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은 소리의 다채로움을 누리게 해준다. 태아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외부의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청각은 인간이 외부의 상황이나 정보를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통로 가운데 하나이다. 외부 환경 파악에 시각이 압도적인 부분을 차지하지만 상상력을 전개하는 데는 청각이 더 효율적이다.
시각에 비하여 청각은 의지적 차단이 불가능하다. 시각은 스스로 눈을 감음으로써 보는 것을 막을 수 있지만 소리는 듣는 이에게 자율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물론 듣기에도 경청(listen)과 듣기(hear)와 같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청각의 작용은 그냥 들리거나 귀 기울여 듣거나 하는 차이일 뿐이지 ‘듣는 것’을 충족시키는 소리는 변함이 없다. 소리를 통하여 사물의 근원성에 도달할 수 있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소리에는 생명성이 존재한다. 한문학자 배병삼은 “원래 ‘말(禮)’이 망가져버린 자리는 ‘소리(樂)’가 치유하는 법”이라고 했다. 현대사회에서 ‘소리’의 필요성을 적확하게 언급한 것이다.
소리와 관련된 시들을 살펴보면서 한국 현대시에는 시각적 요소가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지만, 청각 요소도 상당히 많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장철문 시 「흰 국숫발」(시집 <무릎 위의 자작나무>, 창비, 2008.7.25 초판1쇄)은 그야말로 소리의 향연이다. 소리만으로 이렇게 풍성한 잔치 풍경을 표현해낼 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에 이른다. 청각의 시각화이다. 미리 말하면 「흰 국숫발」에는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진 높은 시적 완성을 보인다. 제목의 ‘흰’은 이미 시각 요소를 전제하고 있어 시각과 청각이 공존한다. 여기에 리듬감이 더해지면서 시적 운율미를 한층 높였다.
8연 27행으로 이루어진 「흰 국숫발」은 한밤중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마치 국숫발을 뽑고, 이 방 저 방에서 온 가족이 몰려나와 국수를 먹는 모습으로 그려냈다. ‘비 내리는 소리 = 국숫발 뽑는 소리 = 국수를 삶고 나눠 담는 소리’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비 = 흰 국숫발’이라는 등식을 전제로 한다.
자, 이제부터 비오는 소리는 본격적으로 국수를 뽑고, 물을 끓이고, 국수를 삶고, 빨고, 소쿠리에 건져 담고, 그릇에 나눠 담고, 국물을 붓는 과정을 거쳐 국수 먹는 소리로 나아가는 잔치판을 만난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다시 국숫발이라는 소리로 환원한다.
슬레이트 지붕에 국숫발 뽑는 소리가
동촌 할매
자박자박 밤마실
누에 주둥이같이 뽑아내는 아닌 밤 사설 같더니
- 장철문 詩 「흰 국숫발」 1연
지금이야 1급 발암물질인 석면 함량 비중이 높아 점차 사라져가고 있지만 초가지붕을 벗어나 함석지붕을 거친 개량주택의 대표적인 지붕이 바로 슬레이트였다. 오목과 볼록을 반복하는 물결 같은 굴곡이 만드는 홈은 빗물을 잘 흘러내려 처마 아래 흙마당에 일정한 간격의 낙수구멍을 만들기도 했다. 슬레이트 지붕은 빗소리를 잘 들리게 했다. 깊은 밤 가만히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무슨 긴 얘기를 듣는 기분마저 든다.
첫 행 “슬레이트 지붕에 국숫발 뽑는 소리”란 슬레이트 지붕 위로 내리는 빗소리를 “국숫발 뽑는 소리”로 규정하고 시작한다. 단번에 은유의 중심부로 찔러 들어가는 수법이 예사롭지 않다. 흔히 시를 배우는 초심자들이 저지르기 쉬운 것 가운데 하나가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것이다. 즉 정황을 하나하나 다 설명한 다음, 그제야 은유에 이르려고 한다는 점이다. 만약 이 시를 “슬레이트 지붕에 내리는 빗소리 국숫발 뽑는 소리”라고 했다면 첫 행부터 늘어져 시 전체에서 보여주는 통통 튀는 운율미를 제대로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박자박 밤마실” “아닌 밤 사설”은 슬레이트 지붕에서 나는 빗소리이다. 그 빗소리는 폭우나 세우(細雨)가 아닌 추적추적 내리는 가랑비일 것이다. 그래야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자박자박 소리를 내며, 길고 길게 끝이 없을 것처럼 뽑아내는 사설 같기 때문이다. 밤마실 나온 할매가 자근자근 풀어놓는 길고 긴 사설에 젖다보면 어느새 밤이 푹 깊어져버린다.
관용구 ‘아닌 밤’은 ‘뜻하지 않은 밤’, ‘뜻밖의 밤’의 뜻으로 쓰이지만, 밤의 깊고 그윽한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의도의 측면도 있다. ‘밤마실’에서 ‘아닌 밤 사설’로 내디딘 어법이 입 안에서 자연스럽게 구른다.
“동촌 할매”는 고유명사이지만 이 땅 윗세대의 대표적인 인물이요, 시골 노인네의 전형이요, 나눔과 공존의 상징이다. 이후부터의 시적 전개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먼저 공동체의 대표 인물로서 동촌 할매가 지금부터 풀어가는 사설로 봐도 무방하다.
또 다른 하나는 처음 시작처럼 빗소리 그 자체가 국숫발 뽑는 소리요 국수 삶고 건져 나눠먹는 풍광으로서의 상상 전개이다.
배는 출출한데 저 햇국수를 언제 얻어먹나
뒷골 큰골 약수터에서 달아 내린 수돗물
콸콸 쏟아지는 소리
양은솥에 물 끓는 소리
- 같은 詩, 2연
한번 국숫발 뽑는 소리를 듣자 식욕이 저 먼저 달려 나간다. 아닌 밤 긴 사설로 깊어지자 배도 출출해진다. 그 해 수확한 밀가루를 반죽하여 막 뽑아낸 국숫발은 그야말로 햇국수의 풋기를 가득 안고 있다. 밀이 자라기까지 햇볕과 비와 바람과 흙의 냄새가 섞여있을 그 햇국수를 얼른 먹고 싶은 것이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이제 본격적으로 국수를 끓일 준비를 한다. 뽑은 국수를 삶기 위하여 수돗물을 받고 양은솥에 끓인다. 그 수돗물은 정수장에서 보내오는 대도시의 수돗물이 아니라 “뒷골 큰골 약수터에서 달아 내린 수돗물”이다. 흔히 시골의 수돗물은 맑은 계곡물을 막아 만든 수원지나 약수터에서 끌어온다. “뒷골 큰골 약수터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대나무를 쪼갠 홈을 이용하여 수로를 만들거나 호스를 길게 연결한다. 그러한 사실을 함축적으로 담아서 단번에 보여주는 “달아 내린”이라는 어구가 맛을 더하였다.
“뒷골 큰골 약수터에서 달아 내린 수돗물/ 콸콸 쏟아지는 소리/ 양은솥에 물 끓는 소리”는 비의 양이 꽤나 많아져서 이제 빗물이 모이면 제법 큰 소리를 내며 흐르는 모양을 그려낸 것이다. 동시에 분주하게 국수를 삶는 역동적인 장면을 잘 그려냈다.
흰 국숫발, 국숫발이
춤추는
- 같은 詩, 3연
이제 국수가 끓기 시작한다. 양은 솥 안에서 흰 국숫발은 춤을 춘다. 끓는 물속에서 국숫발은 제각각 요동친다. 가는 면발이 꿈틀거리며 끓는 모양은 그야말로 충을 추는 것에 다름 아니다. 때로 느리게, 때로 빠르게, 때로는 일정한 방향으로, 때로는 반대 방향으로 국수는 끓는다.
이 연에서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노는 묘미를 최대한 발휘한다. 3연 첫 행에서 한 번 쉼표를 찍어줌으로써 국숫발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한 단계 상승하는 리듬감을 형성해준다. 2행은 형용사 “춤추는” 하나 만을 씀으로써 긴 여운을 남기는 지속성을 확보하였다. 또한 다음 연 첫 행을 수식해주는 효과를 통하여 자연스러운 연결을 이끌어낸다.
저 국숫발을 퍼지기 전에 건져야 할 텐데
재바른 손에 국수 빠는 소리
소쿠리에 척척 국수사리 감기는 소리
- 같은 詩, 4연
국수가 끓기 시작하자 시인의 마음은 조급해진다. 처음에는 국숫발 뽑는 소리에 “저 햇국수 언제 얻어먹나” 하고 기다렸는데, 이제는 끓는 국수의 면발이 퍼질까봐 안달이 난다. 시인의 마음을 알기나 했다는 듯 이제 끓인 국수를 찬물에 빨아 소쿠리에 나눠 담는다. 국수 빠는 장면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끓인 국숫발을 건져 찬물에 담근 후 면발이 차가워져 탄력이 생기면 한 손으로 적당량의 국수사리를 집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국수사리를 훑어 내려 물기를 제거한다. 어느 정도 물기가 제거된 국수사리를 둘둘 말아 소쿠리에 덩이덩이 담는다. 4연은 그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낸다.
“국수 빠는 소리”, “소쿠리에 척척 국수사리 감기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그야말로 빗소리는 이 모든 양태를 두루 안고 있다. 천태만상을 빚어내는 빗소리의 조물 능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서리서리 저 많은 국수를 누가 다 먹나
쿵쿵 이 방 저 방
빈방
문 여닫히는 소리
아래채에서 오는 신발 끌리는 소리
헛기침 소리
- 같은 詩, 5연
이제 시인은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동천 할매의 “누에 주둥이같이 뽑아내는 아닌 밤 사설 같”은 국숫발을 수돗물 콸콸 받아 양은솥에 대범하게 끓였는데, 너무 많이 끓인 것이다. 빨아 건져놓고 보니 “서리서리 저 많은 국수를 누가 다 먹나” 하는 걱정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걱정은 단지 기우일 뿐이다. “이 방 저 방”에서 쿵쿵 “문 여닫히는 소리”를 내며 신발 끌고, 헛기침 하며 야참 국수를 먹기 위해 식구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햇국수를 향해 모이는 식구들 장면이 설레는 가슴으로 한 마당 축제장으로 모여드는 구경꾼들 같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실제로 집안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쿵쿵 이 방 저 방” “문 여닫히는 소리”가 나지만 실은 “빈방”으로 있던 것이다. 시인은 슬쩍 한 단어를 집어넣음으로써 모든 할 말을 다 한다. 모름지기 시는 이러해야 한다.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할 말 다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을 아낀다 해서 할 말 다 못하는 것도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단어 하나라도 제 자리에 있을 때 뜻과 상징이 뚜렷해지고 울림을 갖게 된다. “빈방” 한마디로 인해 “아래채에서 오는 신발 끌리는 소리/ 헛기침 소리”가 모두 허상임을, 결국에는 시인이 돌아가고 싶은 시간의 한때를 갈구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더 나아가보면 시 전체에서 시인이 이르고자 하는 것을 빗소리를 통해 상상세계로 펼쳐낸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3연과 4연은 각기 첫 행에 능청스러운 질문을 던지고, 나머지 행들은 순식간에 대답으로 보여준다. 시를 전개하는 시인의 솜씨가 일품이다.
재바르게 이 그릇 저 그릇 국수사리 던져넣는 소리
쨍그랑 떵그랑 부엌바닥에 양재기 구르는 소리
솰솰솰솰
멸치국물 우려 애호박 채친 국물 붓는 소리
- 같은 詩, 6연
자, 이제 사람들이 모였으니 잔치국수를 나눠줄 차례이다. 사람이 많이 모였으니 재바르게 국수를 나눠담는다. 감아놓은 국수사리를 그릇마다 던져넣고, 그러다가 양재기가 바닥에 구르기도 한다. 나눠 담은 국수사리에 “멸치국물 우려 애호박 채친 국물”을 따르면 햇국수 한 그릇이 완성된다.
6연에서 특히 눈을 끄는 것은 의성어 “솰솰솰솰”이다. 멸치 국물 우리고 애호박 채친 국물 붓는 소리를 이처럼 잘 표현한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후루룩 푸루룩
아닌 밤 국수 먹는 소리
수루룩 수루룩
대밭에 국숫발 가는 소리
- 같은 詩, 7~8연
7연과 8연은 다시 한 번 내리는 빗소리의 정체를 확인시켜준다. “아닌 밤 국수 먹는 소리”요, “대밭에 국숫발 가는 소리”이다.
이 시에는 몇 개의 의성어가 등장한다. 자박자박, 콸콸, 쿵쿵, 쨍그랑 떵그랑, 솰솰솰솰, 후루룩 푸루룩, 수수룩 수루룩, 이러한 의성어는 그것이 쓰인 자리에서 가장 적합한 소리를 형성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소리들이 각기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비와 국수를 둘러싼 정경을 그려나가는 시인의 솜씨가 놀랍다.
장철문 시에서 소리는 고향이며, 고향이 지닌 공동체의 근원적인 생동감이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시골의 따스한 한 토막 기억과 여운과 울림이다.
장철문 시인에게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소리이다. 그 소리는 간단하지만 간단함이 지닌 생의 끈질김에서 나온다. 그래서 소리는 삶이 만들어낸 수많은 양태이다. 시집 『무릎 위의 자작나무』에 함께 수록된 다른 시편들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먹는다는 것은/ 세계를 밀고 가는 일이다”<단풍 행렬> 세계를 밀고 가는 그 먹는 일은 “공양간 앞에 국숫발처럼 일렁이는/ 젓가락 젓가락짝들”<단풍 행렬>을 만들어낸다. 살아가는 형상은 모두 다르지만 삶을 만들어내는 근원의 힘은 동일한 데서 나온다. 그것은 바로 삶의 소중함이다. 그래서 먹음은 곧 삶의 에너지를 만드는 일이다. 그 먹음을 가장 생생하게 드러내주는 소리, 장철문 시인의 시가 지닌 힘은 거기에 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