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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Notre Dame de Paris
아시아 첫 공연을 보다.

이 공연을 기획한 회사 AIM의 마케팅 팀장이
첫공연에 초대해 주었다. 감동했다.

나를 초대해준 사람은 바로.....봄봄님이다.
2년 동안 변함 없이 내 글에 애정을 보여준,
내 어설픈 글들을 읽고 날 염려해 주고 응원해 준 고마운 봄봄님.

봄봄님을 보면서 느낀다.
꾸준함과 성실함의 엄청난 힘을....

많은 사람들이 성공의 문턱 바로 앞에서 지쳐 버린다.
그렇게 힘겹게 노력해 놓고,
한번만 두번만 더하면 닿을 수 있는데
문턱 바로 앞에서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

봄봄님은 자신의 길에서 절대 이탈하지 않는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편하게 살 수 있는 다른 길들의 유혹을 겪으면서도,
한번도 다른 길을 쳐다보지 않았다.

언젠가 봄봄님에게 이런 구박을 한 적이 있다.
" 제발 좀 돈 되는 일을 해요!"
부끄럽다. 왜 주제 넘게 그런 말을 했을까?

서양화를 전공하는 후배가 있다.
세상일 아무 것도 모르고 그림만 그린다.
그 흔한 증권 카드도 하나 없다.
주식을 어떻게 사고 파는지 모른다.

그 후배에게 어줍쟎은 충고를 했다가 후회한 적이 있다.
" 예술가들도 생활인 아니야? 경제 흐름 정도는 알아야 하는거 아니야? "
이 말 하고 나서 잠 못자고 후회했다.
그 후배에게 어찌나 미안했던지...

내가 봄봄님에게 했던 주제 넘는 말이나,
후배를 아프게 했던 말이나,
다 내 열등감, 그들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지 못하는
나의 용기 없음에 대한 열등감의 산물이다.

그들에게 화가 난게 아니라,
그들처럼 소신 있고 용기 있게 살지 못하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나서 한 말이다.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봄봄님에게, 후배에게 정말로 미안하다.

Notre Dame de Paris
아시아 첫공연. 세종문화회관 로비는 TV에서 자주 보던 유명인들로 넘쳐 났다.

앙드레 김. 아....앙드레 김의 화장은 나 보다 더 진했다.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것처럼 앙드레 김은 외국 대사, 대사 부인들을 잔뜩 초대했다.
로비에서 대사 부인들에 둘러 싸여 얘기하고 있었다.
세련된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영어는 참.....전형적인 콩글리시에서 약간 더 촌스러웠다. 옷은 참으로 멋졌다.

이자도시...TV에서 보고 푼수 같다고 생각했는데, 참 세련되고 예뻤다. 훨씬 도시적인 이미지였다.

유인촌....드라마에서 본 모습과 별 다를 바 없었다.
늙으면서 더 멋있어 지는 것 같다.

모자를 눌러 쓴 김수철 아저씨도 보이고(키 정말 작더라...),
친근감 느껴지는 윤문식 아저씨도 보이고,
방송국 하나를 옮겨 놓은 것처럼 많이들 왔다.

8시 공연.
7시 50분에 입장을 하려 할 때,
표를 잃어버렸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았다.

주머니, 가방 다 뒤져도,
같이 간 동생의 주머니,가방을 다 뒤져도,
왔던 길을 도로 가 보아도 없었다.

아....패닉상태가 되었다.
초대해준 봄봄님에게 미안한 마음과
공연을 보고 싶다는 터질 것 같은 마음....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손에 들고 있었는데 흘렸나 보다.
바보,바보,바보!!!

봄봄님에게 전화를 했다.
입구로 달려온 봄봄님.
안내에게 표를 잃어 버렸다고 말해줘서 겨우 들어갔다.
아....봄봄님, 정말로 미안해요!

의자에 앉았을 때 정신이 없었다.
처음 10분 동안은 공연에 집중을 못하고,
나의 멍청한 행동을 비난했다.

그런데....공연이 너무도 대단해서
더 이상 딴 생각을 하는게 불가능했다.
배우들의 노래가 폐부를 찌르는 듯 했다.
노래가 정면으로 가슴에 부딪혔다.
이런 느낌....정말 오랫만이다.

Notre Dame de Paris를 원작으로 한 수많은 영화와 애니가 있었다. 꼽추 콰지모도의 에스메랄다에 대한 사랑이 줄거리였다.
흉한 자신의 외모를 마음 아파하며 에스메랄다를 바라보는 해바라기 사랑,무조건적인 사랑.

사실 빅토르 위고의 원작이 너무 거대해서,
그 시대적,문화적 배경과
등장 인물들의 심리적 배경,
그 시대의 파리라는 역사적 배경을
영화나 애니에서 담아내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꼽추 콰지모도의 순애보라는 서정적 줄거리만 가져온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어제의 뮤지컬은
어떻게 노래와 무용에 그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는지....
짚시들의 외침이 그대로 와닿았다.
파리, 파리의 노트르담이라는 역사적 배경의 의미를
가슴에 울리게 절절하게 표현했다.

6명의 주연을 빼고는
모두 대사 한마디 없는 댄서들이었는데,
그 댄서들의 몸 동작 하나하나가 정말 위력적이었다.
짚시들 삶의 절절함이 그들의 몸 동작에서 흘러나왔다.

또 하나,
프랑스어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 아름답고 절절한 노래들이 프랑스어 특유의 발음과 비음에 섞여
아름다움의 절정에 닿았다.

공연을 보고 나오는데 뻐근했다.
여전히 감동이 쿵쿵 가슴을 두드렸다.

오늘 아침에 공연 CD를 듣고 있으니,
어제의 감동이 그대로 전해진다.
공연이 끝나기 전 한번 더 봐야 겠다.

봄봄님, 이 훌륭한 공연에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답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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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7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3-01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05-03-02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부러워요. ^^
오늘 아침 신문에 보니까 노트르담 드 파리에 대해 기사가 실려있더군요. 대사없이 노래만, 그것두 불어로 부르는데 재미가 있을까? 답은 있다더군요. ^^ 뮤지컬이 왜 MUSIC al 인지 알 수 있게 하는 공연이라구..
저도 보고파요. ㅠㅠ
 

수요일 저녁,
끝내지 못한 일을 과감히 포기하고, 바람을 휘날리며 퇴근했다.

왜?
Chagall 전시회에 가려고.
원래 10/15까지 전시예정이었는데,
워낙 방문객들이 많아서 22일(오늘)까지 연장되었다,

내가 하는 일이 항상 그렇듯이
( 벼락치기의 대가.時테크랑 전혀 관계 없는 대표적 인간 유형!
자랑도 아닌데...ㅋㅋ)
전시 종료를 이틀 남기고 부랴 부랴 미술관을 찾았다.

7시에 갔는데도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서울시립미술관 앞에서는 시민들을 위한 꽁짜 콘서트까지 하고 있었다. 박기영이 한껏 가창력을 뽐내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시원한 저녁 바람, 음악, 샤갈전을 보기 위해 찾아 온 많은 사람들..
분위기 참 좋았다.

그 때, 시커먼 대형 승용차 한대가 섰다.
경비가 90도로 인사를 하고,
양복 차림의 공무원 아저씨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차 주위를 둘러쌌다.

도대체 누가 왔는데, 이 난린가?

차 문이 열리더니, 이명박이 내렸다.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90도로 절을 하고 악수하고 난리였다.

우리는 힐끔 그들의 "쑈"를 바라보면서, 미술관에 입장했다.
전시종료 이틀 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미술관에서 줄을 서서 작품을 본건 정말이지 처음인 것 같다.
살바도르 달리展에도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었다.

초등학생들한테는 학교에서 숙제를 내 줬는지
어린이들이 수첩에 깍둑이 글씨로 작품 제목들을 적고 다녔다.
뭐하러 그런 숙제를 내 줘가지고.....한심하다.

그 놀라운 색감에, 그 몽롱한 상상력에 반해서
화가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어린이들이 대폭 탄생할 중요한 시점에서
교사들이 내준 100년 전과 똑 같은 숙제로
어린이들은 작품 제목을 적는다고 바빠서 그림도 제대로 못 보고 있었다.

달력, 엽서, 책, cafe에 걸려 있는 프린트화 등에서 샤갈의 그림을 수도 없이 봤지만,
원화를 보니 그 색감에 너무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어떻게 이런 색감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Chagall은 천재다.

Chagall의 그림을 보면 인물들의 얼굴 색깔이 다 다르다.
초록색 얼굴, 파란색 얼굴, 빨간색 얼굴......
그 어떤 얼굴도 이상하다거나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국민학교 때가 생각난다.(난 초등학교를 다니지 않았고, 국민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그냥 국민학교라고 부른다.)

미술시간에 항상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렸고,
친구들의 생일선물로도 가장 흔하고 만만한게 크레용이었다.
미술 시간 뿐 아니라 그림 일기까지 그려야 했기에
크레용은 거의 연필과 맞먹는 국민학생들의 생필품이었다.

기본 크레용은 12가지 컬러,
그 다음은 24가지 컬러,
디따 큰건 48가지 컬러도 있었던 것 같다.
( 48개 짜리 대형 크레용을 가지고 온 애들은 하루 종일 자랑한다고 침을 튀겼다.)

크레용은 어린이들의 손에 묻지 않도록
종이로 쌓여 있었고 그 종이에는 색깔 이름이 써 있었다.

기억나겠지만,
크레용에는 "살색"이 있었다.
"살색"
그 때는 한번도 "살색"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엄마,아빠를 그릴 떄,
선생님을 그릴 때,
친구들을 그릴 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살색으로 얼굴을 색칠했다.

그런데....
어떻게 "살색"이라는 색깔 이름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이 세상 사람들의 "살색"이 모두 다 다른데 말이다.
꼭 "살색"이라고 부르려면 좀 길더라도 "한국사람 살색"이라고 불러야 했던 거 아닐까?

물론 같은 한국 사람이라도
사람 마다 살색은 모두 다르다.

그러니까 화장품 종류도 많은거 아닌가?
내츄럴 베이지, 다크 베이지 , 페일 베이지 등등....

"살색"이라는 호칭은 너무도 파쇼적인 발상이다.
우리는 아무런 비판적 대응 없이 "살색"은 크레용의 그런 엷게 누르끼리한 색이라고 믿었다.
살색은 사람 마다 다 다른데도 말이다.

아프리카에서는 "black"을 "살색"이라고 부를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거주지역에서는 "white"를 "살색"이라고 부를까?
미국 같이 온갖 인종이 다 뒤섞여 사는 나라에서는 도대체 무슨 색깔을 "살색"이라고 불러야 할까?

샤갈이 그린 총 천연색의, 너무도 눈부신 원색으로 빛나는 얼굴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상상력의 상실"을 강요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살색"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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