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한 이정록 시집 아버지학교(열림원, 2013)를 받았다

먼저 읽는 <시인의 말>이 가슴에 와 박힌다.


아버지는 쉰여섯, 입춘에 운명했다. 소한 지나 입춘까지, 원고지라는 멀고도 척박한 땅에 아버지를 모셨다. (어머니학교를 포함하여) 두 시집을 나란히 읽어보니 성숙시집같다. 생의 여로가 이렇게 이어진 듯싶다. 두 학교를 모두 마쳐도 졸업은 없다. 죽어서도 무릎 아픈 학생부군이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학교의 불량학생들이다. 내가 먼저 회초리를 맞겠다.”(6~7p)


시집을 읽으면서 이정록 시인이 먼저 맞는 회초리에 나도 내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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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문을 두드리다 - 오늘의 중국 문화와 예술 들여다보기
인지난 지음, 김태만 옮김 / 학고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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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베네에서 인지난의 홀로 문을 두드리다(獨自叩門)(학고재, 2012)를 읽다.

오늘의 중국문화와 예술 들여다보기라는 비교적 명징한 부제에 비하여 다소 막연하고 문학적 느낌마저 자아내는 홀로 문을 두드리다중국 예술 평론서 출판사상 최다 쇄수 기록 보유라는 설명도 붙어 있다. 책이 많이 판매된다는 건 그만큼 주목받는다는 의미 외에도 그 영향력이 크다는 말도 된다. 인지난(尹吉男)이라는 저자 이름만 알고 있던 나로서는 도대체 얼마나 팔렸기에?’라는 약간의 궁금함과 거부감이 함께 버무려진 정도의 관심으로 책을 펼쳤다. 학고재라는 출판사의 신뢰성이 조금 더해지긴 했지만 중국 현대미술의 거품 가운데 하나라는 이미지를 떨칠 수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한국어판 서문을 읽으면서 나의 선입견은 깨지기 시작하였다. 이 책이 지닌 영향성과 인기도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저자는 예술의 감응과 그것을 포착하여 글로 쓰는 비상한 재주를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글들은 가장 소박한 표현에 기초하고 있는 만큼, 대단히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다. 이 때문에 다른 난삽하고 거친 평론들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5p)

구체적이면서 직접적이라는 말은 작품에 대하여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얘기를 하지 않고 구체적인 언급, 직접적 표현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게 하려면 그만큼 작품에 대한 분명한 주관과 작가 의중을 꿰뚫는 통찰력, 면밀한 검토, 충분한 예지력이 충족되어야 가능하다. 미술관련 책들을 살펴보면 막연함과 이해 못할 용어와 표현들이 난무한다. 구체성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안지난은 1993년 서문에 부제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놓았다. 이 설명만으로도 저자가 어떤 생각과 의도로 연재원고를 썼고, 이를 단행본으로 묶어 출간하게 되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오늘의 중국 문화와 예술 들여다보기라는 부제에서 들여다보기라는 것은 가까이서 자세히 살핀다는 의미다. 첫째로는 시간상 현재와 매우 가깝다는 의미고 둘째로는 공간상 나와 매우 가깝다는 뜻이다. 결국 나는 가까운 곳에서 마음으로 느끼는 자연적 친밀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생활과의 일치를 추구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에서 언급한 작가나 작품은 주류에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생활했던 그 순간에서는 매우 특별한 것으로서, 내게 무엇인가 쓰고 싶다는 동기를 부여해 나의 생활을 한층 더 풍부하게 해줬다. 들여다봄으로써 시선이 명확해질 뿐 아니라 앞을 똑바로 볼 수 있다. 이런 근거리 관찰을 통해 얻은 성과를 돌이켜보면 수많은 글 속에 생활사와 연관된 이야기나 상황들이 엮여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15p)

안지난의 말대로 들여다보기시선이 명확해질 뿐 아니라 앞을 똑바로 볼 수 있다.” 반면 시간과 공간상 너무 밀접하다는 건 거리감과 객관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문제점도 노출시킨다.


그러나 예술작품 감상에 있어서 객관성이 가능할까. “예술을 논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조류학(鳥類學)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13p)는 저자의 말처럼 예술은 완전히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일”(345~347p)이다. 예술감상은 마땅히 개인적인 직접 체험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당연히 마음에 와 닿는 예술작품이 글을 쓰도록 추동하는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나의 태도는 매우 주관적일지도 모른다. 예술 작품이나 예술 현상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고 해서 모두 결과로 남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마음과 부딪혔을 때라야 글로 남을 수 있다.”(13p)

오늘날 출간되는 수많은 미술평론서들이 막연할 뿐만 아니라 감동적으로도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마음에 부딪힌작품들, 쓰고 싶다는 동기부여 없이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글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쓰고 싶다는 간절함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작품에 대해 들여다보기를 시도하기란 당연히 쉽지 않다.


    


원서의 대중적 반응과 그 가치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 가진 것은 인지난이 주류가 아닌,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대하면서, 혹은 다가가서 들여다보면서 중국 미술의 순간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점이다.

어차피 생존하여 현재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살피는 일이라면 오늘 한국의 현재에서도 연관성이 있을 것이고, 그러할 때 인지난의 시선과 관심은 우리에게도 유효할 수 있을 테니까.

 

이 책의 가치는 역시 현대 미술의 현장에서 생동하는 기운을 느끼게 해주는 데 있다. 물론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시기로 보면 20년이 지났지만, 그 역시도 현대, 당대의 저자와 호흡하던 시기의 작가와 작품들이다.

저자는 북경대학에서 고고학을, 중앙미술학원에서 중국미술사학을 전공하였다. 이러한 학문 과정을 그가 오늘의 중국 문화와 예술들여다보게한 바탕이 되었다.

나는 당시 중앙미술학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옛것[]’지금의 것[]’이라는 거대한 두 영역에 대해 관찰하기 시작하면서, 그 옛날 사마천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변화를 통달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7p)

현재는 반드시 과거가 이룬 역사의 집적이나 정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가 있다는 자체로 많은 새로움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법고창신이 왜 중요한가. 바로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과거를 아는 것이요,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과정에 통달한다면 현재를 보는 눈은 그만큼 더 밝아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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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시학 - 스물네 개의 시적 풍경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3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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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은 동파지림(東坡志林)에서 왕유의 시와 그림을 두고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라고 평하였다. 시에서 그림의 요소를 보고, 또 그림에서 시적 요소를 본다는 의미이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시··화 삼절을 높이 꼽았고, 또 지향해 왔다. 시와 서, 화가 상통 조화를 이루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서화(書畵) 이론에서 서(), () 용어를 시()로 바꿔 적용시켜 보면 참으로 묘하게도 서화론이 시론으로도 손색이 없다. 반대로 시론에 시 대신 서화를 적용시켜도 서화론이 된다. 물론 시, , 화 고유의 특성과 이론 체계가 따로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 , 화가 본질적 측면에서 교감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안대회 교수의 궁극의 시학(문학동네, 2013)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을 심도 깊게 분석한 궁극의 시학20111년 동안 매주 네이버 카페에서 온라인 강의 형식으로 연재한 것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나는 연재 사실을 진작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시간과 정성 부족으로 모두 챙겨 읽지는 못하였다. 연재 원고를 단행본으로 묶어 출간하는 것은 우리 출판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처럼 관심 있는 주제를 다룬 글이 7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묶여져 나온 것에 반가움이 앞선다.


시품은 스물네 가지 시의 풍격을 논한 글이다. 웅혼(雄渾), 충담(沖淡), 섬농(纖穠), 침착(沈著), 고고(高古), 전아(典雅), 세련(洗鍊), 경건(勁健), 기려(綺麗), 자연(自然), 함축(含蓄), 호방(豪放), 정신(精神), 진밀(縝密), 소야(疏野), 청기(淸奇), 위곡(委曲), 실경(實境), 비개(悲慨), 형용(形容), 초예(超詣), 표일(飄逸), 광달(曠達), 유동(流動) 이렇게 24개의 각 풍격마다 41248자로, 1,152자로 쓴, 짧은 시학서이다. 저자는 당나라 말엽의 시인 사공도로 의심 없이 알려져 있었지만, 사공도가 아닐 수 있다는 견해가 1992년 스티븐 오언에 의해 제기되었고, 지금은 사공도의 저작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우위에 있다.


시품이 지닌 의미를 저자는 해제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시품은 그 추상성 덕분에 중요한 시학의 진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는 인정을 받았다. 그러한 방식은 인간과 예술과 문학을 직관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으로 판단하고자 한 동양 고유의 방식이자 심미적 판단의 틀이다. 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최고의 진리를 표현한 시학의 모델로서 시적이기까지 한 시품은 비평임에도 불구하고 감상해야 할 일종의 문학작품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시품을 이해하는 것은 지난날의 시 전반을 이해하고 나아가 동아시아 미학의 정수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8p)


시품은 시를 논할 때 빠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의 창작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축윤명은 시품을 서()로 썼고, 문팽은 시품을 새겨 이십사시품인보(二十四詩品印譜)를 남기는 등 시품을 내용으로 한 화보와 인보가 여럿 제작되었다. 시품은 명·청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일찍부터 크게 영향을 끼쳤다. 정선과 이광사는 그림과 글씨로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시품을 그림으로 제작한 것 가운데 한두 가지만 예로 들어보겠다. 시품을 그림으로 옮기는 첫째 원칙은 형상성이다. 구체적 이미지를 통하여 추상적 의미를 획득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시적 대상의 중심을 잘 보여주기 위해서는 구체적 형상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나 구체적 형상을 보여주지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더 중요하다. 시품각 풍격을 그린 반시직의 그림이 정선, 장부의 그림보다 더 추상적인 것은 초이상외 득기환중(超以象外 得其環中”, 형상 밖으로 훌쩍 벗어나 존재의 중심을 손에 쥔다.”는 시학을 극적으로 표출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시품이 동아시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것일까? “시품이 지닌 미학과 표현 방식에는 당시 예술가들의 심미안을 강하게 자극하는 요소가 있었고, 그 미학은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18p)


그렇다면 오늘날 시품은 어떠한 미학적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가를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 대답이 바로 궁극의 시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시품은 시의 창작과 감상을 목적으로 한 시학서이다. 그러나 시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서예, 회화, 전각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아가 삶의 방향과 태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현대사회에서의 문인적 삶은 전통사회와는 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당연히 현대사회에 전통적인 문예 가치와 미학을 그대로 적용시키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품에서 제시한 풍격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술적, 예술가적 사유와 풍모에서 소홀하게 여겨왔거나 상대적으로 덜 중시되었던 풍격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일깨우고, 나아가 전통시대에 동아시아 미학의 중요한 부분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궁극의 시학시품의 각 풍격에 대한 해설에 그치지 않고 이 책의 저술 목표인 동아시아 지성인의 미학과 그 궁극적 담론인 인생의 품격을 제시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을 성취해냈다는 데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자구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꼼꼼하게 분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세한 고증까지 마다하지 않은 자세가 바로 이 책에 신뢰를 부여하게 한다. 나아가 시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림에도 큰 비중을 두어 시품을 소재로 한 그림들을 하나하나 분석하였다.

개인적으로 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은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의 이광사의 글씨이다. 정선의 그림에 3년 후 서예로 시품 각 풍격을 쓴 이광사의 글씨는 전, , , , 초서의 다양한 변화로 풍격에 부합하는 서예 작품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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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게도 나는 오랫동안 내 인생의 한 권의 책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져왔다. 나를 기다리는 책, 내가 그 책을 향하여 긴 시간을 걸어왔을 것 같은 책이 분명 있으리라는 생각을 품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책은 없다. 단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꿨다는 얘기는 간혹 들었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말은 아니다. 모색과 탐독 과정에서 임펙트 강한 책은 있을 것이다. 전환의 계기가 된 책, 새로운 싹을 틔운 촉매로서의 책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통째로 바꾸는 한 권의 책을 만나는 경험은 드물 것이다.


아까운 책 2013(부키, 2013)을 받아들면서 내가 미처 알아보지 못한 책 가운데 나를 기다리는, 내가 기다려온 한 권의 책은 없는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해보았다. 결국에는 내가 읽은 모든 책이 합해져서 한 권의 책을 이루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어쩌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는 미련한 짓과 나를 붙들고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 미련이 나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책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까운 책 2013》에 수록된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라는 부제가 붙은 다시, 그림이다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오랫동안 바라보기,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기

예술과 관련짓지 않더라도 관찰과 관조는 대상의 핵심을 명징하게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책을 통하여 인문과 사회, 예술과 문화, 인간과 과학을 오랫동안,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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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은 소리의 다채로움을 누리게 해준다. 태아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외부의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청각은 인간이 외부의 상황이나 정보를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통로 가운데 하나이다. 외부 환경 파악에 시각이 압도적인 부분을 차지하지만 상상력을 전개하는 데는 청각이 더 효율적이다.

시각에 비하여 청각은 의지적 차단이 불가능하다. 시각은 스스로 눈을 감음으로써 보는 것을 막을 수 있지만 소리는 듣는 이에게 자율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물론 듣기에도 경청(listen)과 듣기(hear)와 같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청각의 작용은 그냥 들리거나 귀 기울여 듣거나 하는 차이일 뿐이지 듣는 것을 충족시키는 소리는 변함이 없다. 소리를 통하여 사물의 근원성에 도달할 수 있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소리에는 생명성이 존재한다. 한문학자 배병삼은 원래 ()’이 망가져버린 자리는 소리()’가 치유하는 법이라고 했다. 현대사회에서 소리의 필요성을 적확하게 언급한 것이다.

소리와 관련된 시들을 살펴보면서 한국 현대시에는 시각적 요소가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지만, 청각 요소도 상당히 많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장철문 시 흰 국숫발」(시집 <무릎 위의 자작나무>, 창비, 2008.7.25 초판1)은 그야말로 소리의 향연이다. 소리만으로 이렇게 풍성한 잔치 풍경을 표현해낼 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에 이른다. 청각의 시각화이다. 미리 말하면 흰 국숫발에는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진 높은 시적 완성을 보인다. 제목의 은 이미 시각 요소를 전제하고 있어 시각과 청각이 공존한다. 여기에 리듬감이 더해지면서 시적 운율미를 한층 높였다.

827행으로 이루어진 흰 국숫발은 한밤중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마치 국숫발을 뽑고, 이 방 저 방에서 온 가족이 몰려나와 국수를 먹는 모습으로 그려냈다. ‘ 내리는 소리 = 국숫발 뽑는 소리 = 국수를 삶고 나눠 담는 소리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 흰 국숫발이라는 등식을 전제로 한다.

, 이제부터 비오는 소리는 본격적으로 국수를 뽑고, 물을 끓이고, 국수를 삶고, 빨고, 소쿠리에 건져 담고, 그릇에 나눠 담고, 국물을 붓는 과정을 거쳐 국수 먹는 소리로 나아가는 잔치판을 만난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다시 국숫발이라는 소리로 환원한다.

 

슬레이트 지붕에 국숫발 뽑는 소리가

동촌 할매

자박자박 밤마실

누에 주둥이같이 뽑아내는 아닌 밤 사설 같더니

- 장철문 흰 국숫발1

 

지금이야 1급 발암물질인 석면 함량 비중이 높아 점차 사라져가고 있지만 초가지붕을 벗어나 함석지붕을 거친 개량주택의 대표적인 지붕이 바로 슬레이트였다. 오목과 볼록을 반복하는 물결 같은 굴곡이 만드는 홈은 빗물을 잘 흘러내려 처마 아래 흙마당에 일정한 간격의 낙수구멍을 만들기도 했다. 슬레이트 지붕은 빗소리를 잘 들리게 했다. 깊은 밤 가만히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무슨 긴 얘기를 듣는 기분마저 든다.

첫 행 슬레이트 지붕에 국숫발 뽑는 소리란 슬레이트 지붕 위로 내리는 빗소리를 국숫발 뽑는 소리로 규정하고 시작한다. 단번에 은유의 중심부로 찔러 들어가는 수법이 예사롭지 않다. 흔히 시를 배우는 초심자들이 저지르기 쉬운 것 가운데 하나가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것이다. 즉 정황을 하나하나 다 설명한 다음, 그제야 은유에 이르려고 한다는 점이다. 만약 이 시를 슬레이트 지붕에 내리는 빗소리 국숫발 뽑는 소리라고 했다면 첫 행부터 늘어져 시 전체에서 보여주는 통통 튀는 운율미를 제대로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박자박 밤마실” “아닌 밤 사설은 슬레이트 지붕에서 나는 빗소리이다. 그 빗소리는 폭우나 세우(細雨)가 아닌 추적추적 내리는 가랑비일 것이다. 그래야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자박자박 소리를 내며, 길고 길게 끝이 없을 것처럼 뽑아내는 사설 같기 때문이다. 밤마실 나온 할매가 자근자근 풀어놓는 길고 긴 사설에 젖다보면 어느새 밤이 푹 깊어져버린다.

관용구 아닌 밤뜻하지 않은 밤’, ‘뜻밖의 밤의 뜻으로 쓰이지만, 밤의 깊고 그윽한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의도의 측면도 있다. ‘밤마실에서 아닌 밤 사설로 내디딘 어법이 입 안에서 자연스럽게 구른다.

동촌 할매는 고유명사이지만 이 땅 윗세대의 대표적인 인물이요, 시골 노인네의 전형이요, 나눔과 공존의 상징이다. 이후부터의 시적 전개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먼저 공동체의 대표 인물로서 동촌 할매가 지금부터 풀어가는 사설로 봐도 무방하다.

또 다른 하나는 처음 시작처럼 빗소리 그 자체가 국숫발 뽑는 소리요 국수 삶고 건져 나눠먹는 풍광으로서의 상상 전개이다.

 

     

 

배는 출출한데 저 햇국수를 언제 얻어먹나

뒷골 큰골 약수터에서 달아 내린 수돗물

콸콸 쏟아지는 소리

양은솥에 물 끓는 소리

- 같은 , 2

 

한번 국숫발 뽑는 소리를 듣자 식욕이 저 먼저 달려 나간다. 아닌 밤 긴 사설로 깊어지자 배도 출출해진다. 그 해 수확한 밀가루를 반죽하여 막 뽑아낸 국숫발은 그야말로 햇국수의 풋기를 가득 안고 있다. 밀이 자라기까지 햇볕과 비와 바람과 흙의 냄새가 섞여있을 그 햇국수를 얼른 먹고 싶은 것이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이제 본격적으로 국수를 끓일 준비를 한다. 뽑은 국수를 삶기 위하여 수돗물을 받고 양은솥에 끓인다. 그 수돗물은 정수장에서 보내오는 대도시의 수돗물이 아니라 뒷골 큰골 약수터에서 달아 내린 수돗물이다. 흔히 시골의 수돗물은 맑은 계곡물을 막아 만든 수원지나 약수터에서 끌어온다. “뒷골 큰골 약수터에서물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대나무를 쪼갠 홈을 이용하여 수로를 만들거나 호스를 길게 연결한다. 그러한 사실을 함축적으로 담아서 단번에 보여주는 달아 내린이라는 어구가 맛을 더하였다.

뒷골 큰골 약수터에서 달아 내린 수돗물/ 콸콸 쏟아지는 소리/ 양은솥에 물 끓는 소리는 비의 양이 꽤나 많아져서 이제 빗물이 모이면 제법 큰 소리를 내며 흐르는 모양을 그려낸 것이다. 동시에 분주하게 국수를 삶는 역동적인 장면을 잘 그려냈다.

 

흰 국숫발, 국숫발이

춤추는

- 같은 , 3

 

이제 국수가 끓기 시작한다. 양은 솥 안에서 흰 국숫발은 춤을 춘다. 끓는 물속에서 국숫발은 제각각 요동친다. 가는 면발이 꿈틀거리며 끓는 모양은 그야말로 충을 추는 것에 다름 아니다. 때로 느리게, 때로 빠르게, 때로는 일정한 방향으로, 때로는 반대 방향으로 국수는 끓는다.

이 연에서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노는 묘미를 최대한 발휘한다. 3연 첫 행에서 한 번 쉼표를 찍어줌으로써 국숫발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한 단계 상승하는 리듬감을 형성해준다. 2행은 형용사 춤추는하나 만을 씀으로써 긴 여운을 남기는 지속성을 확보하였다. 또한 다음 연 첫 행을 수식해주는 효과를 통하여 자연스러운 연결을 이끌어낸다.

 

     

 

저 국숫발을 퍼지기 전에 건져야 할 텐데

재바른 손에 국수 빠는 소리

소쿠리에 척척 국수사리 감기는 소리

- 같은 , 4

 

국수가 끓기 시작하자 시인의 마음은 조급해진다. 처음에는 국숫발 뽑는 소리에 저 햇국수 언제 얻어먹나하고 기다렸는데, 이제는 끓는 국수의 면발이 퍼질까봐 안달이 난다. 시인의 마음을 알기나 했다는 듯 이제 끓인 국수를 찬물에 빨아 소쿠리에 나눠 담는다. 국수 빠는 장면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끓인 국숫발을 건져 찬물에 담근 후 면발이 차가워져 탄력이 생기면 한 손으로 적당량의 국수사리를 집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국수사리를 훑어 내려 물기를 제거한다. 어느 정도 물기가 제거된 국수사리를 둘둘 말아 소쿠리에 덩이덩이 담는다. 4연은 그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낸다.

국수 빠는 소리”, “소쿠리에 척척 국수사리 감기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그야말로 빗소리는 이 모든 양태를 두루 안고 있다. 천태만상을 빚어내는 빗소리의 조물 능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서리서리 저 많은 국수를 누가 다 먹나

쿵쿵 이 방 저 방

빈방

문 여닫히는 소리

아래채에서 오는 신발 끌리는 소리

헛기침 소리

- 같은 , 5

 

이제 시인은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동천 할매의 누에 주둥이같이 뽑아내는 아닌 밤 사설 같은 국숫발을 수돗물 콸콸 받아 양은솥에 대범하게 끓였는데, 너무 많이 끓인 것이다. 빨아 건져놓고 보니 서리서리 저 많은 국수를 누가 다 먹나하는 걱정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걱정은 단지 기우일 뿐이다. “이 방 저 방에서 쿵쿵 문 여닫히는 소리를 내며 신발 끌고, 헛기침 하며 야참 국수를 먹기 위해 식구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햇국수를 향해 모이는 식구들 장면이 설레는 가슴으로 한 마당 축제장으로 모여드는 구경꾼들 같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실제로 집안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쿵쿵 이 방 저 방” “문 여닫히는 소리가 나지만 실은 빈방으로 있던 것이다. 시인은 슬쩍 한 단어를 집어넣음으로써 모든 할 말을 다 한다. 모름지기 시는 이러해야 한다.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할 말 다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을 아낀다 해서 할 말 다 못하는 것도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단어 하나라도 제 자리에 있을 때 뜻과 상징이 뚜렷해지고 울림을 갖게 된다. “빈방한마디로 인해 아래채에서 오는 신발 끌리는 소리/ 헛기침 소리가 모두 허상임을, 결국에는 시인이 돌아가고 싶은 시간의 한때를 갈구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더 나아가보면 시 전체에서 시인이 이르고자 하는 것을 빗소리를 통해 상상세계로 펼쳐낸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3연과 4연은 각기 첫 행에 능청스러운 질문을 던지고, 나머지 행들은 순식간에 대답으로 보여준다. 시를 전개하는 시인의 솜씨가 일품이다.

 

     

 

재바르게 이 그릇 저 그릇 국수사리 던져넣는 소리

쨍그랑 떵그랑 부엌바닥에 양재기 구르는 소리

솰솰솰솰

멸치국물 우려 애호박 채친 국물 붓는 소리

- 같은 , 6

 

, 이제 사람들이 모였으니 잔치국수를 나눠줄 차례이다. 사람이 많이 모였으니 재바르게 국수를 나눠담는다. 감아놓은 국수사리를 그릇마다 던져넣고, 그러다가 양재기가 바닥에 구르기도 한다. 나눠 담은 국수사리에 멸치국물 우려 애호박 채친 국물을 따르면 햇국수 한 그릇이 완성된다.

6연에서 특히 눈을 끄는 것은 의성어 솰솰솰솰이다. 멸치 국물 우리고 애호박 채친 국물 붓는 소리를 이처럼 잘 표현한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후루룩 푸루룩

아닌 밤 국수 먹는 소리

 

수루룩 수루룩

대밭에 국숫발 가는 소리

- 같은 , 7~8

 

7연과 8연은 다시 한 번 내리는 빗소리의 정체를 확인시켜준다. “아닌 밤 국수 먹는 소리, “대밭에 국숫발 가는 소리이다.

이 시에는 몇 개의 의성어가 등장한다. 자박자박, 콸콸, 쿵쿵, 쨍그랑 떵그랑, 솰솰솰솰, 후루룩 푸루룩, 수수룩 수루룩, 이러한 의성어는 그것이 쓰인 자리에서 가장 적합한 소리를 형성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소리들이 각기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비와 국수를 둘러싼 정경을 그려나가는 시인의 솜씨가 놀랍다.

장철문 시에서 소리는 고향이며, 고향이 지닌 공동체의 근원적인 생동감이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시골의 따스한 한 토막 기억과 여운과 울림이다.

 

장철문 시인에게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소리이다. 그 소리는 간단하지만 간단함이 지닌 생의 끈질김에서 나온다. 그래서 소리는 삶이 만들어낸 수많은 양태이다. 시집 무릎 위의 자작나무에 함께 수록된 다른 시편들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먹는다는 것은/ 세계를 밀고 가는 일이다”<단풍 행렬> 세계를 밀고 가는 그 먹는 일은 공양간 앞에 국숫발처럼 일렁이는/ 젓가락 젓가락짝들”<단풍 행렬>을 만들어낸다. 살아가는 형상은 모두 다르지만 삶을 만들어내는 근원의 힘은 동일한 데서 나온다. 그것은 바로 삶의 소중함이다. 그래서 먹음은 곧 삶의 에너지를 만드는 일이다. 그 먹음을 가장 생생하게 드러내주는 소리, 장철문 시인의 시가 지닌 힘은 거기에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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