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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나라 -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
토르디스 엘바.톰 스트레인저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자신을 범한 강간범과 함께 용서를 위한 여행을 떠나다.
책의 내용이 꽤 파격적이다. 자신이 강간당한 경험에 대해 실명을 밝힌 작가가 논픽션으로 책을 쓴 것에도 놀랐지만, 더 놀라운 건 책의 뒷날개에 저자를 강간했던 톰 스트레인저의 얼굴이 함께 나와있는 거였다. 심지어 이 둘은 공동 저자로 이 책을 함께 썼다. 《용서의 나라》는 10대 시절 강간을 당한 저자 토르디스 엘바가 자신을 강간했던 남자 톰 스트레인저를 지구 반대편의 낯선 나라, 남아공에서 만나 일주일간 대화를 통해 서로를 용서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실화 논픽션이다.
강간범은 어두운 뒷골목의 사이코 정도로 생각하던 편견에 놀라움을 던져줬다. 실제로 톰 스트레인저는 토르디스 엘바의 첫사랑이었고, 한때 연인이었다. 하지만 1996년 어느 날 그는 술에 잔뜩 취한 토르디스가 정신을 잃었을 때 그녀의 동의없이 2시간동안이나 무지막지한 강간을 저질렀다. 그 일로 인해 몸과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입은 토르디스 엘바는 이후 정신적인 충격으로 우울증, 약물중독, 자해 등 많은 괴로움을 겪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과거의 상처에 붙잡혀 자신을 갉아먹는 대신 정면돌파로 그를 만나 진정으로 용서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들은 만나기 전 8년동안이나 서로 이메일을 통해 의견을 교류해왔다. 이제는 직접 만나서 진정한 용서를 하고, 그 덫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강간을 저지른 톰 스트레인저는 다행스럽게도 자신이 한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깊숙히 후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과거 잘못을 말하지 못한 채 한 곳에 발 붙이지 못하고 불안하게 이리저리 방황하는 삶을 살아왔다. 토르디스와 계속해서 이메일로 대화한 건 그녀가 상처를 치유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였다고 말한다. 자신은 그 괴로움에서 놓여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하지만 토르디스가 생각하는 치유는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용서의 핵심은 짐은 덜되 그 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는 거야. 그 짐이 원래 그 사람의 몫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그 돌을 소유한 사람이 바뀐다 해도 악순환이 계속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 용서의 나라 p. 70>
그들은 토르디스가 살고 있는 아이슬란드와 톰이 살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간 지점인 남아공에서 만나기로 약속 한다. 자신을 범한 강간범과 16년만에 단둘이 낯선 곳에서 만난다는 것, 그녀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으리라. 그렇지만 그녀는 상처를 털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꼭 필요한 여정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오랜만의 어색한 만남을 시작으로 대화를 통해 고통스러운 기억에 정면으로 부딪치고 아파하면서 점점 용서에 가까이 다가간다.
「"나는 너를 '강간범'이라고, 적어도 '나를 강간한 사람'이라고 불러도 돼. 그렇지만 그 말이 곧 너를 말하는 건 아니야. 절대 아니지. 그 말로는 네가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 십분의 일도 나타낼 수가 없어. 난 기억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이 있어. 하지만 그게 날 '알코올 중독자'로 만들수는 없어. 난 가끔 거짓말을 하지만 그게 날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난 강간당한 적이 있지만 그게 날 '희생자'로 만들진 않아. 사람은 평생 살면서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해. 요지는 나는 사람이라는 말이야. 딱지표가 아니고. 나라는 사람이 그날 밤 일어났던 일로 축소될 수는 없어.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 용서의 나라 p. 177>
여기서 토르디스 엘바의 대단하고도 똑똑한 점은 자신의 상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스스로의 아픔을 치유했으되,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공격하지 않고 함께 끌어안았다는 점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자신이 강간을 당했다고 해서 그 사실만으로 자신을 규정할 수 없듯, 죄와 사람을 분리시켜 톰도 과거를 떨쳐버리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이다. 톰 스트레인저는 자신의 죄를 깊이 늬우침과 동시에, 비로소 자신의 죄를 숨기며 전전긍긍 사는 것이 아니라, 공개하며 주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이 선생님께 한 짓을 용서할 수 있으세요?"
해괴한 질문도 다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내가 이제껏 들어본 것 가운데 가장 진심 어린, 천진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그의 폐부 깊숙한 곳에서 폭포처럼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내게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물론이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우리는 다 용서했어요. 그래야만 다음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요."」
< 용서의 나라 p. 278>
그들은 남아공 곳곳을 여행하다가, 로벤섬에서 죄수로 수감되어 오랫동안 엄청난 핍박을 받다가 풀려난 경험이 있는 가이드에게 용서에 관한 명쾌한 해답을 듣고, 그 힘을 실감한다. 용서는 대단한 사람이 베풀어주는 희생같은 것이 아니다. 어쩌면 자신을 위해, 과거에 붙들려 괴로워하는 자신을 이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문득 얼마전 파리에서 테러가 일어나 가족을 잃은 사람이 인터뷰에서 자신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용서하지 않으면 이 악순환이 끝나지 않을거라고. 그 말이 진심이었다면, 그 사람은 적어도 테러리스트를 저주하며 괴로워하진 않으리라. 희생된 가족을 추억하며 슬퍼하기에도 시간은 부족하니까.
《용서의 나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그리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는 책이다. 용서와 늬우침의 당사자 두명이 함께 나라 곳곳을 여행하며 자신의 과거 삶과 생각을 속속들이 이야기 나누고, 때로는 작은 다툼과 의견 차이도 보이지만 결국엔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상태에 들어서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워보인다. 특히 여성 강간 피해자는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함께 스스로 죄의식을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토르디스 엘바가 현명하고 주도적으로 아픔을 이겨내는 모습은 참 좋았다.
이 책은 강간과 범죄에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니라 '용서'에 방점이 찍힌 책이다.
혹시 지금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트라우마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용서라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다른 누구도 아닌 소중한 자기 자신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