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윤호 글, 이상희 사진의 <섬에서 섬으로 바다백리길을 걷다>를 읽다.

이상희 작가의 사진도 좋지만, 전윤호 시인의 글은 근래 읽은 여행산문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

섬에도 흙과 돌의 길이 있다. 풀과 나무가 있다. 삶과 역사가 있다. 기다림과 오지 않음이 있다. 여기에 물의 길이 하나 더 있을 뿐이다. 못 걸을 이유가 없다. 천천히 글을 따라가다 보면 함께 가자고 보채는 것도 아닌데, 저자를 앞질러 가서는 안 될 것 같다. 저자가 본 것들을 놓치고 가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이다. 수목과 화초, 바람과 소리와 사람의 냄새를 살펴가며 걷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들르는 섬마다 일박 하는 심정으로 하루에 섬 하나씩만 읽었다. 여섯 개 섬을 다 읽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바닷길을 걷는다는 건 섬과 섬을 연결시키는 의미도 있다. 통영 앞바다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걸어야 할 바닷길, 섬들은 많다. 우리나라에는 약 3,000여 개의 유무인도가 있다고 하지 않은가.

정작 내가 걷고 싶은 것은 섬이 되어버린 내면이다. 남들의 눈에는 고립과 차단으로 외로워 보일 섬이 의외로 볼 만한 경치도 있고, 맑고 시원한 바람도 분다는 걸 확인하고 싶다. 물론 그걸 확인하기 위하여 굳이 섬을 걸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섬 아니더라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

다만 이 책을 읽다보면 섬을 걷는 방법이 섬을 발견하는 가장 빠른 길임을 확인하게 된다. 당연하다. 내면을 걸어야 내면을 잘 발견한다. 그래서 이번 여름에는 휴가기간 동안 '바다백리길'을 한 번 걸어보자고 나를 유혹해본다.


이 책을 출판한 '남해의봄날'은 통영에 있다. 지방에서 출판활동을 하는 출판사들은 많이 있지만, 남해의봄날만큼 성격을 분명히 하고, 그것에 맞춰 출판하는 곳은 드물다. 로컬북스 시리즈 설명에 감동하였다.

"이웃한 도시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다른 자연과 문화, 아름다움을 품고 있습니다. 독특한 개성을 간직한 크고 작은 도시의 매력, 그리고 지역에 애정을 갖고 뿌리내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해의봄날이 하나씩 찾아내어 함께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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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기 시인의 시집 <내가 내 몸의 주인이 아니었을 때>를 읽는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양해기 시인은 남들이 눈여겨 보지 않는 것들을 본다.

그냥 보지 않고 눈여겨 본다. 

그러고는 눈여겨 보지 않던 것들을 화들짝 눈여겨 다시 보게 하는 것들로 바꿔 놓는다.

심지어 그림자와 사물의 뒷편까지도 본다. 

개의 눈, 죽은 참새에게서 전생이 사람이었던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가 보는 사물과 현상은 하나하나가 명확하게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한 몸이 되었거나 변형되었거나 몸 바꿔 앉은 것들이다.


시집 곳곳에서 죽음이 수시로 출몰한다.

생명은 이미 죽음을 품고 있고, 죽음은 저 홀로 따로 있지 않다.

양해기 시에서 생명과 죽음은 함께이거나 하나이다.

그는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시선을 놓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서 수많은 과거와 전생과 다른 생명을 본다.

전혀 이질적인 것에서 본질을 통찰해낸다. 

그래서 시에 담긴 대상이 더 안타깝고, 더 슬프다.

그러한 것들을 보는 시인의 눈은 연민과 안타까움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시로 나온 대상은 담담하게 묘사되고 언급된다. 

그게 더 가슴을 쥐고 흔든다.



사전 동의를 받지는 못하였지만 양해를 구하며, 짧은 시 4편을 옮겨 놓는다.


[인형 세우기]



영은이가 인형을 가지고 논다


헝겊조각을 펴서

인형을 눕힌다


서 있을 때

눈뜨고

눕히면 눈을 감는다


일찍 돌아가신 엄마 대신

영은이는

오늘도 인형과 함께 놀고 있다


불안한 영은이는

자주 인형을 일으켜 세워본다


인형이 

오래 눈감고 있지 못하게 한다


(54p)



[아기 관]



성남 화장터

병원 구급차가 도착했다


작고 조그만 관이 옮겨지고


화장터 뒤편에서

유난히 하얀

연기가 뒤섞여 나온다


연기는

이제까지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관 속 아이의 얼굴을

허공에 그려두고 있었다 


(53p)



[낡은 운동화]



신발 한 짝이

흙바닭에 버려져 있다


뒤집히면서도

신발은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21p)



[벌레]

 


어디론가 바삐바삐 가고 있는

저 작은 벌레도


오늘 나처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모양이구나 


(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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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서거 5주년이다. 서거 이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책들이 지속적으로 출간되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이처럼 많은 관련 책들이 나온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이 유일할 것이다.


왜 그럴까? 노무현 대통령의 진심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가 어떠한 철학과 원칙을 가졌으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어떠한 위험과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는지, 그리하여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를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를 가까이에서 모셨거나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부채의식이었을 것이다. 사명이었을 것이다.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저술한 책들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리고 우리가 보고 들었던 사건과 상황의 갈피에 담겨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진심을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책임과 의무감이 끝내 이 책을 쓰게 했을 것입니다." (문재인, <기록> 13쪽)


<기록>은 "노무현 대통령이 마주했던 시간과 상황을 가장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알려진 윤태영 비서관의 책이다. 


"주요 회의나 개인 일정에 배석하여 기록하는 것이 나의 주 업무가 되었다. 대통령은 나에게 특권을 주었다. '체력과 집중력이 허락한다면, 내가 참석하는 모든 회의나 행사에 자유롭게 배석하도록 하게.' (...) 그렇게 시작된 기록은 퇴임 후로도 이어졌고, 서거하시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남았다. 수백 권에 달하는 휴대용 포켓 수첩, 1백 권에 달하는 업무 수첩, 1,400여 개의 한글파일이 생산되었다." (17~18쪽)


노무현 대통령은 보수언론의 악의적 보도로 인하여 부정적 이미지도 넓고 깊게 퍼졌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진심을 알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사후 출간된 많은 책들로 인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진심을 알게 되는 사람들이 하나둘 더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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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한정식 선생의 사진 <전남 영암 도갑사>(1986)는 빈방 가운데 작은 탁자 하나가 놓여 있고, 천정 가운데 백열등 알전구 하나가 매달려 있다. 그 방의 전부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많은 사진 가운데 이만큼 깊은 인상을 준 사진은 드물다. 한 장의 사진에 무성한 얘기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아니, 수도 없이 많은 말들을 한꺼번에 다 지워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게 맞겠다.


한정식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참으로 신비하다. 겉 속에 속이 들어있고, 보이지 않는데 보이는 것이 있다. 보인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요, 안 보인다고 안 보이는 것이 또 아니다.

사진이 그렇다. 사진은 겉모습 속에 속이 들어있고, 보이지 않는데 보이는 것이 있으며, 보인다고 그것을 다 보이려는 것이 아니요,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또한 아니다." (사진산책, 눈빛, 2007, 93~94쪽)



나는 많은 것을 채우면서 살아왔다. 지금도 여전히 채우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채워갈 것 같다. 작은 집, 작은 방에는 여러 가지 물건으로  자꾸자꾸 채워진다. 지금은 쓸모가 있다 하더라도 과연 언제까지 쓸모 있을지는 모른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부터는 비움이 더 많이 차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도의 명상가 오쇼 라즈니쉬는 이렇게 말했다.

"한 번이라도 좋다. 완전하게 빈집에 들어가 본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빔'은 그냥 빈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존'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잠깐이라도 빈집에 살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생을 다할 때까지 빈집에 살아볼 일은 없을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나는 빈집을 추구할 것이다. 무늬를 만드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만들었던 무늬를 잘 지워가는 것도 필요하다. 무문(無紋)의 삶을 살아 가는 것.


나는 폐사지를 좋아한다. 중동이 부러진 한두 기의 석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거나 석불은 어디가고 좌대만 남아 바람과 햇볕과 소리의 불상을 옮겨 앉히는 풍경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 쇠락해진 모습이 무소유와 비움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남기고 싶은 것도 폐사지의 옛 번성을 더듬어볼 수 있는 단초 몇 개와 같은 것들인지도 모른다. 그것마저도 빈집에 대한 욕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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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그만 벌기로 결심했다>(김영권, 살림, 2013). 제목만 언뜻 보면 너무 명확해서 촌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만 번다는 것"은 수익 행위를 그친다는 의미이다. 부제가 "더 행복해지기 위한 인생 실험"이라고 했으니 "그만 버는" 것이 행복해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책의 방향성이 더 뚜렷하게 들어온다. 내 짐작이 맞았다. 


저자는 신문사 기자로서, 데스크로서 부지런히 살아 왔다. 22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더 이상 직장을 갖지 않고 살아 가기로 했다. 쉰 살, 인생의 후반전을 새롭게 살 계획을 세운 것이다. 살던 집을 팔고 재산을 모두 정리해 보니 5억원이 약간 넘는다. 그 돈으로 화천에 집을 짓고 오피스텔 두 채를 산다. 오피스텔 두 채에서 생기는 임대료 수입 120만 원이 한 달 수입의 전부이다. 그 돈만으로 살아갈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다.

그는 인생 후반전에서는 더 많이 벌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그로 인한 성공과 돈은 없을 것이다. 시간과 여유는 늘어갈 것이며 스트레스와 부담과 긴장은 줄어들 것이다. 


나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였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말이다. 생계를 위해 하던 일은 그만둔다.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한다. 돈이 목적이 되지 않도록 한다. 조금 불편하게 산다. 도시를 벗어난다. 여유와 느림이 내 일상을 더 많이 차지하게 한다. 



책을 읽고 얻은 게 많았다. 막연하게 생각하고 꿈꾸었던 것이 책을 읽으면서 구체적인 생각을 낳았다. "매월 돈은 얼마나 들어갈 것인가. 어디에 살 것인가. 무엇으로 생계를 꾸려 갈 것인가."와 같은 현실적인 사항들에서부터 "내가 처할 문제점들은 무엇일까. 후회없는 삶이 될 거라고 확신하는가. 과연 행복해질 수 있는가."와 같은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였다. 


이 책이 적어도 '나'에게 의미있는 이유를 책에서 찾았다.


"타인의 삶을 엿보는 건 재밌다. 그것은 그를 통해 나를 돌아보는 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나의 거울이다."(179쪽)


"'더 하는 것'의 함정은 넓고 깊다. 아차 하면 빠진다.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완전히 푹 빠지면 그곳이 함정인지도 모른다. 내 삶은 "조금 더 조금 더" "나중에 나중에" "다음에 다음에"를 외치다가 종친다. 노는 것도 나중, 쉬는 것도 나중, 사랑도 나중, 여행도 나중, 잘 먹는 것도 나중, 나중, 나중, 나중, 나중..... (중략) 그러니 무엇이든 선을 긋지 못하고 자꾸 더하려 할 때 되물어볼 일이다. "더 해서 뭐하게?" 그것의 마지막 답은 언제나 "느긋하게 인생을 즐긴다"일 것이다."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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