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성취되는 강력한 조국 수호 능력이나 경제적 발전이란 결국 영혼을 가지지 못한 기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12p)


-《최초의 민주주의 - 오래된 이상과 도전》, 폴 우드러프 지음, 이윤철 옮김, 돌베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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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 선생의 <나 혼자만의 시 쓰기 비법>(푸르메, 2014)에서 읽은 내용이다. 


문학청년이던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서정주가 어느 봄날, 한 술집에서 만났다. 그 무렵 시도 쓰고 소설도 썼던 김동리가 "내가 시 한 편 썼는데 한 번 읊어볼까?" 하고 말했다. 얼근하게 취한 서정주가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거렸고 김동리가 읊었다.

"벙어리도 꼬집히면 우는 것을,"

그 순간 서정주가 무릎을 탁 치면서 "야아, 명작이다,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울다니!" 하고 말했다. 

(311p)


김동리 선생이 읊은 것만 놓고 보면 여운이 부족하고, 서정주 선생의 오독만 따로 떼어서 보면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보면 시적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즐거운 오독(誤讀)이다. 


삶에도 이런 오독이 있다. 

간혹 스마트폰도 오독한다. 내 손가락이 터치한 것과는 다른 내용을 저 맘대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상당히 시적일 때가 간혹 있다. 기특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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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서재 - 길에서도 쉬지 않는 책읽기
이권우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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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 <여행자의 서재>(동녘)을 읽는다. ‘여행’과 '책'에 대한 책이다. ‘여행기 서평집’쯤 되겠다. 

처음에는 내가 읽었던 책이나 관심 가지고 있던 책을 어떤 시선으로 읽었을까 궁금하여 군데군데 골라 펼쳐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속독에 관심을 갖는다. 엄청난 양의 책을 읽을 것을 권하는 책도 수두룩하다. 1년에 365권의 책을 읽고, 심지어 1년 6개월 동안 33권의 책을 펴냈다고 한 저자의 책도 읽어보았다. 귀기울여 들을 만한 점이 있었다. 물론 따르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나는 모든 책을 빨리 읽거나 많이 읽는 것이 능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지독(遲讀)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독의 묘미를 느낄 때가 간혹 있다. 마음에 드는 책이 그렇다. 얼른 먹어버리기 아까워 천천히 음미하며 읽는 재미란 속독으로는 맛보기 어렵다.

혹시라도 내가 속독이나 다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수많은 책을 빨리 읽을 것을 권장한다면 그건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할 책을 골라내기 위한 과정이라고 이해해 주기 바란다.


       


이권우의 <여행자의 서재>를 천천히 읽다가 시선이 종종 멈추곤 하였다. 얼른 도달하기 위해서 급히 쓴 문장이 아니었다. 도보여행자의 걸음처럼 한 발 한 발 단어를 디뎌가며 나아간 문장이었다. 짧았지만 호흡이 가쁘지 않았다. 군더더기를 제거한 문장에는 어떻게든 대상으로 선정한 책을 제대로 수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천천히 문장을 씹어가며 따라가는 묘미를 다시 확인한다.


읽는 사람은 건너뛰며 읽을 수는 있어도 문장을 쓰는 이는 건너뛰며 쓸 수 없다. 한 자 한 자, 한 단어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장을 이어가야 한 권의 책이 된다. 저자의 저술 과정을 따라가듯이 읽는 것. 그러할 때 제대로 저자와 호흡하게 된다. 어쩌면 책을 읽는 궁극적 목적이 그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권우의 글을 읽다보면 책을 현장 중계하는 아나운서와 해설자를 함께 만난다. 그러니 당연히 생생한 전달과 중요한 맥점과 의미를 짚어주는 일이 함께 하기 마련이다. 어떨 때는 생각거리도 던져주고, 또 어떨 때는 무의식 중에 '아, 그랬군' 하는 동감의 말이 튀어나오게도 한다. 과도한 의미 부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역시도 읽는 이의 몫으로 남겨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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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건축전문지 「플러스」가 건축가 22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의 ‘가장 잘 지은 고건축’ 항목에 부석사가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였다.
부석사는 별다른 언급 없이도 조금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 면면을 잘 알고 있을 만큼 너무도 유명한 사찰이다. 부석사를 말하고자 한다면 한이 없을 정도이다. 최고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불교철학을 바탕으로 한 가람배치, 태백과 소백 양백이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하여 그 능선과 봉우리를 앞마당처럼 펼쳐놓은 장쾌한 풍광하며, 답사지로서도 최상으로 분류되는 사찰 아니던가. 시인은 그런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있다. 5연 17행으로 이루어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는 부석사의 세부적인 묘사라든가 느낌을 말하지 않는다. 시인 특유의 남도 서정성을 남성적 톤으로 유장한 가락으로 풀어낸다.


풍광 전체가 끓어 넘치고 자물리고 스러지고 하면서 마침내 “한 우주율로 쓰러”지는 장엄한 광경을 연출해낸다. 부석사에 대해, 혹은 부석사에 가서 쓴 많은 시 중에서 이 시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르러 마침내 뒤돌아서서 무량 펼쳐지는 장쾌한 능선을 마주하였을 때의 느낌과 가장 어울리는 톤으로 시를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맞이하는 풍광은 남도의 서정성을 가득 담은 웅혼한 남성적 가락이다. 1연과 2연은 이러한 장엄한 광경을 시공을 넘나드는 장대함으로 표현해 놓았다. 일상에 지쳐 자잘해지고 자잘해졌던 마음을 일순간에 툭 터지게 한다. 송수권 시인의 시적 특성이 거침없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시인의 초기 시에서 남성적 서정성과 애조를 마주하고선 나는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였다. 소리 내서 읽으면 읽을수록 입안에 감겨오는 우주 만물을 주물럭거려 펼쳐놓는 가락에 전율이 일었다.

 

         

 

천고에 몇 번쯤은 학이 비껴 날았을 듯한
저 능선들,
날아가다 지쳐 스러졌을 그 학 무덤들 같은 능선들,
오늘은 시끄럽게 시끄럽게 그 능선들의 떼 울음이
창해를 끓어 넘친다.

 

만상이 잠드는 황혼의 고요 속에
어디로 가는지 저희들끼리 시끄럽게 난다.
- 송수권 詩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1~2연

 

천고와 학과 능선과 학 무덤과 떼울음으로 표현해내는 풍경은 너무도 크고 너무도 오래어 현세의 풍광이 아닌 것 같다. 황혼의 능선이 저희들끼리 서로 끌며 “어디로 가는지” 아스라이 저문다.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의 상주처인 무량수전에서 바라보는 저 너머에 또 하나의 극락정토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전설 같기도 하고, 한 폭의 관념 산수 같기도 한 이 장면은 부석사가 단지 산비탈에 계단을 이루어 쌓아올린 사찰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창대한 공간에 시공을 넘어서 피어나는 연화정토의 정수이자 화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엄한 우주적 공간을 창출해내야 하는데, 1~2연은 기가 막히게 시간과 공간을 연출해낸 것이다.

 

浮石寺의 무량수전 한 채가 연화장을 이룬
그 능선들의 노을빛을 되받아 연꽃처럼 활짝 벌고
서해 큰 파도를 일으키고 달려온 善妙 낭자의 발부리도
마지막 그 연꽃 속에 잦아든다.
- 같은 詩, 3연

 

그렇다. “학 무덤들 같은 능선들”은 이미 “연화장을” 이루었고, “연화장을 이룬/ 그 능선들”이 보내는 노을빛을 되받아 “부석사의 무량수전 한 채가” “연꽃처럼 활짝 벌”어져 연화정토를 이룬다. 귀국하는 의상대사를 뒤따라 “서해 큰 파도를 일으키고 달려온 선묘 낭자의 발부리도/ 마지막 그 연꽃 속에 잦아든다”. 3연의 “서해 큰 파도”는 1연의 “창해”와 맞물리고, “창해”는 “어디로 가는지 저희들끼리 시끄”러운, “학 무덤들 같은 능선들”과 일체가 된다. 그리하여 선묘낭자는 “연화장을 이룬/ 그 능선들” 위로 파도를 일으키며 달려와 연꽃처럼 번 무량수전 속에 잦아드는 것이다.
결국 풍광 모두가 무량수전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집결은 억지로 빨아들이지도, 그렇다고 모이도록 강제하지도 않는다. 거대한 우주가 율을 이룰 뿐이다.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서서히 서로가 서로에게 겹쳐지고 스며들면서 품어 안는 4연과 5연은 부석사 무량 광대한 세계를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오래 감동을 주는 명장면이다.

 

장엄하다
어둠 속에 한 능선이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또 한 능선이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하는 것

 

마침내 태백과 소백, 兩白이
이곳에서 만나 한 우주율로 쓰러진다.
- 같은 詩, 4~5연

 

      

 

다른 것들을 끌어들여 변형시키거나 나의 것으로 변모시켜 놓는 것이 아니라 서로 포개지고 스미면서 하나가 되는 이 장엄한 장면, 송수권 시인이 추구하는 시 세계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송수권 시인은 시 「대숲 바람소리」처럼 세상 만물이 서로에게 스미고 번져가면서 마침내 “한 우주율로 스러지”는 세계를 지향해 왔다. 이러한 세계는 부석사와 절묘하게 부합한다. 시인은 이 시에서 부석사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해놓지 않았지만 부석사의 가람배치와 건축 사상은 거대한 우주율, 불국토의 구현이 아니겠는가.


부석사 가람은 모두 약간씩 비껴 앉으면서 서로를 맞대응하지 않는다. 부딪혀서 발생하는 대립을 가급적 자재하고 양보하면서 서로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살려주는 구도이다. 아홉 단을 상승하면서 이뤄내는, 극락세계에 이르는 건축 철학의 기조는 상생과 조화이다. 이러한 특성이 21세기에 남은 가장 위대한 고건축이 되게 한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는 순간 이미 부석사는 광대한 자연을 껴안았다가 풀어놓고, 다시 껴안았다가 풀어놓으면서 극락세계로 오르는 장엄한 세상을 펼친다. 그 정상이 9품 만다라 상품상생(上品上生)의 맨 위에 위치한 무량수전이다. 안양루(安養樓) 누각 밑을 지나 마지막 계단에 오르면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의 상주처인 무량수전 앞마당에 올라선다. 1043년, 고려 정종 9년, 원통국사가 중창할 때 지은 무량수전은 아주 간결하면서도 고요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처마 끝을 살짝 들어 올린 팔작지붕은 엄정함 속의 경쾌함, 정(精) 속에서의 동(動), 긴장 속에 감동을 응축시켜 놓았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의 당당함은 그 기둥에 오래 기대서있고 싶게 한다. 그리하여 “한 능선이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또 한 능선이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하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그 자체로 장엄함에 빠져드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단지 시인이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서 바라보는 풍광은 저만큼 떨어져 펼쳐진 거리감 있는 세계가 아니라 저 장엄한 풍광이 곧 무량수전이요, 무량수전이 곧 광대한 우주의 연화장을 이룬 연화정토인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이 기대어 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이 단지 부석사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만도 아니요, 또한 특정 공간으로서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만도 아닌, 불심에 기대어 선 모든 기둥이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부석사의 위치도 절묘하다. 태백과 소백으로 갈라지는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위치한 동시에 “태백과 소백, 兩白이/ 이곳에서 만나 한 우주율로 쓰러”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그러나 태백과 소백산맥 전체를 앞마당처럼 펼쳐놓는 그 지점에 “부석사의 무량수전 한 채”가 “연꽃처럼 활짝” 벌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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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디자인 여행 안그라픽스 디자인 여행 7
지은경 지음, 세바스티안 슈티제 사진 / 안그라픽스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지은경의 <벨기에 디자인 여행>(안그라픽스, 2013)을 읽다. 

벨기에는 작은 나라이다. 경상남북도를 합친 정도의 크기이다. 영토가 작은 이 나라는 묘하게도 네덜란드어를 쓰는 북부의 플랑드르 지방, 프랑스어를 쓰는 남부의 왈로니아 지방, 그리고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도 또 다른 지자체를 이룬다. 그러다보니 세 명의 국무총리로 세 영역의 통치가 따로, 또 함께 이뤄진다. 그럼에도 조화롭고 평화롭다.


벨기에 디자인은 뛰어나다. 그 디자인은 고유성이나 단일성을 고집하지 않는 수용과 유지, 조화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래서 벨기에에서 오래 산 사람들은 벨기에가 작은 나라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벨기에 수도 브뤼셀은 유럽의 수도라고 불릴 만큼 유럽의 정상들이 브뤼셀에 모여 주요한 회의를 하고 정책을 논의한다.

19세기에 벨기에가 국가로 설립될 때 세계에서는 벨기에가 10년도 유지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벨기에는 국제 동세를 면밀히 살핀 다음 식민지 경쟁에 효과적으로 뛰어들었고, 19세기 중반 공업국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심지어 미국의 디자인 평론가 마이클 캐널은 "다음 세대의 디자인 스팟이 벨기에"라고 할 정도로 세계 디자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금 이 시대의 디자인 코드를 읽고 다음 디자인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벨기에가 가진 디자인 이야기는 분명 그 안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10p)




나는 벨기에에 단지 2박3일 머물렀지만, 전통과 현대의 공존, 전통 벽돌 건물과 아르누보 구조의 만남, 오랜 세월과 현대 조명과의 만남은 가히 신비로울 정도였다. 지금 되새겨보면 왜 그렇게 서둘러 벨기에를 지나갔던가 아쉬울 정도이다. 브뤼헤와 겐트, 안트워프에 주저 앉아 오래 머무르며 "시대와 공간의 다양성, 형태들의 상이함에서 균형을 이루며 동시애 전통을 자킬 줄 아는 벨기에 서람들의 지혜"(18p)를 잘 살펴보았어야 했지 싶다. 벨기에를 더 잘 알아야 할 숙제로 남겨두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만 벨기에를 조금 더듬어 보고 싶어서 손에 든 책이 바로 <벨기에 디자인 여행>이다.


컨셉을 디자인으로 맞춘 것은 잘 한 것 같다. 흥미롭다. 저자가 전시 기획자이자 에디터이기 때문이었을까.

다음의 구절에서 벨기에 디자인에 주목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프랑스의 화려함, 독일의 미니멀리즘, 네덜란드 실용주의, 북부 유럽의 담백함이 어우러져 언뜻 이도 저도 아닌 듯 보이지만, 사실은 각 스타일의 장점만을 모아놓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벨기에 디자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동시대인들이 추구하는 문화 성향과 적절한 만남을 이루어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다른 시대, 각기 다른 디자인의 물건들과 오브제들이 모여 산만한 듯 뒤섞여 새로운 스타일이 탄생하고 있다. 이것은 전 세계의 레스토랑이나 카페 등에서 선도적으로 이끄는 인테리이어 디자인 스타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벨기에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이러한 스타일을 누려왔다. 따라서 다음 디자인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 것인지에 대해 고민한다면 벨기에의 현대 스타일을, 그리고 그들이 지향하는 스타일을 한 번쯤 엿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18~19p)


저자는 '벨기에 디자인'이어야 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유럽의 중심에 위치하여 교통의 발달과 교류를 통한 현대문화의 발달을 이룬 지리적 특성, 역사와 언어의 혼란 등 수많은 불협화음을 독특한 강점으로 바꾸었고 다양한 생각과 언어에 따른 분열을 국제화시대에 폭넓은 시각으로 인식한 역사적 배경, 그리고 현실적이며 긍정적 타협정신을 바탕에 둔 벨기에 사상 때문이라고 했다.

저자는 이러한 벨기에의 특성을 밝히고, 첫 장에서 도시 디자인과 아이콘을 살핀 후, 본격적인 디자인 여행으로 접어든다. 요리를 다룬 <테이블 위의 디자인>, <전통 위에 뿌리 내린 패션 실험 정신>, 건축과 인테리어를 다룬 <공간을 위한 디자인 철학>, <디자인 속의 예술과 장인 정신>, <진정성 있는 삶을 향한 디자인>으로 각 장을 구성하였다.


여담이지만 지금 어린 세대들에게 뽀로로는 가히 신적인 존재이다. 울다가도 뽀로로만 틀어주면 울음을 그치니 전래동화의 곶감과 같은 존재이다. 우리 세대가 어렸을 때 즐겨보았던 만화 드라마는 개구장이 스머프였다. 뽀로로 정도의 인기였다. 그 스머프가 벨기에 작가 피에르 쿨리포드가 1958년에 완성한 만화이다.





자, 이제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을 벨기에를 한 번 살펴보자.

먼저 벨기에 맥주가 유명한 것은 누구나 다 안다. 맥주에 한 자부심 하는 독일인들도 좋아하는 맥주로는 벨기에 맥주를 꼽는다. 맥주순수령으로 인해 물과 호프만을 사용해야 하는 독일과 달리 벨기에는 다양한 방법과 재료를 통해 독특한 풍미와 향을 가진 맥주를 만들어내고 있다. 

맥주의 꽃이라고 할 트라피스트 맥주를 우선 꼽을 수 있겠다. 바티칸에서 인정하고 트라피스트수도회에서만 만드는 맥주 트라피스트는 전세계에 벨기에가 6종, 네덜란드가 1종 있을 뿐이다. 그 맛을 보려면 생산량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몇 년 전에 예약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두블(Duvel), 레페(Leffe), 호가든, 오르발 맥주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벨기에 맥주의 다양성에 '언제 저걸 다 맛보나' 싶을 정도이다. 브뤼헤에서 열리는 브뤼헤비르페스티발은 세계 최대 맥주 축제로도 불린다.


벨기에 하면 맥주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초콜릿이다. 품격 있는 맛과 모양은 가히 아트 수준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브랜드는 노이하우스, 마콜리니, 고디바이다. 고디바는 광화문, 삼청동, 홍대, 가로수길, 청진동 등에 있는 전문점에서도 맛볼  수 있다. 

요즘 초콜릿만큼이나 사랑을 받는 것이 와플이다. 벨기에 와플은 그 자체로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든다. 프렌치후라이라 불리는 감자튀김의 원조가 벨기에이고, 홍합요리로도 유명하다.

패션도 빼놓을 수 없다. '레이스의 도시'로 불리는 브뤼헤, 전 세계 다이아몬드 유통 물량의 60%를 담당하고 있는 앤트워프의 다이야몬드의 거리, 세계3대 패션학교로 손꼽히는 앤트워프왕립예술학교를 위시하여, 드리드 반 노튼, 마튼 마르겔라, 엘비스 폼필리오와 같은 디자이너의 명성은 너무도 높다. 


이제 이 책의 제목이자 주제인 '디자인'에 대해 마무리 언급을 할 차례이다. 제목이 '벨기에 디자인 여행'이라고 했지만 저자는 디자인과 무관해 보이는 것들도 꽤나 열심히 설명한다. '벨기에 안내서' 같아 보이는 부분도 있다. 테마를 벗어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저자는 벨기에 디자인을 알기 위해서는 역사와 사회와 문화와 기호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왜? "우리 시대의 디자인은 곧 모든 것"(183p)이라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자신이 몸 담고 살아가는 이 현실의 모든 것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끊임없이 연구와 모색과 창조를 시도해야 한다.


아르누보(새로운 예술) 정신은 세상의 모든 생각, 모든 만남, 모든 현상 속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름다우면서도 실용적이고, 곡선의 부드러움을 한껏 표현하면서도 견고하며, 저마다 독특한 스타일의 표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로 어우러지는 하모니를 지닌다.

벨기에 디자인은 바로 이 아르누보 정신의 산물이다. 그것이 건축이든 패션이든, 가구, 도예, 주얼리, 음식 등 모든 것을 관통한다.

작은 국가 벨기에가 작지 않은 이유이다. 생각보다 크고,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생각보다 유연하며, 생각보다 포괄적이며, 생각보다 실질적이다.


브라질 월드컵 H조에 속한 우리나라는 벨기에와의 마지막 예선 경기를 남겨두고 있다. 1무1패로, 16강 진출 가능성이 매우 낮은 상태에서 벨기에를 상대한다. 현재 벨기에 축구는 시드 배정을 받을 만큼 탑클레스에 올라 있다. 벨기에 축구가 강하다면 그건 각 국가의 축구 특성과 장점이 벨기에의 특성으로 재창조된 것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벨기에를 이기고 희망을 현실화시켜 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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