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웰빙은 상품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고 웰빙음식을 사먹고 웰빙상품을 구입하는 것으로 웰빙을 실천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것은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 같은 착각이며, ‘자연’에서 떨어져 나온 부작용을 치유하기 위해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문명의 처방전을 쓰는 식이다.”

- 정승희, 아마존은 옷을 입지 않는다, 7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왕멍의 『나는 학생이다』(임국웅 옮김, 들녘, 2004)를 읽다.
인상 깊은 구절 두 군데를 옮겨본다.


“없다라는 뜻은 아주 간단하다. 속일 마음과 꾀를 부릴 마음이 없으며 이름을 얻고 실리를 추구하려는 마음을 줄이거나 제거하면 된다. 당신이 이 ‘네 가지 마음’을 버리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면, 미안하게도 이때는 정말 나도 별다른 방도가 없다. 하지만 당신이 이 ‘네 가지 마음’을 제거하고 비운 다음에도 성실하고 진정한 견실과 재능과 사려가 남았다면 당신은 진실한 모습으로 진실한 사람이 되면 된다.” (263p)

“열정과 함께 동반하는 것은 지극히 유치한 성급함으로 하루아침에 일을 성사시키려는 조급함이다. 그러한 열정과 연소는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당신은 내일 아침, 늦어도 다음주에는 일이 성사되어 단번에 히트치기를 바라고, 즉시 호동환우 하기를 바란다. 빨리 성공하려는 심리의 반대편에는 급격히 기가 떨어지고 맥이 풀어질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다. 빨리 성공하려했는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과정을 수차례 반복한다면 기가 약해지고 맥이 풀리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일이든 급히 성공하려는 것은 유치한 환상이다. 급히 성공하려고 하면 오히려 성공하지 못한다.” (283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시in>이 창간된 지 몇 주 지나 뒤늦게 정기구독을 신청하며 관리담당자에게 잘 보인 덕에 어렵게 창간호부터 채울 수 있게 되었다. 메모와 낙서가 된 것일망정 받아들고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귀도서 수집이 취미는 아니지만, 창간호부터 채워놓고 싶은 정기간행물이 있다. <시사in>이 그런 잡지이다. 그런데 그렇게 창간호부터 잘 챙겨 놓고도 간수를 잘 못하는 편이다. 한겨레신문도 창간호부터 100호까지 알뜰히 챙겼더랬는데, 결혼을 하고,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종적을 감춰버리고 말았다.

그건 그렇고, <시사저널> 정기구독을 중단하고, 몇 개월 있다가 정기구독을 신청한 <시사in>에 ‘영화만담가’로 영화평을 쓰고 있는 김세윤 씨의 글을 읽고서 그가 쓴 책을 구해 읽어봐야겠다 하고 인터넷 서점을 뒤져 알아낸 것이 『헐크의 바지는 왜 안 찢어질까?』(Media2.0)이다. 책을 받아들고 몇 꼭지를 읽으면서 “캬, 이런 말발로도 글발이 되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한정된 분량에서 해야 될 말을 절묘하게 다하고 있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분량이 한정된 글을 쓸 때는 전략이 필요한다. 황순원 선생처럼 단편소설 한 편을 쓸 때 장면과 묘사마다 원고지 매수를 모두 계산해 놓고 소설을 시작하여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을 때 정확하게 처음 예정한 원고지 매수가 똑 떨어지게 하는 신기는 아닐지라도 한정된 지면 속에서 자유자재하게 할 말을 구사한다는 것,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스트레스까지 받기도 한다.

지금은 소설가이자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인, 소설가가 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그러나 소설집보다 산문집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한겨레출판)를 먼저 출간한 조선희 씨는 <씨네21>의 편집장으로 있을 때 “편집장이 독자에게”라는 200자 원고지 7.5매의 꼭지글 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월간지 편집 책임자로, 매주 정해진 분량의 글을 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편집장 레터를 읽기 위해 정기구독한 사람들도 부지기수라지 않은가. 그의 그 글을 찾아 읽기 위해 나도 <씨네21>을 부지런히 주물럭거렸던 것이 사실이고 보면 일단 그 말들이 맞다는 심증은 간다. 하긴 모 도서평론가가 모 잡지에서 책 소개를 하면서 다른 수많은 단행본을 젖혀두고, 그 주에 나온 <씨네21> 서평을 떡 하니 쓰면서 “편집장이 독자에게”를 집중적으로 거론한 것을 읽기도 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필자 조선희의 글쓰기의 괴로움이 바로 열혈 독자들을 생성시킨 모태가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한정된 지면에 글을 쓰면서 빛나는 성취를 이룬 사람으로 정운영 선생도 들 수 있겠다. 수많은 독자들을 이끌고 다녔으니 그의 글에 대한 나의 찬사야 사족만 될 뿐이고, “그의 글을 읽다보면 명치가 아려온다”는 한 마디만 더하고 싶다. 철저하게 말을 아끼는 것도, 그렇다고 아픈 곳만 골라서 찔러대는 필창(筆戈)도 아닌데,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 같고, 시대의 아픔을 함께 가지고 가는 듯이 싶어진다. 왜 통증이 오는 것일까. 그의 글이 겨눈 창이 결국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오랜 뒤에 혼자 생각했더랬다.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서 김세윤 씨의 글은 문(文)과 언(言)의 구분 없이 넘나드는, 그러면서도 화해롭고 발랄하다. 블로그시대의 글쓰기의 한 연결선상에 놓일 법도 하지만, 하는 말들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에서 다르다. 『헐크의 바지는 왜 안 찢어질까?』는 독자들의 집요한 궁금증과 필름2.0의 기획과 인내심에 힘입은 바 크다. 그들에게 박수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화의 책이 여섯 권 정도 국내에 번역 소개되었다. 『허삼관 매혈기』(푸른숲)를 읽은 게 벌써 8년이 지났다. 그 동안 위화 소설은 국내 독자들에게 인지도를 넓혀 간 것 같다. 정치(精緻)하지 못한, 어찌보면 느슨하기까지 하던 『허삼관 매혈기』는 재미에 웃음과 눈물을 섞어 가슴을 먹먹하게 틀어막았더랬다.
그리고 8년이 지나 휴머니스트에서 출간한 『형제』(전3권)를 관심 가지고 뒤적거려본다.

  

위화의 홈페이지(http://blog.sina.com.cn/yuhua)에는 『형제』의 한국어판 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這是《兄弟》韓文版封面, 今年六月由韓國人文主義者出版社出版. 譯者是崔容晩先生. 他也是《許三觀賣血記》和《在細雨中呼喊》的韓文版譯者. 在韓國出版的《兄弟》分成了三部, 第1部是中文版的上部, 第2部是中文版下部里八十年代的內容, 第3部是中文版下部里九十年代以后的內容. 韓國的出版社爲《兄弟》一書建立了博客 : http://blog.naver.com/yuhuabrother

한글로 옮겨보면 대충 이렇다. 

이것은 올해 6월, 한국의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출판된 <형제>의 한국어판 표지이다. 역자는 최용만 선생으로, 다른 책으로는 <허삼관 매혈기>, <가랑비 속의 외침>의 역자이기도 하다. 한글판 <형제>는 3부로 나눴는데, 제1부는 중국어판의 상부(上部), 제2부는 중국어판 하부(下部)의 80년대의 내용까지이다. 제3부는 중국어판의 하부(下部) 90년대 이후의 내용까지이다. 한국의 출판사는 <형제> 전용 블로그를 개설하였다. : http://blog.naver.com/yuhuabrothe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월간 「현대문학」 정기구독 연장 혜택으로 받은 『침묵예찬』을 읽다가 밑줄 그어놓은 부분 가운데 하나를 옮겨본다. 

“내가 반 고흐의 그림을 처음으로 본 것이 제네바의 바젤에 있는 미술관에서였던가,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스위스 여행 중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마치 문짝이 돌쩌귀 밖으로 이탈하듯이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열여덟 살 때였던가, 나는 귀가 잘린 그 사람의 작품들을 복사판 그림들과 그림엽서들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내 방의 벽 한구석에 태양이 미친 듯이 빙글빙글 도는 그의 그림을 붙여둔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실제 그림을 내 눈으로 ‘본다’는 사실은 나를 산산 조각내 놓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튜브를 꾹꾹 눌러 짜서 어찌나 두껍게 발라 놓았는지 층층으로 포개진 덩어리가 어떻게 떨어지지 않고 화폭에 제대로 붙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인 다량의 물감 무더기, 물감을 입혀서 선들을 어찌나 짓이겨 놓았는지 그림에서 3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는 오직 아우성치는 듯한 색조들 속에서 요동치는 요철들의 혼합밖에 알아볼 수 없고 화집에서 보았던 이미지를 대강이라도 찾아보려면 한두 걸음 물러서야 하는 그 독특한 화법, 그야말로 다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놀라운 창조방식이 그날 나에게는 격렬한 충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때 나는 회화 작품에 눈을 뜨게 되면서 그림이 실제로 걸려 있는 곳에 가서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왜냐하면 인쇄된 복제품이란 형상의 막연한 유사점 외엔 실제 그림과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 『침묵예찬』, 마르크 드 스메트 지음,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刊, 2007년, 164~16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