘 살고들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안경 쓴 짧은 머리의 그 어린 연인이 서로를 바라보던 눈길은 잊혀지질 않는다. 그애들하곤 말 한 마디 나눠보지 않았는데.

뭐 괜히 그런 기억이 나는 제목이었다. 이 소설의 한아는 지구를 사랑하는 저탄소 친환경 지속가능한 리사이클 업사이클 의류 디자이너이자 경민을 사랑하는 연인이다. 그런 한아에게 반해 모두를 모든 것을 던지고 2만 광년을 달려온 외계인이 있다.
설탕에다 올리고당에다 사카린 아스파탐 뭔 톨 붙는 온갖 감미료 다 친 듯한 소설이었다.
눈에서 하트 튀어나오는 연애물 드라마 안 좋아하는 나에게는 조금 버겁지만 그래도 그냥저냥 읽으면서 정서순화는 되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랑스럽다 느끼는 캐릭터와 스토리. 달달이와 해피엔딩에 대한 저항감은 만들어지는 건지 타고나는 건지도 궁금했다. 내가 워낙 현실적이라...라고 하면 누군가 옆에서 정색하며 그건 메말랐다고 하는 거에요! 하고 비난하는 장면도 떠올렸다.

8월부터 줄서서 전자도서관 예약을 기다릴 정도로 인기책이었는데, 우연히 본 명사들의 추천도서에서 윤덕원이 이 책을 권하고 있었다. 아니, 난 권해줘서 읽는 게 아냐! 원래부터 한 번 보려고 했어! 괜히 툴툴대 보고 싶었다. 사실 지난 번 첫 단편집을 망설이다 읽은 건 뭐 브로콜리너마저 유튜브 채널 시청에 힘입은 바 있지만...(비겁하다 비겁맨 인정해도 되지 않겠니.)

2만 광년 거리인지는 몰라도 수많은 우연이 겹쳐 내 곁에 오게 된 존재들이 있다. 내가 모질고 모지리 같이 굴게 되는 날은 그 우연의 놀랍고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사랑하는 데 전념해야 겠다.

+동네 사람 출신 외계 체류자가 반가워 뜬금없는 밑줄
“저기 진짜 지구인은 한 명도 없는 거네.”
“아니, 딱 한 명 있어. 지구 애호가가 불법으로 납치해간 사람이 한 명. 심지어 한국인이야. 용인 출신인데 어린 시절부터 아르바이트한 경험으로 해외 놀이공원에 취직하려다가 저기로 납치당했대. 지구 애호가가 죽고 다시 자유를 얻었지만 돌아오지 않고 저기 남았어. 천사의 애인이란 소문이 있는데 내가 봐도 꽤 뜨거워 보이더라.”
“외계인들의 납치는 진짜 있는 일이구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19-10-08 1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친환경인데 달콤하다니, 반칙이잖아요?? 원래 친환경은 밍밍한 게 정석 아닌가요....

반유행열반인 2019-10-08 18:33   좋아요 0 | URL
판타지에요 판타지...먹어도 0칼로리 같은...올바른 데다 달달하니 헤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1번째 마니아님 앞에서 제가 깝치고 있네요.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91007 테드 창

건강보험공단에서 의무로 받아야 하는 직장인 검진만 2년 마다 받다가 남편 직장에서 가족 복지?로 제공하는 검진을 처음 받아봤다. 키 몸무게 재고 피 뽑고 소변 뽑고 끝, 아닌가? 했는데 온갖 곳을 초음파로 쏘고, 생애 최초 위내시경도 받아 보고(수유 때문에 약 안 쓰는 비수면으로...별로 어렵지 않았음...나 좀 대단한 듯), 여기저기 전극 붙이고 집게 꽂고 별 거 다 했다. 원하면 MRI에 CT까지 찍나 본데 난 특별히 아픈데 없어서 안 했다.

원래 알던 이상 수준 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결과 ‘교감신경계 과활성화 상태입니다.’ 이 문장 말고는 뭐가 문제다, 이래라 저래라가 없는 항목을 보며 뭐라는 거야, 하고 검색해 보았다. 쉽게 말하면 깜짝 놀란 상태가 하루종일 지속되는 것이란다. 공황장애, 우울증, 불안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뭐 그럼 대충 이해가 갔다.
궁금한 건 저런 신체 상태가 저런 심리를 만드는지, 저런 심리 상태의 신체화 증상이 교감신경계 과활성인지 뭔지인지 모르겠다는 것...별다른 설명이 없다.
그냥 아, 그랬구나, 까지지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겠는 건 그대로다.

과학 기술의 많은 부분이 그런 것 같다. 이런 상태라는 기술적 설명, 이런 관계가 있다는 상관 분석까지는 내놓지만 원인이나 해결책은 명확하게 내어 줄 수 없다. 무엇을 해야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건 사람의 몫이다. 어쩌면 무엇을 하건, 하지 않건 달라질 게 없는 건지도 몰라.

이 소설집 속에 다루어진 많은 이야기도 그렇게 읽혔다. 자유의지 대 결정론, 기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할 것인가 구속하게 될 것인가. 작가의 최신작을 읽고 나서 이 책도 보게 될 건 알았지만 너무 빨리 봤나 싶기도 했다. 나는 숨 쪽이 더 좋았다. 두 소설집 안에 서로 짝이 되는 듯 비슷한 소설들이 있었는데 대개는 두번째 작품집 소설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1. Tower of Babylon (1990) 「바빌론의 탑」
바벨탑에서 영감을 얻었을 법한 신비로운 이야기였다. 고공도시, 신을 경배하는 자들이 쌓는 탑, 마무리에서 주인공은 절망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상황이라면 빠져 죽지 않고 자신이 출발한 곳으로 이끈 존재에게 더 감사하고 기뻐했을 것 같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왠지 마리오에서 토관 타고 워프한 느낌….ㅋㅋㅋㅋㅋㅋㅋ빵 터지네 혼자서.

  2. Division by Zero (1991) 「영으로 나누면」
영화 멜랑콜리아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타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이 끝난 느낌. 으아니 내가 인생을 바쳐온 수학이 다 헛짓거리라니!!! 하는 절망과 그 옆에서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절망의 상황은 그대로 지켜보는 이의 심정. 두 가지가 평행선을 그리다 마무리에서 접점을 찾는 듯하다. 단락 나누는 숫자나 기호, 수학 때문에 고민하는 부분은 내게는 너무 어려웠다.

  3. Understand (1991) 「이해」
초지능 인류가 등장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그들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서 이해를 고려하지 않은 채로 자기가 꽂힌 분야에 몰두할 것이다, 뭐 그런 상상 같은데. 이미 거기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는지도. 똑같이 지능 폭발한 개체끼리도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상황을 보면 그렇다. 장강명 호모 도미넌스가 조금 비슷한 소재를 다루었다.

  4. Story of Your Life (1998) 「네 인생의 이야기」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시간 구성을 손톱깎이 처럼 접었다고 해야 되나. 이것도 정확하진 않고. 일어날 일을 안다고 해서 바꿀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고 그냥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것이고 체념이나 달관이나 초월? 매우 묘한데 좋았다. 다른 인식 체계와 언어, 문자를 갖춘 외계인과 소통한다는 아이디어도 재미있었다. 몰랐는데 컨택트 Arrival 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했다. 영화는 왠지 망작일 것 같은 슬픈 예감이…(그저 편견이길….)

딸내미에게 밑줄 친 농담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못 알아 먹었다. 아니 애초에 애한테 할 소리냐…(더럽게 못된 엄마…)
“...‘내가 자식을 여럿 낳는다고 가정해봐. 만에 하나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된 다음에 인생에서 겪은 안 좋은 일들을 모두 내 탓으로 돌리면 어떻게 하지?’ 그랬더니 그 친구가 웃으면서 이러더라고. ‘만에 하나라니, 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5. The Evolution of Human Science (2000) 「인류 과학의 진화」
이해 의 초지능이 등장한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격차, 그럼에도 과학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힘겹게 들고 있다. 나한테는 설득력이 크지 않아 힙겹다고 썼다. 작가노트 보면 자신 있어 보여서 이상하다.

  6. Seventy-Two Letters (2000) 「일흔두 글자」
이 소설에 갇혀 거의 5일은 허비했다. 다음 책의 옴팔로스랑 비슷한 느낌의 소설이다. 명명학이라 하는, 이름으로 뭔가를 움직이는 힘을 만들어내는 능력. 자동 인형을 움직이거나 생식 세포에게 태아 형태를 갖추게 하는 이름들. (주문?spell? 이름? Name? letter? )
해리포터의 주문처럼, 볼트모트 이름을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데 나한테는 더럽게 재미없었다. 참고 본 보람도 없었다. 눈물 줄줄줄...

  7. Hell Is the Absence of God (2001) 「지옥은 신의 부재」
두번째로 마음에 든 소설이었다. 닐의 입장에 매우 공감이 갔다. 결말도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경건한 듯 신성모독적인 소설이나 영화 너무 좋다. 밀양 같은 거. 독실한 이들은 반대로 읽을 수 있는 형식.
나도 그렇게 신 안에 행복 느끼는, 아이돌 보며 황홀해지는, 지도자들의 카리스마에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지지의 응원과 표를 던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봤지만, 안 될 것이다. 태생이 불신자에 모독자다. 그냥 믿지 않는 자로 살다 신이 있다면 지옥에 떨어지겠다고 단언한 적도 있다. 그런데 신을 사랑하게 되지만 영원히 버림 받는 상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참신했다. 뭐 이미 그렇게 살아온 사람에겐 그것도 커다란 지옥은 못될 것 같다.

8. Liking What You See : A Documentary (2002)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터리」
이건 세번째로 좋았다. ㅎㅎㅎ다큐 형식으로 다양한 등장인물의 인터뷰? 연설 발췌? 발화만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아래 문단 밑줄치며 나에게는 자기 검열 능력만 생겼을 뿐 그런 감수성과 공감능력은 주어지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경기하는 걸 보면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나? 물론 그렇지 않지. 그러기는커녕 경이감을 느끼고 감탄하지 않나. 그토록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는 거야. 그런데 왜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같은 느낌을 받으면 안 된다는 건가?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반응을 보이는 우리에게 반성해야 한다고 하겠지. 페미니즘은 미학을 정치로 치환하려고 하니까. 그런 시도가 성공하면 할수록 우리의 문화는 빈곤해질 거야.’
칼리가 있다면, 나는 아마 안 하는 쪽을 택할 것 같다. 한다면 조금 행복해질 것 같긴 하지만. 그냥 안 하고 불행한 쪽으로. 병이야 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