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광기 - 왕들의 광기는 역사에 무엇을 남겼는가?
비비안 그린 지음, 채은진 옮김 / 말글빛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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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이 책은 두가지 면에서 여타 역사책보다 흥미롭다. 서론에서 볼 수 있듯이 대다수의 역사가들은 역사의 발전과정을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사건에 촛점을 두는 경우가 많은데, 저자는 '군주'의 '질병'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역사란 인간 사이에서 발생한 일이 주된 소재가 되므로 역사의 흐름에 있어 인간은 - 적어도 단기적 관점에서는 -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나 결정적인 사건에서 '개인'이 미치는 영향에는 그리 큰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였던 플루타르코스는 사소한 사건, 말 한마디, 농담 한마디가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경우도 많다고 말한 바 있다. 즉, 한 개인의 사적인 일, 감정변화가 역사적 사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인물의 행동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 포인트는 바로 '질병'이다. 질병은 때때로 역사의 흐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중세 유럽을 휩쓴 페스트는 인구 감소는 물론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쳐  중세의 기본 구조인 봉건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결국 중세의 쇠퇴를 불러왔다. 그밖에도 기원전 430년 아테네를 휩쓴 전염병은 지도자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수많은 아테네인의 희생을 가져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진행과정에 영향을 주었고, 스페인 정복자와 노예들과 함께 아메리카에 건너간 천연두는 토착 문명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듯 역사에서 한 개인, 특히 역사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칠 가능성이 높은 군주와 권력자가 신체적, 정신적인 질병에 걸렸을 경우에 역사의 흐름은 어떻게 뒤바뀔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이 책은 통치자들의 정신병 혹은 비정상적인 성격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20세기 초중반의 정치가, 독재자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들의 행동 사례를 분석하고 있으며,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 편지와 함께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소개함으로써 권력자들을 뒤흔들었던 광기의 진실이 과연 무엇인지 파헤치고 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건강과 정치는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책의 여러 권력자들의 사례를 통해 정치적 행동은 정치적인 고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와 인격의 영향을 받아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과거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배경을 좀더 다각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는 점에서 역사연구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권력자들의 정신 이상에만 촛점을 맞춘 나머지 그들과 관련된 주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관련성이 부족하다던지 권력자들의 다른 업적을 소홀히 하여 자칫 잘못된 인물관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권력자의 정신병이 거의 개인적인 불행에 지나지 않아 그다지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카를로스 2세의 문제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 경우에 있어서 카를로스 2세의 정신적인 문제보다는 '불임'이라는 그의 신체적 문제가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두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랜 근친혼은 유전병을 일으킬 가능성을 높여 결국 카를로스 2세의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져온 것이다. 만약 국왕이 불임만 아니었던들 그가 정신병에 시달렸다는 사실에 상관없이 13년동안 벌어진 참혹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헨리 8세와 표트르 1세의 경우에는 그들의 정신적인 문제와 사생활이 강조된 나머지 훌륭한 업적이 묻혀버린 경우다. 헨리 8세는 튜더왕조의 시조인 헨리 7세의 뒤를 이어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큰 성과를 거둠으로써 장미전쟁으로 흔들린 영국의 왕권을 단단한 기반 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영국의 지위를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나중에 큰 활약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헨리 8세가 미리 구축해놓은 기반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표트르 1세는 러시아의 군주 가운데 유일하게 '대제'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로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었다. 그가 서유럽의 발전된 문물을 배우기 위해 직접 네덜란드의 조선소에서 일했던 사실도 있었을 정도로 러시아의 근대화에 몸소 솔선수범했던 통치자였다. 그리고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발트해로 진출하였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겨 서유럽화를 추구함으로써 러시아를 당당히 유럽 열강의 반열에 세운 공적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 둘은 비록 정신적으로는 큰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국가의 통치에 심각한 해를 끼치지 않았고, 역사적으로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6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왕위에 있었던 조지 3세는 그의 정신병이 역사적 사건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치세에 있었던 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은 사실상 그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이 시기 영국은 수상과 의회에 의해 다스려졌고, 말그대로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 입헌 군주제가 뿌리내린 시절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흥미로운 연구에 지장을 준 것은 사료(史料)의 부족과 편향적이고 불충분한 정보이다. 오늘날에도 정신병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신체적인 질병의 원인을 밝히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 하물며 의학이 오늘날처럼 발전하지 못한 옛날에는 정신 질환이 마법에 걸렸거나 악마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져 그 원인을 밝히기란 더욱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 때문에 '권력자의 광기'의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지만, 결국 추측과 짐작의 수준에 머물 뿐이다.

이 책에는 분명 여러 한계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사건이나 결정에 개인의 욕망이나 질병의 영향이 있을 수 있고, 역사적 사건도 이와 관련있다고 보는 견해는 역사 연구는 물론 오늘날의 정치문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시사점이 될 수 있다. 특히 20세기에 나타난 여러 독재자들에 관한 분석을 통해 그들의 성장과정에 어떠한 일이 있었고, 그 때문에 어떤 성격을 갖게 되었으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풍토는 어떻게 그들을 성장시켰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정치인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좀더 주의를 기울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생각보다 통치자의 정신 건강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나오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지만 권력자들의 정신 질환과 관련된 다양한 사례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비록 지금은 부족한 점들이 있지만 더 많은 사료들이 발견되고 의학과의 연계를 통해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더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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