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와 로마 살림지식총서 116
김덕수 지음 / 살림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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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거의 2500년 전 멀고 먼 지중해를 배경으로 펼쳐진 그리스와 로마문명은 현재의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저자의 이 질문에 대해 얼핏 생각해보면 고대의 그리스,로마와 현대를 사는 우리 사이에 접점을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24시 찜질방, 사우나와 같은 목욕탕 문화에서부터 현대 정치의 기본 구조인 민주정과 공화정에 이르기까지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즉,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로마 문화에 대한 관심은 제한적이고, 그 둘 사이의 구분도 명확하게 되지 않을 정도로 현대의 우리들에게 그리스와 로마는 그저 먼 옛날의 문명으로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스와 로마문명은 서구 문명의 두 기둥이다. 고대에 지중해를 배경으로 발전을 거듭한 두 문명은 상업적, 군사적 수단을 통해 그들의 문화,제도 등을 전파했고 헬레니즘 시대와 제정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절정에 달했다. 특히 그리스를 대표하는 도시인 아테네와 작은 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 발전한 로마는 두 문명의 성격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들을 비교함으로써 서양 고대 문명의 이해는 물론 현대의 우리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서구 문화의 이해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는 본 이야기에 앞서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라는 말의 기원과 헬라스의 의미 그리고 '영원한 로마(Roma Aeterna)'라는 이데올로기의 발생과 그것이 유럽역사에 미친 영향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이제 다루게 될 아테네와 로마의 비교를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주로 정치적인 성격이긴 하지만 이 책에서는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 카피톨리움 언덕과 유피테르 신전과 같은 물질적인 유산으로부터 시작해서 귀족정치, 광장 문화, 민회처럼 문화적, 제도적인 유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아테네와 로마를 비교하고 있다. 이 두도시의 공통점으로는 시간적 흐름에 따라 왕정, 귀족정, 민주정 혹은 공화정이라는 정체가 발전하기 시작했고, 정치, 상업, 종교 등 공적, 사적 생활의 중심이 된 광장(아고라와 포룸 로마눔)이 도시의 중심이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왕정, 귀족정을 거쳐 거의 완전한 민주정으로 이행한 그리스와 달리 로마에서는 집정과과 원로원, 민회라는 3개의 정체적 요소가 혼합적으로 기능을 발휘했다는 점은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두도시의 비교를 통해 현대사회를 이루는 주요 요소인 민주주의, 공화정, 의회, 선거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고 무엇이 그리스 문화의 영향이고, 무엇이 로마 문화의 영향인지 보다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그리스와 로마라는 라이벌 관계를 좀더 확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아테네와 로마라는 고대 세계의 범위에서 벗어나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의 대립을 통해 중세 이래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두 문화권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물론 교회의 분열은 정치적, 종교적 요인이 주된 원인이지만 그리스와 로마라는 배경도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이 두 문명을 라이벌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된다. 사실 그리스와 로마는 그들 문명의 전성기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사사건건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리스 문명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 로마는 아직 발전 중에 있었으며, 로마가 지중해 세계의 지배자로 등장할 때쯤 그리스는 이미 쇠퇴기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또 '정복한 그리스에게 정복당했다'라는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말처럼 로마가 정복한 그리스의 문화가 오히려 로마를 문화적으로 지배한 일도 있는 것처럼 지나치게 두 문명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스와 로마의 라이벌 관계란 어쩌면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규정되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고대에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 해도 먼 훗날에 서구 문명의 근간이 된 두 문명이 비교되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리스와 로마 문명은 우리에게 멀리 떨어진 과거의 것이지만 오늘날 서구 문명의 기원이 된 문명으로써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지만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몰랐던 많은 것들 - 민주주의, 의회, 목욕탕 등 - 이 사실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이 두 문명의 비교를 통해 서구 문명의 기원에 대해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즉, 그리스와 로마 문명은 우리 가까이에서 현재와 과거를 비추는 거울인 셈이다. 이 점에서 오늘날에도 그리스와 로마를 알아보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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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광기 - 왕들의 광기는 역사에 무엇을 남겼는가?
비비안 그린 지음, 채은진 옮김 / 말글빛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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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이 책은 두가지 면에서 여타 역사책보다 흥미롭다. 서론에서 볼 수 있듯이 대다수의 역사가들은 역사의 발전과정을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사건에 촛점을 두는 경우가 많은데, 저자는 '군주'의 '질병'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역사란 인간 사이에서 발생한 일이 주된 소재가 되므로 역사의 흐름에 있어 인간은 - 적어도 단기적 관점에서는 -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나 결정적인 사건에서 '개인'이 미치는 영향에는 그리 큰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였던 플루타르코스는 사소한 사건, 말 한마디, 농담 한마디가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경우도 많다고 말한 바 있다. 즉, 한 개인의 사적인 일, 감정변화가 역사적 사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인물의 행동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 포인트는 바로 '질병'이다. 질병은 때때로 역사의 흐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중세 유럽을 휩쓴 페스트는 인구 감소는 물론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쳐  중세의 기본 구조인 봉건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결국 중세의 쇠퇴를 불러왔다. 그밖에도 기원전 430년 아테네를 휩쓴 전염병은 지도자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수많은 아테네인의 희생을 가져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진행과정에 영향을 주었고, 스페인 정복자와 노예들과 함께 아메리카에 건너간 천연두는 토착 문명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듯 역사에서 한 개인, 특히 역사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칠 가능성이 높은 군주와 권력자가 신체적, 정신적인 질병에 걸렸을 경우에 역사의 흐름은 어떻게 뒤바뀔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이 책은 통치자들의 정신병 혹은 비정상적인 성격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20세기 초중반의 정치가, 독재자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들의 행동 사례를 분석하고 있으며,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 편지와 함께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소개함으로써 권력자들을 뒤흔들었던 광기의 진실이 과연 무엇인지 파헤치고 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건강과 정치는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책의 여러 권력자들의 사례를 통해 정치적 행동은 정치적인 고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와 인격의 영향을 받아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과거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배경을 좀더 다각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는 점에서 역사연구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권력자들의 정신 이상에만 촛점을 맞춘 나머지 그들과 관련된 주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관련성이 부족하다던지 권력자들의 다른 업적을 소홀히 하여 자칫 잘못된 인물관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권력자의 정신병이 거의 개인적인 불행에 지나지 않아 그다지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카를로스 2세의 문제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 경우에 있어서 카를로스 2세의 정신적인 문제보다는 '불임'이라는 그의 신체적 문제가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두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랜 근친혼은 유전병을 일으킬 가능성을 높여 결국 카를로스 2세의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져온 것이다. 만약 국왕이 불임만 아니었던들 그가 정신병에 시달렸다는 사실에 상관없이 13년동안 벌어진 참혹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헨리 8세와 표트르 1세의 경우에는 그들의 정신적인 문제와 사생활이 강조된 나머지 훌륭한 업적이 묻혀버린 경우다. 헨리 8세는 튜더왕조의 시조인 헨리 7세의 뒤를 이어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큰 성과를 거둠으로써 장미전쟁으로 흔들린 영국의 왕권을 단단한 기반 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영국의 지위를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나중에 큰 활약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헨리 8세가 미리 구축해놓은 기반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표트르 1세는 러시아의 군주 가운데 유일하게 '대제'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로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었다. 그가 서유럽의 발전된 문물을 배우기 위해 직접 네덜란드의 조선소에서 일했던 사실도 있었을 정도로 러시아의 근대화에 몸소 솔선수범했던 통치자였다. 그리고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발트해로 진출하였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겨 서유럽화를 추구함으로써 러시아를 당당히 유럽 열강의 반열에 세운 공적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 둘은 비록 정신적으로는 큰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국가의 통치에 심각한 해를 끼치지 않았고, 역사적으로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6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왕위에 있었던 조지 3세는 그의 정신병이 역사적 사건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치세에 있었던 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은 사실상 그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이 시기 영국은 수상과 의회에 의해 다스려졌고, 말그대로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 입헌 군주제가 뿌리내린 시절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흥미로운 연구에 지장을 준 것은 사료(史料)의 부족과 편향적이고 불충분한 정보이다. 오늘날에도 정신병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신체적인 질병의 원인을 밝히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 하물며 의학이 오늘날처럼 발전하지 못한 옛날에는 정신 질환이 마법에 걸렸거나 악마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져 그 원인을 밝히기란 더욱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 때문에 '권력자의 광기'의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지만, 결국 추측과 짐작의 수준에 머물 뿐이다.

이 책에는 분명 여러 한계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사건이나 결정에 개인의 욕망이나 질병의 영향이 있을 수 있고, 역사적 사건도 이와 관련있다고 보는 견해는 역사 연구는 물론 오늘날의 정치문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시사점이 될 수 있다. 특히 20세기에 나타난 여러 독재자들에 관한 분석을 통해 그들의 성장과정에 어떠한 일이 있었고, 그 때문에 어떤 성격을 갖게 되었으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풍토는 어떻게 그들을 성장시켰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정치인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좀더 주의를 기울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생각보다 통치자의 정신 건강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나오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지만 권력자들의 정신 질환과 관련된 다양한 사례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비록 지금은 부족한 점들이 있지만 더 많은 사료들이 발견되고 의학과의 연계를 통해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더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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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3 - 최후의 노력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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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의 로마는 유명한 관광지로써 옛 로마 시대의 유물이 많은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다. 마치 도시 전체가 하나의 유물인 것 마냥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유적지 옆을 걸어다닐 것이다. 그리고 로마를 방문한 관광객들은 그 옛날 로마인들이 보고 감탄했을 거대한 경기장과 개선문을 보고 그들과 똑같이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묘하게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광경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강하고 번영했던 역사를 가진 나라의 것이었다 해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유적들을 바라보는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해진다. 이런 훌륭한 문화유산을 가졌던 나라도 결국은 멸망을 맞이하여 그 때의 사람들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텅빈 유적들만 화려했던 과거의 모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시리즈도 막바지에 접어든 로마인 이야기 13권의 내용도 이러한 쓸쓸함이 짙어지고 있다. '최후의 노력'이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번영을 위한 것이 아닌 쇠퇴를 늦추고자 노력하는 로마인들의 노력을 이야기 하고 있다. 284년 황제가 되어 잇따른 황제 암살, 이민족의 침입, 분열 등 로마 역사상 유례없는 국난을 겪었던 '위기의 3세기'를 종식시킨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는 로마인들에게 비교적 평화로웠던 시기였다. 여전히 침략을 반복하긴 했지만 북쪽의 게르만족도 무난히 잘 막아냈고, 동쪽을 위협했던 사산조 페르시아와도 강화가 맺어짐에 따라 이 지역에도 수십년간 평화가 찾아온다. 하지만 외적의 침입과 내정 불안, 그에 따른 경제 위기로 로마 제국은 쇠약해져 있었다. 이 책의 전반부는 제국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혁이 소개되어 있다. 그는 외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대담하게도 동료인 막시미아누스를 동료 황제로 임명한 후 각각 부제를 두게 함으로써 로마 제국을 넷으로 분할한다. 그리고 행정제도를 개편하여 제국을 몇 개의 거대 관구와 속주들로 나누었고, 화폐개혁과 물가대책을 발표한다. 그 많은 일을 어떻게 다 했을까 하고 생각하면 그의 노력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러한 '최후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행정 개혁은 실상 관료제의 비대화로 인해 효율이 떨어졌고, 그에 따라 비용은 늘어났다. 또 양화를 주조하여 화폐가치를 유지하려는 시도도 좌절되었고, '최고 가격령'으로 알려진 물가 통제는 경제활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만 낳았다. 이 책에 나와 있진 않지만 락탄티우스라는 사람의 기록에 따르면 포고가 나온 후 "사람들은 두려워서 시장에 상품을 내놓지 않게 되고 따라서 값은 한층 더 뛰었다."라고 그 당시의 정황을 전하고 있다. 이 법령은 치밀하기 이를 데 없어서 밀, 보리, 호밀, 꿩, 참새 등의 가격까지 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위반자에게는 사형이 적용됐다. 수십년의 군인황제 시기를 거친 뒤 전제화된 황제의 권력이 '개혁의 질'을 떨어뜨린 것이다. 결국 국민들의 세금부담은 늘어났고, 경제력은 약해졌으며, 무엇보다도 로마인에게 '활력'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가 지적한 것처럼 행정개혁으로 인한 민정과 군정의 분리는 다양한 능력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기 어렵게 했다.

결국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 제국의 기본 체제였던 '사두 정치'도 무너지고 만다. 실상 '사두 정치'는 영속적인 지배 시스템이라기 보다는 한시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정제로써 다른 황제들 위에 있을 때는 존속이 가능했지만, 그들의 후계자들에게는 그런 확고한 서열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하지만 실패로 끝났던 많은 개혁이 그러하듯 로마의 '최후의 노력'이란 것도 '의도는 좋았던 실패작'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번 로마인 이야기 주요내용 가운데 하나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이었다면, 나머지 하나는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사에서 기독교는 제국 전반과 후반을 비교할 때 자주 거론되는 것중 하나다. 제국이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기독교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제정 초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기독교가 4세기 초에 이르러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정식으로 공인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세력 확장에 나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에 꿈에서 십자가를 보았다는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가 기독교에 우호적이었고 제국 내 기독교 세력의 확산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후세에 적지 않은 역사가들이 콘스탄티누스의 공헌이 아니었다면 기독교는 교리 논쟁으로 피폐해진 끝에 몰락했을 거라고 말했을 정도라니 말이다.

사실 <교회사>의 저자 에우세비우스가 말한 것처럼 신앙보다 이익을 얻기 위해 입문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성장에는 거품이 끼여 있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지원한 데에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이미 전제군주제가 확립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신의 권위'를 이용한 것이었다. 과거 원수정 시대에 황제의 권위는 원로원과 시민에 의해 공인받는다. 하지만 그들에 의해 권좌에서 끌려내려올 수도 있다. 네로황제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신'은 직접 말하는 법이 없다. 결국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도를 한 편으로 만듦으로써 새로운 권위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그리고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진흥, 이 둘은 분명 별개의 사건이지만 로마사 전체를 볼 때 이 두 황제의 업적은 로마의 전통을 뿌리채 뒤흔들어 놓은 것이란 점에서 비슷한 효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로마사에서 원로원, 로마 시민이란 단어는 낯설게 되었다. 심지어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조차도 그저 제국의 여느 도시 중 하나로 여겨질 뿐이다. 로마는 이제 '모든 길이 하나로 모이는 곳'이 되기는 커녕 더이상 황제의 모습도 보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아마도 로마에 쓸쓸한 그늘이 드리워지게 된 것도 이 때부터가 아닐까? 410년 알라릭에 의해 약탈당하는 치욕을 당할 때까지는 아직도 많은 세월이 남았지만 로마시의 쇠락은 마치 제국의 우울한 모습을 반영하는 듯 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두 황제는 분명 제국의 전성기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하나는 행정 개혁을 통해 효율적인 국가조직을 만드려했고, 다른 하나는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이 두 황제 통치 사이에 6명의 황제가 난립하던 혼란기도 있었지만 외적의 위험은 줄어들고 방어선은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최후의 노력'이란 결국 내리막길에서 속도를 조금 늦추는 것일 뿐이다.

이 책의 중간 부분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이곳 저곳을 찍은 사진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멋있지만 사실 이곳 저곳에서 떼네온 부조로 장식되어 있고, 문 자체는 아예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것이다. 그리고 개선문에는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부조도 있긴 하지만 수준이 이전시대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진다. 5현제 시대에 제작된 부조는 정교하고 세밀하여 매끄럽다는 인상을 주지만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제작된 것은 투박하고 거칠다. 이렇게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부조를 보고 있자니 마치 이 유적 자체가 점점 활력을 잃어가고 있는 당대의 로마인들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제 로마는 옛 추억을 간직한 채 점점 세월에 마모되는 유적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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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바시스
크세노폰 지음, 천병희 옮김 / 단국대학교출판부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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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401년 9월 바빌론에서 북쪽으로 약 100마일 정도 떨어진 쿠낙사 평원...

자신들 앞을 가로막던 페르시아군을 멀리 쫓아내고 돌아온 그리스 용병들 앞에는 처참하게 파괴된 진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뒤 그들은 그들이 따르던 페르시아 왕자 키로스가 전투 중에 전사했으며, 살아 남은 병사들은 죄다 페르시아 왕에게 항복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게다가 주위에는 온통 페르시아군이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지리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그리스 용병들은 적국 한가운데에 고립된 것이다!!

이들이 그리스를 떠나 머나먼 페르시아 내륙으로 진군하게 된 것은 페르시아의 왕위계승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기원전 402/1년 페르시아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아우 키로스는 자신에게 앙심을 품은 카리아의 태수 티사페르네스의 모함으로 체포됐다가 간신히 풀려난 뒤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품게 된다. 그래서 그는 휘하의 페르시아인 이외에 그리스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소아시아를 떠나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한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아나바시스>는 '올라가기'라는 뜻인데, 이는 저지대인 소아시아 해안에서 고지대인 메소포타미아로 그리스인들이 지나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비록 전투에서 우익을 맡았던 그리스 용병들이 자신들과 맞서던 페르시아 군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중앙에서 지휘하던 키로스가 전사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설상가상으로 그리스군 지휘관들이 협상차 티사페르네스를 찾아갔다가 모두 처형되자 병사들은 더욱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리스 용병들은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고, 여기서 이 책의 저자인 크세노폰이 새로운 지휘관이 된다. 아나바시스는 바로 그리스 용병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기록한 글이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 있진 않지만 사실 아나바시스는 서구에선 지휘관, 더 나아가 지도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고전이다. 그 이유는 책 곳곳에 드러나 있는 연설 때문이다. 병사들의 합의로 지휘관으로 선출된 만큼 크세노폰은 자기 맘대로 부하들을 다룰 수 없었다. 그래서 '명령'보다는 '설득'으로 병사들을 이끌어야 했고, 그 때문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크세노폰은 논리정연한 연설을 통해 그들을 설득해 나갔다(크세노폰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한 병사가 그를 고소한 일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관계가 엄격한 상하관계가 아니었던 듯하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용병들 간의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사실 설득을 통해 부하들을 이끄는 것도 지휘관의 능력이다. 30년 전쟁 초기에 맹활약했던 스웨덴의 왕이자 위대한 장군이었던 구스타프 아돌프 2세가 이 책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도, 저명한 군사학자인 리델 하트가 아나바시스를 "모든 군사저술 가운데 최고의 책"이라 극찬한 것도 이런 점에 주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용병들이 페르시아의 중재 제의를 거부하고 후퇴하기 시작했지만 돌아가는 길은 정말 험난했다. 사실 페르시아 군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이 별로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인들은 정면으로 그들을 상대하지 못했다. 문제는 그리스인들에게 적대적이었던 부족들이었다. 광활한 페르시아 제국 내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있었고, 페르시아 정부도 그들을 일일이 통제하지 못했다. 여러 부족들과의 전투로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서도 마침내 그리스 용병들은 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시인 트라페주스에 도착했다. 아나바시스에는 그동안 그리스인들이 만났던 부족들의 풍습이 기록되어 있어 페르시아 내 이민족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리스 용병들은 같은 그리스인들의 도시에서도 냉대를 받는 등 위험에서 상당히 벗어난 뒤에도 고난은 계속됐다. 오늘날의 이스탄불인 비잔티움에서 그들은 시내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허용되지 않았고, 트라키아의 왕자 세우테스에게 고용되어 싸웠지만 급료도 제대로 받지 못해 끈질기게 협상을 벌인 적도 있었다. 기원전 399년 3월 그리스 용병들은 페르시아의 태수 티사페르네스와 파르나바조스를 공격하기로 결정한 스파르타 장군 티브론의 휘하에 들어감으로써 그들의 고단한 여정은 마침내 끝이 난다.

사실 아나바시스는 딱히 장르를 구분하기 어려운 책이다. 서기 1세기의 웅변가 겸 철학자인 크뤼소스토모스는 웅변가가 되려는 사람은 <아나바시스>를 읽을 것을 권하면서 그 이유로 이 책에는 정치가가 행하게 될 온갖 종류의 연설이 들어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또한 명료한 문체와 세련된 아티카 방언 때문에 문학적 가치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크세노폰은 이 책을 회고록 혹은 자서전으로 쓴 듯하지만 내용을 보면 여행기, 지리서, 역사서의 성격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오늘날의 사람들은 기원전 5세기 말의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과 군사제도 그리고 크세노폰의 생애에 관해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이보다도 훨씬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끝도 없이 펼쳐진 대제국 페르시아 한복판으로부터 한줌도 안되는 그리스인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생각보다 페르시아가 허약하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비록 티사페르네스가 이오니아 지역의 그리스계 폴리스에 즉각 페르시아에 복종할 것을 명령하긴 했지만, 이미 상대의 허약함이 드러난 이상 그리스인들은 이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 기원전 399년 봄 용병들을 받아들여 세를 불린 티브론의 군대 지휘권을 가을에 스파르타에서 온 데르퀼리다스가 인수했고, 기원전 396년에는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가 군대를 장악하여 페르시아 태수의 통치령 곳곳을 습격했다. 그로부터 2년 후 페르시아는 크니도스 해전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하여 에게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이후 '안탈키다스의 평화' 로 불리는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페르시아의 힘이 예전같지 않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이 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아나바시스>에 기술된 사건들이 있은 지 20년 뒤 아테네의 웅변가 이소크라테스는 전 그리스가 연합하여 페르시아를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고, 결국 이 염원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실현된다. 물론 아나바시스에는 이소크라테스가 주장한 '범그리스주의'가 확실히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크세노폰의 이 책은 그의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 결국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을 이끌어냈다. 서기 2세기 로마의 역사가 아르리아누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을 기술한 책에 <아나바시스>란 제목을 부친 것도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가  후세 사람들에게 상당히 인상적인 것이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책의 장르가 확실치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분야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 나오는 연설이 인상적이었다. 이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으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웅변은 정말 중요한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위기적 상황에서는 정확한 상황 판단과 함께 이를 납득시킬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하지만 그런 때가 아니더라도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나 대표는 독단적인 방법이 아니라 공정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주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고 이끌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이상적인 정치가 혹은 경영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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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왕실의 탄생 살림지식총서 86
김현수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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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살고 있는 요즘에도 가만히 따져보면 아직도 왕국이 꽤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의 왕실은 국가의 상징으로만 존재하지만 왕실 가족의 삶은 여전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예전의 다이애나 비나 최근에 평민과 결혼한 왕자들의 뉴스가 왕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말이다. 여러 왕실 중에서도 영국 왕실은 오늘날 가장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데 비단 윈저공과 심프슨 부인의 로맨스나 다이애나 비의 비극적인 최후를 제외하더라도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된 왕실이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유럽 왕실의 탄생'이지만 실상 '영국 왕실의 탄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할 정도로 영국 왕실의 정통성에 대해 논하고 있다. 저자는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1066년 영국 왕실의 탄생 시점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잉글랜드에는 왕국이 있었다. 그것도 한때는 7개씩이나 말이다. 그리고 북쪽에는 섬의 원주민인 켈트족이 세운 스코틀랜드 왕국도 있었다. 그런데 왜 저자는 브리튼에 살던 켈트족이나 앵글로 색슨족도 아닌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 온 노르만족의 왕조를 정통 영국 왕실로 보고 있을까?

우선 저자는 왕실 성립의 3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통치조직의 중심이 되는 왕과 왕실, 두번째는 봉건제 그리고 마지막은 로마 카톨릭이다. 우선 유럽 대륙의 국가인 프랑스의 카페 왕조와 독일의 작센 왕조는 이 전제조건에 부합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은 이들 왕실과 다른점이 있었다. 전통에 따라 국왕은 위테나게모트라 불린 평의회에서 선출된 권력이 제한된 통치자였다. 따라서 대륙 출신인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함으로써 유럽 왕실의 정통성을 영국에 뿌리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노르만 왕조가 영국 정통 왕실의 시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책은 영국 왕실의 정통성에 대해 논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뿌리 깊은 영국 왕실의 기원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헤이스팅스 전투의 배경과 전개 과정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곳곳에 있는 삽화와 함께 읽는 맛을 더해주고 있다. 다만 95페이지 밖에 안되는 작은책에서 영국 왕실의 정통성의 기원에 대한 논의보다는 헤이스팅스 전투 자체에 너무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또한 왕실 성립의 전제조건이 왜 그렇게 정해졌는지에 대한 배경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적은 분량의 책이지만 여전히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영국 왕실의 탄생에 대해 알찬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전쟁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헤이스팅스 전투의 전개 과정을 묘사한 '바이외의 테피스트리'의 삽화가 전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유럽 왕실로써의 영국 왕실의 근원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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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29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