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두 챕터 읽고 내일 다시 오세요 - 책으로 처방하는 심리치유 소설
미카엘 위라스 지음, 김혜영 옮김 / 책이있는풍경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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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로 아픈 마음을 치료할 수 있을까. 글쎄, 정작 마음이 힘들때는 글자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경험이 많아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책을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 독서 치료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건 신기하고도 반가운 일이다. 지금의 내 상황을 독서 치료사에게 말한다면 그는 과연 무슨 책을 처방해줄까. 그렇게 모든 사람의 사연을 듣고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처방을 해주기 위해서는 도대체 머릿속에 몇 권의 책이 들어있어야 하는 걸까, 궁금하긴 하다. 
《이 책 두 챕터 읽고 내일 다시 오세요》는 독서치료사 알렉스가 자신의 환자들과 있었던 모든 상담과 알렉스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해 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핑크핑크한 책 표지에 끌려 유쾌한 독서 경험을 기대했는데, 솔직히 중언부언한 문장 스타일과 뒷맛이 찝찝한 이야기 결말 때문에 썩 재밌거나 유쾌하진 않았다. 보통 책에 관한 책을 보다보면 책 속에서 언급되는 책들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기 마련인데, 언급된 수많은 책들 중에 특별히 관심가지게 된 책도 얼마 없어서 좀 아쉽다. 그 중 가장 아쉬웠던 점은 활자중독이라고 할만큼 책을 좋아하는 주인공 알렉스나 문학에 빠져 다른 모든 것을 괄시하는 알렉스의 어머니가 모두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매력없는 사람인 것 처럼 표현되어 아쉬웠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언제나 호기심을 자아내고 약간은 신비로운 느낌도 들게 마련인데, 주인공 알렉스는 독서 치료사이지만 어디까지나 일적으로만 환자들을 대하려 하는 딱딱한 사람이고, 그의 어머니는 문학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로써 자신이 아는 어려운 책들을 읽지 않은 사람은 무시하고 가르치려 드는 사람이다. 주인공과 그의 내담자들 모두 크게 매력을 끄는 사람이 없어서 더 흥미가 반감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인공 알렉스의 풀 네임은 알렉상드르 판토크라토르이다. <삼총사>,<몬테크리스토 백작>등을 쓴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에서 따온 이름이다. 문학에 깊이 빠져 아들의 이름까지 위대한 작가의 이름을 따서 붙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알렉스는 사실은 어머니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다. 항상 무언가의 결핍을 느꼈던 그는 자신이 그렇게 싫어했던 어머니 처럼 결국은 자신도 책에 빠져 산다. 사랑하는 아내 멜라니가 있지만, 그녀도 결국은 알렉스의 책에 대한 집착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전 그의 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곁에 책이 있기에 괜찮다고 여긴다. 그는독서 치료사로서 자기 자신을 치료하기 위한 처방으로 쇠렌 키르케고르의 <유혹자의 일기>라는 책을 처방한다. 그는 과연 그 책을 읽고 사라진 아내를 다시 유혹할 수 있을지... 

그는 3명의 내담자를 돌아가며 상담하고 있다. 자동차 사고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혀가 잘려 말을 할 수 없는 소년 얀, 유명한 축구단 주장이지만 자신의 미래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안토니, 미치도록 일에 빠져살았기에 번아웃 증후군에 빠진 로베르 이들은 책 속에서 어쩌면 해결점을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독서 치료사를 찾았고, 알렉스가 처방해준 책을 저마다의 방법으로 읽으며 자신의 삶의 방향을 찾아나간다. 

「문학은 '거의' 삶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작품을 자신의 상황에 맞추어보아야 한다. 이 '다만'이라는 단어가 내 직업만의 묘미다. 현존하는 수많은 작품들속에서 이 안타까운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말을 건네줄 소설이나 시를 찾아 제공해야 한다. 나는 작품이 '말을 건넨다'라는 표현까지 쓴다. 이것은 절대 허튼 소리가 아니다.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작품들은 그것을 읽는 독자와 함께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작품의 텍스트는 귀가 아니라 눈을 통해 우리에게 스며든다.」
< 이 책 두 챕터 읽고 내일 다시 오세요 p.186>

책이 과연 내 삶의 방향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물론 적시에 읽게 된 좋은 책은 내 삶을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데리고 갈 수도 있다. 혹은 책 속 주인공을 보며 용기와 위안을 얻어 절망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인생의 키는 자신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 내담자들 모두 겉으로는 알렉스가 처방한 책이 자신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며 고마운 마음을 표했지만, 사실 그들 인생에 진짜 영향을 미친 것은 알렉스가 추천해준 책을 읽은 것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스스로 해결점을 찾으려 나서는 행동 때문이 아니었을까. 독서는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야 하는 취미이다. 고도의 집중력과 많은 시간, 다 읽어내겠다는 의지가 아니면 완독이 힘들기 때문에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언제나 칭찬받을 만한 행위다.그들은 적극적인 독서행위를 통해  그들의 인생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책의 말미를 보면 알렉스는 자신에게 처방했던 쇠렌 키르케고르의 <유혹자의 일기>를 사실은 펼쳐보지도 못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책이 아닌 현실에 발을 딛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로 인해 서서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가고 있었다. 책은 언제나 위대하지만 그 책 또만 내 현실 위에 존재할 때 의미가 있다. 독서 치료사로써 다른 사람에게 상황에 맞는 책을 권하던 알렉스는 결국 자신에게 처방된 책을 읽지 않고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무슨 책을 처방할 수 있을까.
따로 책을 처방하기엔 그냥 읽어야 할 책도 넘쳐나는 상황이라 일단은 패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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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삶의 철학
엠리스 웨스타콧 지음, 노윤기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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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단순한 삶의 모습은 이렇다. 
느지막히 푹자고 일어난 아침, 향기 나는 커피 한잔과 함께 빵이나 과일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초록빛 풀들이 자라나는 정원에서 햇빛을 받으며 광합성을 한다. 오후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글을 쓰기도 한다. 노을이 번지는 저녁쯤이 되면 동네 한바퀴를 돌며 산책 겸 장을 봐와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먹는다.  저녁을 먹고는 와인이나 맥주 한잔과 함께 까만 하늘에 뜬 별을 보며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든다. 
이 얼마나 꿈같은 시나리오인가. 내가 원하는 단순한 삶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우선 이런 삶을 살려면 한적하고 깨끗한 땅에 정원 딸린 전원주택이 있어야 하고, 매일 출근을 하지 않아도 충분한 돈을 벌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지만(ㅠ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내 꿈이다. 요즘엔 그냥 단순한 삶을 살기 위해서도 참 많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삶에 매년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고 싶다거나 하는 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으면 불가능한 삶이다. 요즘은 참 단순하게 살기도 힘든 세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삶이라는 키워드에 이끌려 읽게 된 이 책의 부제는 '세상의 스크루지들을 위한 철학의 변명'이었다. 알고 보니 《단순한 삶의 철학》의 원제는 the wisdom of frugality였다. 해석하자면 "절약의 지혜" 쯤 될 것이다. 단순하게 사는 삶이 절약하며 사는 삶과 동의어라니 좀 의외이긴 하다. 내가 생각하는 단순하고 아름다운 삶의 끝판왕은 아마도 제주도의 소길댁, 이효리가 사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서였으리라. 원하는 만큼 돈을 벌어놓고, 사랑하는 사람과 예쁜 집에서 살며 마음대로 시간을 누리고 사는 삶.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인생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삶, 그것이 내가 본 단순한 삶의 미학이었다. 제주도 하면 이효리가 생각날 만큼 그녀는 내추럴 라이프로 사람들에게 또다른 로망을 심어줬다. 

책에는 소박하고 단순하게 사는 것의 미덕과 그것을 반박하는 주장들이 함께 실려있다. 다만 책에서 말하는 단순하게 사는 삶은 아끼고 근검절약하며 사는 삶을 말한다. 

「19세기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도 같은 맥락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지나치게 지루하지만 않다면 단순한 인간관계와 단조로운 일상이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한다."」
< p. 52>

「소박한 삶을 살게 되면 일상에서 만나는 작은 것들에게서 흥미를 느끼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사소한 현상을 기적과도 같이 느끼며 때로는 작은 것에서 깊은 성찰을 얻게 된다. 에머슨이 말한 대로 "가까이서 보는 세상은 멀리서 볼 때보다 아름답고 놀랍다."」 
< 단순한 삶의 철학 p. 155>

위의 의미에서 볼 때 난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반론들을 보면, 

「당신이 신형 아이패드를 가졌다는 사실이 남들에게 강한 인상을 줄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같은 상품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만일 먼 바다를 돌아 바하마를 거쳐 오늘 미국에 도착했고 곧 <니벨룽겐의 반지>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독일 바이로이트로 떠난다면, 당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질 것이다. (..) 대화를 유능하게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방의 최근 여행이나 여가 활동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차별화시켜주는 방식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휴가나 나들이, 모임, 콘서트, 스포츠행사 등에 쓰이는 돈이 유형의 상품을 구입하는 것보다 훨씬 큰 행복감을 가져온다. 우리는 새로운 물건에 쉽게 익숙해지지만 좋은 기억은 쾌락의 원천이 되어 오랫동안 남아있기 때문이다. 」 <p.243> 

사치는 때로 삶의 재미와 활력을 선사한다고 한다. 실제로 최근 신형 아이패드를 사고 싶어 눈독들이고 있는 와중이라 책 속 문장을 보고 깜놀했다. 난 유형의 물건을 지르는 것도 좋아하지만, 여행을 떠나는 것도 인생에 꼭 필요한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왜 시간만 나면 해외여행을 떠나려고 하는지, 이번 휴가때 어느 나라를 여행하고 왔다고 자랑하는지 알 것 같다. 그 여행이 실제로는 얼마나 힘들고 고된 시간이었든 간에 시간이 지나면 두고두고 얘기할 수 있는 즐거운 추억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새로운 경험을 위해 여행에 투자하는 것은 분명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다만 남에게 보이기 위해 일부러 과시하는 소비는 지양해야 할테지만 말이다.

현대 사회는 사람들의 소비로 경제가 굴러간다. 앞서 내가 말한 단순한 삶이 돈을 아끼고 마냥 근검절약하는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듯, 적절한 소비와 쾌락은 사회가 유연하게 굴러가도록 만들어주는 기름 역할을 한다. 《단순한 삶의 철학》은 소박하게 근검 절약하는 삶에 대해 다양한 철학자들의 생각과 의견을 조사한 다음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 정리한 글이다. 결론적으로는 소박한 삶도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지나친 근검절약은 인색함을 불러오고 사회전반적인 경기침체로 이어질수도 있다는 말을 전한다. 많은 철학자가 등장하고, 그리 쉽게 쫙쫙 읽히는 글은 아니지만, 중간중간 내 삶에 대해 생각해 볼만한 문장들이 있어 공감되는 부분은 많다.

나는 앞으로 어떤 부분에서는 근검절약 하되, 나머지 부분에서는 비용이 허락하는 한 가끔은 사치도 누려볼 생각이다. 옷이나 가방 사는데 큰 욕심이 없는 만큼 책이나 문구류, 전자기기 처럼 나에게 큰 기쁨을 주는 지름에는 돈을 열심히 쓸 생각이다. 또한 생각의 틀을 넓혀줄 다양한 여행과 무형적인 경험에도 좀 더 투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행복하려고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이니 만큼 아끼면 된다는 말이 있듯이(?), 단순한 삶 속에서 마음껏 작은 사치를 누려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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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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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평소 생활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이건 나중에 글로 써봐야지' 할 때도 많다. 문제는 글을 써야겠다고 책상에 앉으면 머릿속이 새하얘진다는 것, 생활하면서 자유롭게 머릿속을 떠다니던 멋진 문장들은 앉아서 글로 쓰려는 순간 훅 날아가버리고 없다. '평소에 메모를 했어야지'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핸드폰으로 글자 적는걸 싫어할 뿐만 아니라, 메모지를 곳곳에 놔두고 쓰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쓰기만 하면 멋진 문장이 줄줄 흘러나올거란 기대를 한다. 막상 쓰기 시작하면 초등학생 수준의 유치한 문장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써야한다. 계속해서 쓰면서 생각의 쓰레기들을 흘려보내다보면 언젠가는 그 안에서 자그마한 생각의 사금을 발견할수도 있으니까. 

「이 책을 다 읽은 사람이 무엇이든 쓰게 되었으면 좋겠다. 다 읽지 않더라도 갑자기 책을 덮고는 무엇이든 쓰게 되었으면 좋겠다. 낙서를 하고 문장을 만들어보고, 이야기를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고, 노랫말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결과는 형편없을 것이다. 나도 그랬고, 당신도 그럴 것이다. 형편없는 것들이 쌓이게 될 것이다. 자, 이제 시작해보자. 형편없는 것들을 하나씩 쌓아보자. 당신은 지금부터…… 무엇이든 쓰게 된다.」 <프롤로그 에서>

김중혁 작가는 잘쓰려고 하지 않으면 쉽게 쓸 수 있고, 잘 그리려고 하지 않으면 쉽게 그릴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요즘 데일리 다이어리에 매일 일기를 쓰는 중이다. 매일 비슷한 일상이다 보니 사실 별로 쓸 내용이 없다. 어떤 날은 읽은 책에 대한 내용을 쓰기도 하고, 오빠랑 대화나눈 것들에 대해 쓰기도 한다. 잘 쓰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부끄럽게도 초등학생 일기 수준이다. 하지만 적어도 매일 무언가 쓰고 있지 않은가. 매일 정제된 글을 써야한다고 생각했다면 아마도 벌써 포기했으리라. 

작가는 어떤 일상을 사는지 궁금했다. 좋아하는 글을 쓰면서 돈을 버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대체 어떤 생활을 할까. 글 쓸때는 어떤 프로그램을 쓸까, 하루에 몇 시간이나 글을 쓸까, 다들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김중혁 작가는 이런 질문을 꽤 많이 받았나보다. 평소 자신이 쓰는 펜의 종류와 문구부터 시작해서 글쓰는 프로그램과 전자제품까지 모두 소개해놓았다. 사실 문구덕후에 장비 갖추는걸 좋아하는 나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여기서 벌써 한번 흔들렸다ㅋ 책을 읽다가 아이패드 프로의 가격도 확인하고, 작가가 쓴다는 스크리브너와 율리시스 같은 글쓰기 프로그램도 찾아봤다. 아마도 애플빠인듯한 김중혁 작가는 책에 나온 모든 삽화도 직접 애플 펜슬로 그려서 넣었다고 한다. 전작 에세이 <뭐라도 되겠지>에서도 온갖 귀여운 그림들과 유쾌한 농담이 난무하는 이야기를 보면서 '아니, 왜 이 사람은 글도 잘쓰고 그림도 잘그리는거야, 거기다 유머까지! 세상은 불공평해' 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러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가 물론 글과 그림에 두루 소질이 많은 것도 있지만, 잘해야 겠다는 생각없이 일단은 시작해본다는 것, 그것이 지금의 그를 만들어낸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믿음과 소망과 관찰, 그 중에 제일은 관찰이다. 재치와 끈기와 열정과 야심이 불타올라도 관찰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관찰은 창작자로 출발하기 위해 제일 먼저 가동시켜야 할 엔진이자 가장 늦게 타올라야 할 불꽃이다. 관찰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다.」 
< 무엇이든 쓰게 된다 p.10>

책의 첫부분부터 귀싸대기를 맞은 기분. 그렇다, 난 관찰력이 부족하구나. 얼마전부터 느끼긴 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뭔가를 그리려고 하면, 그게 어떻게 생겼더라, 이 포즈는 어떻게 그려야 하지 하는 생각으로 눈앞이 캄캄한거다. 평소 한가지를 눈여겨보기 보다는 성격이 급해 대충 훑어보고 넘어갈 때가 많기 때문에 그림을 잘 그리려면 관찰력부터 길러야 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역시 글 쓰는데도 필요한 스킬이었다. 남들과 같은 것을 보더라도 더 오래보고, 다른 방향에서도 보고, 결국엔 남들과 다른 점을 볼 수 있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실제로 미술관에서 이보다 더한 걸로, 새하얀 캔버스 위에 가늘고 붉은 줄 하나를 세로로 찍 그어놓은 작품도 봤다. 헤어 실버맨에게 그 붉은 줄 그림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런건 나도 하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안했잖아."」 
< 무엇이든 쓰게 된다 p.283>

책을 읽으며 가장 뒤통수 맞은 것 같았던 대목이다. 살다보면 정말 아무나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으로 대박이 나는 사람도 있고, 어떤 글은 '이건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과 나의 다른 점은, "하지만, 안했잖아!" 이다. 얼마전에 기사를 보다 카카오톡에서 '대충 하는 답장'이라는 이모티콘으로 대상을 받은 사례를 봤다. 정말 연필로 대충 그린 듯한 얼굴에 표정도 다 비슷비슷한데 다만 매우 얄미움을 장착한 이모티콘이다. 그 작가는 취업도 안되고 심심해서 평소 자신의 모습을 담아 대충 그려서 내봤는데 대상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단다. 나도 어쩌면 그런 그림 정도는 그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안했잖아." 어떤가. 이제 노트를 한번 펴보실까.

「독일의 교육학자 하르트무트 폰 헨티히는 "창의성에 대한 잘못된 기대가 우리를 벽에 부딪치게 만든다"고 했다. 뭔가 완전히 새로운 것,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 남들과 다른 어떤 것을 만들려고 하는 순간, 스스로 벽을 세우는 셈이다. 특별할 필요가 없다. 오래 하다보면 특별해진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특별하고, 시간과 함께 만든 창작물은 모두 특별하다. 」 <p. 286>

모두에게 특별하지 않더라도 나한테 특별한 글이면 족하다. 에버노트에 2주전쯤, <매일 글쓰기> 폴더를 만들어놓고 단 한 줄도 못썼다... 일기장과 다르게 거기엔 뭔가 좀 더 특별한 글이 쓰여야 할 것 같았나보다. 김연수 작가는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일주일 정도는 꾸역꾸역 자기가 보기에도 쓰레기 같은 글들을 미친듯이 꾸역꾸역 토해내고 나서야 새롭게 글쓰기를 시작한다고 한다. 전문 작가들도 일단은 쓰면서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내가 뭐라고 처음부터 잘 쓰려고 했단 말인가. 아무 글이나 써보자. 유난히 추웠던 날씨, 반려묘 다림이가 나에게 보여줬던 따뜻한 애교와 눈빛, 오늘 봤던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 가감없이 써보는거다. 

당신도 당장 펜을 들어보자. 자, 무엇이든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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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나라 -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
토르디스 엘바.톰 스트레인저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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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범한 강간범과 함께 용서를 위한 여행을 떠나다. 
책의 내용이 꽤 파격적이다.  자신이 강간당한 경험에 대해 실명을 밝힌 작가가 논픽션으로 책을 쓴 것에도 놀랐지만, 더 놀라운 건 책의 뒷날개에 저자를 강간했던 톰 스트레인저의 얼굴이 함께 나와있는 거였다. 심지어 이 둘은 공동 저자로 이 책을 함께 썼다.  《용서의 나라》는 10대 시절 강간을 당한 저자 토르디스 엘바가 자신을 강간했던 남자 톰 스트레인저를 지구 반대편의 낯선 나라, 남아공에서 만나 일주일간 대화를 통해 서로를 용서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실화 논픽션이다. 
강간범은 어두운 뒷골목의 사이코 정도로 생각하던 편견에 놀라움을 던져줬다. 실제로 톰 스트레인저는 토르디스 엘바의 첫사랑이었고, 한때 연인이었다. 하지만 1996년 어느 날 그는 술에 잔뜩 취한 토르디스가 정신을 잃었을 때 그녀의 동의없이 2시간동안이나 무지막지한 강간을 저질렀다. 그 일로 인해 몸과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입은 토르디스 엘바는 이후 정신적인 충격으로 우울증, 약물중독, 자해 등 많은 괴로움을 겪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과거의 상처에 붙잡혀 자신을 갉아먹는 대신 정면돌파로 그를 만나 진정으로 용서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들은 만나기 전 8년동안이나 서로 이메일을 통해 의견을 교류해왔다. 이제는 직접 만나서 진정한 용서를 하고, 그 덫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강간을 저지른 톰 스트레인저는 다행스럽게도 자신이 한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깊숙히 후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과거 잘못을 말하지 못한 채 한 곳에 발 붙이지 못하고 불안하게 이리저리 방황하는 삶을 살아왔다. 토르디스와 계속해서 이메일로 대화한 건 그녀가 상처를 치유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였다고 말한다. 자신은 그 괴로움에서 놓여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하지만 토르디스가 생각하는 치유는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용서의 핵심은 짐은 덜되 그 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는 거야. 그 짐이 원래 그 사람의 몫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그 돌을 소유한 사람이 바뀐다 해도 악순환이 계속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 용서의 나라 p. 70>

그들은 토르디스가 살고 있는 아이슬란드와 톰이 살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간 지점인 남아공에서 만나기로 약속 한다. 자신을 범한 강간범과 16년만에 단둘이 낯선 곳에서 만난다는 것, 그녀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으리라. 그렇지만 그녀는 상처를 털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꼭 필요한 여정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오랜만의 어색한 만남을 시작으로 대화를 통해 고통스러운 기억에 정면으로 부딪치고 아파하면서 점점 용서에 가까이 다가간다. 

「"나는 너를 '강간범'이라고, 적어도 '나를 강간한 사람'이라고 불러도 돼. 그렇지만 그 말이 곧 너를 말하는 건 아니야. 절대 아니지. 그 말로는 네가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 십분의 일도 나타낼 수가 없어. 난 기억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이 있어. 하지만 그게 날 '알코올 중독자'로 만들수는 없어.  난 가끔 거짓말을 하지만 그게 날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난 강간당한 적이 있지만 그게 날 '희생자'로 만들진 않아. 사람은 평생 살면서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해. 요지는 나는 사람이라는 말이야. 딱지표가 아니고. 나라는 사람이 그날 밤  일어났던 일로 축소될 수는 없어.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 용서의 나라 p. 177>

여기서 토르디스 엘바의 대단하고도 똑똑한 점은 자신의 상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스스로의 아픔을 치유했으되,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공격하지 않고 함께 끌어안았다는 점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자신이 강간을 당했다고 해서 그 사실만으로 자신을 규정할 수 없듯, 죄와 사람을 분리시켜 톰도 과거를 떨쳐버리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이다. 톰 스트레인저는 자신의 죄를 깊이 늬우침과 동시에, 비로소 자신의 죄를 숨기며 전전긍긍 사는 것이 아니라, 공개하며 주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이 선생님께 한 짓을 용서할 수 있으세요?"
해괴한 질문도 다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내가 이제껏 들어본 것 가운데 가장 진심 어린, 천진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그의 폐부 깊숙한 곳에서 폭포처럼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내게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물론이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우리는 다 용서했어요. 그래야만 다음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요."」 
< 용서의 나라 p. 278>
 
그들은 남아공 곳곳을 여행하다가, 로벤섬에서 죄수로 수감되어 오랫동안 엄청난 핍박을 받다가 풀려난 경험이 있는 가이드에게 용서에 관한 명쾌한 해답을 듣고, 그 힘을 실감한다. 용서는 대단한 사람이 베풀어주는 희생같은 것이 아니다. 어쩌면 자신을 위해, 과거에 붙들려 괴로워하는 자신을 이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문득 얼마전 파리에서 테러가 일어나 가족을 잃은 사람이 인터뷰에서 자신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용서하지 않으면 이 악순환이 끝나지 않을거라고. 그 말이 진심이었다면, 그 사람은 적어도 테러리스트를 저주하며 괴로워하진 않으리라. 희생된 가족을 추억하며 슬퍼하기에도 시간은 부족하니까.

《용서의 나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그리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는 책이다. 용서와 늬우침의 당사자 두명이 함께 나라 곳곳을 여행하며 자신의 과거 삶과 생각을 속속들이 이야기 나누고, 때로는 작은 다툼과 의견 차이도 보이지만 결국엔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상태에 들어서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워보인다. 특히 여성 강간 피해자는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함께 스스로 죄의식을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토르디스 엘바가 현명하고 주도적으로 아픔을 이겨내는 모습은 참 좋았다. 

이 책은 강간과 범죄에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니라 '용서'에 방점이 찍힌 책이다. 
혹시 지금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트라우마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용서라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다른 누구도 아닌 소중한 자기 자신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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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1 0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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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1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2 - 문학사를 바탕으로 교과서 속 문학 작품을 새롭게 읽다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2
채호석.안주영 지음 / 리베르스쿨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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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공부든 시키지 않을 때 하는 공부가 제일 재미있다. 리베르 스쿨에서 나오는 <보다 시리즈>는 성인 대상으로 나오는 책은 아닌 듯 하지만, 중고등학생 정도의 눈높이에서 쉽고 재미있게 정보를 설명해주기 때문에 쉽게 다양한 정보를 얻고 싶을 때 즐겨 읽곤 한다. 예전에 세계지리에 대해 궁금한 부분이 많아서 도서관에서  <세계지리를 보다> 시리즈를 빌려 읽었었다. 유럽과 아메리카, 아시아 곳곳의 지리적 환경과 특징 같은 것들이 쉬운 지도와 보기 좋은 그림과 사진들로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어 흥미롭게 읽었던 생각이 난다. 이번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시리즈도 마찬가지 의미로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평소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 한국 고전문학은 별로 읽은 것이 없다. 학창 시절 국어시간에 소설 발췌 지문으로 배웠던 정도의 지식이 다인데, 지루하게 공부했던 기억 때문인지 어른이 되어서도 원본 전문을 찾아서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각각의 책들이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나오게 된 것인지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 탓도 컸다.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2>는 광복 이후 현대의 이르기 까지의 다양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탄생한 위대한 작품들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설명과 사진을 덧붙여주는 책이다.  


책을 읽으며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작가들이 직접 썼던 육필들이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는 점이었다. 지금처럼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원고지에 한자 한 자 꼭꼭 눌러가며 글을 썼던 그 때 그 시절 작가들은 글 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특히 최근에 읽기 시작했기에 더 관심이 큰 박경리의 <토지> 같은 대하 소설의 육필 원고는 더 호기심을 자극했다. 완성된 작품으로만 봤던 소설이 처음에 어떤 과정으로 구상된 것일까, 박경리 작가는 그 작품이 그렇게나 긴 소설이 될 거라는 생각을 처음부터 했던 걸까, 모든 것이 궁금하다.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는 시대별로 소설/시/수필 등으로 나누어 다양한 작품과 작가들을 소개한다. 소개한 작품들에는 생각보다 모르는 작품이 많았다. 어쩌면 모르기 때문에 읽어볼 생각도 못했던 것이리라. 책에서 시대에 따라 특징 지을만한 작품을 소개하고 간단한 줄거리와 작가, 작품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도 흥미롭게 설명을 해주기 때문에 읽고 나서 위시 리스트가 가득 늘어났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는 것이지만, 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 역사적 배경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느냐를 배우는 것이다.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시대, 그 시절 사람들이 겪었던 고뇌와 절망은 잘 쓰여진 문학작품이 아니었다면 어렴풋이 짐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문학작품에 대한 배경지식과 함께 흥미를 돋을 수 있어 좋을 것 같다. 국어 시간에 배워야 하니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흥미를 가지고 궁금한 작품에 대해서 배운다면 국어시간이 얼마나 즐거우랴. 꼭 학생이 아니라 성인들도 쉽고 재미있게 한국 현대 문학사를 쭈욱 훑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읽고 싶은 작품도 잔뜩 얻어갈 수 있겠지만, 방문해보고 싶은 작가의 생가나 문학관 정보도 가득 얻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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