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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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아마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마지막 저서인 《카메라 루시다》에서 언급한 '푼크툼'이 회화 보기에서 차용될 줄이야. 그것도 21세기, 자신의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말이다. 미학자 진중권 교수가 이번에는 미학과 미술사를 넘어, 회화보기의 새로운 경지를 제시했다.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을 회화에도 적용해서 말이다.  

책 제목이기도 한 피터르 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는 최근 그의 처지와 맞물려 묘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더구나 브뤼헐은 당대 권력자들을 조롱하고 대운하를 반대한 전력을 갖고 있으며, 그에게 풍자의 대상은 서민이라고 비껴가질 않았다. 진 교수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그는 인터넷을 사용하는 일반인이라고 무조건 편들지 않는다. <디 워>논쟁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목격했다.  

그런 진 교수가 스스로 꽂혔다며, 열 두 작품을 언급했다. 우리가 잘 아는 작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른바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도 있다. 어떻든간에《교수대 위의 까치》를 관통하는 개념은 푼크툼이다. 즉, 똑같은 제재를 보더라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꽂히는 감각. 나한테는 꽂히지만, 다른 이에겐 꽂힌다는 보장도 없는, 작품과 나 사이의 개별적이고 고독한 관계. 피사체가 있는 사진에서만 쓰이던 개념인데, 그 개념을 완화했다는 것이 진 교수의 설명이다.

그것은 참 재미있는 개념이다. 진 교수가 언급한 열 두 작품은 이전에 우리에게 주입된 회화를 보는 방법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낯설게 보기다. 표준적인 작품 해설에 의한 미술사 보기가 아닌, 내 마음에 꽂히는 '삘'로 작품 마주대하기. 표준적인 작품 읽기가 아니어서일까. 책은 흥미를 불러 일으키며, 의외로 미술보기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더구나, 타의에 의해 교단에서 쫓겨난 그의 처지와 맞물려, 책에 나온 작품들이 (잘리지 않았다면) 강의실에서 얘기될 것들이었다고 하니, 마지막 강의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 책에 대한 집중도 또한 높아진다. (교단에서) 사라졌지만,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온 이 아이러니.  

책은 곳곳에서 찔러댄다. 회화를 보는 시선이 하나가 아니며, 미술사가 아닌 전혀 다른 분야의 시선을 빌려서도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의미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범례적으로 보여준달까. 경계를 넘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방법이 앞으로 회화를 만나면, 나만의 푼크툼의 순간을 만끽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란 기대를 하게 한다.   

'사라진 주체'라는 테마로 진행된 요하네스 굼프(Johannes Gump, 1626~?)의 <자화상>이 메타 회화를 언급한다는 대목에선 17세기 화가들의 자의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엿봤다. 이 작품, 희한하게 주체가 3개다. 하나는 뒤통수, 다른 하나는 거울, 남은 하나는 캔버스. 현실과 비현실, 더 나아간 비현실이 함께 등장하는데, 현실과 비현실은 위치를 바꾼다.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작가는 뒤통수만 보이고 캔버스에 그려진 자화상이 가장 강력한 효과를 드러낸다. 가상이 현실을 압도하는 셈이다.   

이것은 그렇다고, 굼프가 창안한 것은 아니란다.그럼에도 굼프를 비롯한 17세기 화가들은 보들리아르가 언급한 시뮬라크르(자기동일성이 없는 복제)를 일찌감치 다룬 셈이다. 화가의 정체성을 넘어 회화의 정체성을 다룬 진화의 단계. “굼프는 관객에게 등을 돌려 얼굴을 감추어버리고는 화폭 위에 거울에 비친 ‘영상’과 캔버스에 그려진 ‘모상’만 남겨둔다. 그 결과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자연스레 그림을 그리는(또는 거울을 비추는) ‘행위’만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런 식으로 굼프는 자화상을 이용해 ‘주체의 본성’이 아니라 ‘재현의 본성’을 주제화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굼프는 ‘화가의 정체성’을 묻고 있지 않다. 그가 묻는 것은 ‘회화의 정체성’이다.”(pp.143~144)  

여러모로 진 교수의 범례적 회화읽기는 곳곳에서 놀라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림 보기가 보다 즐거워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답이 있어야 안심을 하는 제도권 교육의 폐해는 이런 것이 아닐까. 답 하나만 좇아 모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는 것. 푼크툼은 그것만큼 중요한, 새롭게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알려준다. 답을 푸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질문을 제기하는 능력임을.  

굼프의 <자화상>이 진 교수를 사로잡은 이유는, ‘모델-재현’의 상식적 관계를 무너뜨린 디테일 때문이었다. “재현은 모델과 상관없이 제 의지를 가지고 따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느 것이 나인가? 뒤통수를 보이는 저 머리인가? 아니면 거울 속의 얼굴인가? 그것도 아니면 캔버스 위의 얼굴인가?”(p.159) 진 교수로 하여금 질문을 던지게 만든 굼프의 <자화상>. 

세상을 보는, 세상을 사는 재미가 하나 더 늘었다. 푼크툼으로 인해, 《교수대 위의 까치》가 안겨준 책 읽기의 행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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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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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에서 한국인 유학생이 총기 난사를 했던 사건. 그 비극 앞에 어이 없게도, 그가 한국인이라서 국가적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던 주장도 있었다. 비극 앞에 있거나 그 사건으로 경악한 많은 미국인들도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실제로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가 단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런 그를 제대로 보듬지 못한 사회가 문제가 됐을 뿐.   

그런 것으로 따지자면, 지구상의 남자들은 모두, 죽어 마땅하다. 없어져야 할 족속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악과 폐해의 당사자는 거의 남자들이다. 그렇게 따지자니, 우습긴 한데, 그만큼 남자들은 늘 문제를 일으킨다. 영원히 철들지 않는다는 말은, 진실에 가깝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그런 남자들의 심리를 보여준다. 왜 그들은 좋지도 않다는술을 입으로, 위로, 간으로 퍼붓는 것일까. 오죽하면 이런 말도 있을까. “한국 성인 남자는 여가의 절반을 술을 마시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 절반은 술을 깨우는 데 사용한다.” 한국 성인 남자들은 대부분 재미를 모른다. 아니, 어떻게해야 재미가 있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혼자 있는 법도 모른다. 그래도 꼴에는 강한 척 해야 '가오'가 선다.  

제목부터 자극적인 이 책은, 술술술 읽힌다.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그것이 대한민국의 성인 남자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혹은 그 남자를 지겨워하거나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여성들에게도 이해도를 높여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재미와 감탄을 모르고 살아가는 남자들을 위한 처방전 혹은 그런 남자들을 알고 싶은 여자들의 참고서이다. 

무엇보다 저자인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의 '내 이야기'가 살갑다. 오밀조밀 궁시렁궁시렁 신변잡기에 불과한 그 이야기가 왠지 살갑다. 시시콜콜하지만, 수다의 힘은 의외로 세다. 여자들의 것이라고 치부했던 수다는 의외로 많고 큰 효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것도 술보다는 수다다. 저자의 수다가 살가운 것도, 저자가 친근하게 여겨지는 것도 책 속의 다종다기한 수다 덕분이다.  

사실 지금은 우울한 시대다. 20대부터 벌써 재테크에 미치라고 설파하고, 어떻게든 스펙을 좀더 높이 쌓아 어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알랑방귀를 낀다. 30대라고 다르진 않다. 현실이라는 이유로 부동산, 재테크, 육아 얘기만 나부낀다. 자신의 이야기는 쏙 빠졌다. 내 고유의 서사를 지운 삶인 셈이다. 어떡하면 재미가 있는지 모르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의 미덕은 무엇보다 '감탄하기'의 중요성을 알려준 점이다. “식욕, 성욕은 인간의 본질적 욕구가 아니다. 감탄이 인간의 본질적 욕구다”(p.283) “누가 나보다 더 분명하게 우리의 삶의 목적을 설명할 수 있다면 나와보라! 우리는 감탄하려 산다.”(p.293) 그것은 아마도, 세상에 대한, 작고 사소한 것에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열라는 말이다. 그러면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고, 정서적 경험이 풍부할수록 타인과의 관계도 유려해진다.

감탄할 줄 아는 것은 재미의 다른 말이다. 재미가 없으니 정치인 욕이나 하고, 폭탄주 돌려서 취하고 빨리 망가지는 거다. 많은 남자들은 그런 퇴행적 온정주의에 사로잡힌 노예들이다. 일 하는 것도 힘든 마당에 술까지 힘들게 마시는 소아병적 퇴행. 그럼에도 알코올이 힘을 발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비슷비슷한 처지이기 때문이다.   

책은 남자들에게 익숙지 않은 정서적 공유도 강조한다. 아내에게든 자식에게든 친구에게든 뭐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공유하면 살 길이 열린다.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표현도 그런 얘기를 터 놓음으로써 치유 받고 싶다는 마음의 다른 표현인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책은 알려준다. 사회적 지위? 기똥찬 집과 차?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당연히 여겨지는 어느 회사의 부장, 사장, 교수와 같은 내 사회적 지위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내 본질과 상관없는 것들이다”(p.100)  

그러면서 저자는 커밍아웃한다. “생각해보라! 도대체 언제까지 사장할 것인가. 언제까지 교수일 것인가. 나는 어느 대학의 교수나 어느 위원회의 위원장이 아니다. 나는 슈베르트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 내 노래에 감동하여 눈물 흘리고, 아내의 관심이 조금만 식어도 쓸쓸해하고, 하늘거리는 주름치마에 가슴 설레어 한다. 그게 진짜 나다.”(p.100) 아내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마냥 침울해지는 소심한 남자!

다시 말하지만, 이 시대의 문제는 모두 남자의 문제다. 가족에서 더 이상 남자(남편)는 필요없게 됐다. 기러기 아빠가 이를 대표하지 않나. 남자들은 돈'만' 버는 기계다. 그래놓고선 고작 하는 위안이 가족을 위해, 아이를 위해 희생한다? 참으로 불쌍한 족속이 아닌가.  

저자의 남자 다독이기는 별다른 게 아니다. 그럼에도 그 심리적 파장은 크다. 나도 그렇지만 아마도 이 땅의 남자들이 너무 획일적으로 길들여진 탓일 게다. 아니,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한 사회적 문제도 많은데, 일일이 남자들 심리를 파고들 건 뭐야,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우리는 다른 문제도 면밀하고 정교하게 접근할 수 있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남자들의 문화심리를 다뤘는데, 한편으로 (남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법, 재미있게 사는 법을 알려주는 가이드북이기도 하다. 허섭하게 야동틱한 이야기말고 생동감 있는 에로틱한 수컷의 향기를 풍기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그렇게 되면 감탄도 절로 나올 것이며, 우리는 자신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여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시간을 이겨낸 모든 것은 예술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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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가붕가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
붕가붕가레코드 지음 / 푸른숲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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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가붕가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은 인디 레이블의 악전고투의 순간, 고생바가지를 다룬 글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건, 뭐 염장질이라고 봐야겠다. 그러니까,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 니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오늘 밤 절대로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진 못할 거다." 이런 거다. 뭐라도 재미난 것을 하면서, 명예와 명성을 얻고, 돈까지 벌게 됐으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을쏜가.

물론, 약간 부러움에서 비롯한 언급이었지만, 붕가붕가레코드(이하 붕가붕가)는, 책을 보면 그렇다. 놀기 위해 태어났다. 그리고 잘 논다.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그들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이 가능하도록 일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과장해서 이렇게 잘 노는 애들은 국민들의 정서함양을 위해서라도 국가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제대로, 잘 놉시다'라는 콘셉트의 공익광고라도 만들어 그들을 출연시키고 싶을 정도다.  

붕가붕가는 그렇다. 인디신의 거성, ‘장기하와 얼굴들’을 통해 익숙해진 레이블이다. 책이 나올만하지 않겠나 싶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출판사라고 그들을 놓칠리가 있나. 책은 아주 흥미롭고, 재미가 쏠쏠하다. 대학교에서 음악 좀 해보겠다고 '깝치던' 청춘들이, 혈혈단신 음악판에 뛰어들어 좌충우돌, 종횡무진, 엎치락뒤치락 흥망성쇠(?)를 겪은 기록.  

점차 나아지고 있음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붕가붕가의 성장사를 보자면 기특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어떻게 버텼을까, 용하기도 하고. 더구나 그들은 잡탕이다. 뚜렷하게 섞이지도 않고, 하나로 관통할만한 음악세계도 없다. 그러나 단 하나, 재미있어야 할 것. 아하, 책은 그들의 음악과 다르지 않다. “서로 섞이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게 용케도 어울려 있다. 이것이 바로 붕가붕가의 음악세계다. 물론 생판 다르다면 이렇게 섞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음악에 아교 구실을 하는 몇 가지는 분명히 있다. 이 때문에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 이들이 서로의 작업을 좋아하고 있다. 따로 또 같은 것이 붕가붕가레코드의 노래들이다.”(p.215)    

놀기를 잘 해야 조화로운 사람이 된다고 믿는 나로선, 약간 뻥을 튀기자면, 붕가붕가 멤버들이 놀 줄 모르는 이 사회에 균형추를 놓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그렇잖나. 우리는 너무 못 논다. 노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도 그렇고, 노는 것을 금기시 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 몫했다. 근면성실이 아니면 죄악으로 몰아버리는 이 근엄한 풍조. 미친 게지. 못 놀아서 지금 이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인게야!  

그런 면에서 장기하의 공연에 대한 철학(!)은 선명하다. 그 선명한 철학은 역시 놀 줄 알기 때문에 고안할 수 있는 거다. '음악은 듣는 것'이라는 고정관념, 엄숙한 풍조에서 이런 생각은 나올 수가없다. “장기하의 얘기처럼 음반이 들려주는 것이라면 공연은 보여주는 것이라는 게 붕가붕가레코드가 처음 공연을 할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가져온 생각이다. 이런 생각으로 ‘아주 괜찮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럴싸하다‘고 보여주는 것, 그리하여 관객에게 음반을 들을 때와는 다른 경험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p.250)

붕가붕가의 모토 또한 놀 줄 아는 자가 가져야할 덕목이 아닐까. “혼자 힘으로 사랑하자 + 혼자 힘으로 살아가자 = 혼자 힘으로 사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혼자서 뭐든 할 수 있는 법을 배우거나 익히지 못하니, 악성 패거리문화가 생기고 힘 자랑이나 하게 된 거다. 혼자서 노는 법도 중요하다. 혼자 놀다가 재미 맞으면 둥둥 서로 손을 맞잡는 거고!  

그래서 장기하와 얼굴들로 제대로 뜬 그들의 차후 행보가 마음을 잡았다. 그들에게도 아마 야심이나 야망 따윈 없으리라. 나를 움직인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야망 없음.' “온전하게 우리 힘으로 해낸 게 아닌 만큼, ‘장기하와 얼굴들’에 의존하지 말자. 다른 팀들에게 그 수준의 성공을 기대하는 건 애초에 그만두자. 당분간 초라한 자취방에 살더라도 자기 힘으로 관객을 모아나가자. 남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다른 문을 두드려보자. 아니면, 아예 벽을 뚫고 문을 하나 새로 내자.”(p.83)  

지금 대한민국의 음악시장, 아니 예능인들을 만들어내는 주류의 방식은 이런 거다. 소속의 하나가 제대로 떴다치면, 어디 줄을 대서 새끼를 자꾸 키워 세력을 확산시켜볼까, 공산품을 만드는 일에 전력해볼까. 포트폴리오 짠답시고, 비슷비슷한 애들로 돌려막기나 하는 거다. 고작 이런 생각이나 하면서 돈 벌 궁리에만 매몰된 주류의 방식에 비해 그들의 철학은 깔끔하다. 어디 뭐, 더 재미있는 일 없나.

이것이 붕가붕가를 지금까지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든 중요한 요인은 아닐까. 많고 적음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놀 줄 아는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것. “우리가 만드는 노래를 괜찮다고 들어주는 누군가가 지금은 한줌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적지 않은 숫자가 될 것이라는 바람. 취미로 음악 하는 대학생들이 한 줌 모여 있는 동아리 주제에 스스로 회사라고 주장하며 음악 사업에 뛰어들겠다고 나선 자뻑의 바탕에는 나름 이런 꿈이 있었다. 일단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이런 의미에서 김 기조는 붕가붕가레코드의 모토를 ‘혼자 힘으로 살아가자’로 정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자위라는 붕가붕가의 의미에 목매달고 있던 곰사장은 이를 잘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붕가붕가는 ‘혼자 힘으로 사랑하자’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붕가붕가레코드는, 시작했다.”(pp.54~55)

엄숙한 이들이 들으면 뜨악해 할 이름을, 버젓이 자신들의 레이블 이름으로 단 배짱도 재미있다. “‘붕가붕가 중창단’이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논란이 있다. 내 기억으로는 2000년에 내 여자친구의 친구 되는 사람 자취방에 놀러갔다가 ‘붕가붕가’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들었다. 그 단어가 애완동물의 자위를 의미한다는 설명도 함께였다. "오, 발음 좋네. 뜻 좋네. 붕가붕가 좋네. 우리의 자기 충족적이고 관객 의존적이지 않은 자발적 아방가르드 문화 활동을 설명할 수 있는 핵심적인 단어인 것 같아."”(P.30)

그럼에도 그들은 이것을 단순히 인터넷상의 무의미한 유희로 치부하지 않는다. “주류 대중음악(일반적인 섹스)과 기존 인디음악(자위)의 중간 지점에 있는, ‘대중지향적 인디음악’이라는 조금은 모순적인 우리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는 단어가 바로, 붕가붕가다.”(p.53) 자신들의 정체성과도 연결 지을 줄 알만큼 그들은 똑똑(?)하다.   

지금은 놀 줄 아는 것이 혁명이다. 세상을 무력으로 전복하는 것은 과거지사. D.H.로렌스 시선집 《제대로 된 혁명》은 이리 말하고 있지 않은가.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는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그저 원수들의 눈에 침이라도 한 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좇는 혁명은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은 하지 마라
혁명은 우리의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결단이어야 한다

책을 놓고 보자면, 붕가붕가의 행보는 획일이 아닌 깨는 것이었다.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것이었다. 웃고 즐겼으며 너무 진지하지도 않았다. 뭐든 재미로 해보자였다. 이제 혁명은 재미에서 나와줘야 생명력이 길 수 있다. 붕가붕가는 재미사냥은 제대로 과녁을 맞춘 것이다. 출발에서도 그 기운은 완연했던 셈이다. “‘붕가붕가 중창단’이라는 붉은 깃발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 학내 공연의 게스트에 불과하건만 마치 무대를 강탈한 혁명단 같은 모습이었다,”(p.32)  

중요한 것은, 붕가붕가가 버티고 견뎠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예술 아닌가. 그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손, 단순히 딴따라로 치부할 건 없다. 무려 5년째, 그들은 버티고 있다.  “남들이 내 능력을 알아주지 않아 잘나가지 못할 때, 미래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지속가능을 위한 자질이다. 그걸 해낼 수 있는 게 반드시 용기와 근성만은 아닌 것 같다. 제3의 재능이랄까.”(pp.73~74)  

망하지 않아서 고마웠다. 이렇게 책까지 내서, 뭐든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증명해 줘서 고마웠다. 엄숙을 가장한 싼티가 판치고, 삽질만 할 줄 알고 놀 줄 모르는 이 엄한 시대에 붕가붕가도 숨통을 틔워주고 있으니까. 분별없는 열정이 판치는 시대에, 붕가붕가는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그들은 키치가 아니다. 저렴한 것을 키치와 동일어로 상정할 필요는 없다. “괴발개발에 엉성해서 저렴하게 보이는 것과 저렴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다른 문제다.”(p.147) 이제 필요한 것은, 현금연대. 인디나 약자에게, 현금은 지속가능함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이며, 그들의 연대를 가능하게 하지 않던가. 논다는 것은 노동하고 일 하는 것만큼이나 신성하다. 그것도 제대로 놀아야 한다.   

내게 책이 매혹적이었던 이유는, “스스로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남들이 대신하거나 소멸한다”는 것을 붕가붕가가 보여줬기 때문이다. 또, ‘굳이 남의 똥꼬 빨 필요 없이 저렇게 살면 되겠구나’하는, 다른 삶의 방식을 알려줬다. 스펙에 목매달지 않아도, 일보 전진을 위해 반보 후퇴를 하는 한이 있어도, 뭐라도 재미난 것을 해보면서도 살 수 있음을 들려줬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딴따라질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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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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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에 '여자친구'가 있다면, 나는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데 나는 세계의 끝이 어딘지 모른다. 물론 그것은 물리적 장소(성)만을 뜻하진 않으리라. '세계의 끝'이라는 어감은, 어쩐지 아득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이 맞닥뜨린 곳이, 아마도 세계의 끝이 아닐까. 다시 묻는다. 나는 궁지에 몰린,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진 여자친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김연수의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그것에 대한 일종의 답변이다. 여기에 실린 단편,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가 그렇다. 김연수는 용산을 말했다. “편의점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온 동료들이 다시 사무실로 들어오는 걸 보고 내가 화면을 끌 때까지, 거기에는 타오르는 불꽃과 시커먼 연기와 아래에서 솟구치는 물줄기가 침묵의 공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날 새벽, 거기서 여섯 명의 사람들이 불에 타 죽었다는 건 며칠이 지나서야 알았다.”(p.107)

그러니까, 지금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면서 갈 곳을 묻는 이들에게, 국가가 폭력으로 대답하는 시대. 김연수에게 용산(희생자들)이 그랬던 것은 아닐까. 세계의 끝에 내몰린 여자친구 같은 존재. 김연수는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것을 세계의 끝 여자친구로 표현한 것은 아녔을까.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 구절. 나를 울리기도 했던 이 편지글이 김연수(의 펜)를 추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바람을 맞으며 내가 떠올린, 그날 새벽의 타오르던 붉은 불꽃과 시커멓게 피어나던 검은 연기와 아래에서 솟구치는 하얀 물줄기들에 대해서,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읽게 된 편지의 구절들에 대해서. "아버지와 아빠에게"라는 구절로 시작해서 "아빠, 나는 아빠가 보고 싶어. 지금은 이 마음 하나뿐이야.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꿈속에서라도 한번 나와 줘, 나는 아빠를 힘껏 끌어안고 놔주지 않을 거야. 떠나지 못하게 절대 놔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아빠한테 말할 거야,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2009년 1월 용산참사로 숨진 윤용헌씨의 장남 윤현구군이 쓴 편지 중에서)로 끝나는. 아까 내가 울었던 건 그 편지의 구절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얘기했다.”(p.114)

김연수는 자신이 당장 가닿을 수 없는 세계의 끝에 있는 여자친구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썼을 것이다. 용산에 대해, 이 세계에 대해. 지금 우리에게 용산은 그렇다.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할 빚이 됐다. 국가권력이 어처구니 없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그 뒷수습은 우리의 것이 됐다. 그 시대도 따지고보면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던가. MB로 대변되는 패악과 몰염치를 잉태한 것은 우리다.  

2009년 1월20일, 용산은 그 날을 기점으로 더 이상 ‘전자상가’로 대변되는 장소가 아니다. 살자고 외치던 이들이 죽었고, 그들은 아직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으며, 국가는 아무런 말이 없다. 국가는 국민을 지켜주는 것이 본디 의무이며 사명인줄 알았다. 우리가, 잘못 알았다!  

하지만 일상은 언제나처럼 우리의 의식을 잡아먹고, 용산이 기억 한켠에서 멀어질 즈음, 김연수의 글은, 뇌주름을 건드리고 있었다. 너,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부끄러웠다. 부아가 다시 치밀어올랐다. ‘케이케이’를 사랑했던 미국인 작가(「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처럼, 그랬다. “‘무엇도 영원한 것이 없는, 스쳐 지나가는 것들로 가득한, 좌충우돌의 도시’에서 떠나고 싶다. 지금 당장.” (p.20) 막장이 대세인 지금 이 땅, 세계의 끝에 내몰린 여자친구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가. 다시 책은 묻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김연수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적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친구, 그리고 세계의 끝. 필요한 것은 노력이다. 김연수는 그 노력으로 용산에 대한 글을 썼고,(그것이 성공적이든, 아니든) 나는 그것으로 환기받았다. 그 말에는, 꾹꾹 눌러 담은 작가의 흔적이 있었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느꼈다. 김연수는 사랑했던 것이다. 직접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김연수는 그것을 실토하고 있었다. “이 우주의 90퍼센트는 그렇게 우리가 볼 수 없는, 하지만 우리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그런 불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물론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그 불들을 보지 못하겠지만.”(p.32) “나는 숭례문의 그 불꽃에 영향을 주고 또 영향을 받았다. 미신과도 같은 이야기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p.317 ‘작가의 말’ 중에서)  

단편 사이로 난 길에는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관통하는 소극적인 이정표가 있다. 각기 다른 이야기와 서사로 포장돼 있지만, 그는 우리 사는 세계의 연결성을 포획하고 있다. 「내겐 휴가가 필요해」의 '최'같은 또라이도 그렇다고 내팽개치진 않는다. 분명 편애는 있지만, 차별은 하지 않는다. 공명의 순간을 기다리는 예지자 같은 느낌도 있다. “각각의 삶은 하나씩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들은 서로 연결돼 있으니,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으로 살더라도 결코 혼자가 아니다. 한쪽 끝을 건드리면 다른 한쪽 끝이 떨린다. 그 공명과 공감 속에서 예수 시절 이래의 ‘정의와 아름다움’이 이어져올 수 있었다.”(pp.294~295)

나는 '이해니, 오해니' 하는 말로 김연수를,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김연수가 공명의 순간을 바란다손, 책을 읽은 모두가 김연수의 마음과 같을 순 없다. 아마 100만부가 나간다손, 그 마음은 분명 100만개로 흩어질 것이다.  

책을 통해 누군가는 이것을, 다른 누군가는 저것을 획득하거나 채집하지 않았을까. 자기만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떤 것. 살아가는 동안 셀 수 없이 맞닥뜨리는 오해와 이해의 외줄타기.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가 오래도록 살아 노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p.81)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나일 수도 있고,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바꿀지도 모른다. 아니 바꾼다기보다 영향을 미칠 것이다. 크든 작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흘러가던 이야기가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영향. 김연수도 그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한쌍의 연인이 1982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시합을 하다가 링에서 쓰러져 죽은 권투선수(고 김득구) 때문에 사랑했고, 2001년 9․11 테러로 무너진 쌍둥이빌딩 때문에 헤어졌듯(「달로 간 코미디언」).  

내 신경의 무심함을 건드린 김연수의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그렇게 질문을 던진다. 세계의 끝에 있는 여자친구를 위해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용산은 여전히 현재진형행이다. 계절이 네 번을 바뀌어 다시 그 계절로 왔다. 물론 우리가 느끼는 체감은 지난해와 또 다르다. 생각지도 않았던, 상상도 못했던 일이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됐고, 우리의 상처는 깊다.  

김연수는 이번 소설집을 통해 그의 고민을, 특히 용산에 대한, 드러냈고,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글쓰기)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화답해야 할까. 각자의 방식이 있겠지만, 우리도 여전히 그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각자는 안드로메다와 지구 사이의 서로 맞닿을 수 없는 머나먼 생명체가 아니므로. “우리는 각자가 하나의 이야기들이고서로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별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각자 고독하게 달로 가지 않고 모두 함께 복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메리 올리버가 가르쳐준 대로 말이다.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는 동안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기러기」)”(p.313 해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중에서)

서로가 서로를 껴안을 때 우리는 어쩌면 행복해지는 존재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엄마의 품에서 안전함과 평화를 느낀 존재가 아니었던가. “불편한 자세로, 우리는 물속에서 서로 껴안고 있었다. 우리는 입을 열지 않았다. 물에 젖었건 땀에 젖었건, 내가 사랑한 케이케이의 몸은 언제나 젖은 몸이었다. 나는 케이케이의 젖은 몸이 내 몸에 닿는 게 좋았다. 그 젖은 몸은 보통의 육체와 달랐다. 그 젖은 몸은 보통의 육체와 달랐다. 한없이 부드럽고 또 연약했다. 소년의 몸. 가만히 두면 물에 풀리는 물감처럼,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젖은 몸. 나는 그걸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한사코 케이케이에게 매달렸다. 내가 아는 행복이란 그런 것이었다.”(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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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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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모든 것의 방식이 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무엇. 옳고 틀리고,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냥 자신만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김훈은 《공무도하》를 통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강경감의 말처럼, 해망은 해망의 방식대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p.320) 균열이 있었다손, 그것은 다시 제 방식대로 간다.   

김훈에게도, 김훈만의 방식이 있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어쩔 수없이 감내해야 할 무엇이다.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읽을 수밖에 없는 무엇도 있다. 때론 그(가 쓴 글)에게 베일 때가 있다. 피가 흐른다. 그 피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다. 닦아내봐야 소용없는 짓임을 알기 때문이다. 피를 닦는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저 피가 응고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 《공무도하》가 그랬다.

그곳에는 어쩔 수 없는 것들, 인력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살인이나 치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토록 무덤덤한 일상 혹은 서사가 있을 뿐인데도, 나는 그 속에서 내 빨간 피를 봐야했다. (할 수)없는 것은 (할 수)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일까.  

《공무도하》는,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성립되지 않는 질문에는, 당연히 답하지도 않았다. 언론이, 미디어가 세상을 담는 그릇이라지만, 세상에는 신문에 쓸 수 없는 것들, 담아지지 않는 것들, 써지지 않는 것들, 말로써 전할 수 없고, 그물로 건질 수 없으며, 육하의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다가갈 수 없고, 긍정할 수 없는 죽음도 있으며, 해석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죽음도 있었다.
 
온통 없는 것 투성이였다. 혹은 없는 것을 붙잡기 위한 발버둥도 가끔 있었지만, 그것은 허사였다. 왜 그랬을까를 묻지는 마라. 그래야만 하는 것도 있으니까. 바다사자의 모습이 그랬다. 인간의 세계에 어쩔 수없이 발을 디딘 녀석은,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일어설 수 없는 몸을 일으키려는 몸부림을 쳤다.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존재증명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그것은 그만의 방식이다.  

사람이라고 다르냐. 아니. 저 멀리 떠나있던 아들의 개죽음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오금자가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딸의 개죽음에도 목소리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방천석도 있었다. 그 한편에는 그들을 취재할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결국 포기한, 추적할 수 없고 전할 수도 없는 세상을 말할 수밖에 없는 문정수도 있었고,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노목희도 있었다.  

《공무도하》는 애초에 포기하고, 아니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이해를 바라지도 않고, 억지로 설명을 하려 하지도 않았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폭력적이 되곤 하는데, 김훈도 늘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을 이루는 근간은 폭력과 악이라고. 그는 일찌감치 이해되기를 바라지 않는 투다. 그것을 폭력(적)이라고 여겨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김훈이 덕지덕지 묻은 글 속에서 나는 자꾸만, 버티고 견뎌야 하는 우리네 일상이 중첩됐다. 가감없이 그대로 드러난 어떤 일상의 벌거벗은 몸.   

노목희는 말한다. “그래도 기사는 쓰지 마. 치사해. 막막한 쪽이 치사한 쪽보다는 견딜 만할 거야.”(p.129) 하지만, 나는 쓴다. 그것이 나만의 방식이니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애초 기대하진 않았지만, 《공무도하》는 여느 그의 (역사)소설보다 더 깊게 서걱거렸다. 희망도 절망도 아닌 끝에서, 나는 어떤 일상적 풍경과 마주대했고, 너무 오염돼서 괜히 입에 올리기가 민망한 '희망'을 거들먹거리는 것은 실례인 것처럼 느껴졌다.   

맞다. 애초 희망은 위정자들의 언어일지 모른다. 그저 일상을 즐기고 거기서 충분히 행복을 느끼며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돈과 집, 자동차를 들먹이며 안락함을 미끼로 그것을 '희망'이라는 단어로 한데 묶었던 것은 아닐까. 돈, 집, 자동차를 갖춰도, '더 많은, 더 큰, 더 좋은'을 수식어로 붙여 사람들을 현혹한 것이다. 그것을 역시 '희망'이라는 말로 포장한.  

《공무도하》에는 그래서 서툰 희망 따윈 없다. 재미있는 건,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지금, 돈을 희망으로 등가시킨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물며, 화재현장에서 귀금속을 턴 뒤, 소방서에서 퇴직하고 고철인양업체의 전무가 된 박옥출도 돈돈돈하지 않는다. 어쩌면 딸의 억울한 죽음을 돈으로라도 보상 받으려는 심리가 발동할만한 방천석도 그러지 않는다. 그들은 강은 건너지 않고, 아니 건너려고조차 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저 이 더러운 세상에서 자포자기하듯 발을 디딜 뿐이다.
  
따져보면 노목희도 그렇고 문정수도 그렇다. 그들에겐 어떤 야심도 찾아보기 힘들다. 다른 등장인물들에 비해 좀 더 먹물을 먹은 그들이지만,  그저 자신 앞에 놓인 일만을 처리할 뿐이다. 특히 노목희는 늘 문정수를 먹이고 재운다. 그의 어리광을 거의 받아들여주고 다독여주기까지 한다. 즉, 늦은 밤, 갈 곳을 찾는 어린 양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하사한다. 먹일 목(牧)에, 계집 희(姬). 짐승을 거두어 먹이는 목희라니. 그 이름 한번 절묘하다.   

하지만, 그게 다다. 그들은 놀지도 않는지, 《공무도하》는 퍽퍽한 스트레이트 행보로 모든 것을 종결 짓는다. 좋고 나쁘고를 얘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책을 덮고 나는 스산했다. 아무리 퍽퍽한 일상이라도 찰나의 즐거움과 행복이 있을진데, 그들에게선 그것을 찾기 어려웠다. 그나마 베트남의 산간에서 이국 땅으로 팔려(!)왔으나, 꿋꿋하게 버티고 견디는 후에가 가장 인간적이었달까. 강을 건너지 못하고 약육강식의 갯벌에서 발을 빠뜨린 채, 그 나름의 환경에 적응만 하는 등장인물의 면모가 질척거렸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들이 작은 것이라도, 사소한 것이라도 부둥켜안는 것을 봤으면 하는 바람.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진 않아도, 꾸역꾸역 살고 있어도, 찰나일지라도 삶의 하중을 덜 느끼면서 지내는 모습도 봤으면 했다. 노을이 지는 강변에서 노을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그 찰나의 행복감 같은 것 말이다.   

《공무도하》는 무엇보다 삶을, 일상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 삶의 이유는 이것'이라고 못박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자신을 위한 넉살이다. 누구에게도 삶이 지속돼야 할 이유가 굳이 따로 있진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삶을 절단내야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우리는 그냥 사는 것 아닐까.    

장철수는 그 옛날, 노목희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난 아무래도 이 세상을 단념할 수가 없어.” 또 다른 이말도. “세상을 긍정하니까 단념할 수 없는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런 세상은 아니야.” 단념할 수가 없음에도, 살아있음이 고통스러운. 그래서일까. 장철수의 이 말은 김훈을 대변하는 것 같다.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p.35) 

《공무도하》로 나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나는 제대로 책을 읽은 것일까. 지금 나는 어디를 건너고 있을까. 그저 나는 일상과 샅바를 움켜쥐고 씨름을 하고 있는 중이다. 강을 건널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아직 나는 제대로 삶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나의 설명을 바라진 않겠지만. 하나 더 분명한 것이 있다. 나도 나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나의 방식대로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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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yours 2010-08-09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무도하>를 다시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리뷰군요!
추천, 꾹 누르고 갑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의 방식이 있다
한 번 써보고(쳐보고) 싶었어요.

책을품은삶 2010-08-09 21:43   좋아요 0 | URL
그 추천의 방식에 고맙단 인사 드려요.^^

모든 것은 모든 것의 방식이 있다

제가 쓴 것이지만,
moon님의 댓글을 보자니, 저도 갑자기 다시 한 번 쓰고 싶어졌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