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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4 - 그리스도의 승리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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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권의 목차를 보면 이 책의 구성이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2부까지는 전편과 마찬가지로 황제들을 기준으로 나뉘어졌지만 3부는 일개 성직자가 이들을 제치고 이야기의 한 가운데에 나선 것이다. 바로 겉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그 주인공이다. 그가 주교로 있던 23년 동안 교회에 군림하며 어떻게 황제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 결과 로마제국은 어떤 모습으로 변모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번 권의 주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이 시기에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가운데 기독교의 세력이 제국 내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기 4세기는 대세의 향방이 외줄타기를 하다가 마침내 한쪽으로 기울게 되는 전환점이 된 시기였다. 물론 이 책에서 소용돌이의 중심은 기독교회라 할 수 있지만 정치, 사회, 문화 다방면에서 변화를 겪고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이 후기 로마제국의 성격을 규정지었다고 볼 수 있다. 변화의 원인을 간단히 말하자면 외적으론 게르만족의 대이동 그리고 내적으론 기독교의 세력 확대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게르만족의 이동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제정 이후 로마와 게르만족 사이에 접촉이 늘어나 한편으로는 전쟁을 다른 한편으로는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변화가 있긴 했지만 중기까지는 어느 수위에서 균형을 이루었고 근본적인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위기의 3세기'를 거치면서 마침내 게르만족은 제국 깊숙히 침공하는데 성공했고, 로마가 이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황제의 전제군주화, 자영농의 농노화, 군대의 게르만화 그리고 제국의 분할 통치 등 제국 후기에 나타난 주요 변화들은 게르만족의 침입과 관련이 있었다. 계속해서 가해지는 게르만족의 압력에 제국이 마침내 손을 들기 시작한 것이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이다. 서고트족에게 대패하고 발렌스 황제마저 전사했을 정도로 큰타격을 입은 로마는 결국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고트족의 이주를 허용함으로써 쇠퇴에 가속도가 붙었다. 이제 로마는 게르만족을 몰아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테오도시우스는 기독교를 제국의 국교로 정한 황제다. 기독교도가 되면 황제조차도 교회의 간섭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암브로시우스는 유능한 자였기에 이 때에 이르러 기독교의 세력이 타종교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 밀라노 주교가 황제가 잘못을 저질렀다며 용서를 빌라고 요구하면서 테오도시우스를 교회 앞에 세워놓고 기다리게 했던 사건은 중세에 있었던 '카노사의 굴욕'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책에는 시대의 흐름에 맞섰던 인물들도 있다. 바로 율리아누스 황제와 수도장관을 역임한 심마쿠스가 그들이다. 각각 '배교자'와 '이교 로마의 자랑스러운 마지막 불꽃'이라는 말을 들은 것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당시 시대상의 변화에 굴하지 않고 전통을 지키려 노력했다. 과거 '로마다움'을 상징하는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와중에 사람이라고 변하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조차도 불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소신을 지킨 이들이 있어 역시 정체성이란 것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율리아누스는 14권에서 제일 매력적인 인물이다.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올바른 정신과 철학적 사고력, 자제심을 유지했고 막판에 큰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군사적 재능도 가진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군주였다. 애초부터 기독교도가 아니었던 그에게 '배교자'라는 경멸스런 별명은 사실도 아닐 뿐더러 그의 업적까지도 무시해버린 잘못된 호칭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사람들의 마지막을 담담히 소개하고 있다. 397년 암브로시우스가 기독교의 기반을 단단히 다진 후 눈을 감았고, 그와 논쟁을 펼치며 역사에 이름을 남긴 심마쿠스 또한 5년 뒤 생을 마쳤다. 새로운 시대의 막이 올랐지만 활력보다는 애수가 더 느껴지는 결말이다. 이미 황혼기에 들어선 로마제국의 운명을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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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인 스파르타인 살림지식총서 173
윤진 지음 / 살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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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오늘날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라이벌 도시로 여겨지고 있다. 아테네는 그리스 문명의 전성기인 기원전 5세기부터 4세기 후반까지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이 도시는 그리스 전역에서 온 재능있는 예술가와 학자들로 붐볐다.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누리고 있었으며 시민들의 지적수준도 높았기 때문에 문학,건축,예술, 철학 등 다방면에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이상적인 도시인 아테네는 과연 그리스의 학교라고 불리기에 손색없는 도시였다. 한편 고대 그리스인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도시국가인 스파르타에 대해서도 하나의 기준이자 모범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이 뛰어나고 소박한 생활방식을 영위했던 스파르타인들은 다른 그리스인들의 눈에 이상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발전해 나갔던 두 도시의 역사를 비교해 보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여러 분야에서 이렇게까지 딱 맞춘듯 대조되는 나라는 동서양을 통틀어 흔히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책 후반부에는 이 두 라이벌 도시의 주요 인물들도 비교하고 있는데 이들의 일생도 마치 도시의 특성을 반영한 듯한 삶을 살았다는 인상을 준다. 특히 두 도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솔론과 뤼쿠르고스의 비교는 눈여겨 볼 만하다. 이 둘은 각각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지도자로서 민주정과 과두정(형식적으로는 군주정이었지만) 체제의 토대를 쌓았는데 그 과정에서 법과 제도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원전 8~6세기 인구증가에 따른 사회불안이 그리스 전역에 만연했는데 위기와 발전이 공존하고 있던 이 시기에 두 지도자의 합리적이고 정교한 개혁 덕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다른 도시보다 앞서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먼 과거의 일이지만 오늘날을 사는 우리도 주목해야 할 점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교육은 두도시가 추구하고 있는 이념을 반영하고 그에 걸맞는 인간을 기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일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테네는 민주정치가 발달된 나라로 공적인 자리에서 행해지는 연설과 글에서의 수사법은 출세하고자 하는 시민들에게 필수적인 수사법이었다. 이 책에는 아테네의 대정치가이자 명연설가였던 페리클레스에 대한 일화가 있다. 페리클레스 시대에 만들어졌던 희곡작품에선 그에 대해 혀 끝으로 무서운 천둥을 일으킨다고 표현되어있으며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묘사도 있다. 레슬링경기에서 그(페리클레스)를 넘어뜨려도 그는 넘어진 일이 없다고 증명하여, 구경꾼들로 하여금 자기 눈을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그의 말을 믿게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묘사는 페리클레스에 대한 최고의 찬사이기도 하지만 수사학자들이 난립했던 아테네의 상황에 대한 풍자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반면 스파르타의 교육은 ''스파르타식 교육''이라는 말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데 아테네의 교육이 유려한 연설실력을 갖추는 수사학이 중시되었다면 스파르타의 교육은 오직 시민을 뛰어난 전사로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는 스파르타의 사회 구성때문에 소수의 지배층인 스파르타 시민이 다수의 피지배층인 헤일로타이를 통제하기 위해서였는데 이 때문에 다른 도시국가들과 달리 철저히 공교육이 이루어졌다. 훈련과정은 오늘날의 군대처럼 육체적 훈련과 함께 국가에 대한 복종심과 충성심을 주입시켰다. 7세부터 30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민들이 병영에서 함께 식사하고 잠을 자면서 지내야 했으니 동시대의 그리스인들 눈에도 특이하게 보였을 것이다.

비록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결국 나머지 도시국가들과 함께 두도시도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인들이 자신들의 도시에 대해 가졌던 자부심은 대단했다.

<우리의 정체는 이웃의 관례를 따르지 않고, 남의 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들의 규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 명칭도, 정치 책임이 소수자에 있지 않고 다수자 사이에 골고루 나뉘어 있기 때문에 민주정치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대, 지나가는 이여. 가서 라케다이몬 사람들에게 우리가 조국의 명령에 복종하여 여기 누워있노라고 전해주오>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추도연설의 일부인 윗글과 페르시아 전쟁당시 테르모필레에서 끝까지 페르시아군을 막다 전멸한 스파르타인을 위해 세워진 비석에 새겨진 아랫글은 두도시의 성격과 함께 그들의 자부심이 잘 나타나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나라가 번영하기 위해 어떤 정체를 택해야 하는지도 중요하지만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우리사회에 정치를 비롯해 사회 곳곳에 대한 다소 냉소적인 시각이 만연해있는데 그보다는 애정어린 비판과 반성 그리고 자부심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하고 책을 덮으며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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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읽는 부의 세계사 - 카이사르에서 빌 게이츠까지,부의 탄생과 몰락을 한눈에 읽는다
데틀레프 귀르틀러 지음, 장혜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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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돈이 발명된 곳은 기원전 7세기 소아시아의 리디아였다. 그 이전에는 시장에서 물물 교환을 하거나 금이나 곡식을 가지고 물건을 샀다. 하지만 돈이 발명되고 일단 신뢰를 얻기 시작하자 그것은 전세계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쩌면 평생 한번도 보지 못했을 리디아의 왕이 엄청난 부자일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리디아왕 크로이소스는 그렇게 부자로서 처음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역사상 최고의 부자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부를 쌓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동시대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재산을 모았고, 끊임없는 노력과 모험가적 기질을 발휘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과정에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수천년에 이르는 역사를 이끌어온 원동력은 다양한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군대를 이끌고 사방을 휩쓴 정복자들이 있고, 불시에 들이닥친 홍수와 지진, 전염병도 있고, 상품을 싣고 사막과 바다를 건넌 상인도 있었다. 「이야기로 읽는 부의 세계사」는 돈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앞서 크로이소스 왕의 예로 알수 있듯 초기의 최고 부자들은 권력자 들이 었다. 이집트의 파라오와 로마의 카이사르처럼 권력의 힘으로 재산을 끌어 들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부는 권력을 쥐고 있는 이상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었다. 이 시절의 부자들은 자기 '본업'에만 충실해도 부자가 될 수 밖에 없던 권력자 들이었다.

부자들이 진정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았던 것은 '상인의 시대' 이후이다. 야코프 푸거와 로트실트 가문과 같은 대부호는 돈을 버는것 보다 쓰는 것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이들의 사업 상대는 군주와 국가였다. 야코프 푸거는 신성 로마황제 카를 5세에게 빌린 돈을 갚으라는 재촉을 하면서 '제가 없었더라면 폐하께서 로마 제국의 왕관을 얻지 못하셨을 겁니다'라는 말을 편지에 쓸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로트실트 가문은 1854년 영국과 프랑스에게 돈을 빌려주어 크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들은 돈자루를 흔들면서 각국의 정치와 외교의 방향을 바꾸었다. 덤으로 푸거 가문이 독일에서 벌였던 면죄부 장사는 마르틴 루터가 활약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는 점에서 종교 개혁에 '한몫'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본과 가치의 시대가 되자 이제는 부를 축적하는 과정이 곧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산업 혁명 이래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기업의 활약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경제적, 사회적 진보를 설명 하는데 최고 부자들의 이야기 만큼 좋은것은 없을 것이다. 크루프의 초강력 강철, 자동차를 대중화 시킨 헨리 포드, DOS를 전세계 PC의 표준 운영체제로 만든 빌 게이츠 등 이세상 최고 부자들의 사업은 엄청난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된것은 물론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어쩌면 이들은 돈을 벌만한 사업 기회를 찾아 돌아 다녔을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부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나를 포함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이 부를 손에 쥐고 싶어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얻고 그렇게 손에 쥔 부를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얻기는 쉽지 않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부를 창출하기 위한 새로운 사장을 개척하기 위한 사람들의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어떤 결과가 나올 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고 그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시장이 개척되면 또다른 세계 최고의 부자가 등장할 수 있다. 그리고 세계사는 또 한번 전환기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부자란 그저 돈만 많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단순한 부자라면 그러한 해석도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부호의 자리에 오를 정도의 부자라면 그 자리에까지 오르기까지의 과정도 그리고 그 후의 행동 모두 '역사적'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뉴욕 시장 새뮤얼 틸던의 말처럼 전설적인 재산의 주인은 결국 공익의 수탁자가 될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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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 해전 - 세계의 역사를 바꾼 전쟁
배리 스트라우스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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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역사를 바꾼 전쟁'

 이 책의 제목인 '살라미스 해전'의 부제로 쓰여진 말이다. 기원전 480년부터 이듬해까지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와 이에 맞선 그리스 도시국가 동맹 사이의 전쟁 중 일어난 이 해전에 대해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분수령이 되는 전투라고 인정하고 있다. 아니 그걸 넘어서 그리스 문명을 부모로 둔 서구 문명이 이 전투로 인해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살라미스 해전은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무릇 역사상 중요한 사건의 현장 속에 있던 당사자들이 그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기도 하다. 살라미스 해전과 함께 세계 4대해전에 포함되는 레판토 해전(1571)과 칼레 해전(1588)의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레판토 해전의 결과 오스만 투르크는 서부 지중해를 장악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승리한 유럽측 국가들이 승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함에 따라 투르크는 신속하게 함대를 재건했고, 다음 세기까지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투르크는 이 해전 이후 이전까지 활발했던 정복활동이 점차 주춤하기 시작했고, 정체의 시기를 거쳐 서서히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패배한 칼레 해전이 끝난 뒤에도 승리한 영국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때도 역시 엘리자베스 여왕은 승리 후에 별다른 전략적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여왕은 모든 것을 반만 했고, 자잘한 침략을 거듭함으로써 에스파냐인들이 자신들의 약점과 방어법을 깨닫게 해주었다. (Raleigh)

에스파냐는 이 해전에서 130척의 전함 가운데 53척만이 심하게 부서진 가운데 귀환했지만 얼마 안돼 또다시 대규모 함대를 구축했다.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영국인들은 여전히 에스파냐가 강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역사를 배우는 우리들은 이 해전이 에스파냐의 전성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을 알고 있다. 살라미스 해전 당시의 그리스인들도 이 해전에 우리들만큼이나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페르시아는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중해에서 막강한 세력을 자랑했고, 도리어 그리스인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같은 내전으로 스스로 힘을 낭비했다.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기원전 394년 파르나바조스가 지휘하는 페르시아 함대는 크니도스 해역에서 스파르타 함대를 격파하여 에게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이듬해에는 라코니아 해안을 약탈하였으며, 펠로폰네소스 근처의 키테라 섬에 해군기지를 건설하여 제해권을 공고히 한다. 그리고 기원전 387년 페르시아는 내전중이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압력을 가하여 평화조약을 맺게 했다. '안탈키다스의 평화'라 불리는 이 조약은 '왕의 평화'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도 페르시아는 여전히 강력했던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이 끝난 뒤 1세기가 지났는데도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크세르크세스의 침공을 물리친 뒤 살라미스 섬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아이스킬로스나 헤로도토스와 같은 그리스 작가들이 승리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했지만 이 전투가 서구 문명은 물론이고 향후 그리스의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스인들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살라미스 해전은 그 자체로도 또한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담긴 해전이다. 비록 같은 그리스 혈통인 이오니아인들과 마케도니아와 테베를 비롯한 여러 그리스 국가들이 페르시아 편에 서기는 했지만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그리스인들은 그들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결된 힘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그들끼리 숱한 전쟁을 치뤘고, 이후에도 치열하게 다투어 결코 하나가 되지 못했지만 정말 중요한 순간에 그리스인들은 힘을 합하여 자유를 지켜낸 것이다. 반면 페르시아는 모든 면에서 그리스에 비해 우위에 있었지만 페르시아 군에 속해 있던 여러 민족들은 서로 반목을 일삼느라 전력을 다할 수 없었다. 해전 중에 크세르크세스 앞에서 이오니아인들을 비난했던 페니키아인들, 위기가 닥치자 같은편인 칼린다의 배를 침몰시킨 할리카르나소스의 아르테미시아 등 페르시아 해군의 주축인 이들은 전투의 승리보다는 철저히 자기 이익에만 충실했던 것이다. 즉,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전력을 다했던 그리스인들의 분전이 예상을 뒤집은 기적같은 승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살라미스 해전은 이후 그리스의 문명의 번영에 큰 역할을 했다. 살라미스 해전 이후로도 그리스와 페르시아는 미칼레와 플라타이아에서 전투를 벌였고,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가 지휘하는 그리스 육군이 마르도니우스의 페르시아 육군을 격파한 후에야 전쟁의 막은 내렸지만 살라미스 해전 이후 크세르크세스가 퇴각을 결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페르시아는 두번 다시 그리스를 정복하려는 시도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살라미스에서 그리스가 패했다면 뒤이은 페르시아 육해군의 합동공격에 펠로폰네소스는 무너졌을 것이고, 아마 그리스 문명도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쟁 이후 아테네를 중심으로 그리스 문명은 활짝 꽃을 피웠고,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서 그리스 문명은 세계로 뻗어나가 유럽 문명의 기원이 되었다.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그리스 문명이 생존한 것... 이것이 바로 이 해전이 세계의 역사를 바꾼 전쟁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일 것이다.

 이 책은 역사책이지만 마치 소설책이나 영화를 보는 것같은 느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책 곳곳에 지형, 날씨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저자가 직접 삼단노선의 모형인 올림피아스호를 타고 살라미스 해협을 항해하면서 체험한 경험이 녹아든 것이다. 게다가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는 페르시아군의 위용, 불길에 휩싸인 아크로폴리스, 치열하게 토론하는 그리스 지휘관들의 표정, 지칠대로 지친 노잡이들의 모습, 충각에 부딪쳐 좌우로 흔들리는 전함, 화살이 날아다니고 창칼이 부딪치는 광경 등에 대한 묘사는 상상력을 자극하여 읽는 맛을 더해주고 있다. 다양한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듯한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적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흥미로운 것 같다. 살라미스 해전의 총체적인 모습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아울러 1차 사료인 헤로도토스의 역사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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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 문명과 문명의 대화, 개정판 살아있는 휴머니스트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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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역사에 관심이 많아 한 5~6년전부터 지금까지 수능이 끝나면 꼭 사회탐구영역 세계사 문제를 풀어보곤 한다. 그리고 나 또한 수능에서 전국적으로 응시자가 10%를 밑돈다는 세계사를 선택해서 시험을 치뤘다. 사실 수험생들이 그 방대한 양의 범위를 다 공부해서 시험을 치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매년 문제를 풀다보면 가장 많이 차지하는 부분은 언제나 서양사고 그 다음이 중국사 그리고 가끔씩 일본사와 서아시아에 관한 문제가 나온다. 올해처럼 동남 아시아에 대한 문제가 나온 것은 정말 희귀한 경우이다. 실상 서양사에 집중해서 공부해도 '세계사' 문제 절반 이상은 맞출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세계사 교육이 그다지 활성화되지도 않은 마당에 현재처럼 서양사 중심으로 그리고 이것 저것 사건만 나열한 교과서는 진정한 세계사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할 뿐더러 흥미조차도 가질 수 없게 한다. 또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그저 옛날에 있었던 사실을 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역사관을 갖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으므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학생들이 뚜렷한 시각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이 책은 이와 같은 문제점을 극복하고 우리만의 독창적인 시각을 기를 수 있도록  역사 교사들이 오랫동안 노력한 끝에 나온 성과물이다.

머리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세계 각 지역의 문명을 중심으로 역사의 주요 흐름를 살피고 특히 문명권 간의 교류에 큰 비중을 두었다. 그럼으로써 옛날부터 세계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었고 각 문명은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을 이루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한국사를 세계사와 연결시켜 서술한 것이 눈에 띄는데,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은 어떻게 성장했으며 다른 나라와 어떻게 교류하였는가를 기존 교과서보다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사를 동아시아사라는 범위 안에서 다루어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에 보다 신경쓴 점은 한중일 삼국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역사 왜곡 문제와 같이 국수주의적인 시각을 극복하는 데 있어 좋은 해법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또 이 책은 기존 교과서들에서 경시된 부분을 보강하고 있다. 그동안 적은 비중을 차지하였던 인도,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보다 자세히 소개함으로써 이 지역에 대해 서양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특히 국제 교류의 측면에서 인도,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역 등이 매우 큰 역할을 함으로써 다양한 문화, 풍속, 물자들이 오고가는 가운데 전세계가 서로 가까워졌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책을 읽으면서 역사 특히 세계사에 있어 상인들이 매우 중요한 일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읽다 보면 사진이나 그림이 많이 나오는데, 마치 사회과 부도와 세계사 교과서를 합쳐놓은 듯한 느낌이다.  글과 함께 다양한 시각자료를 살펴봄으로써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당시의 분위기를 간접적이나마 느낄 수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는 청소년과 여성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나 풍습을 따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렇게 기존 역사책에서 소외된 부분을 소개해 주는 것도 역사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갖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처럼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는 기존 교과서와 여러 면에서 차별화되어있다. 그저 외우는 세계사가 아닌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는 역사적 화제들이 담겨 있다. 하지만 몇가지 문제점도 있다. 우선 서양사 분량이 너무 적은 점이다. 인도, 서아시아, 중국의 여러 나라의 기원에 대해서는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반면 그리스사와 로마사처럼 서양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에 대해서는 너무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다. 가령 그리스같은 경우 폴리스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아테네에 대한 내용이 조금 나왔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시작만 나와있고 어떻게 되었는지는 생략되어 있다. 그리스에 대한 부분이라면 반드시 민주정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설명은 나올 법한 데도 그에 대한 내용은 찾을 수 없다(페리클레스 시대에 대한 내용이 전부이다) 또 로마사는 갑자기 포에니 전쟁 이후부터 시작해서 바로 제정으로 넘어가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 실용문화, 크리스트교에 대한 설명만 나와 있다. 특히 로마법에 관련해서 제정 이후의 만민법만 다루고 있고, 12표법이라든지 리키니우스법, 호르텐시우스 법과 같은 공화정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던 법들은 제외되어 있다. 이 책의 기본 컨셉이 '유럽 중심주의'를 벗어나 '우리 시각'으로 세계사를 재구성 하는 것이라 해도 어느 정도 서양사의 비중은 유지하는 가운데 타지역의 역사비중을 늘려야 하는데, 서양사에 관한 내용 중 생략된 부분이 많아 지나치게 축소되었다는 느낌이 든다(이 부분에 있어서는 기존 교과서에 못 미치는 것 같다) '세계사 교과서'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각 지역의 역사를 고루 소개하고 오늘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에 있어서는 그게 설령 서양사에 속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소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 지적하자면 이 책의 구성에 대해서는 기존 교과서보다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서술에 있어서는 기존의 그것과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시각'이라고 할 수 있는 서술상의 관점은 생각보다 두드러지 않고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물론 역사적 사실도 충분히 설명해야겠지만 저자들의 역사관이 좀더 명확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시도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더 나은 교과서를 위한 위대한 첫걸음인 동시에 앞으로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를 본격적으로 떠안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이니만큼 만족스럽지 못한 점도 있지만 21세기를 살아갈 청소년들에게 걸맞는 새로운 역사책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이 책은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그것은 문화의 다양성을 기반으로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고 서로의 차이점을 존중함으로써 평화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역사 교과서 왜곡', '고구려사 왜곡' 등이 이웃나라와의 분쟁대상이 되고, 세계 곳곳에서 문명과 문명 사이에 편견으로 인한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이 책에서 주장하는 평화와 공존을 위한 세계사 교육은 우리의 세계사 교과서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 p.s

책에 오류가 몇개 있습니다.

1. p179 오른쪽 하단에 호류사의 백제 관음 입상의 길이가 210.9미터라고 나와있는데 다른데서 찾아보니까 2.11미터라고 나와있더군요.

2. p316 세계사 연표에 751년 당이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군에게 패했다고 나와 있는데, p319에서는 같은해 아바스 왕조가 탈라스 전투에서 당에 패배했다고 상반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탈라스 전투에서 이긴 쪽은 아바스 왕조였으므로 319쪽의 내용을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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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12-07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좋은 서평이네요.
추천에 땡스투!!

데메트리오스 2005-12-07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이렇게 두배로 기쁨을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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