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3 - 최후의 노력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날의 로마는 유명한 관광지로써 옛 로마 시대의 유물이 많은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다. 마치 도시 전체가 하나의 유물인 것 마냥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유적지 옆을 걸어다닐 것이다. 그리고 로마를 방문한 관광객들은 그 옛날 로마인들이 보고 감탄했을 거대한 경기장과 개선문을 보고 그들과 똑같이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묘하게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광경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강하고 번영했던 역사를 가진 나라의 것이었다 해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유적들을 바라보는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해진다. 이런 훌륭한 문화유산을 가졌던 나라도 결국은 멸망을 맞이하여 그 때의 사람들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텅빈 유적들만 화려했던 과거의 모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시리즈도 막바지에 접어든 로마인 이야기 13권의 내용도 이러한 쓸쓸함이 짙어지고 있다. '최후의 노력'이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번영을 위한 것이 아닌 쇠퇴를 늦추고자 노력하는 로마인들의 노력을 이야기 하고 있다. 284년 황제가 되어 잇따른 황제 암살, 이민족의 침입, 분열 등 로마 역사상 유례없는 국난을 겪었던 '위기의 3세기'를 종식시킨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는 로마인들에게 비교적 평화로웠던 시기였다. 여전히 침략을 반복하긴 했지만 북쪽의 게르만족도 무난히 잘 막아냈고, 동쪽을 위협했던 사산조 페르시아와도 강화가 맺어짐에 따라 이 지역에도 수십년간 평화가 찾아온다. 하지만 외적의 침입과 내정 불안, 그에 따른 경제 위기로 로마 제국은 쇠약해져 있었다. 이 책의 전반부는 제국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혁이 소개되어 있다. 그는 외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대담하게도 동료인 막시미아누스를 동료 황제로 임명한 후 각각 부제를 두게 함으로써 로마 제국을 넷으로 분할한다. 그리고 행정제도를 개편하여 제국을 몇 개의 거대 관구와 속주들로 나누었고, 화폐개혁과 물가대책을 발표한다. 그 많은 일을 어떻게 다 했을까 하고 생각하면 그의 노력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러한 '최후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행정 개혁은 실상 관료제의 비대화로 인해 효율이 떨어졌고, 그에 따라 비용은 늘어났다. 또 양화를 주조하여 화폐가치를 유지하려는 시도도 좌절되었고, '최고 가격령'으로 알려진 물가 통제는 경제활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만 낳았다. 이 책에 나와 있진 않지만 락탄티우스라는 사람의 기록에 따르면 포고가 나온 후 "사람들은 두려워서 시장에 상품을 내놓지 않게 되고 따라서 값은 한층 더 뛰었다."라고 그 당시의 정황을 전하고 있다. 이 법령은 치밀하기 이를 데 없어서 밀, 보리, 호밀, 꿩, 참새 등의 가격까지 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위반자에게는 사형이 적용됐다. 수십년의 군인황제 시기를 거친 뒤 전제화된 황제의 권력이 '개혁의 질'을 떨어뜨린 것이다. 결국 국민들의 세금부담은 늘어났고, 경제력은 약해졌으며, 무엇보다도 로마인에게 '활력'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가 지적한 것처럼 행정개혁으로 인한 민정과 군정의 분리는 다양한 능력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기 어렵게 했다.

결국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 제국의 기본 체제였던 '사두 정치'도 무너지고 만다. 실상 '사두 정치'는 영속적인 지배 시스템이라기 보다는 한시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정제로써 다른 황제들 위에 있을 때는 존속이 가능했지만, 그들의 후계자들에게는 그런 확고한 서열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하지만 실패로 끝났던 많은 개혁이 그러하듯 로마의 '최후의 노력'이란 것도 '의도는 좋았던 실패작'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번 로마인 이야기 주요내용 가운데 하나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이었다면, 나머지 하나는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사에서 기독교는 제국 전반과 후반을 비교할 때 자주 거론되는 것중 하나다. 제국이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기독교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제정 초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기독교가 4세기 초에 이르러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정식으로 공인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세력 확장에 나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에 꿈에서 십자가를 보았다는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가 기독교에 우호적이었고 제국 내 기독교 세력의 확산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후세에 적지 않은 역사가들이 콘스탄티누스의 공헌이 아니었다면 기독교는 교리 논쟁으로 피폐해진 끝에 몰락했을 거라고 말했을 정도라니 말이다.

사실 <교회사>의 저자 에우세비우스가 말한 것처럼 신앙보다 이익을 얻기 위해 입문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성장에는 거품이 끼여 있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지원한 데에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이미 전제군주제가 확립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신의 권위'를 이용한 것이었다. 과거 원수정 시대에 황제의 권위는 원로원과 시민에 의해 공인받는다. 하지만 그들에 의해 권좌에서 끌려내려올 수도 있다. 네로황제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신'은 직접 말하는 법이 없다. 결국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도를 한 편으로 만듦으로써 새로운 권위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그리고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진흥, 이 둘은 분명 별개의 사건이지만 로마사 전체를 볼 때 이 두 황제의 업적은 로마의 전통을 뿌리채 뒤흔들어 놓은 것이란 점에서 비슷한 효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로마사에서 원로원, 로마 시민이란 단어는 낯설게 되었다. 심지어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조차도 그저 제국의 여느 도시 중 하나로 여겨질 뿐이다. 로마는 이제 '모든 길이 하나로 모이는 곳'이 되기는 커녕 더이상 황제의 모습도 보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아마도 로마에 쓸쓸한 그늘이 드리워지게 된 것도 이 때부터가 아닐까? 410년 알라릭에 의해 약탈당하는 치욕을 당할 때까지는 아직도 많은 세월이 남았지만 로마시의 쇠락은 마치 제국의 우울한 모습을 반영하는 듯 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두 황제는 분명 제국의 전성기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하나는 행정 개혁을 통해 효율적인 국가조직을 만드려했고, 다른 하나는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이 두 황제 통치 사이에 6명의 황제가 난립하던 혼란기도 있었지만 외적의 위험은 줄어들고 방어선은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최후의 노력'이란 결국 내리막길에서 속도를 조금 늦추는 것일 뿐이다.

이 책의 중간 부분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이곳 저곳을 찍은 사진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멋있지만 사실 이곳 저곳에서 떼네온 부조로 장식되어 있고, 문 자체는 아예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것이다. 그리고 개선문에는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부조도 있긴 하지만 수준이 이전시대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진다. 5현제 시대에 제작된 부조는 정교하고 세밀하여 매끄럽다는 인상을 주지만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제작된 것은 투박하고 거칠다. 이렇게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부조를 보고 있자니 마치 이 유적 자체가 점점 활력을 잃어가고 있는 당대의 로마인들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제 로마는 옛 추억을 간직한 채 점점 세월에 마모되는 유적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