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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살림지식총서 38
윤진 지음 / 살림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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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이라는 용어는 19세기 독일의 역사가인 드로이젠이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이후, 최초의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마지막 헬레니즘 왕국인 이집트를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던 대략 300년 정도의 시기를 '헬레니스무스(Hellenismus)', 즉 '그리스화'라고 표현하면서 나타났다. 이 기간 동안에 그리스인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등 예전의 페르시아 영토 전역을 포괄하는 지역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며, 그리스 문화가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산되었던 시기였다.

사실 우리가 헬레니즘이라는 말은 그저 학교에서 세계사 시간에 들은 것 이외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헬레니즘 시대는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헬레니즘 시대는 국제적인 문화가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즉 세계인이 나타난 시대로서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과 가장 유사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근거로서 오늘날 영어가 널리 통용되는 것과 같이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어가 그리스 지역뿐만 아니라 저 멀리 인도에서까지 쓰이고 있음을 말해준다. 언어의 전파는 그 언어권의 문화도 함께 전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한 왕은 그리스어로 쓴 비문을 남겼다. 그리고 불교문학의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은 《밀린다판하 Milindapah》의 한역본(漢譯本)으로, 이것은 박트리아의 왕 메난도로스(밀린다)와 불교승(佛敎僧)인 나가세나(나선)가 불교 교리를 플라톤식 문답형식으로 논한 경전(經典)형태의 것으로, 그리스문화 ·불교의 접촉이 밀접하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조각하는 경향이 있었던 그리스 인의 문화가 간다라 미술을 발전시켜 인도로 전해졌으며, 그 영향은 우리나라에까지 미쳤다. 우리나라의 불상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리스 문화가 멀리 퍼지면서 동시에 근동의 여러 문명도 다양한 정도로 그리스 문명에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의 수많은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당시도 그리스 문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가 접목되어 헬레니즘은 좀더 풍요로운 문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 책을 보면 서구 문명과 크리스트교의 상당 부분이 잠식되어 있는 우리 사회도 헬레니즘 문명과 그리 낯선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초기 크리스트교는 보편적 성향의 헬레니즘 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신학자 폴 틸리히가 '헬레니즘 사상이 대부분의 크리스트교 사상의 직접적 원천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헬레니즘은 서구의 보편적 세계관과 철학, 종교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사상은 오늘날 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헬레니즘 시대는 현대 사회에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는 '세계적 규모의 사회, 경제, 문화 네트워크'가 가장 먼저 나타난 시기이다. 저자는 헬레니즘을 알게 됨으로써 '고립된 지역주의'에서 벗어나 '연결된 세계'로 나가는 데 필요한 지침에 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이 본 세계는 현재보다는 분명히 작았지만, 먼 옛날에 오늘날과 유사했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좀더 활력있고 역동적인 세계문화가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며, 우리나라도 좀더 다른 문화에 포용력을 갖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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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의 왕 아틸라 역사 명저 시리즈 10
패트릭 하워스 지음, 김훈 옮김 / 가람기획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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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에 대한 무지함은 커다란 편견을 낳을 수 있다. 비록 그것에 대해 약간의 정보는 갖고 있더라도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 잘못된 정보를 저항없이 받아들인 경우에 편견은 더욱 굳어지게 된다. 서기 5세기 초 유럽을 황색 공포로 물들인 훈족은 무려 1500년 동안이나 온갖 중상과 편견에 휩싸여 제 모습을 알 수 없었던 민족이었다. 당시 오늘날의 헝가리에 해당하는 다뉴브 강 동쪽에 근거지를 둔 훈족은 로마제국과 여러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용맹을 과시하여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래서 후에 보불전쟁(1870~1871)과 제1차세계대전(1914~1918) 당시 프랑스인들은 적인 독일인들을 '훈족'이라 부를 정도로 훈족은 유럽인들에게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었다.

동서로 나뉘어져 있던 과거 막강했던 로마제국조차도 훈족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해마다 공물을 바쳤을 정도로 훈족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훈족이 가장 강력했던 때가 바로 아틸라가 왕이었던 시기였다. 아틸라의 통치기간은 불과 8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훈족은 콘스탄티노플 근처까지 육박하여 동로마인들을 공황상태에 빠뜨렸고, 이어 아틸라는 갈리아에 침입하여 오를레앙과 카탈루냐에서 로마인과 게르만인들과 싸웠다. 특히 카탈루냐 전투는 세계15대 전투 중 하나로 볼가강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모든 민족이 포함된 대규모 국제전이었다. 그 후 아틸라는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롬바르디아의 여러 도시들을 함락시켰다.(특히 아퀼레이아 공방전 당시 시민들이 반도 북동쪽의 바닷가로 도망가 도시를 세웠는 데, 바로 그 도시가 베네치아다) 이렇게 유럽을 종횡무진하며 휩쓰는 아틸라를 유럽인들은 '신이 내린 재앙'으로 불렀다. 하지만 아틸라가 죽은 뒤 훈족은 여러 세력으로 나뉘고 로마인과 게르만인의 공격을 받아 뿔뿔히 흩어진 후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지게 된다.

아틸라의 별명에서 알 수 있다시피 유럽인들은 훈족을 두려워 했고 그 공포는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아틸라가 미친 영향은 후세의 문학작품에도 이어져 게르만족의 전설인 '니벨룽겐의 노래'나 여러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며 근대에 이르러서는 베르디의 오페라 '아틸라', 리스트의 오페라 '훈족의 전쟁'에서 비극의 주인공이나 용맹스런 왕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또 그 밖에도 다수의 연극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렇게 훈족과 아틸라에 대한 작품들은 다양했지만, 유럽인들은 훈족의 참모습은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훈족은 공포의 대상이자 경멸의 대상이었고, 아틸라는 피에 굶주린 폭군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틸라는 동로마 황제가 보낸 자객을 잡은 후 그냥 돌려보낼 정도로 너그럽고 대범한 면도 있는 사람이었다. 또 훈족이 등자의 보급에 기여하여 기마술의 발달에 큰 공헌을 했다는 점도 인정되어야 한다. 사실 유럽에 공포를 불러일으킨 민족은 훈족뿐만이 아니었다. 북유럽의 근거로 하여 유럽 전역에 침입한 노르만족과 동유럽을 휩쓴 마자르족이 오히려 유럽에 더 큰 피해를 끼쳤다. 이렇게 훈족은 짧은 기간 활약했다가 역사에서 사라져 버려 참모습을 알기 어려웠고, 그것은 훈족에 대한 커다란 편견을 갖게 하였다.

저자는 훈족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분석하여 훈족이 피에 굶주린 잔혹한 민족으로 묘사하는 서구인의 편견을 거부하고, 훈족이라는 민족이 유럽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 균형있는 입장을 갖도록 하고 있다. 또 저자는 아틸라의 군사적인 업적 이외에도 그의 가족들의 모습과 여러 왕족 여성과의 로맨스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일반 대중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서술 방식에 재미까지 갖춰 부담없이 읽어내려가는 동안 어느새 훈족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있도록 함으로써 역사를 보는 올바른 시각까지 가질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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