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런지, 인간의 속성이 그런지는 몰라도 산다는 게 참으로 이상하다. 극단적인 상실 앞에서는 내면이 비워지는 듯한,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한 상실 앞에서는 도저히 일어설 것 같지 않은데 외려 담담해진다. 없다는 것, 빈다는 것이 주는 느낌은 이상하게도 채워짐이나 얻음보다 더 큰 채움의 느낌을 준다. 비우기 이전에 이미 그만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어도 비움의 일이라는 게 채워짐의 느낌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때가 있다. 굳이 『장자』를 읽지 않더라도, 무(無)와 허(虛)의 깊은 의미를 모른다 치더라도 극단적인 ‘없음', ‘잃음'이 새로운 충만을 주는 것은 왜일까.
세상일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어, 오히려 모순되고 상충되는 점이 더 많이 존재하거나 혹은 상황을 더 쉽게 이해시켜 주는 경우도 있다. 가질 수도 있는데 갖지 못한 것이나 가지고 있는데도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에 이르렀을 때 크게 대범해지는 마음을, 그 마음이 이룬 경지를 엿보는 일 역시 새로운 느낌이다.
“본디 내 것이다마는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라는 「처용가」는 현실의 소유를 넘어선 더 큰 소유를 보여주는 예이다. 사람은 당연히 현세적 소유에 관심과 욕심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일반인의 경지를 넘어선 사람이 아닐지라도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마음 가난한’ 삶을 영위하는 걸 볼 수 있다. 물적 가치, 현실적 가치가 결코 전체 가치의 경중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인 것이다.
문태준의 시 「극빈」(시집 『가재미』, 문학과 지성사, 2006)은 그야말로 현실의 필요와 가치 그 너머의 것에 대한 관심이 있고, 심지어 그마저도 놓아버리는 허정의 심사가 시 속에 그려져 있다. 소유와 무소유의 경계에는 늘 있음과 없음의 인지작용이 자리하고 있기에 어느 것을 소유하는가에 대한 관점에 따라 상당히 다른 접근 태도를 보여준다.
문태준 시가 지닌 사라지고 남겨진 것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 눈여겨보지 않고서는 쉽게 만나기 어려운 것들에 대한 집착, 이미 마음 속, 기억 속에만 자리하고 현실에서는 먼먼 곳에 남겨진 것들에 대한 시적 형상화는 놀라운 평가를 받고 있다.
기이하고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글들이 대세를 이루는 현실 한국 문단에서 지극히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가기란 쉽지 않다. 그러면 문태준 시인의 어떠한 측면이 한국 시단의 관심의 첨단에 서게 한 것일까.
시 「극빈」은 바로 문태준 시세계의 저변을 관통하는 사상과 관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시로 관심을 끈다. 1연 21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열무’를 가지고 실물과 그 너머, 소유와 상실을 이끌어낸 탁월한 시이다.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 문태준 詩 「극빈」, 1~4행
시인은 밭에 열무를 심었다. 땅과 가까이 있고, 소일 삼아서이든 먹거리를 위해서든 열무를 심었다. 그러나 열무를 심을 때와는 달리 “게을러” 열무의 사용 효용이 담긴 뿌리와 줄기는 놓쳐버리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열무가 식용으로 쓰기에 적합할 만큼 자랐을 때 수확을 했어야 하지만 때를 놓쳐버리고 결국 식용의 쓰임새가 지나 꽃이 피어버린 것이다.
열무꽃은 수확기를 지나면 자연스레 피어난다. 그냥 두면 된다. 그런데도 시인은 그 꽃을 “가까스로” 얻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작용한다. 첫째는 실용성이 사라지면 존재성 전체가 사라지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담은 의중이다. 다른 하나는 열무에게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뿌리와 줄기만이 아니라 꽃도 있음을 일러주려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더 큰 가치일 수도 있다. 물론 이 두 가지는 표면적으로 이 시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만 “가까스로”란 부사가 묘하게도 시인의 “게으름”을 상쇄시키는 귀여운 행위를 담고 있는 것처럼 여겨져 친근하게 다가온다. 문태준 시인이 사라져가고 빛바래고 낡은 것에 숨결을 불어넣어주는 어법이다.
그렇게 “가까스로” 얻은 “흰 열무꽃이” “공중에 파다하다.” 이렇게 보니 열무꽃을 “가까스로” 얻은 게 아니라 마치 열무꽃이 피기를 기다린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한 것을 보면서 외려 즐거워하는 기색까지 보인다.
여기에서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문태준 시인의 시적 특징이라고 할 편안함, 조용함의 스밈이 어디에서 연유하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1~4행만 놓고 보더라도 어려운 시어, 난해한 해석이 아니라 지극히 쉽고 친숙한 언어로 쓴다는 점이다. 물론 시를 쉽고 평이한 말로 쓴다고 해서 그 시가 지닌 함의마저 얕거나 가벼운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그 쉬움에서 무궁한 해석과 상생과 상징을 이끌어낸 점이 이 시인을 주목하게 만든 이유일 것이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 같은 詩, 5~10행
동네사람들이 묻는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고. 필시 농사짓는 분들일 게다. 그 말에는 나무람과 어이없어 끌끌 혀를 차는 모습이 담겨 있다. 놀림과 신통함도 조금 섞여 있다.
그 물음에 시인은 답을 망설인다. 왜일까? 시인은 분명 “채소밭에 꽃밭을 가”꾼 것이 아니다. 애초의 목적은 열무를 얻고자 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나놓고 보니 열무꽃을 얻은 것도 꽤 괜찮아 보이기 때문에 대답을 망설인 것이다. 심지어 꽃밭을 가꾸려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복합적 심사를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나비가 날아온다. 한 마리만이 아니라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를, 그 한 마리가 또 다른 한 마리를, 그렇게 나비떼를 데리고 왔다. 그래서 둘러보니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마치 동화의 한 장면 같다. 문태준 시인의 시에는 맑고 향기로운 동화적 상상의 요소가 내장되어 있다. 교조적이고 경직되기 쉬운 일반적 상식으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용하고 검박한 상상의 세계가 바닥에 놓여 있다.
꽃에 나비가 모여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얻은 꽃에 나비들이 내려앉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열무의 쓸모를 놓치고 꽃이나 피워놓은 열무밭을 보면서 한심한 어조로 묻는데, 나비는 기꺼이 떼를 이뤄 내려앉는다.
이제 3행의 부사 “가까스로”에 부합하는 정황을 이룬 것이다. 사실 시인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망설이는” 시인 앞에 나비떼가 대신 답해주는 것이다.
나비의 등장은 장면 전환의 역할을 하는데, 사실 시를 써나가면서 논리적인 구조를 반드시 갖춰야 할 필요는 없지만 경우에 따라서 시 전반부에 던져놓은 상황을 뒷받침할 근거 제시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장면 전환은 이러한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 물론 이보다는 시적 환기, 시적 안목을 보여주는 경우로 더 많이 쓰이기도 한다. 시적 승화를 이루는 효과, 즉 시가 될 수 있는 여건을 제시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
다소 비껴가는 얘기지만 현대시들을 읽다 보면 시와 시 아닌 것의 구분점을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시가 될 수 있는 것과 시가 되기 어려운 것의 경계는 뭘까. 시는 ‘시라는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요소를 지녀야 한다. 형식,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과 내용을 담은 시 자체가 지닌 예술적 속성 말이다. 도저히 시가 되지 않을 법한 내용이나 문장도 시라고 버젓이 발표되고, 또 당연히 시라고 읽는다. 그러나 시적 눈이 없으면 시라고 할 수 없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소변기를 뚝 떼어내 전시장에 가져다놓고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부여한 것은 예술 작품의 경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이다. 레디메이드 ‘변기’에 예술적 속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변기를 예술작품을 이끌어내는 작가의 시선과 의미, 행위의도가 바로 예술과 비예술을 가르는 경계인 것이다.
문태준의 시에는 바로 평이한 내용을 가지고 평이하게 진술하면서도 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시적 눈을 간직하고 있다. 참으로 고요한 어조로 전개하지만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은 참으로 번뜩이는 영감으로 독자에게 벼락같은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 같은 詩, 11~16행
시간이란 치우침 없이 모든 만물에 공히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하긴 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생물 모두에게 시간이란 똑같이 적용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똑같은 양의 시간도 대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장주가 이미 갈파하였다. 매미에게 있어 1주일은 찬란한 일생이지만 사람에게 1주일은 80년 생애 가운데 일곱 날에 해당하는 짧은 시간이다. 반면 천년을 살아내는 거목의 입장에서 볼 때 1백년도 채우기 어려운 인간의 나이란 보잘 것 없어 보이기도 한다.
시간은 느낌상 절대 기준보다 상대적일 때가 많다. “3초씩 5초씩” “가녀린 발을 딛고” 머무는 시간이란 인간이 보기에는 한 없이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나비떼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이다. 인간이 보기엔 “짧게짧게” 머문다 싶지만 꿀과 수분을 채집하는 나비에겐 충분한 시간이다.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다. 심지어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기도 하다. 물론 긴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나비떼의 그 “느슨한 시간”을 갖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시인이 “3초씩 5초씩”의 시간 인식을 두고 사람과 나비의 양측을 모두 언급한 것은 ‘부족함’을 드러내기 위한 시적 장치이다.
사실 “열무를 심어놓고”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친 것이 “게으름” 때문이라고 하였지만 12~16행을 읽다보면 또 한편으로는 뿌리와 줄기를 얻기 위하여 재빠르게 몸 놀려야 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다. ‘뿌리와 줄기’가 어디 열무에만 해당되는 얘기이겠는가. 어떤 형태로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놓치지 않으려고, 붙들려고 안달하는, 내게 유용한, 내게 필요한 양식이 아니던가. 단지 먹거리만이 아닌 지위와 명예, 업적과 치적에 대한 집착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측면에 더 가까운 비유, 상징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게을러” 놓치고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는 시인 역시 사람인지라 쉽지 않은 과정에서 “가까스로” 그렇게 얻은 그 꽃에서 마저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은 고사하고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지 못한다. 시인이 왜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선 꽃을 “가까스로” 얻었다고 하는지를 알 것 같다.
시인에게 있어 ‘꽃’이란 얼른 취해야 할 실용적 대상과는 거리가 있는, 그러나 시인에게 있어서는 가치로운 것으로의 대상이다. 결코 “게을러”서 다른 가치 있는 것을 다 놓치고서 남아도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배당된 것이 아니라 시인이 공들여 찾고 얻고자 한 것을 얻은 것이었다.
3행의 “가까스로”라는 부사는 바로 이러한 정황을 모두 내포한 것이다. 그러한 시인의 심사를 알아주기라도 하듯이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아 있는 것이다.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시인의 마음을 나비들이 제대로 알아보는 것만 같다. 그런데 시 말미에서는 반전을 통하여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 같은 詩, 17~21행
문태준 시인의 시 전개 기교의 극치를 보여준다. 품격 높은 반전과 시적 승화. 제목과 맞아떨어지는 성취를 이루기란 쉽지 않다. 시인은 “흰 열무꽃에 내려앉”은 나비들을 보면서 자신에게는 살아가는 동안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채마밭에 채소 가꾸기를 당연하게 여기는 상황에서도 뿌리와 줄기 대신 “가까스로 꽃을 얻었”지만 그 꽃마저 나비 앞에서는 여유와 쉼과 느슨함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시인이 가까스로 얻은 ‘꽃’이란 바로 “느슨한 시간”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있는 것”,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으로 상징되는 내적 여유, 비움, 느림, 고요, 느슨함, 쉼, 내려놓음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얻은 게 아님을 어느 순간 알게 된 것이다. “내줄 곳”과 “내준 무릎”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포함하는 시인 자체에 해당한다. 문법상 “내줄 곳”은 “내준 곳”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미래형으로 처리한 것은 앞으로 그 가치를 포함한 시인 자신을 얘기하기 위함이다.
이제 시의 마무리를 짓는다. 시인은 “내 열무밭은 꽃밭”이라고 분명히 한다. 뿌리와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얻은 꽃밭”이다. 즉 시인이 지향했던 가치 있는 순간을 실현하였지만 그마저도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자신이 얻었으나 자신의 것이 아님을, 곧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라는 고백에 이른다. 자신이 소유하기에는 자질과 준비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어떤 것이든 누리는 자의 것이다. 향유하는 자가 그 가치의 정수를 취하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단어가 “비로소”인데, 이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바라다가 드디어 소망하는 바가 이뤄질 때 사용하는 부사이다. 그러니 시인은 진정한 ‘꽃’의 주인을 기다린 셈인가.
꽃의 용도와 가치를 제대로 파악한 것은 나비이지만, 시인 역시 그것을 기다려 온 것이고, 동시에 시인 자신도 그 가치의 진정한 순간을 찾게 된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는 진술은 꽃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강조하기 위한 방법적 요소이고, 시인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시 제목이 ‘극빈’일까. 문학평론가 이광호가 시집 해설에 이렇게 써놓았다. 참고가 되기에 인용해 놓는다.
“‘극빈’은 사전적으로 몹시 가난하다는 뜻이다. 무엇이 그토록 가난하다는 말인가? (…) 여기서 가난은 보다 깊은 차원을 품고 있다. 채소를 놓쳐버린 현실적인 가난 너머의 또 다른 가난, 남은 꽃밭마저 나비떼에게 잃어버린 또 하나의 가난이 있다. 채소를 잃어버린 가난이 현실의 가난이라면, 꽃을 잃는 가난은 심미적인 가난이다. ‘극빈’은 아마도 현실 가난 너머에서 남아 있는 아름다움마저도 비우는 가난의 경지일 것이다. 그래서 ‘극빈’은 아름다움을 향한 허영과 욕망마저도 비워버리는 지독한 가난이다.”(123~12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