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으로 간 사나이 - A Man Who Went to Mar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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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네요, 아가씨. 꽤 오랜 세월이 흘렀죠?

 

콧물 찔찔 흘리던 시절이었던가, 빡빡머리 시절이었던가, 교과서를 통해 아가씨와 목동의 이야기를 읽고 가슴 설렜던 기억이 짠하네요. 그래요, 알퐁스 도데의 <별>을 통해 아가씨를 처음 만났었죠. 첫 만남, 참 감미롭고 아름다웠었어요. 그 이야기를 만난 이후, ‘별’이라는 말을 듣거나 볼라치면, 아름다운 스테파네트 아가씨와 순진해 빠진 목동이 가장 먼저 떠올랐으니까요.


그래서 그 이야기, 오랫동안 저장했었어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아름답고 순수한 외사랑 이야기로 말이죠. 아가씨는 여전히 아름다우시죠? 아가씨를 지켜주던 그 ‘이름 없는 목동’이 스무 살이 되도록 봤던 사람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근처 백리 안에서 가장 어여쁘다고 했었던 기억도 나요.

 

그 미모, 세월이 지나갔다고 어디 가진 않았겠죠? 저는 아마 아가씰 본다면, <개그콘서트>의 <사마귀유치원>의 쌍칼처럼 음흉한 표정을 짓고 이렇게 얘기하겠죠. 나이가 들어도, 이~뻐~


참, 그 순진했던 목동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아세요? 혹시 프로방스 지방 뤼르봉 산에서 여전히 양을 치고 있나요? 아가씨, 그 목동의 어깨에 기대 잠들었던 기억나세요? “헤아릴 수 없는 별들 가운데 가장 가냘프고 빛나는 별 하나가 그만 길을 잃고 내 어깨에 내려앉아 곱게 잠들어 있노라고…” 그때, 살포시 잠든 아가씨의 모습을 목동은 이리 묘사했었더랬어요.  


이 애틋한 묘사가 얼마나 많은 소년들을 녹였었는지, 아가씬 모르죠? 목동이 얼마나 부러웠다고요. 별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가씨와 데이트하는 꿈을 꾸질 않나, 그 순수함을 갈망하질 않나... 뤼르봉산에서 나도 양치는 목동이 되고 싶더라니까요. 아가씨 옆에 있는 양들도 털이 섹쉬~해~

 

흠흠, 어쨌든 목동의 독백이 압권이었죠. 아가씨가 졸음에 겨워 무거워진 머리를 목동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고, 목동은 그 잠든 얼굴을 빤히 보면서 꼬박 밤을 새웠었는데, 목동이 그랬어요. “…가슴이 설렜지만 마음은 오직 아름다운 것만을 생각하게 해 주는 맑은 밤하늘의 보호를 받아, 성스럽고 순결한 생각을 잃지 않았습니다.…” (참, 그 목동, 지랄방정을 떨었죠. 오직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면서, 속으론 이~뻐~ 하고 감탄(?)했을지도.ㅋ)

 

 

<별>은 그렇게 그 어린 마음들의 둥지에 자리를 틀었었어요.

 

한 여자를 지키는 남자의 마음 같은 거랄까. 어린 마음엔 그런 줄로만 알았죠. 목동은 진심이었을 거예요. 맑은 밤하늘의 보호가 정말 있었다면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단맛 쓴맛 세상의 간을 좀 보고, 다시 <별>을 만나 그 상황을 되짚어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목동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정확한 시대를 알 순 없지만, 당시는 봉건적인 신분제가 유지되고 있었던 것 같더군요. 여러 정황묘사를 보았을 때 말이죠. 아가씬, 그런 신분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한 번 생각해보세요. 신분 차를 감안했을 때, 산에서 양떼를 돌보는 목동이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아가씨에게 성스럽고 순결한 생각외의 것을 할 수 있었겠어요? 감히 그랬다가 당장 목이 날아가요. 그 신분제가 얼마나 엄격했으면, 엄연히 있었을 목동의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고, 프로방스 지방 ‘어떤 목동의 이야기’라고만 돼 있을까요.


어린 시절엔 무심하게 지나쳤는데, 생각해보니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봐요~ 아가씨는 버젓이 ‘스테파네트’란 이름이 있잖아요. 그런데 왜, 목동은 이름이 없을까요? 목동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의미 없는 행위가 아님은 아시죠? 아, 혹시 모르시나? 워낙 귀한 분이라 그런 것까지는, 못~해? 

 

이거 한 번 보실래요? 한국의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詩에서 이리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목동은 왜 이름이 없었을까? 전 아직도 그게 궁금해요.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죠? 신분차별이 제도화된 시대에, 목동을 굳이 ‘꽃’이 되게 할 필요는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은 생각, 없었어요? 

 

제가 삐뚤어진 아이라 그런 거겠지만, 목동의 ‘이름 없음’이 괜히 아팠어요. 개인의 정체성을 무시한 것 같고, 차별을 내면화한 행위 같아서.  


신분제는 자기 집단과 선천적으로 다르고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집단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 이땅에서도 신분이 낮은 계급에겐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죠. 이름조차도 지을 수 없는 불가촉천민이 있었거든요. 목동이 그런 신분이었던 건가요? 양을 치는 목동이 그렇게 하찮았던 건가요?  

 

귀족가문의 교양 있는 영애였을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별이 쏟아지는 그곳에서 목동의 이름을 불러줬다면, 참 좋았을 뻔 했어요. 아가씨가 목동이라는 구체적 실존에 대한 존엄을 보여줬다면, <별>은 더욱 빛을 발했을 것 같은데. 누구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지만, 아가씨만은 달랐다면, 목동의 마음이 더욱 잘 전달됐을 거라고요.ㅠ.ㅠ


그런데, 혹시 그것 생각해 보셨어요? 목동이 진짜 바랐던 것!

 

물론 아가씨가 그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나 신경은 없었겠지만, 전 목동이 사랑을 할 누군가가 필요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목동의 순수함이 안타까운 건, 신분제라는 벽이 그의 사고를 지배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에요. 순수가 순수 그 자체로 빛나기보다 사회적인 산물 같아서요.


아마도 그는, 아가씨를 뫼시면서 성스럽고 순결한 생각을 잃지 않으려는 강박관념에 묶였을 지도 모르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스무 살 열혈 청년의 몸이 간직한 자연스러움을 표현하지 못한 거요. 물론 아가씨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고백을 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 나잇대 남자의 몸과 마음이 자연스레 표현되지 못한 것 같아요. 아가씬 어땠는지도 궁금하고요.

 

아, 말이 길었네요. 사실, 아가씨가 영화에도 짜짠, 나와서 반가웠었어요. 

 

<화성으로 간 사나이>.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목동 어깨에 기대, 밤하늘 별을 보고 코~자더니, 화성이야기로 돌아오셨더라고요. 서프라이즈~ 그런데, 보다보다 울화통 치밀어서 이렇게 닿지도 못할 편지를 써요. ㅠ.ㅠ

 

영화는, 시대가 바뀌어서인지, 아가씨의 가정환경이나 태어난 곳이 다르더군요. 귀한 아가씨에게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하고,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약간은 초라한 시골집을 고향으로 했고요. 스테파네트란 이름도 ‘소희’(김희선)라고 바꾸고 말이에요.

 

목동은 별반 바뀐 것 없이 환생한 것 같았습니다. 아, 중요한 변화라면 목동에게 ‘승재’(신하균)란 ‘이름’이 부여됐더군요. 사랑을 지키는 파수꾼 노릇을 자처하는 건 여전했지만 말입니다. 첫사랑을 평생 가슴 속에 간직하는 순수한 남자. 우와~ 목동의 이미지, 딱 그대로이더군요. 아가씨는 이미 이렇게 환생할 거라는 것, 다 알고 있었죠?

 

아가씨, 근데 그거 아세요? 호르몬에 대한 일부 연구결과. "‘사랑’의 유효기간은 2년뿐,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면 뇌 속에서 일어나는 ‘사랑’이라는 현상은 더 이상 화학반응의 작용을 멈춘다."

 

그리 따지자면, 목동은 그 오래 전부터 얼마나 사랑을 이어간 거죠? 놀라울 따름입니다. 아가씨는 참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렇죠? 전생에 나라를 구하거나 곗돈을 타지 않는 이상,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어쨌든 세월이 바뀌어도 동화로 엮어진 것은 비슷하더군요. 극적인 장치는 더 곳곳에 포진해 놓고 말이에요. 수몰 직전의 외딴 산골마을, 시골과 도시로 이분화된 심성의 갭, 엇갈리는 엇박자의 사랑... 특히 설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은 영상까지 감안한다면 말이죠. 책을 보며 상상만 했던 그런 장면이~ 우와, 이~뻐~ 아가씨도 완전 이~뻐~

 

아가씨도 세월따라 변신을 시도했는데, 제가 당시 10대의 심성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까닭일까요? 세월이 흐르면 원래 그리 되는 걸까요?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건 아닙니다, 아니고요. 아가씨(소희)나 목동(승재)의 이야기가 여전히 전근대적인 채로 이어졌기 때문이에요.  

 

시골과 도시. 무슨 1960~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인 시대도 아닌 마당에, 그 둘을 떡하니 갈라놓고 심성을 그리 후지게 대비시켜 놓다니요. ‘농촌=순수, 도시=비정’ 이런 도식적인 방정식은 식상하고 진부한데다 너무 상투적이지 않아요? 그런 구도, 아 정말 무성의해 보여요. 

 

아울러, 아가씨(소희)의 소원대로 승재가 나루터를 지키고 화성으로 떠난다는 발상은 꼭  ‘관객모독’하는 느낌까지 받게 해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요? 목동 대신 우체부하면서 멀쩡하게 잘 지내던 양반이, 아무리 아가씨가 한때의 좋은 감정을 그대로 묻어달라고 했기로서니, 그걸 버림받았다고 생각했기로서니. 아, 짜증~

 

이야기, 한여름 밤의 꿈같았습니다. 아가씨의 사랑, 승재의 사랑, 그 사랑 모두 매력없고 흡입력도 없습니다. 아가씨는 승재가 화성에서 영원히 아가씨를 바라보며 산다는 말을 곧이 받아들일 것도 없잖아요. 혼자 웃고 앓다가 예견된 결말처럼, 죽음으로 마무리하다니. 죽음이 무슨 ‘전가의 보도’도 아니고. 사랑을 위한 죽음을 그렇게 희화화하는 건 억지스러웠어요.

 

아가씨나 목동의 변신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신분사회의 관습과 전형을 그대로 옮겨왔단 생각도 들더군요. 전통적 신분제가 무너진 대신 유사신분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대입시켜 보자면, 서울로 이주한 ‘주인마님’을 향해 시골에 남은 ‘비복’이 처량한 신세한탄을 하는 것 같은? 그리고 그 유사신분제의 벽 앞에서 꼬꾸라진 나약한 영혼에겐 원래 의도했을 ‘순수’의 때깔도 별로 드러나질 않아요.  


이전과 다름없는 동화(童話)인데, 세상 간을 좀 봤다고, 예전처럼 그 내용에 동화(同化)되지 못하는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아가씨나 목동은 그대로인데, 저만 달라진 것 같아요. <별>이 마냥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아프면서도, 그 행간에 묻은 봉건적 신분제의 구조를 읽어낼 수 있어서 다행이기도 해요.


<별>은 이제 제겐, 맥없는 별빛 소나타 같은 이야기가 됐습니다. 괜히 아가씨의 부아가 치밀 소리를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아가씨도 마냥 온실 속의 화초로만 자라진 않았겠죠?

 

목동의 안부도 궁금하지만, 그 사람 여전히 신분이 주는 무게에 짓눌려 있진 않을까, 걱정도 돼요. 좋습니다. 털어놓죠. 제겐 이제, 과거의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없습니다. 목동의 순수도 시대착오적이고요.

 

어쩌다보니, 불만투성이 작별의 편지가 되었지만, 그만큼 과거 <별>을 사랑했었던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봐주세요. 더 이상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마음에 담지 않기로 한 남자의 아쉬운 작별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이젠 고합니다.

 

굿바이, 스테파네트.

 

(P.S. 제가 패러디를 해서, 어른이여러분을 위한 쌍칼 아저씨판 <별>을 만들면 어떨까요? 허락해 주실래요? 제가 너무 음흉하고 발랑 까졌죠? ^^; 그나저나, 이 영화에서의 (신)하균이 형은 <브레인>과 완전 180도 다른 표정이에요. 놀라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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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끊고 성적이 올랐어요 - 자기주도학습 4000시간의 실험과 기적
정영미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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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인사십'(마흔)을 목전에 둔 동창들과 모임을 할라치면, 화제는 더 이상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 즉, 중년을 향하고 있는 우리들은 '나'를 은폐엄폐하거나, 순정한 자신의 욕망은 골방으로 밀어넣는다. 아니, 실종됐다. 고작 말하는 욕망은, 따지고 들면 자신의 것이 아니다. 주류사회가 요구하는, 그래서 주입된 타자의 것이다. 

 

이제 그들과 나누는 대화의 주류는, 집(아파트 시세)이나 직장(에서의 출세나 퇴직시점) 혹은 아이들에 대한 것이다. 좋은 아빠(의 조건 등)를 드물게 이야기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교육, 아니 정확하게는 사교육 비중이 가장 높다. 영어유치원이 어떠니, 학원이 어떠니, 교육비가 어떠니, 등등이 물결을 치고 꼬리를 문다. 이것은 결국 집, 주식 등과도 불가피하게 연관을 맺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이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서느냐, 대부분 그것도 아니다. 그저, 이러저러해서 돈이 얼마가 들더라, 이 정도다.

 

결혼도 않고, 자식도 없는 나로선, 그 대화에서 약간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온갖 걱정 앞에 내가 끼어든다. 사교육의 무쓸모, 선행학습의 폐단 등을 주창하는데, 그들은 늘 이렇게 종결한다. "니도 결혼하고, 애 낳아서 키워봐라." 철 없는 소리, 멋 모르는 소리 지껄이지 말라는 그들의 충고(?)다. (이런 고마울 데가. 청순하게 욕 나와주신다. 샤방.)

 

그러나, 그들의 충고에 마냥 동의할 수 없다. 비록 나는 아이가 없어도, 그들의 아이들은 곧 나의 조카들이다. 나는 조카들이 이 무지한 아빠들의 손아귀에서 사육당하길 원하지 않는다. 나의 동창들이라지만, 그들은 깨놓고, 이미 사교육의 노예다.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으며 자신의 교육관을 갖고 있지 못하다. 생각하지 않는 죄. 

 

그들은 사교육이라고 일컫지만, 정확하게 그것은 사육이다. 학교로도 모자라, 세상이 아닌 학원이라는 사각의 프레임에 아이들을 가둔다. 그 아이들, 양계장에 갇혀 알만 낳는 난형성 닭과 무엇이 다른가. 거칠게 말해서, 자신의 아이들이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부모 맞나?

 

나는 그들 일부에게 이 책을 권한다. 너희들이 아이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보내는 학원, 그것이 과연 일류 아이를 만들까? 학원 끊어도 죽지 않아! 학원 다니지 않는다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좋아. 학원 다니지 않아도 성적이 내려가긴커녕 올라갈 수 있어.

 

그 명제, '거짓' 같다고? 아니 '참'으로 증명한 것이 이 책이다. 2010년 5월, 고1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진 위험한 실험. EBS 다큐프라임 < 공부의 왕도 >는 '사교육 없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을까'를 놓고 4000시간에 걸쳐 실험을 했다. '자기주도학습'이 가능한지,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에 대한, 21명이 참가한 담대한 실험이었다.  

실험은 학원부터 끊는 사교육 정리부터 시작했다. 학원에 길들여진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도록 만들었다. 당연히 불안증 따랐다. 이땅은 남들 다 하는데 안하면 불안이 증폭되는 사회 아니던가. 학생뿐 아니라, 부모, 교사까지 사교육 불안증이 닥쳤다. 그렇다면 실험은?

결과는, 올레~ 아이들이 달라졌다! 교사도 달라지고, 부모도 달라졌다. 모두가 달라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달라졌다기보다 원위치를 찾았다. 학원을 안 가니, 어찌할 바 모르던 학생들이 스스로 움직였다. 공부할 이유를 찾았다. 자연 성적도 올랐다. 뭣보다 가장 중요한 결과가 나왔다. 아이들에게 미소가 퍼졌다.

이 실험, 사교육(이라고 쓰고 사육이라고 읽는)공화국에 건네는 파열음이다. 책을 보면 학원은 만병통치약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좀 더 깊이 생각하면, 학원은 악(惡)이다. 아이가 스스로 서지 못하게 만드는 악. 그것은 결국 인생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그러니까 명백하다. 학원, 끊어도 산다.

 

아무리 그래도 학원 안 보내면, 뒤처지는 것 같다고? 책을 좀 더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책은, 그러니까 실험은 증명한다. 학원을 보내지 않아도 성적이 올랐다. 물론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개별 특성에 맞춰 자기주도학습을 하도록 만드는 것.

 

우리의 아이들은 절대적으로 지쳐 있다. 세계 어느 나라 학생들보다 더 오래 교실에 붙잡혀 있는데도 학원까지 가야한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참으라고 하니, 대한민국은 점점 미쳐가고 늙어간다. 그러다보니 만날 필요한 것이 위로가 될 수밖에.

 

독학이 아니다. 자기주도학습이다. 삶은 스스로 감당해야 하고 자신이 꾸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부모들은 왜 그것을 잊고 사나? 시행착오도 삶을, 자기주도학습을 만드는 과정이다.

 

책은 자기주도학습의 목표도 뚜렷하게 제시한다. 그것은 단순히 성적을 올리기 위함이 아니다. 성취감을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이들의 생은 길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부모의 조급함이 아이를 미끄러지게 만든다. 시간이 필요하다. 책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예전으로 돌아가면 결국 시간 낭비. 성과를 얻기 전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고 책은 강조한다. 긴 여정, 무수히 많고 다양한 일들이 생겨나겠지만, 그것 모두 인생이다.

 

나는 내 동창들이 자신들의 이야기, 즉 '나'에 좀 더 집중했으면 좋겠다. 그것은 곧 아이들이 스스로 생을 꾸릴 수 있게끔 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아이, 학원 보낸답시고, 자기들 등골도 휘어지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망가진다. 이 무슨 '너 죽고 나 죽고'의 시나리오인가. 학원이야말로 '등골 브레이커'가 아니고 뭔가.

 

남인사십, 그네들이 삶에 지쳐 나가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이땅은 더 이상 지쳐선 안 된다. 학원부터 끊자. 아이들은 성적 오르고, 어른들은 성적(性的)으로 왕성해질 수 있다. 최근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평균 성관계 횟수는 주 1.04회로 조사대상 13개국(34세 이상 남녀) 가운데 최하위였단다. 대한민국의 활력을 돋게 하기 위해, 학원을 끊자. 상관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자신에게 집중했던 동창들 좀 찾고 싶다. 예전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녀석들과 만나고 싶다. 그들을 학원에 뺏긴 현실은 슬프고 우울하다. 그들 대부분, 아직 모른다. 학원 때문에 자신의 생에서 그 자신이 유폐되고 실종됐음을. '나'라는 서사를 잃은 그들 때문에 나도 덩달아 슬퍼진다. 미친 존재감까지 바라지 않는다.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의 총명함을 되찾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나 여기 있다'고, 그 존재만이라도 드러내다오. 

 

아 여보게, 정신차려 이 친구야. 우린, 아직 살아갈 날이 많다고! 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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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본능 - 불, 요리, 그리고 진화
리처드 랭엄 지음, 조현욱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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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왕, 제우스는 어째 위대함보다 쫌생이 같은 면모가 좀 더 드러난다. 불을 ‘숨카놓은(숨겨놓은)’ 것만 해도 그렇다. 그만큼 불이 유용해서겠지? 제우스는 혼자 뭔가 꿍꿍이를 갖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많은 자식을 낳은 걸 보니, 불장난을 했던 것도 같고. 신들의 신치고는, 불 갖고 무슨 장난을 쳤는지, 재미있는 신이야.


그런 제우스의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 그는 제우스의 장난감인 불을 훔쳤지만, 제우스처럼 숨카놓고 장난치지 않았다. 인간에게 불을 내줬다! 그는 혼자 불장난을 할 생각이 없었는지, 제우스의 쫌생이 기질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지 모르겠으나, 냉큼 불을 건넸다. 덕분이었을까. 인간은 불을 통해 문명의 문을 열었다. 굳이 따지자면,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맨 처음 문명을 가르친 장본인. 참고로, 프로메테우스는,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물론, 쫌생이 제우스가 그걸로 끝낼 리는 없었다. 복수. 판도라를 보냈다.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가 그녀에게 뿅 갔다. 판도라를 아내로 맞았고, 그 유명한 판도라의 상자는 여기서 탄생했다. 인류는 제우스의 저주로 불행을 맞이해야 했다. 실은 그것이 불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참고로, 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의미.


알다시피, 프로메테우스는 형벌을 받았다. 코카서스 바위산에 쇠사슬로 묶였다. 낮이면 제우스가 보낸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신세. 아파, 마이 아파, 간이 아파. 간 때문이야~ 물론 밤이면 간이 다시 회복되는 쳇바퀴. 곧, 영원한 고통의 굴레.


당사자들이 불 갖고 장난을 치는 동안, 그렇다면 인간은? 프로메테우스가 깔때기였던 것인지, 인간은 추위와 맞설 수 있게 됐다. 무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청동과 철의 시대를 불러왔다. 그리고 하나 더, 음식을 요리할 수 있게 됐다. 《요리 본능》의 저자 리처드 냉엄은 요리할 수 있게 된 것에 주목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주면서, 요리 대접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불이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것은 온기와 빛뿐만이 아니다. 뜨거운 음식과 안전한 물, 마른 의복, 위험한 동물로부터의 보호, 친구에게 신호할 수 있는 수단, 심지어 마음의 평안까지도 제공한다.”(pp.22~24)


리처드 냉엄은 불로 음식을 만드는 화식이 인류의 진화를 가져왔다는 가설을 내놓는다. 자연 그대로의 것, 생식에 대한 예찬이 지금 종종 흘러나오지만, 그는 화식 예찬에 더욱 적극적이다. 생식은 먹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에너지 전환에서도 화식만큼 효율적이지 않다. 화식은 인간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줬다. 그가 주목한 것은 이것이다. '음식을 익히면 우리가 그로부터 얻는 에너지의 양이 늘어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불로 요리하기’는 우리가 먹는 양식의 가치를 높이고 우리의 몸과 두뇌, 시간 사용 방법, 사회생활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p.14)

 

추가된 에너지는 생존율과 번식률을 높였다. 유전자를 널리 퍼트렸다. 해부학적 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생리작용은 물론이요, 생태, 생활사, 심리, 사회 변화, 익힌 음식이 지닌 파괴력이었다. 물론 가설이다. 랭덤은 인류가 익힌 음식을 먹기에 알맞은 치아와 창자를 갖춰서 익힌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익힌 음식을 먹는데 적응하면서 짧은 치아와 짧은 장을 갖게 됐다고 주장한다.  

 

그럴 듯하다. 랭덤은 익힌 요리의 가치를 극적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독보적으로 큰 뇌를 가질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부실한 육체에 빛나는 정신력을 부여해 준 것이다." 가히, 이 정도면 요리를 향한 숭고한 숭배다. 그게 자신의 가설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는진 몰라도. 

 

그러나 이 책, 대중들이 보기엔 아카데믹하지 않나 싶다. 아니 내가 과문해서 그런 건가? 좀 더 쉽게 풀어쓸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단어나 내용이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먹는 것 갖고 왜 이러나, 이 사람! 고개를 끄덕일 만한 내용 충만하지만, 중간중간 턱턱 막히는 아카데미 앞에 나는 프로메테우스의 고뇌를 생각했다. 간 때문이야~ 간 때문이야~


그러다, 남녀 역할 분담과 결혼과 가정의 형성 등의 대목은 흥미로웠다. 6장(요리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리니)와 7장(요리하는 인간의 결혼 생활)이 그것이다. 여성들의 입장에선 화식이 웬수이자, 원흉일지도 모르겠다. 요리라는 이름의 향기로운 냄새와 맛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부엌에 유폐했는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요리를 해야한다며 생에서 실종됐는가.  

 

랭덤에 의하면, 화식은 여성을 집에서 요리하게 만든 주요인이다. 남자가 요리를 할 때도 드문 간혹 있으나, 가정에서의 요리가 여성의 몫이라는 건, 놀랍게도 문명 여부와 상관없이 일관된 규칙이란다. 그는 세계 전역의 소규모 사회를 조사해, "조사한 모든 사회에서 여성은 가족들에게 매일 식사를 제공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결론을 낸 제인 콜리에와 미첼 로살도의 연구도 언급했다.

 

어떤 사회에서는 미혼 여성이 남성에게 음식을 제공한다면 약혼 제안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실상 추파를 던지는 셈이란다. 문득, <봄날은 간다>가 떠올랐다. 은수(이영애)가 상우(유지태)에게 은근슬쩍 툭 던진다. "라면 먹고 갈래요?" 라면의 용도에 대한 새롭게 눈뜬 그때가 있었지, 흠흠. 그러고 보면,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시절, 내게도 자신이 만든 음식을 같이 먹자며 추파(?)를 던지던 소녀가 있었는데, 나는 그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던 기억.

 

뉴기니 보네리프족의 경우엔, 여자가 그들의 주식인 사고야자를 식사로 준비해서 남자에게 주면, 그녀는 남자에게 시집간 것으로 간주된단다. 음식과 결혼 혹은 성관계의 연계는 어디에서나 일상적일 수도 있겠다. 하긴 식욕 중추와 성욕 중추는 바로 옆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지 않는가. 보네리프족 남자가 머리에 꽂고 있던 사고야자 포크를 빼서 여자에게 보여주면 성관계를 하자고 요청하는 것이라니, 사회마다 지닌 음식의 함의란 참 재미있는 것이다.

 

그래서 랭덤은 화식을 통해 남녀가 서로 보호해 주는 배우자 관계의 유대 체계가 신속하게 진화했을 것이라고 본다.

 

화식은, 남녀 관계에서 남자에게 좀 더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은 남성의 권위애 매우 취약하게 됐다는 것이다. 남성 지배문화가 자리한 동력으로서의 화식.

 

"화식은 여성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었고 자녀들을 먹여 살릴 수 있게 해 주었지만, 동시에 남성 지배 문화가 강요하는 종속적 역할을 새로이 떠맡도록 하는 덫이 되었다. 그리고 남성이 문화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새로운 제도를 창조하고 영속화하였다."(p.228)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주지 않았다면 여성은 요리에 얽매이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어찌 보면, 여성들에게 불은 판도라의 상자였던 셈이다. 재앙을 함께 얻은 셈인가?


그래서 나는 요리하는 남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굳혔다. 나는 사랑에 종속되고 싶은 남자니까!ㅋ 내게 있어, 요리는 공동의 몫이다.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으면서 종속되는 관계를 위한. 그래서 지금은 커피를 요리하지만, 더 많은 요리와 맛있는 요리를 사랑하는 여자에게 제공하고 싶다. 《요리 본능》은 그런 나의 본능을 일깨운다.

 

랭덤과 다른 나의 결론은, 요리는 사랑이다.

 

다시 한 번, 장석주의 詩를 꺼내본다.

詩의 마지막,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보리라."

아무렴. 첫사랑을 잃지 않으려면!

그러니까, 부디 당신도. 남자라면 그리 하고, 여자라면 그런 남자를 만나시라. 건투를 빈다.

요리가 인생사에서 중요한 이유다. 요리본능! 

간을 쪼이고 있는 프로메테우스에게 간에 좋은 요리라도 만들어줘야겠지?

프로메테우스에게 깔맞춤 요리가 있을 텐데, 누가 알고 있다면 알려주소.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으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 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보리라

 

                              - 장석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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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스틸 - Real Stee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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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원했다. 딱 하룻밤. 원나잇만 같이 보내자고. 격정적이고 격렬하며 가슴 뛸 일이니, 원나잇, 원나잇만!

뭐, 원나잇스탠드? 유후~ 앙큼하게 그런 상상을. *^.~* 최근 팡 터졌던 일화도 떠오른다. 한 어른이 중딩에게 물었다. 호텔에서 파는 게 뭘까요? 중딩 왈, "하룻밤이요." 아, 이 스스럼 없는 직설의 향연. 물론 그것은 원나잇스탠드 아닌 액면 그대로의 것일 게다. 나는 그 중딩의 답변을 전해듣곤 팡 터졌었다. 닳을 대로 닳아버린, 찌들만큼 찌든 수컷남자인 나는 그 질문에 뭐라고 답할까? 도 궁금했다.

그런데, 원나잇을 간절히 원하는 이 남자의 애원은 아들을 향한 것이다. 최악의 아빠였으나, 이번만큼은 잘해보고 싶다는 아빠. 자신이 양육할 수 없는 아들, 부자 이모와 이모부가 양육권을 지닌 아들과 어쩌면 생애 최고로 짜릿한 원나잇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그들의 고철덩어리 '아톰(ATOM)'과 함께. 


<리얼 스틸>. 사과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의 전직복서 찰리 켄튼(휴 잭맨)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팔리기까지 한 아들 맥스 켄튼(다코다 고요)의 엎치락뒤치락 감동작렬 부자(父子)드라마! 라고 규정하고 싶진 않다.  

 

나는 마냥 부자의 이야기로만 보질 못했다. 둘은 그냥 한대의 고철로봇을 공유한 사업적 파트너이기도 했으니까. 

찰리는 끝내 챔피언엔 오르지 못했으나 인상적인 경기를 펼쳤던 전직 복서다. 말하자면, 심심한 챔피언보다 버라이어티한 도전자. 지루한 챔피언 벨트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도전을 했던 복서. 

뭐, 때로 인생은 그런 것으로도 충분할 수도 있다. 지루하게 챔피언 벨트를 차고 있다가 권태에 빠지느니, 반짝하는 순간을 지니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허나, 그 순간만 움켜쥐고선, "내가 왕년에~" "나도 해봐서 아는데~" 따위만 읊는 것도 참 비루하고 너절한 짓이다. 찰리는 그렇진 않으나 좀 궁색하긴 하다. 은퇴한 뒤 로봇복싱으로 근근히 먹고사는데, 신통치 않다. 시합은 번번이 지고, 돈은 없으며,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도 표현할 줄 모르는 먹통이다.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인생. 99%다.

파트너이자 아들인 맥스의 등장이 그를 달라지게 한다. 그렇다고, 없는 아들이 갑자기 생겼다고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고 이를 앙 다무는 건 아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달라지는 건, 사소하고 작은 승리에서 비롯된다. 번번이 실패만 하던 그에게 이 사소한 성공은 다르다.

고철더미에서 건진 로봇, 아톰의 처지는 찰리와 다르지 않다. 폐기처분된 것이나 다름없던 아톰에게 파이터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건, 맥스다. 어리지만, 훌륭한 사업파트너. 로봇과 교감할 줄 아는 아이의 마음을 어찌 욕하리오. 그런 어린 시절을 관통했던 자라면. 

그리고 <리얼 스틸>은 익히 예정된 수순을 따른다. 고철 로봇파이터의 승승장구. 비루하고 궁색하던 찰리의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오는가. 맥스의 천진난만함과 우격다짐은 최강 로봇파이터 제우스와의 경기를 성사시킨다. 

생각해보라. 폐기직전의 고철과 세상 모든 첨단(돈)으로 무장한(쳐바른) 명품의 대결. 자, 누구 편을 들겠는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당신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겠는가. 승패? 물론, 중요하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만큼 99%의 우리를 옥죄는 것이 있으랴. 그런데도, <리얼 스틸>은 그것을 뛰어넘었던 <록키>를 뒤따른다. 모방한다.
 


따지고 보면, <리얼 스틸>은 인생 역전을 꿈꾸는 비루한 자들의 환상이다. 고철더미에서 꽃 피기, 개천에서 용 나기, 그로기 상태에서 카운터블로를 날려 역전하기. 인생 한 방을 바라는 99%의 통쾌한 역전극. 일종의 마약이다. 남들 못해도 너라면 (죽어라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살살 꼬드겨 불구덩이로 볏짚 짊어지고 뛰어들게 만드는.

심지어 이 영화, 보수적이다. 실패한 복서 찰리와 버려진 아들 맥스, 고철덩어리 아톰이 뭉친 오합지졸이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최첨단 기술로 로봇복싱계를 주름잡는 제우스(와 기업체)를 상대로 '사실상' 승리한 이야기. 그러니, 번번이 실패하는 니들도 (우리가 던져주는) 희망을 가져!, 라고 말한다.  

뭣보다 거슬리는 건, 아시아인에 대한 나쁜 편견을 은연 중에 주입한다. 제우스(와 기업체) 뒤에 있는,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가기 위해 물리쳐야 할 상대(적)로 묘사한 인물들이 아시아계(인도, 일본)다. 과장된 몸짓과 서툰 영어를 구사하고, 악의 섞인 표정과 비열한 웃음을 짓는다. 백인 부자의 기적을 위해 아시아인을 악인 비슷하게 상정한다. (맞아, 이 영화는 디즈니가 만들었지!)

그렇게 뻔하고 상투적인 이야기인데, 나는 그 고철덩어리 아톰(과 찰리)에게 그만, 우리 99%의 모습을 투영하고야 말았다. 쓰러질 때마다 나는 "Wake up(일어나)"을 외쳤고, 레프트 라이트 어퍼컷, 외치는 프로모터가 됐다. 아톰이 다른 로봇을 제압하거나 제우스가 삐걱거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아!!!   

<리얼 스틸>은 99%가 1%를 점령하는 내용의 영화다, 라고 하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 영화를 그리 보는 건 오독이다. 그럼에도 왠지 오독하고 싶었다. 이 미친 시대를 정면돌파하기 위해선, 그런 오독의 낭만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아톰이 어퍼컷을 날릴 때, 찰리가 셰도우 복싱으로 복서의 본능을 되찾을 때, 속이 다 시원했다.

두 사업파트너의 짜릿한 원나잇은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맥스는 수영장도 있고, 스파도 있는 안락한 부자 이모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찰리는 좀 더 의기양양해져서 인민의 챔피언(People's Champion) 아톰을 데리고 로봇복싱쇼를 전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민을 위해서!

(영화의 번역은, 'People's Champion'을 '시민의 챔피언'으로 하고 있었는데, 글쎄 좀 불만이다. people을 인민 혹은 민중으로 해줬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 흠...)  

허나, 그러면 어떤가. 그들에겐 그토록 짜릿한 원나잇이 있었는데. 그 한순간으로도 생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게 때론 인생이다. 혹은, 이런 것?

사랑하는 여자에게 키스하기 위해 1200마일을 달려가는 것. 찰리가 베일리(에반젤린 릴리)에게 그랬다!!! 베일리가 물었다. 키스하려고 1200마일을 달려온 거야? 찰리 왈.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쉬파, 이 오글거림 돋는 대사, 휴 잭맨이 대수롭지 않게 하는데, 이 자가 하니까 오글거림 없이 그냥 깔맞춤이다. 잘 나고 볼 일이군. 된장. 센스, 그냥 돋는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사랑하는 사이인지 아닌지, 다소 헷갈렸던 두 사람의 관계. 이 짧은 장면과 대사로 내겐 모든 것이 정리됐다. 두 사람의 애정이 얼마나 단단한지 엿볼 수 있었던, 그리고 그 한 순간만으로도 충분할 법한 인생. (이정도 여자라면, 나도 그런다, 뭐!!!)

그리고 떠올랐던 한 순간.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에서 워싱턴 시애틀로 내달렸던 그때 그 순간... 그때의 나도 1200마일 정도는 내달린 건 아닐까.  

영화를 보고, 한 마디 툭 던졌다. 복싱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글쎄, 마냥 자신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이토록 가슴을 끓게 하는 복싱, 과거에 분명히 있었고, 지금도 있으리라 믿고 싶어졌다. 슈거 레이 레너드가 이 영화의 복싱 슈퍼바이저를 했단다.

마지막으로 휴 잭맨, 이 남자. 콩으로 팥죽을 쑨다고 해도 믿고 말 이 남자의 얼굴. 멋지다, 이 남자. 울버린은 잊어도 좋다. 이 남자, 이젠 찰리 켄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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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 파스타 - 남자, 면으로 요리를 깨치다
권은중 지음 / 바다출판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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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010년, 내가 가장 사랑한 드라마는 <파스타>였다. 아니, 넌 라임과 주원의 <시크릿 가든>에 열광했던 거 아녀? 하고 되물으면, 아니, 난 <파스타>의 손을 주저함 없이 들어준다. <시크릿 가든>, 좋았지만 <파스타>의 폭풍 매력을 넘어설 순 없다.

<파스타>가 끝나고서도, 후유증은 한동안 갔다.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릴 때마다, 나는 중간에 멈춰섰다, 아니 그것을 꿈꿨다. 붕셰커플의 짠한 키스가 있었던 건널목 키스 때문이었다. 건너편에서 나의 붕어(극중 서유경(즉 공효진)의 별명이었다)가 건너오고, 중간에 멈춰선 나는, 그녀의 입술을 훔친다. *^^*  

아, 부끄러버랑~ 그래, <파스타> 후유증!

허나, <파스타>의 주인공은 '파스타'가 아녔다. 파스타 배틀이 펼쳐지고, 파스타 블라블라 했지만, 파스타는 그저 거들 뿐. 파스타에 마음을 뺏기진 않았다. 사실, 그리 파스타가 맛있게 보이지도 않더라. 파스타를 뒤켠으로 밀어낸 로맨스와 주방의 정치가 돋보일 뿐. 

그래서, 그땐 몰랐다. 파스타가 향으로 승부하는 음식일줄이야. 그 다음이 맛이고, 온기란다. 그러니, 파스타에 반드시 허브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알 턱이 있나. 오래된 기억이지만, 파스타를 좋아했던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늘 까르보나라만 시켰고, 나는 한때 까르보나라에 중독됐다. 크림이 달달하기만 했던 그때.

알다시피, 파스타는 이탈리아의 라면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는 대신, 탱자가 회수를 건너면 귤이 되는 경우라고나 할까. 한국에선 파스타가 라면급이 아닌 엘레강스한 요리 비슷하게 세팅됐다. 약간의 허영과 사치가 가미된 것도 사실이고. '이탈리아'가 주는 에스프리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표준화된 조리과정과 재료를 덕분에 전 세계에 쉽게 퍼졌고, 그 때문에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이 파스타다.

안동의 양반 가문인 듯한데, 권씨 성을 지닌 저자(권은중)의 파스타는 좀 다르다. 표준화된 조리과정과 재료를 존중하지만, 존중이 고집에 머물지 않는다. 좀 더 창조적으로 나아간다. 말하자면, 권은중이라는 진짜배기 재료를 넣는다. 먹는다는 것에 대한, 그의 철학을 보자.    
 
"똑같은 요리라도 먹는 환경과 사람이 달라지면 당연히 그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 음식이 가진 고유한 특성도 현지에 맞게 적용할 때 빛을 발하는 법이다."(p.249)

알 덴테(al dente). 파스타 쫌 안다는 사람들이 거들먹거리는, 알 덴테. 즉, 너무 부드럽지도 않고 과다하게 조리되어 물컹거리지도 않아 약간의 저항력을 가지고 있어 씹는 촉감이 느껴지는 정도로 파스타의 최적 상태로 일컬어진다. 중간 정도로 설 익혀 꼬들꼬들하고, 치아에 씹히는 맛이 있는, 파스타의 헌법(?)이다. 꼬들꼬들한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할 만한 상태다. (커피도 꼭 그런 게 있다. 자신만의 미각이나 후각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와서 들이대는 거들먹들이 꼭 있다.)

그런데, 이 안동 남자는 알 덴테를 좋아하지 않는다. 퍼진 라면을 좋아하는 자신의 입맛따라 스파게티도 약간 퍼져야 제맛이라고, 파스타 헌법에 반기를 든다. 한 마디 더 붙인다. "퍼진 면발에 양념이 좀 더 잘 묻어난다."

오호~ 자신의 입맛을 알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면의 상태를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파악하고 있다. 파스타를 하면서 이 안동 남자는 좀 더 자신을 잘 알게 되고, 변했단다. 파스타가 삶에 틈입하면서 생긴 긍정적 변화. 파스타가 사람을 바꾼다.

파스타는 한 세계도 바꾼다. 생활 패턴뿐 아니라 사고방식도 변했다. 파스타는 거들뿐, 이 아니라, 파스타가 바꿨다! 이 남자, 주말에 골프를 끊은 대신 신선한 해산물을 사러 시장이나 마트로 향한단다. 유명 파스타집을 기웃거리지도 않는다. 거기보다 10배(자칭)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20여년 만에 청바지를 다시 입었다. 요리하는 사람은 위대한 창조자라는 경외심까지 갖게 됐다. 멋진 변화다. 

커피 덕분에 바뀐 나로선 이런 변화가 남의 일 같지 않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임상실험으로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먹는 것을 다룬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멋진 일인지도 안다. 저자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재료를 고르고 요리를 만들고 사람들과 나눠 먹는 과정은 예술을 창작하고 발표하는 감흥과 다를 게 없었다."(p.7)

이탈리아 요리사들은 이렇게 말한단다. "복잡하면 이탈리아 요리가 아니다." 복잡하지 않은데서 창조가 나온다. 그래서, 이탈리아 요리의 가장 큰 특징은 창조성이다. 독학으로 다룬 파스타는 그래서 느끼하지도 않고, 거들먹거림이라곤 없다. 좀 안다고 젠체했다면, 이 책은 목에 걸렸겠으나 그런 게 없다. 안초비 대신 멸치젓을 쓰고, 간고등어로도 파스타를 만들 수 있음을 알려준다. 표준화됐다고 그대로 따라야 할 이유는 없는 법이다. 

자신만의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요리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다. 창조는 곧 자신만의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아니겠나. 그래서, 나는 지금-여기의 어떤 트렌드를 당최 이해할 수 없고, 불편하고 불만이다. 하나 같이 똑같은 먹을거리를 내놓는 이 땅의 거대 체인들 말이다. 표준화된 재료와 조리 방법, 하나같이 똑같은 사무적인 접대 태도로 그들은 어딜가나 비슷한 것만 내놓는다. 먹을거리뿐 아니라 인테리어까지 대동소이한 그곳에서 우리는 획일화된다. 거대 자본이 원하는 바다. 비약해서 그들은 파시즘이다. 질서정연함과 반듯반듯함으로 효율 자체가 목적인. 개성이나 창조성은 당최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파스타 문화의 정수는 재료 자체의 고유성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다양한 재료를 써서 즉흥적으로 요리하는 창조성에서 우러나온다."(p.166)
 
그것은 조미료와 같다. 저자의 말마따나, 조미료는 모든 음식의 맛을 평등하게 만든다. 기계적인 평등. 사람들은 그것에 중독되고, 그것이 진짜 맛인양 착각한다. 생의 감각을 하나씩 잃고 있는 셈이다. 오호 통재라~

감칠맛 제대로 나는 된장찌개를 끓이기 위해선 조미료가 아닌 계절 나물과 해산물 등을 넣어야 하듯, 파스타도 그렇고 모든 음식이 그래야 한다. 커피 역시 마찬가지다. 재료 고유의 맛이 가장 중요하다. 먹을 것을 다루는 사람은 그래서 달라야 한다. 창조성의 근간에는 이런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 무엇보다 음식을 다루는 태도와 자세가 중요한 이유다. 

 "좀 더 건강한 식재료로 파스타의 원형질을 잘 살릴 방법은 없을까? 나는 이런 고민이야말로 요리하는 사람의 기본자세라고 생각한다."(p.119)

독학으로 했다지만, 저자의 파스타는, 비록 맛을 보진 못했지만, 그 핵심을 꿰뚫는 심미안과 요리를 대하는 태도 덕분에 맛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커피를 만드는 나는, 커피를 통해 그것을 깨달았으니까. 더구나 미슐랭 가이드의 별을 받고 싶은 사람도 아닌 그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요리를 나누는 소소한 즐거움을 안다. 

그래서, 나는 이 심정 또한 충분히 안다. 이해한다. 나 역시 그랬고, 그러하니까.  

"요리를 하다 보면 막연하게라도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꼭 요리해 줘야지, 라고. 오감을 최대한 동원하는 창조적 작업인 동시에 혼자 해내야 하는 고독감 때문인지 요리에 빠지다 보면 누군가에는 인정받고 싶은 바람이 자연스럽게 찾아온다."(p.142)

내가 커피를 하는 이유, 커피가 혁명을 추동했니, 커피가 소통과 관계의 매개가 됐니, 커피가 세계의 불공정함을 보여주니, 세계의 점들을 연결해주니,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니, 블라블라해도, 닥치고 커피 한 잔! 그 한 잔은 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내려주고픈 것이다. 곧 내 마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꼭 내려주고픈 것이 내 커피다. 미안하지만, 그 커피를 위해 다른 사람들은 임상실험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나 할까.ㅋ  

아주 재밌고 흥미진진한 책은 아니지만,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을 알려주는 책이다. 맞아, 맞아 고개를 끄덕인 부분도 많았다. ‘서로 다른 세상이 만나 +α가 되는 세상을 만든다’ 는 의미의 알파라이징(alpharising). 커피 만드는 남자가 파스타 만나는 남자(책)을 만나 +α가 되는 되는 세상을 꿈꾼다는 의미에서, 이 책을 나는 '파스타 알파라이징'이라고 명명한다.

나는 기대한다. 저자가 꿈꾸는,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조용한, 물가 근처라서 창밖 멀리 바다가 강이 굽어보이는 동네에 있는 작은 파스타집. 저자가 이 파스타집을 찾아오면 달달한 커피 서비스를 약속한다는데, 어찌 가지 않을쏜가. 기왕이면 그 집에 갓 볶은 좋은 커피를 들고 찾아가서 (권은중) 주인장에게도 권해주리라. 파스타향과 커피향을 맡고 예쁜 여자들이 몰려들겠지? 아, 기분 좋다.

p.s.

1. 오타가 있다. 67페이지의 붇지(->붓지), 안팍(->안팎)이다. 2쇄에는 고치겠지?

2. 저자는 종종 '촌스럽다'는 표현을 쓰는데, 영 걸리고 좋지 않다.
저자가 적을 둔 신문사(한겨레)에서 이봉수 시민편집인(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이 한 번 지적한 적도 있었다. 촌스럽다는 표현은 대체로 '세련되지 못하고 어수룩하다'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데, 그것은 '촌'을 부정적인 곳으로 인식하는 도시내기들의 오만이자 거들먹거림이다.

실상 '촌'이란 말 자체는 그렇지 않은데도 '촌스럽다'는 말이 맥락에 따라 부정적 의미로 자주 쓰이는 것이다. 이봉수 시민편집인은 '촌스럽다'는 단어를 남발하는 것에 대해 언어의 공공성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한 탓이 아닐까?라고 지적했다. 신문기자인 저자는 그래서 더욱 주의했어야 했다. 2쇄를 찍을 땐, 다른 표현으로 고쳐졌으면 좋겠다.

(* 출판사에서 책을 받아서 쓴 리뷰이나, 
그것과는 무관하게 리뷰어가 자기 꼴리는 대로, 즉 소신대로 쓴 글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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