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보인다 청춘 소요 1
김종헌.윤은섭 지음, 정현숙 감수 / 미진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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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예가 보인다>(김종헌, 윤은섭 지음, 정현숙 감수, 미진사)를 읽었다저작권 및 판권란에 서예 역사와 작품, 서예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서예 입문서라는 부제가 있어서 이 책의 성격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핵심을 잘 정리하였으며, 속도감 있게 읽힌다. 서예의 뿌리와 역사를 살펴보고, 서예사에서 중요한 작품과 함께 주요 작가를 핵심적으로 정리해서 얘기해 주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점들이 있다.

먼저 입문서를 표방한 책인 만큼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해 주어야 한다.


도판의 오류부터 지적하겠다.

56쪽 갑골 도판은 거북이 등껍질에 쓴 갑골문자, 은”이라고 캡션을 달아놓았는데 잘못 명기하였다. 이것은 귀복갑(龜腹甲), 거북이 배 껍질에 새긴 것이다. 대만중앙연구원 소장인 이 귀복갑은 상하로 관통한 천리로(千里路)’를 중심으로 중갑, 수좌갑, 수우갑, 전좌갑, 전우갑, 후좌갑, 후우갑, 미좌갑, 미우갑 등 9개의 부위가 잘 나타나 있는 복갑이다.

또한 '은(殷)'은 상왕조의 마지막 수도이므로, 정확한 명칭은 '상(商)'이다. (57쪽 도판의 캡션, 설명, 본문에서 사용한 '은'도 '상'으로 고쳐 써야 한다.) 


캡션 명칭의 오류보다 더 큰 문제점은 이 도판이 뒤집혀진 채 인쇄되었다는 점이다. 정확한 갑골문자를 보려면 거울에 비춰 보아야 한다. 뒤집힌 도판을 가져다 썼거나 편집과정에서 도판이 뒤집힌 것으로 보인다. 저자, 감수자, 편집자 모두가 갑골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데서 생긴 문제이다.

 

군데군데 오탈자가 보이지만, 읽는 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다.

다만 참고문헌에서 상당히 많은 오자가 보인다. 눈에 띄는 대로 지적해 보겠다.

 

김은학, 서예미학과 예술정신, 교륜, 2006”에서 저자명과 출판사 명이 틀렸다. 저자명은 김응학’, 출판사명은 고륜이다.

 

정충락, 서형태배교연구, 미술문화원, 1987”에서 저서명은 서형태비교연구이다.

 

한자 백 가지 이야기의 저자로 언급한 시라카와시 즈카는 이렇게 띄어 써야 한다. “시라카와 시즈카

 

"兪建·陸자 저, 곽로봉 지음, 안진경 서예와 조형분석』, 다운샘, 2004"에서 "곽로봉 지음"이 아니라 옮김이다. 역자 이름도 곽로봉이 아니라 곽노봉이다.(저자 '육자서'의 '자'는 확장한자로, 알라딘 서재에서는 지원이 안 되어 물음표로 나온다. '씨앗 자'로 米+子이다.) 

 

임태승, 인물로 읽는 중국서예의 역사,미술문화, 2006”은 쉼표의 표기 위치가 잘못되었다.

 

동아일보사, 소전손재형서화집, 1977”은 닫는 겹낫표는 있는데 여는 겹낫표는 없다.

 

이서 지음, 이광사 옮김, 이종찬 편역, 서예란 무엇인가, 이화문화출판사, 1998”에서 이광사 옮김이라고 했는데, 이 책은 옥동 이서가 지은 <필결>과 원교 이광사가 지은 <서결>을 이종찬이 편역한 것이다. 따라서 이서·이광사 지음, 이종찬 편역”이라고 해야 옳다(274). 그런데 275쪽에서 다시 이 책을 언급하면서 이광사는 아예 사라지고 없다.

 

다시 볼 수 없는 비장비첩: 희제, 한상봉 소장 북한금석문 100선전2, 한국서예금석문화연구소, 2014”에서 희제뒤의 쉼표는 없어야 하며, 희제’도 희재’로 써야 한다. 희재는 소장자 한상봉의 아호이다.

 

식촌화당식촌화당 편역, 중국명필감상, 일본추산서점, 1976”은 도대체 참고문헌의 정보를 주겠다는 것인지 말겠다는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한글로만 식촌화당이라 표기했으니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겠다. 심지어 편역자 식촌화당’을 중복해서 명기했다. 다음과 같이 해 주어야 정확하다. “植村和堂 編譯中國名筆鑑賞, 日本 秋山書店, 1976”

 

중국이나 대만에서 출간된 저서는 각각 한문 간자, 번자로 명기하고, 일본의 경우는 일본어 약자로 명기해야 한다.

본문에서도 통일되지 않은 경우를 볼 수 있는데, 70쪽과 71쪽 조지겸(趙之謙)의 <전서 사유 급취편 축(篆书史游急就篇轴)>을 간자로 명기하였다. 번자로 명기한 다른 것들과 비교해 볼 때 통일성이 없다.

 

번역본의 경우 저자 이름을 밝히고 지음이라고 명기하였는데, 어떤 경우는 붙였고, 어떤 경우에는 붙이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은 통일시켜 명기했어야 하는 부분이다.

 

한국서예사를 다룬 후반부 <한국서예의 흐름>편은 전반부에 비해 오자가 거의 없다. 한국서예인 만큼 익숙하고 지식에서 정확한 편이라서 그럴 것이다.

다만 186, “심붕은 당대의 명필이자 중국서예가협회 회장입니다.”라고 소개했는데, 심붕은 1991년부터 2005년까지 중국서법가협회 주석이었다. 2010년 명예주석으로 선출되었으니 이 책이 출간될 때는 명예주석이었다. 아무튼 ‘주석을 '회장'으로 명기한 것까지는 좋은데, 고유명사인 중국서법가협회중국서예가협회로 명기한 것은 잘못이다.

 

대충 눈에 띄는 대로 지적하였다. 지적하다보니 조금 심각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래서야 서예가 보이다가도 보이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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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푼 벌면 내일 두 푼 나가고 - 절망의 시대에 다시 쓰는 우석훈의 희망의 육아 경제학
우석훈 지음 / 다산4.0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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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오늘 한 푼 벌면 내일 두 푼 나가고 - 절망의 시대에 다시 쓰는 우석훈의 희망의 육아 경제학>을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경제학자로서 교육 정책, 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과 지적에도 꽤 동감하였다. 


다만 오자가 자주 보였다. 주로 어미나 조사에서 나타난다. 심지어 중복 단락도 있다.

편집자의 잘못이다. 교정은 반드시 의심하면서 봐야 한다. 교정을 보는 자신조차 믿지 않아야 한다. 저자의 글을 의심하면서 교정을 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야 오류가 적은 책이 만들어진다. 


한 권의 책은 저자 혼자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저술은 저자의 몫이지만, 책을 가다듬고, 구성하고, 제목을 정하고, 카피를 뽑고, 디자인 방향을 결정하고, 표지 컨셉, 용지 선택까지 편집자는 한 권의 책이 나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래서 어떤 편집자가 편집했는지가 중요하다. 


심각한 오류도 발견했다. "황금돼지의 해"이다. 저자의 큰 아이가 태어난 해인 2012년은 '흑룡의 해'이다. '황금돼지의 해'는 2007년이다. 책의 꽤 여러 곳에 "황금돼지 해"가 나온다. 저자가 착각했을 것이다. 1차적으로 저자의 잘못이다. 편집자도 당연히 걸러냈어야 했다. (알라딘 책 소개에는 '황금돼지 해'가 '흑룡의 해'로 수정되어 있다. 수정판이 발간된 모양이다.)


제목도 아쉽다. 제목만 봐서는 경제 관련 책인지, 육아 관련 책인지, 내용이 가벼운지, 무거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부제를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천만에. 부제는 부제일 뿐이다. 제목이 책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하지 않은가. 

<88만원 세대>의 부제인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을 염두에 두고 부제를 정한 것이지 싶다. 그러나 욕심이 과했다. 조사 '의'가 세 번이나 들어가서 어색하다. 

기왕 정해진 제목이지만 이렇게 하였다면 한결 명징해지지 않았을까. 

<육아, 한 푼 벌면 두 푼 나가고 - 우석훈의 희망 육아 경제학>, 혹은 <우석훈의 희망 육아 경제학 - 한 푼 벌면 두 푼 나가고>. 

또는 TV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 ‘포항 물회’ 편에서 제목을 따왔다는 "오늘 한 푼 벌면 내일 애들한테 두 푼 나가고"를 그대로 정했으면 좋았겠다. "애들한테"를 살린.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여기저기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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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 김남시의 <본다는 것>(김남시, 너머학교)을 읽었다. 

"무엇인가를 보는 행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고, 나의 눈은 하늘과 나무뿐만이 아니라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향해" 있기에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잘'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끊임없이 궁구해야 한다.

 

"우리의 눈으로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카메라로 무엇인가를 찍는다는 것과 전혀 달라요. 왜냐하면 카메라는 이러한 '앎'이 없이도, 다시 말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렌즈를 통해 들어온 외부 사물의 이미지를 그대로 포착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서는, 그러니까 낮은 단계의 지각 상태에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볼' 수 없을 테니까요."(18-19p)


'본다'는 것은 단지 시지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지각을 통해 비쳐지는 사물 그 상태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본다는 것은 우리 눈에 들어온 시각적 자극들을 우리가 알고 있던 앎과 지식에 의거해 '무엇'이라고  보는, 일종의 해석의 과정"(24p)이다. 


루드비치 플렉은 특정한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집합적 지식의 체계를 '사유양식'이라고 했는데, 이 사유양식은 공동체의 역사, 지리적 조건, 사회 문화적 배경들에 의해 형성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앎과 지식이 역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달라짐에 따라서 사람들이 세상의 사물들을 무엇이라고 보아왔는가가 역사적으로 변화해 왔다"(25p)는 사실이다. 즉 어떤 사물, 현상이 시대마다 의미와 해석이 달랐던 것은 '앎과 지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2016년, 대한민국에서 촛불은 어떻게 해석되는가? '밀랍에 심어놓은 심지에 붙여놓은 불'을 의미할까?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만든 집합적 지식체계, 곧 사유양식에 따라 해석하면 이렇다. 잘못된 정치권력에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죽비이자 횃불이고, 민심이자 그것들을 표현해내는 무기이다. 


그렇기에 촛불에는 지금까지 한국현대사가 잘못 이행되어온 과정과 배경까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촛불'을 표면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결코 촛불을 켜든 수백만 명의 의미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김진태의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는 발언이나 "현재 촛불시위는 평화시위가 아니다. 좌파 종북 세력은 통상 시위 때마다 분대 단위로, 지역별로 책임자를 다 정해 시위에 나온다."는 김종태의 발언은 그들의 앎이 거기까지이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생각하고 아는 만큼 해석한다. 

똑 같은 촛불을 보면서도 이렇게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앎'에 대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의 환경이 대다수 국민들의 환경과 달랐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앎과 지식이 역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달라짐에 따라서 사람들이 세상의 사물들을 무엇이라고 보아왔는가가 역사적으로 변화해 왔다"(25)는 것이다.

결국 2016년 우리가 켜든 촛불은 1970년대 군사독재에 저항하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항쟁, 노동자대투쟁을 거치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대학생 반값등록금 등의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앎과 지식'이 달라져서 나온 결과이다. 


따라서 2016년 촛불은 단지 박근혜를 퇴진시키고, 최순실과 그 일당들이 행한 국정농단에 항의하는 차원이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 시스템을 개혁하여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세우는 것이며, 미래 한국에 더 높고 고귀한 가치를 실현시키는 데 작용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켠 촛불이 끄지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에 따라,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고자 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것"(71p)을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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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은 <표현의 기술>(생각의 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는 여야가 싸우는 게 정상입니다. 안 싸우면 문제 있는 겁니다. 그 덕분에 민주주의는 선을 최대화하는 게 아니라 악을 최소화합니다. 시끄럽고 문제가 많지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엄청난 죄악이 벌어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겁니다. 최악의 사기꾼, 거짓말쟁이, 이중인격자, 폭력배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합시다. 국회가 입법권을 제대로 행사하고 사법부의 독립성이 살아 있다면 그 대통령이 죄악을 마음껏 저지르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강점과 경쟁력이지요. (53쪽)
그런데 지금 우리의 "국회가 입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사법부의 독립성"도 살아 있지 못하기 때문에 "최악의 사기꾼, 거짓말쟁이, 이중인격자, 폭력배가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도륙내어 쑥대밭으로 만드는 죄악을 마음껏 저지르게 하고 말았다.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이유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그를 단죄하는 것과 함께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올바로 세우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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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막일기 - 북평사 박래겸이 남긴 254일간의 기록
박래겸 지음, 조남권.박동욱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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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평사 박래겸이 남긴 254일간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북막일기>를 읽는다. 조남권과 박동욱이 함께 옮겼다.  

박동욱이 쓴 서문에는 <북막일기>의 특징과 내용이 잘 나와있다.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정리해본다. 

 

북평사는 조선시대의 정6품 무관 벼슬이다. 외관직으로서, 영안도(함경도)와 평안도에 각 한 명씩 총 두 명을 파견했고, 병마절도사 밑에 있었다.  

박래겸은 북평사 체험을 통해 이 책  <북막일기>를 남겼다. 1827년 7월 14일 북평사에 제수된 때부터 1828년 4월 2일 도성의 자택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록을 담은 것으로, 총 254일 동안 다녔고 이동거리는 6070리였다. 그의 다른 기록과 마찬가지로 모든 내용이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어서 이동 경로, 소요 시간, 일정 등을 구체적으로 그려 볼 수 있다. 

이 일기에는 북평사 고유의 업무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여러 과거시험과 백일장에 주최, 출제, 채점 등 전방위적으로 참여한 행적이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과거시험 문제까지 상세하게 제시해 두어 지방에서 치르는 과거의 전모를 들여다볼 수 있다. 

대청(對清) 무역의 상황도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공적인 업무뿐만 아니라 함경도의 풍속과 풍토 또한 세밀히 그려내고 있다. 

백두산에 대한 기록은 한 편의 유기(游記)로도 손색없을 만큼 흥미롭다.  

그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만났던 모든 사람에 대해 기록으로 남겼다.(4~7쪽)

 

번역이 명징하다. 이해가 쉽다. 또한 고문의 맛을 잃지 않도록 신경쓴 흔적도 역력하다. 어려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도 한문 문장의 묘미를 잃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9월 18일의 "發關"을 "관문을 보내"로 해석하고 각주를 달아 설명한 것을 보면 역자의 번역 원칙을 알 수 있다.  

내용과 연관성 있는 그림들을 다양하게 수록하여 재미와 가치를 더하였다. 각주도 풍부하여 이해를 잘 도왔다. 책 말미에 원문을 수록하여 번역본과 대조해가면서 볼 수 있게 하였다.

 

다만 본문 디자인에서 날짜 앞에 말을 타고 가는 사람 그림을 일일이 붙여놓은 것이 거슬린다. 어수선하여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치장이 군더더기가 되었다. 

69쪽 14행에 "거기 사는 주민들이 전하는 말에" 하고서는 인용하기 위해 여는 큰따옴표는 있지만 닫아주는 큰따옴표는 누락되고 없다. 

232쪽의 7행에서 " 내가 밤새도록 해석해아"는 " 내가 밤새도록 해석해서(余終夜解之)"가 되어야 한다. 오자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적인 아쉬움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북막일기>가 출간되어 박래겸의 일기 3종이 모두 출간되었다. "126일간의 평안도 암행어사 기록"인 <서수일기>(푸른역사), "1829년 심양에 문안사로 간 기록"인 <심사일기>(푸른역사)도 찾아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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