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한때 내가 무서운 영화를 엄청 잘 본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귀신이나 악귀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존재한다한들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가지는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도 나에게 공포의 대상은 '조폭'이나 '살인마'와 같은 사람이었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뱀파이어'와 같은 악령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참 지나서야 내가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악령 이야기에 두려움이 없다고 믿는 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회피하기. 그것이 악령을 대하는 진짜 나의 모습이었다. 무서운 장면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귀를 막고 눈을 감아버리는 나, 무언가 찔리고 찢어지고 피가 튀는 순간에는 잠깐 정신줄을 놓는 나. 그러고나서는 당당하게 무서운 영화를 볼 수 있었다며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해버리던 것이 공포를 대하는 나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이 책을 받아든 순간에도 나는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라며 유쾌하게 맞이했다. 그리고는 한 주 넘게 책상 위에 책을 방치해 두고 있었다. 실제로는 뭔가 책을 열면 당장 뱀파이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은 두려움이 든 것이겠지만, 겉으로는 사람들이 삶의 지루함을 저런 식의 이야기꺼리를 만들어서 위로삼는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태연한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서평을 써야했기에 결국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내려가면서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내가 정말 악령을 두려워하는 겁쟁이였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모습을 묘사한 텍스트를 읽는 것만으로도 그 현장을 머릿속에 상상하고 구현할 수 있는 감정 이입 능력까지 나는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나는 무서운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무서운 걸 무섭다고 인정하는 사람과 나처럼 무서운 걸 무섭지 않은 것처럼 연기하는 사람. 이 두 부류의 사람이 보이는 행동은 언뜻 차이가 있지만, 둘 다 무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마음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죽음의 공포'에서 달아나는 태도가 달라보이는 것이지 근원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같다는 이야기다. 사람이면 당연히 가질 수 밖에 없는 본질적인 공포가 어떻게 '뱀파이어'라는 대상을 만들어냈고, 끊임없이 그것을 소비하며 그 두려움을 이겨냈는지 이 책은 성심성의껏 펼쳐보여 주었다. 뜬구름잡기 식의 생각 전개가 아니라 그동안 '뱀파이어'를 다루었던 텍스트와 영상 콘텐츠의 풀이 방식과 진화의 모습들을 세세하게 설명하면서 '뱀파이어'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부족한  나같은 사람에게 친절하게 다가와 주었다.


책 속에는 잘 몰랐던 '뱀파이어'에 대한 상식들이 가득차 있어 흥미를 돋운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 1565년의 브레슬라우 연대기에서 볼 수 있듯이, 미신에 따르면 기형아는 흔히 악마와 정을 통한 표시로 간주되었다.

- 시체의 손목에 감아두는 묵주에는 이중적인 기능이 있었는데 사자가 기도할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사자가 무덤에서 나와 화를 초래하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사슬이기도 했다.

- 루마니아에서는, 뱀파이어가 될 만한 소지가 있는 망자들은 아예 불에 달군 쇠로 심장을 꿰뚫은 다음 매장하는 관습이 오랫동안 행해졌다.


여기에 다 소개하기보다는 직접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알았던 사실들은 더 확실하게 알고, 몰랐던 부분들은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경험을 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뱀파이어의 문화사'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이렇듯 뱀파이어의 모든 부분에 대해 훑으려고 하는 데 그 매력이 있다. 반면, 다소 뱀파이어 이야기만 하다보니 어떤 특정한 목적 의식이 있어야 흐름이 끊기지 않고 읽어갈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를테면, 새로운 뱀파이어 영화 시나리오를 써 보겠다거는 하는...^^) 앞에서도 밝혔듯 평소에 무서운 영화를 '하나도 안 무서워. 시시해!'라고 핑계대며 즐겨보지 않아서인지 책 속에 이야기들이 내게 많이 낯설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 작품들을 즐겨 읽었던 내게도 <비이>와 같은 작품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다만, 이것은 '뱀파이어'에 친숙하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근거로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평소 꾸준히 '뱀파이어'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 온 사람이라면 '디스크 조각 모음'을 하듯이 뱀파이어 이야기의 비어 있는 부분들을 차곡차곡 채워 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모르는 부분은 가볍게 읽고 넘기면서 조금 익숙한 부분은 조곤조곤 따져 읽으면서 막바지로 오자 반가운 이야기가 나를 반겼다. 바로 영화 <렛미인>과 <박쥐>에 대한 설명이다. 신기하게도 나는 두 영화의 무섭고 섬뜩한 장면은 회피하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똑똑히 지켜 봤었다. 책 속 텍스트에 소개되어 있는 부분을 읽고나니 내 반응이 논리적으로 납득되었다. 두 영화에 나온 '뱀파이어'는 단순히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뱀파이어였다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 주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다른 영화 속 뱀파이어가 내가 맞서야 할 '적'이라면, 두 영화 속 '뱀파이어'는 나의 감정을 대입할 '주체'인 셈이었다. 피할 수 없는 '뱀파이어'의 운명을 타고난 그들이 곧 나라면? 이런 물음들을 끊임없이 하게 되는 사이 공포는 이미 뒷전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올곧이 받아들이며 고난에 대처해야 하는 뱀파이어의 고뇌를 느껴보게끔 함으로써 뱀파이어 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마련한 두 영화였다고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책 속에 백화점식으로 진열된 그 모든 '뱀파이어'는 단연코 죽음을 두려하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매력적인 이미지다. 각양각색의 이미지 파편들은 공포를 느끼고 그 공포에서 도망치려는 또는 이겨내려는 무수한 사람들의 각기 다른 스팟을 공략함으로써 '뱀파이어' 이야기의 역사를 끊임없이 새로 쓰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섹시한 핏빛 유혹'이 함께한다. 누가 그랬던가. 섹스 역시 죽음에 닿아있다고. 덧붙여 롤러코스터와 같은 놀이기구를 타는 것 역시 죽음의 공포를 간접체험 하는 것이 아니던가. 섹스처럼 섹시하고, 롤러코스터처럼 소름끼치는 죽음의 간접 체험 대상, 그것으로서의 '뱀파이어'. 아마도 답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인간이 삶에 대해 치열한 욕망을 갖는 것 만큼이나 죽음에 대한 간접 체험의 욕망도 날이 갈수록 진화한다고. '뱀파이어'는 그런 간접 체험의 가장 세련된 방식 중에 하나이며, 이것 역시 날로 다듬어지고 있다고.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당신이 삶과 죽음에 대해 가져왔던 이미지를 더욱 또렷하게 만들어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얼마나 죽음 앞에서 겁쟁이인지. 그래서 뱀파이어의 핏빛 유혹에 빠지며 잠시라도 죽음의 공포를 잊으려 한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을 수 있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쩌다사회학자가되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저자 피터 L. 버거의 말마따나 그가 어쩌다 사회학자가 된 첫 길목은 '착각'에서 시작됐다. 루터파 목사가 되고 싶었지만, 그것이 과연 자신의 천직인지 회의하던 도중, '에라 모르겠다'며 한 사회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그래서 미국 사회를 잘 알 수 있을지도 모를 사회학 공부를 하게 된 것이었다. 저자는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사회학자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라지만, 책을 관통하는 그의 인생의 '결정적 지점'들은 여느 사람처럼 '우연'의 요소가 따랐다. 우연히 빠져든 일이 필연이 되어가는 과정의 묘미를 알아 갈 때의 즐거움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사회학을 제대로 공부해 본 적 없는 나 역시 간간이 감정 이입을 하며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이 책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중간중간 농담과 유머를 녹여가며 자신의 지적 경험담을 시간 순으로 풀어가는 그의 재치 덕분에 내가 발 담아보지 않았던 세상에 조금씩 흥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사회학을 공부하게 된 첫 학기 때, '세상을 사회학적으로 바라보는 데서 오는 흥분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그리고 책에서 보여준 그의 사회학자로서의 여정은 그 첫 설렘의 흥분과 열정을 지치지 않고 끌어온 치열한 흔적들이었다. 그 길의 시작엔 발자크가 띄고 있던 '상류 사회에서 감추고 부정하는 행위들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이라는 사회학자의 상을 해부해 보겠다는 저자의 젊은 혈기가 녹아 있었다. 그랬다. 이 책의 저자이자 저명한 사회학자인 피터 L.버거를 하나의 단어로 표현해본다면 '혈기'가 아닐까. 단순히 부글부글 끓는 피가 아닌, "난 안달하지 않는 걸! 아무렇지 않아!"라면서도 학문에 집중하며 달려갈 땐 온 힘을 다하는 그런 은근하게 지속되는 혈기말이다.


사회학자로서 뿐만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매력적인 그의 특성을 책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군대에서 신상 정보를 적던 하사가 '사회학자'라는 직업을 잘 알지 못해 '사회복지사'라고 적은 실수 덕분에 겪은 경험담을 보자. 병원에 오는 병사들을 상대로 상담일을 하며 그는 개인의 신상이 무수히 적힌 서류철을 갖게 됐고, 그것으로 미국의 현실에 대한 보고를 얻을 수 있었다며 기뻐한다.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가 뼛속 깊이 사회학자라는 점을 이때 눈여겨보았다. 누군가에게는 따분하고 피로한 일도 그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고 풀어야할 세상의 숙제였던 것이다. 그의 이런 성격은 이 책이 나가가야할 목적을 분명히 하고, 그것을 보여주는 데 구체적이고 꼼꼼하게 풀어낼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사회학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소설도 쓰게 되는데, 이 점만 미루어 보더라도 그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론 그의 기록 욕구가 앞서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지?'라고 갸우뚱하게 만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수다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삶에 '사회학'이라는 영양분이 왜 필요한지 조심스럽게 설득되고 만다. 그것도 그의 유머와 농담이 깃든 명랑 사회학자로서의 주장에 말이다. 다양한 흐름의 사회학 이론들을 종합해 지식사회학을 의식사회학으로 재정립한 <현실의 사회적 구성>을 바탕으로 한 활동 이야기들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또한 그가 좀 더 인간적인 '사회주의'가 아니라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자본주의'를 더 지지하게 된 연유는 무엇이었는지 그 흐름을 따라가 볼 수 있어서도 좋았다. 누군가가 어떤 생각을 하고, 하나의 주장을 신념을 갖고 지지하게 되었을 때 '왜 그렇게 되었나?'가 궁금할 때가 많다. 하물며 학자의 학문적 바탕에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멋진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것은 요즘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바라봐야할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사회학자라면 어떤 논리적인 과정을 거쳐 사회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사회학자의 해결 방식을 개인지도 받을 수 있다. 그가 스스로도 성공적이라고 말하는 '금연 이권'과 '간접흡연' 논증에 관한 예측 이야기가 나에게 와 닿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금연 운동'이 가장 성공한 사회 운동이라고 말한다. 


사회 운동이 성공하려면 이데올로기와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결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 과학의 정치적 이용과 오용(흡연이 흡연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다지 명혹하지 않다)에 대해서,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있어서 두려움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리고 이른바 불법 행위의 시비가 어떠하든 '큰 주머니'를 찬 상대에 대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빼낼 수 있는, 미국의 소송의 힘에 대해서 알게 됐다.(239P)


담배와 관련된 사회운동에 대해 그가 풀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그가 어떤 측면에서 '재미'를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겪은 일들을 아주 재미있게 풀어내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사회학자로서의 성과나 지적 모험담을 푸는 데 있어서 좀더 개인적인 감정들을 더 많이 끌어내 책에 녹여줬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책의 근본적인 성격일지도 내가 지적한 스토리텔링의 방식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대중적인 책이 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끈질기게 한 분야를 파고들어 자신의 인생의 점들을 한 선으로 그어보려는 저자의 노력에는 박수를 보낸다. 독자들이 자신의 삶에 견주어보며 각자가 가는 길에 있어서도 보탬이 될 수 있으리라 예상해 본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우리도 '어쩌다, 어쩌다, 어쩌다 그 무엇이 되어 있을지'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개미 2012-07-24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데올로기와 실질적 이해관계으 결합부분은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몇개 안되는 동감가는 부분중 하나였습니다. 재밌을 것 같은데 참 읽기 힘든 책이었는데 다른 분들 리뷰 보니 오히려 정리가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koopuha 2012-07-25 11:51   좋아요 0 | URL
저도 책 혼자만 읽는 게 아니라 리뷰를 읽다보니 같이 읽고 대화하는 느낌이 들어 좋더라구요. 새로운 텍스트가 하나 더 생겨나서 정리되는 느낌이랄까요 ㅎㅎ 다음 책은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춤춰라, 지금 그 자리에서


책을 덮고 난 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읽어라'다. 덧붙여, '읽어라'라는 단어와 겹쳐진 말이 '춤춰라'였다. 예전부터 전체적인 상황을 살피는 'context'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 왔지만, 'text' 자체가 문서가 아니어도 좋다는 생각을 유심히 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제대로 '읽고, 쓰고, 고쳐 읽고, 고쳐 쓰는 것'이 글이나 말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그런 생각을 해 나가는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


203P

독서란 춤이고, 사람은 법과 춤춥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몸에 두르고 있는 모든 것, 호흡법이나 발성법, 옷이나 장식품이나 소리나 리듬이나 노래, 춤의 안무는 그 자체가 법전이고 성전이며 신화이고 시인 것입니다. (중략) 우리는 말로 하면, 바로 읽고, 고쳐 읽고, 쓰고 고쳐 쓰는, '문학' 행위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춤'은 그대로 그들에게 법적, 규범적, 철학적, 문학적인 '사고'인 것입니다. 그들은 사고하고, 그들은 읽고, 그들은 쓰고 있습니다 - 깊게, 깊게, 춤을 추면서.


유심히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저자인 '사사키 아타루'는 '읽는 법'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조언하고 있다. 나는 어느샌가 그 조언에 (좋은 의미에서) 쇠뇌당해 한 문장 한 문장 곱씹고 있던 중이었다. 그가 책 속에서 말한 혁명 중에서도 중세 해석자 혁명은 오직 '글'에만 집중되었는데, 그 때문에 우리는 진정으로 읽는 법을 잃어버렸다고 쓰고 있다. 그것을 제대로 읽기 위해, 203P의 윗 구절을 몸과 마음으로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어느새 깨닫게 되었다.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단지 정치의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정치이자 삶이 될 수 있고, 영혼의 텍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아도 최근 몇 년간 대중매체를 통해 음악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고, 또 토크쇼에서는 정치인들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예능의 정치화' 또는 '정치의 예능화'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읽고 보면, 사실 예능이라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놀이야말로 정치 그 자체라는 것을 불현듯 받아들이게 됐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더 깊이있는 생각은 책을 여러번 다시 읽은 후에 더 고민해 보기로 해야겠다. 저자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다"라고.


그러니 이 책을 읽는 사람은 한번 말고 여러번 되풀이해서 읽은 뒤, 그 깨달음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었으면 한다.



2. 문학의 위기는 문학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것


나 역시 문학을 전공했다. 문학을 읽고 싶어서, 문학책을 가슴에 안고 다니며, 그 내용과 향기를 온 몸으로 흡수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인문학의 위기다, 뭐다 해도 개념치 않았다. 하지만 개념치 않는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러한 생각을 더 넘어서 이것을 '문제'라고 여기는 것 자체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진다. 


105P

왜 우리는 이렇게 문학을 폄하하고 문학부를 대학에서 추방하려고 할까요? 왜 문학자 스스로가 문학을 이렇게까지 업신여길까요? 그것은 바로 문학이 혁명의 잠재력을 아직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그것에 겁을 먹고 있는 겁니다.


무릎을 쳤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의견에 동감했다. 인문학의 위기는 너무나 오랫동안 이야기되어 왔던 참이라 식상할 수 있는데, '인문학'에 '위기'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인문학의 힘'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바라는 것일수 있겠다 싶었다. 책을 읽고 나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인문학의 위기'라고 부르는 것이 불분명한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문학'이 가리키는 대상은 '글로 된 말로 된 그래서 자료로서 남겨진 text'인가? 그것이 위기인가?


앞에서 썼듯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text가 될 수 있다면, 존재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은 text다. 결국 살아 움직이는 모든 현상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 text이자 인문학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인문학에 '위기'를 말한다는 것은 웃음이 나오는 일이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지금도 우리 세상은 인문학의 힘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니까.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그렇게 크고 작은 혁명이 일어나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인문학'이 만들어내는 예술이다.



3. '혁명'하고 쓰고, 읽고, 외칠 때 피를 떠올리지 말아라.


우리는 보이는 대로 읽는 대로 보아서는 안 된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읽을 때, 보이지 않던 진실을 알 수 있고, 읽지 못했던 진리를 찾을 수 있다. '혁명' 역시 그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혁명의 이미지는 붉다. 피의 이미지다. 하지만, 저자는 '혁명'이 꼭 피로 폭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진데, 역사를 제대로 읽고 이해하지 못하면 그렇게만 생각하고, 그 사고에 갇혀 버린다고 알려준다.


우리가 이 책을 집어들고 이 책을 끝끝내 읽고 덮었다면, 새롭게 열리는 것은 '혁명'을 사고하는 것의 뒤집는 방식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혁명'은 일상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움직임으로도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다. 살아가는 방식을 되새김질 하는 것도 혁명인 것이다.


210P

 우리는 '문학'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시를 읽었습니다. 춤을, 연극을, 노래를, 음악을, 회화를, 복실을 - 한마디로 말하면 예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법이나 규범, 정치와는 관계없는 장소에 몰려 질식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오락', '장식물', '사치품'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법이나 규범, 정치도 질식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실, 상실이라며 우리가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결정적으로 손에서 놓아버린 적이 있을까요. 그것 없이 살 수 있었던 예가 있을까요?


저자는 우리가 '혁명'에 눈 뜨길 바란다. 책 내내 이어지는 '종교 이야기'가 지루할 법도 하지만(나처럼 종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특히), 저자가 '종교'를 말하려기 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 '읽어야' 하는 이유를 조근조근 이어가고 있어서 재미있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설득당한다. 나도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제대로 읽는 것을 시작해야지, 하고.


이 책에서 나는 힌트를 많이 얻었다. 요즘 유행하는 '정의'에 대해서도 73P를 읽으며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고, 훈련에 의한 인간 통치에 대한 '노동'의 문제에 대해서도 220P에서 사고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책의 첫 장부터 읽기 시작하려 한다. 이 리뷰를 읽는 이들에게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읽는 것은 스스로 그것에 몸과 마음을 던지고 성실하고 우둔하게 싸워가는 것이니까. 그냥 읽어보기를.


멋진 책이다. 하지만 직접 읽을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의 읽기가 될 수 있을 때, 당신에게도 멋진 책이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우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꿈꾸는 그 이름이 될 수 있을까?

 

김수영은 김수영이 되길 위한 시인이었다. 그는 또 구름의 파수병이 되길 바랐다. 자유롭게 고도를 조절할 수 있어서 들판의 민들레도, 가난한 아이의 눈물도, 그리고 시인이 서 있는 높은 산정도 내려다볼 수 있는 그런 구름. 김수영은 살아서 써 내려간 시 덕분에 죽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마음껏 의지하고 싶은 푸근하면서도 저릿한 구름이 되었다.

 

김수영을 위하여는 철학자 강신주가 김수영을 사랑하며 열병을 앓고 열꽃을 피운 그 절절한 이야기들을 담아낸 책이다. 김수영이 풀이 눕는다고 하면 바람이 불어 풀이 눕는구나 했었고, 의자가 걸린다 하고 테이블도 걸린다 하면 참 피곤하겠다고 우리들은 멀찍이 놓고 생각할 것이다. 다행히도 시인이 쓴 시를 시답게 시처럼 읽도록 도와준 저자가 있었기에 풀이 눕는 것이 의자가 걸리는 것이 얼마나 슬픈 것인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 영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김수영이라는 한 시인의 인생과 그 시에 힘입어 제대로 만질 수 있는 기회를 이 책이 만들어 주었다.

 

 김수영을 읽으면, 몸이 금방 뜨거워진다. 뜨거워진 손은 또 김수영처럼 시를 쓰고 싶게 만든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을 보면 된다. ‘이란 한계점이다. 고치려야 고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숙명이다.’로 시작하는 산문 ()’(1966)을 읽다 보면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나를 둘러싼 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며, 그 생각의 부산물을 잘 다듬어 한 편의 절절한 글로 써내고 싶다. 읽으면, 자연스레 느끼게 되고, 말하게 되고, 글로 옮기고 싶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가진 시인, 그가 바로 김수영이다.

 

 김수영은 어려우면서도 쉽고, 쉬우면서도 어렵다. 그래서 이 책은 대중적이면서도 대중적이지 않고, 밀어내면서도 당긴다. 김수영에 대해 오래 전부터 조금이라도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나 김수영 시를 가끔이라도 읽었던 사람이라면 이번 기회에 김수영의 정신을 속속들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잘 모른다 하더라도 이 책은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시인이기 이전에 거대한 흐름으로써 한 인간의 면모를 느낄 수 있고, 그의 일대기를 시와 함께 흡수하며 지금 자신이 고뇌하고 있는 삶과 세상의 의문들에 대해 답을 풀어낼 수 있는 힘이 되어 주리라. 다만, 결코 이 책에 담긴 사색의 무게가 가볍지 않기 때문에 심호흡 한 번 제대로 하고 맞이해야 할 테다. 그리고 책장을 덮을 때는 자신이 꿈꾸는 이름에 가까워 질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리라.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생각이 하나 들었다. 요즘 한창 물이 올라 뿜어대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의 SNS 서비스를 보고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시인이 되고 싶어하고, 철학가를 꿈꾸고, 행동하는 사회인을 자처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써내는 짤막한 글 곳곳에 생각을 담고, 생각에 힘을 주고, 리듬을 살린 흔적을 자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1967년에 이런 세계를 예상했을까? 다음의 글을 보고 문득 떠올려 본 것이다.

 

 서구의 어느 비평가가 말했듯이 앞으로 먼 후일에는 모든 세계의 인류가 시를 쓰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오. 또한 헤세가 그의 시에서 읊고 있듯이, 시가 필요하지 않은 낙원이 도래하고 모든 사람들이 착한 시인의 생활을 하고 오늘날의 시가 무효가 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르오.

- <문단추천제 폐지론>(1967.2)

 

 물론 이 글을 쓴 배경과 내가 짚어낸 상황이 맥락은 다르지만, 이렇듯 이 책의 김수영의 글을 현실에 맞춰보며 상상력의 재료로 쓰는 재미가 쏠쏠하다. 김수영은 시인을 꺼리는 시대, 목소리를 가려야 하는 시대에 살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목소리를 쏟아내지만, 그것이 진정 소통으로 받아들여지고, 행동으로 옮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김수영이 살았던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면 너무 슬픈 것 아닌가? 이모저모 의문도 품어가며,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어느새 성숙한 내 영혼의 속살들을 훔쳐볼 수 있다. 그리고 반성하게 된다.

 

 그렇다. 이 책은 철저히 글을 읽는 사람에게 나직이 반성하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어쩌면 이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반성해야 할지도 모르는데하지만 언제든 그러하지 않았나. 늘 반성하고, 그보다 더 많이 겸손해지려는 것도 습관이니까. 그런 습관을 가진 좋은 사람들이 이 책을 펴 들고 각자 모두 다른 이야기를 가지 치길 바란다. , 한가지 마지막까지 김수영 그와 공유해야 할 것은 자유리라. “두려움 사이에서도 자유를 잊지 말고 슬픔 속에서도 환희를 잊지 말고고뇌하는 노인이 두 손을 주먹 쥐고 얼굴을 가린 채 의자에 앉아있는 그림과 함께 제시된 이 문장이 책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음을 알려준다. 우린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사색하고 대화하는 것이다.

 

 김수영을 만난 저자의 에필로그와 또 김수영을 만난 편집자의 글도 일품이다. 그것을 읽고 책을 덮는 순간 우린 모두 허기를 느낄 테다. 나도 내 삶에 오롯이 기대고 내 목소리로 인생을 쓰고 싶은 허기를. 이제는 그 허기를 채울 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료로 책을 대여해주는 공공도서관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책을 빌려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욕심을 내서 1인당 대여 권수 5권을 꼭꼭 채워 빌렸는데, 다 읽지 못해 반납일을 넘겨버린 일이 자주 일어나진 않았는가. 우리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자신 때문에 이 책이 필요한 누군가가 책을 빌리지 못한 상황을 떠올렸을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죄책감의 징후를 느꼈을 것이다. 지역 주민이 무료로 책을 공유하는 도서관의 경우엔 연체벌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연체된 기간만큼 책을 빌리지 못하게 하는 규정을 마련해 놓는데, 전자이든 후자이든 규칙을 어긴 행동에 책임을 묻는 것이다. 하지만 책임을 졌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느끼는 작은 부끄러움은 그대로 남아야 한다. 만약 연체료를 내거나 연체된 기간만큼 책을 빌리지 못하는 것을 감수하기 때문에 다음번에도 그 다음번에도 책을 연체하는 것을 당연시한다면 공공도서관의 원래 목적을 훼손시키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만들어지는 재화와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원래 목적이나 취지를 제대로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저자는 책 전반에 녹여냈다. 공공도서관에서 물어야 할 벌금요금으로 인식되는 순간 우리가 지켜야 하는 규칙은 허물어지고, 사회에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누군가의 권리가 침해받는다. ‘벌금은 도덕적으로 승인받지 못하는 행동에 대한 비용인 데 비해, ‘요금은 도덕적 판단이 배제된 단순한 가격이다. 무거운 의미의 벌금요금으로 가벼워지는 순간 우리가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제해야 하는 나쁜 행동이 하나 더 늘어난다.

 

이 책은 읽는 내내 머리 아플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읽어 내려가는데 어렵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저자는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 즉 시장이 깊게 침투한 시대에 살면서 불편한 진실들에 눈을 감아버리는 사례들을 다양하게 책에 풀어냈다. 그래서 웬만하게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책 한 권을 정독하는 데는 겁내지 않아도 된다. 머리 아플 각오를 해야 한다는 건 다른 차원에서 한 말이다. 우리가 평소 그럴 수도 있지!’ 혹은 그런 것들을 다 지키면서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등으로 합리화시키며 손쉽게 돈을 내고 소유했을 것들에 저자는 의문을 던진다. 정말 그것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말이다.

 

여러분은 우정을 돈으로 살 것인가? 자신이 낳은 아기를 사고팔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마약에 중독된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는 대가로 돈을 받을 수 있다고 보는가? 많은 액수의 돈을 주고 전담 의사들을 채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한쪽에서는 제때 진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늘어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돈이 필요해서 제약 회사의 약물 안전성 실험대상이 되고, 더 높은 보수를 받기 위해 더 위험한 상태로 자신의 몸을 방치시킬 권리가 있을까? 로비스트 대신 줄을 서서 공청회 좌석표 전부를 거액에 넘기는 바람에 기후변화 공청회를 방청하기 위해 도착한 환경운동가들은 그냥 돌아서야만 한다면?

 

위의 질문들은 놀랍게도 모두 현재 존재하는 것들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언뜻 없어 보인다. 이것 외에도 우리가 도덕성이나 공정성을 무시하거나 모르는 체하는 사이에 우리 인간을 더욱 각박하게 만들고, 세상을 점점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거래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동시에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묻혀 버리고 만다. 이 상황은 분명 모두에게 위기다. 저자인 마이클 샌델은 이 위기를 경계하고, 우리에게 기회를 줄 목소리들을 살려내기 위해 이 책을 내놓았다. 자유지상주의자와 공리주의자들에게 논리적인 반박을 하며, 부패한 현실의 고름을 짜내고 새 살을 돋게 할 질문과 답을 멈추지 않는다.

 

책을 읽다 보면 이런 것 정도는 거래되면 서로서로 좋은 일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내 이익(내 밥그릇)’에 집착하다 보니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본질과 가치를 따져보는 일에 무책임하고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이 우리 사회가 놓치고 있는 부끄러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저자가 던지는 질문에 자신이 깨달은 바를 풀어내는 일은 단지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논의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닥칠 삶이자 미래를 결정짓는 중대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