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01)


유명한 사람의 책은 잘 읽지 않는 성격상 아마 독서모임 아니었으면 꺼내들지도 않았을 책일 거다. 딱히 배우의 팬도 아닌데다가 움직일 때 걷기보다는 자전거와 자동차를 선호하는 나에게 ‘걷는 사람’이라는 제목도 크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하정우가 그저 영화배우, 프로먹방러, 때로 감독으로 활동하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 책을 낼 정도로 글을 쓰고 전시회에 내걸 그림도 그리는지는 몰랐다. 무엇보다도 걷기 중독자라고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영화 ‘577 프로젝트’에서 여러 동료와 함께 국토대장정을 하는 건 봤지만 강남에서 마포까지 출근길을 매일 걸어다니고, 강남 집에서 김포공항가지 8시간 동안 걷고, 친구들과 하와이에서 10만보를 꽉 채우고…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담!


> 나는 걸을 때 발바닥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전해지는 단단한 땅의 질감을 좋아한다. 내가 외부의 힘에 의해 떠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뿌리내리듯 쿵쿵 딛고 걸어가는 게 좋다.  _43쪽


책을 덮고 나면 당장 밖으로 나가 걷고 싶은 마음이 든다. 1일 30분 걸읍시다, 이렇게 걸으면 하정우처럼 성공한다, 처럼 걷자고 설득하지도 종용하지도 않는데 괜히 나가서 대지와 맞닿는 발바닥의 감촉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하정우가 손목에 찬 핏빗 뽐뿌가 오는 것도 막을 수 없다!


책은 걷는 이야기가 메인이지만 요리하고 먹는 이야기, 배우와 감독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야기, 직업에 대한 생각, 평소에 떠올리던 사유들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배우 하정우가 아니라 ‘매력적인 사람’ 하정우를 알게해준 나름 고마운 책이라 할 수 있겠다. 하정우의 팬에게는 더 멋있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각인되는 그런 책이겠지.


책은 전체적으로 솔직하고 상큼하나 글이 주는 무게가 다소 가벼워서 아쉽다. 차분하고 진중한 부분이 분명 있지만 전문 작가로 살아오지 않았기에 확실히 문장의 밀도가 떨어지고 같은 문장이라도 다가오는 울림이 다르다. 예를 들면,


> 하와이에서 나는 걷고 먹고 웃는 일에 하루를 다 쓴다. 삶의 곳곳에 놓인 맛있고 즐거운 일들을 잘 느끼는 일. 그게 곧 행복이 아닐까 하고 나는 하와이에서 생각했다.  _129쪽


같은 문장 말이다. 몇 문장만 똑 떼서 보는 건 어찌 보면 작가 입장에서는 치사하게 느낄 수 있는 행위긴 하겠다만, 이런 문장은 어떤 사람이 쓰고 앞뒤 이야기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울림통의 크기가 정해진다. 건강한 작가의 상큼한 이야기이기에 내가 기대한만큼의 무게중심을 보여주지 못해 아쉬운 것일 뿐이다. 나 혼자 단단한 글줄을 기대하고 괜스레 실망하면 안되겠지만, 이토록 매력적인 사람이 글까지 유려하게 쓴다면 더 사랑스러울 것 같아서 하는 볼멘 소리다.


그래도 결국 가벼워서 좋았다. 하정우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위트있게 풀어낸다. 책을 읽을 당시 감정적으로 힘들었는데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골라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참, 나는 걷기를 싫어하니까 하정우가 말한 ‘발바닥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전해지는 단단한 땅의 질감’은 센터에서 스쿼트할 때나 느낄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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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3-11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건강을 위해서 자주 걸으려고 했는데,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장시간 걸어 다닐 수 없네요. 미세먼지 마시면서 걷다간 건강이 더 나빠질 거예요.. ^^;;

양손잡이 2019-03-11 12:5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걷기 좋은 길을 찾기 보다 걷기 좋은 공기를 찾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ㅠㅠ
 
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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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

한 달 전에 읽은 책 간신히 기억 꺼내보기.

알쓸신잡에 출현한 유현준 교수의 두번째 책이다. 방송에 얼굴을 비춘 후 워낙 유명해지셨고(나만 몰랐던 분인가?) 책도 많이 팔리고 했으니 별로 읽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을 책으로 선택됐고, 결론적으로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책의 도입부부터 꽤나 도발적이다. 학교와 교도소가 디자인과 기능, 목적이 모두 유사하다는 것이다. 노이즈 마케팅으로 입소문을 내고 싶었나 했는데 1장을 읽다보니 또 일정 부분 설득당했다. 전국 8도를 통틀어도 동일한 디자인. 네모난 박스처럼 생긴 건물 외형. 일정한 간격으로 나 있는 창문. 건물 부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쳐둔 담장. 학생들이 보이는 여러 신체, 정신적 문제는 교도소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한다. 재밌는 해석이다.

으레 건축이라 하면 그저 도면과 숫자, 콘크리트와 철근, 유리로 이루어진 물질적인 것만 떠올렸다. 그런데 여는 글의

> 건축물의 진정한 의미는 건축물이 사람고 맺는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나와는 동떨어진 물질로만 건출물을 이해하려고 하면 우리는 건축이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는 문장을 읽고 새삼 놀랐다. 완전히 나 같은 건축 방면 바보에게 건내는 말이잖아? 모임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로지 건축공학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아서 다소 편협한 내용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충분히 비판할 만한 점이다. 하지만 건알못인 나에게는 이 시선조차 새로웠다.

우리나라는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오면 땅이 물러져 과거 무거운 돌보다는 가벼운 나무를 주자재로 건물을 만들었다. 빗물에 젖은 나무기둥이 문제없이 마르게 하려면 햇볕의 각도에 맞춰 지붕의 처마를 들어올려야 한다. 해의 입사각은 위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위도마다 처마 곡선의 높이도 달라진다(우리보다 위도가 높은 베이징은 처마의 곡선이 낮다). 도시와 건축은 주어진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결과물이기도 하다니. 도시와 건축, 디자인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그대로 투영하는 시선이 반영된 하나의 인문학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도시의 성장과 발달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많이 걷고 그 사이에서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히 벌어져 여러 이벤트가 만들어지는 도시를 꿈꾸는 듯하다. 단적으로, 서울과 뉴욕은 외면적으로는 빽빽한 빌딩숲 같은 비슷한 이미지를 주지만 막상 도심 안으로 들어가 거리를 걸으면 그 경험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다. 뉴욕은 도심 곳곳에 시민들이 걸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원이 있다. 반면 서울은 한참 걷거나 대중교통을 타는 등의 이동 감각이 끊기는 경험을 하고서야 다른 공원에 다다를 수 있다. 걷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거리는 활발해지고 도시는 자연스레 자라나는 것이다. (사족. 문득 요새 서울의 문제는 공원과 녹지 부족보 미세먼지 뿜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걱정이 드는 건, 그가 제안하는 디자인이 실제로 가능하냐이다. 1장에서 학교 - 교도소를 묶어 도발을 한 후, 학교 건물을 저층 건물 여럿으로 나누고 공원과 학교를 묶어 학생들에게 자연을 되돌려주자는 콘셉트를 보여준다. 자연친화적인 거 좋지. 하지만 넓은 부지와 아이들 학습 시간은 어떻게 보장하지? 숲과 풀밭에서 놀던 학생이 다치면 학부모의 성원은 어떻게 감당할까? 도시 집약적인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시도는 커녕 입도 뻥긋하기 어려운 제안이렷다. 문제를 해결해나갈 때 이상과 현실의 타협점을 어디에 잡느냐가 가장 어렵다.

사실 여는 글의 건축의 의미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건질거리가 많지 않았다. 잠실 롯데타워(고층형 사옥)와 애플사옥(수평형 사옥)을 비교하며 수직, 수평 권력 이야기를 한다든가, 온갖 상점이 입점한 쇼핑몰의 장단점을 나열하는 등 책 안의 여러 내용은 많은 매체에서 이미 접한 것들이어서 감흥이 덜했다. 게다가 위워크 비즈니스 모델과 탈중심을 언급하면서 tv 프로그램인 ‘라디오스타’의 멀티 MC 진행방식과 비슷하다, 힙합가수가 후드티를 즐겨 입은 이유가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려고 한다는 비유를 들 때, 글쎄, 이건 너무 나가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또한 건축학과 도시공학은 땔래야 땔 수 없는 분야이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는 두 내용을 마구 섞어 사용해서 전체적으로 책의 통일성이 떨어진다. 건축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을 말하다가 갑자기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다소 약한 고리를 억지로 붙잡고 있는 느낌이다. 심지어 마지막 12장은 벽과 창문, 기둥 등의 공간의 여러 요소를 설명한다. 급하게 기획된 도서가 아닐까, 분량을 채우기 위한 꼼수는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회사 후배는 학창시절 주변 강이나 호수에서 산책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사는 자취방 주변에는 탁 트이고 맘 놓고 걸을 곳이 하나도 없어 근처 호수공원까지 한 시간 반을 걸어갔단다. 어디서 살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망설임 없이 샌프란시스코라고 답했다. 재밌게도 나의 뉴욕과 그의 샌프란시스코는 저자가 걷기 좋은 도시로 언급한 도시다. 기술이 발달해 스마트폰만으로도 세계여행을 어렵지 않게 하고 차도에 자율주행차가 다니는 시대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길을 걷고 타인과 함께 하는 삶에 익숙한 것 같다. 어디서 살 것이냐는 질문이 참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건축과 도시라는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저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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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 - 기다림에 대하여 철학자의 돌 6
해럴드 슈와이저 지음, 정혜성 옮김 / 돌베개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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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201812)

두 달 전에 읽은 책 간신히 기억 꺼내보기.

제목을 보자마자 아, 이 책이다! 시인,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인데,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시인이 되는 것일까? 이토록 낭만적인 제목에 빛이 바랜듯한 분홍색 표지는 이 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하지만 첫 장을 보자마자 나는 알았지, 이 제목은 사기라는 걸.

기다림이라는 개념을, 친구와 두 시에 만나기로 해놓고 30분 늦으니 잠시만 기다려, 라고밖에 생각하지 않는 나로서는 앙리 베르그송이 어쩌고, <오디세우스>에서 저쩌고, 시몬 베유가 솰라솰라, 아이고 머리 아프다. 책 뒷편의 광고문구는

> 기다림, 시간의 선율과 공명하는 마음의 산책 - 문학과 예술, 인문학을 경유하며 탐색하는 생의 비밀스런 사건

이란다. 심지어 영문 제목은 그냥 <On Waiting>이다. 그 어디에도 시인의 ㅅ 자도 보이지 않는다. 아, 출판사의 속임수에 깜빡 넘어간 것이다.

들끓는 분노와 치미는 배신감을 뒤로하고 어찌됐든 책을 넘겨보기로 했다. 저자는 기다림을 부정적인 개념으로 치환한다. 생활의 템포가 빨라진 현대에서 기다림은 이 현대성을 방해한다(27쪽). 시간이 곧 돈이 되는 지금 시대에, 게다가 그 기다림이 아무 목적 없는 기다림이 된다면 정말 최악의 경험이 될 것이다(35쪽)

많은 사람들이 기다림에 대한 책으로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이야기할 것이다. 극 안의 두 인물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라는 인물이 오기를 기다리지만 막이 내릴 때까지 고도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만약 내가, 고도가 언제 오는지, 그(그것)가 사람인지 강아지인지 신인지 저승사자인지 원자폭탄인지 알 수 없는 세상에 떨어진다면 절망적일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현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다림은 그저 시간낭비일 뿐이고 기다림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라는 기다림의 시간을 조정하지 못한다. 앙리 베르그송은 설탕이 녹을 때까지 “나는 좋든 싫든 기다려야 한다”라고 말한다. 단 커피를 마시고 싶은 나의 욕구와 의지가, 물리학적으로 정해진 설탕이 녹는 시간을 어찌 할 수 없는 셈이다. 그는 우리가 이 ‘비조율’의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에만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41쪽)고 말한다. 컴퓨터 게임을 할 때는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가지만, 플랭크는 고작 30초 버티고는 초침이 빨리 움직이기 바라는 것과 비슷하려나?

결국 기다림은, 우리가 온몸으로 거부하지만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하지만 그 시간을 조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온전히 느끼며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시계를 보게 만드는, 삶의 악당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기다림이 이렇게 나쁜 개념이었다니! 하지만 저자는 지루하고 의미없을 것 같은 기다림이 우리 삶에서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크게 두 가지를 주목해봤다. (여담으로, 솔직히 말하자면, 책 내용이 복잡해서 단순한 나로서는 굵직한 내용밖에 못 읽어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앞서 우리는 기다리는 동안에만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시간을 온몸으로 견디면서 우리는 시간과 자신을 분리해서 볼 수 있다. 이때 자신을 바라보는 철학적 인식은 내부로 깊이 들어간다. 우리가 더 깊은 곳에 닿을수록 우리를 표면으로 밀어내려는 반발력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철학적 직관이란 이 접촉이며, 철학이란 바로 이 약동하는 힘 자체라고, 베르그송은 말한다. 기다리는 사람은 철학에 할애한 시간이 없었지만 기다리는 동안에 의지와는 무관하게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55, 56쪽).

기다리는 동안에 우리는 초조하게 서성거리며 시간은 언제 가나, 하며 시계를 계속 흘끔거리게 된다. 너무 심심한 나머지 주변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평소에는 그냥 배경으로만 보이던 것들이 이때는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벽지에서 작은 흠집을 찾고 한 쪽이 접힌 책을 보며 문득 침대 위 이불의 색이 칙칙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다리는 사람의 괴로운 시선 속에 주변 물체들이 고유 특징을 회복하는 것이다(78쪽). 나와 주변의 물체를 대체 불가능한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면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고, 그 순간 우리는 얽매여 있던 동일화의 도식에서 벗어나 예술을 발현시킬 수 있는 셈이다(158, 159쪽).

책을 다 읽고 나시 제목이 어느정도 수긍이 간다. 기다림은 우리 삶에 철학과 예술을 비추는데, 살면서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래도 시인은 너무했잖아. 분하다. 이렇게 말하고나니 속은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지루하고 의미없고 돈 안되고 피할 수 없는 기다림. 하지만 주변을 바라보고 새로운 세계로 침잠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다림. 나는 앞으로 살면서 이 시간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적어도 시인은 못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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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개정판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 (201901)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박민규 (한겨레출판, 2003)

한국 남자 소설가 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단언코 박민규라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이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형식의 <카스테라>부터 시작해 찌질한 사랑 이야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감히(!) 미국을 비판한 <지구영웅전설>, 단편집 <더블>까지 정말 재밌게 읽었다. 이상문학상 수상집도 2010년에 박민규가 대상을 타고나서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말 다 했지. 그와중에 읽지 못한 책이 있었으니, 이번에 읽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하 ‘삼미’)이다.

책 첫 장을 펴자마자 박민규 특유의 이야기꾼의 재담 같은, 한없이 이어지는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다사다난한 1982년을 이야기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전세계의 온갖 사건 사고를 읽으며 꽤나 즐거웠다. <삼미>가 2003년에 출간된 책이어서 작가 특유의 문장과 표현방식이 이제 한물 간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왕년에 좋아하던 작가의 다다다다 쏟아붓는 수다가 반가웠다. 굳이 넣지 않아도 될 수식어( ‘아쉽게도’ 전대통령은 아프리카 4개국과 캐나다 순방을 마친 후, 무사히 귀국한다 _11쪽)는, 역시 박민규 이꼬르 위트라는 공식을 머리에 떠오르게 만든다.

감히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해보자면,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인천을 연고로 한 삼미 슈퍼스타즈가 탄생한다. 인천 시민의 온갖 기대를 받으며 시즌이 시작했건만 온갖 기록은 다 세우며 6개 팀 중 6위를 기록한다. 다음 해에는 엄청난 선전을 해 2위로 시즌을 마감하지만, 우습게도 그 다음 해에 자신들이 세운 기록을 갱신하는 등 대체 프로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결국 많은 팬들이 등을 돌렸고 소설의 주인공도 야구에 관심을 끊고 대학에 입학하고 회사에 취업한다. 사회의 온갖 짐에 짖눌려가던 나에게 어릴적 함께 삼미 슈퍼스타즈를 응원하던 조성훈이 찾아와 이미 사라진 삼미 슈퍼스타즈 팀의, 팬클럽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인 것이다.

범인인 내가 과거에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이었다면 돈 받고 그것밖에 못하냐며 온갖 쌍욕을 다했을텐데 박민규는 특유의 상상력과 시선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낸다. 책 내용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처럼 야구 이야기가 메인일줄 알았건만 왠걸, <삼미>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그 안에서 좌절하는 우리네의 모습을 그린다.

작가에 의하면 야구가 처음 프로리그를 출범하면서 사회에는 프로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프로라는 새로운 세계와 가치관, 의미가 생기고 프로복음이라는 것까지 설파한다. 이젠 프로만이 살아남는다, 허허 이 친구 아마추어구먼, 프로는 끝까지 책임을 진다와 같이 우리가 자라면서 수없이 들어왔던 문장들이 프로복음에 속해 있다(77, 78쪽). 모두가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선 위에 서서, 사회가 인정하는 프로쪽으로 발돋움을 하려고 노력한다. 지옥철에 몸을 실고 야근을 하고 퇴근 후에 학원을 찾는다.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우리는 주인공과 함께 IMF 같은 경제 위기를 겪으며 온몸 받쳐 열심히 살아도 결국 사회에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만다. 프로의 세계에서 평범한 삶보다 조금이라도 못한 삶은 몇 위일까? 순위는 커녕 프로팀에서 바로 방출당할 것이고, 삶으로 치면 죽음인 셈이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봐야 좀 하는데라는 소리를 듣는다. 허리가 부러져 일어나지 못할 지경이 되어야 잘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126, 127쪽). 사회의 모두가 프로가 되기를 원하는 곳에서 어설픈 아마추어에게 주어진 것은 결국 죽음인 것이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을 뿐이다.

우리도 마냥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길들여왔을지도 모른다. 교육기관으로서의 학교와 공교육이라는 시스템은 산업혁명시대에 착실한 노동자를 길러내기 위한 제도가 시발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알게 모르게 제도와 시스템에 길들여져 근면과 성실이 최고의 가치인줄 알고 쉬지 않고, 쉴 줄 모르고 일하고 있는 건 아닐까(262쪽).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할수록 훌륭한 사원으로 꼽히는 것마냥 말이다.

자본주의와 프로의식에 삐딱한 시선을 보이는 작가의 의도는 꽤나 좋았지만, 그가 풀어낸 뒷 이야기와 결말은 다소 아쉽다. IMF 시대를 겪은 주인공은 아내와 재결합해 돈도 없이 잘 살 수 있을까? 조성훈은 프라모델 도색으로 장인이 되지 못할 바에는 얼른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 어려운 때에 낭만적으로 산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충분히 희망적으로 봐도 될법하지만 이렇게 삐뚜름하게 쳐다보는 건, 과연, 내가 프로 ‘프로인 척하는 아마추어’여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열심히 살아도 좋다. 절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캐치볼을 하다가 공을 잡지 않고 거대하고 광할한 파란 하늘을 쳐다보기만 해도 좋다. 2루타성 타구를 잡으러 갔다가 땅에 핀 노란 들꽃이 너무 아름다워 멍하니 쳐다보아도 좋다. 박민규 식으로 말하자면, 진짜 인생은 삼천포로 빠져야 만날 수 있는 것이고, 프로의 세계에서 이길 수는 없어도 삼천포에서는 무얼 해도 좋을 것 같으니까. 비록, 지금 삼천포는 사라졌지만, 그럼 어디로 갈까요, 칠천포는 어떨까요.

여담. 박민규 하면 톡톡 튀는 문체가 강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위트있는 표현(한 게임 한 게임 그것은 분명 평범한 패배가 아니었고, 뭔가 야구의 상식이 무너지는 느낌의 패배였고, 우주의 역행과 자연의 순리를 거스른다는, 그런 느낌의 패배였다. _63쪽)과 섬세한 묘사(창을 건너온 봄볕이 - 따끔따끔, 내 등에 스킬 자수를 놓듯 두 가닥의 햇살을 피부 속에 심었다 매듭을 지어 뽑아 올리고 있었다. _113쪽)도 꽤나 있었다. 마초 작가의 이미지가 있었는데 의외다.

여담 2. 위에서 썼듯이 마초 작가(…)여서인지 일부 설정과 이야기, 묘사가 거북할 수 있으나 2003년 당시의 시대를 감안해야 하겠다. 작가에 대한 비호가 아니라, 소설과 시대상을 완전히 분리해서 해석하는 것은 제대로 된 소설 읽기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해당하는 부분이 소설의 주 이미지라면 안되겠지만, 다행히 <삼미>는 이를 피해갔다.

여담 3. 가장 아쉬운 점인데, 이 작품은 표절 논란이 있었고 작가는 사과했다. 논란이 있었을 당시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책을 읽고서 작가가 표절했다는 글을 찾아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위트있다고 생각한 부분이, 원글에서 몇 보였다. 작가가 잘못을 시인했으니, 게다가 몇 안되는 애정하는 작가니까… 참작해주자… 하다가도 괘씸한 마음이 든다. 좋아하는 작가여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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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꽤나 단조로운 생활을 한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나름 열심히 일하고 저녁 늦게서야 퇴근, 바로 운동을 한다. 집에 와서 씻고 30분 정도 책을 읽다가 슥 잠이 든다. 다시 아침이 찾아오고 일어나서 회사로 향한다. 밖에 나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집돌이고 취미도 많지 않으며 사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적기에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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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단조로움은 작년 여름 다이어트를 시작하면서부터 더욱 심해졌다. 탄수화물을 적게 먹으니 신경이 조금 날카로워지고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엄두를 못낸다. 그러니 여태까지 하던 행동만 계속 반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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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롭다고 해서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 행동과 식사 루틴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체중도 착실히 줄여가고 있고 책도 어찌됐든 읽어내고 있다 - 물론 작년 하반기부터 독후감은 완전히 멸망 수준 -. 지금까지 나름대로 잘해왔기 때문에 루틴을 비트는 일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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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 후배가 이번달 초에 내가 다니는 크로스핏 박스에 등록했으나 두 번 나가고는 깜깜 무소식이다. 매번 바쁘다, 친구와 술약속이 있다, 내일 오후 근무다, 라는 이야기로 출석도장을 못 찍고 있다. 물론 운동이 최우선순위는 아니지만, 당장 3월에 여자친구와 발리에 놀러가 멋진 몸을 보여준다는 - 적어도 군살은 걷어내 슬림바디를 자랑하겠다는 다짐은 어디로 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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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틴이 아무리 지겹고 남들이 미련하다고 수근수근대도 뚜렷한 목표가 있으면 절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건강과 다이어트라는 최대의 목표 때문에 심심하고 지루하고 외롭더라도 꾹 참고 버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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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 루틴을 유지하는 게 굳은 내 의지 때문인지, 아니면 나를 감싼 방어기제인지 헷갈린다. 새로운 일은 시작하거나 낯선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게 두렵고 무서워서 ‘나는 인생 최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내하며 한 가지에 집중하고 있어’라는 변명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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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아빠도, 친구들도, 살이 어느정도 빠졌으니 외형이 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라고 권한다. 그때마다 준비가 덜 됐다고 말한다. 관계에서 상처를 주고 받는 일보다, 혼자 루틴을 계에에에에속 반복해가며 혼자 외로워지는 게 낫다. 상처의 크기가 얼만큼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슬픔을 곱씹는 건 나 혼자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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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그런데… 나보다 잘하면 질투하고 나보다 못하면 깔보는, 돌이켜보니 싸이코 같은 기질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취미가 아예 엇갈리면 만나는 데 무슨 낙이 있을까도 싶고… 변태 싸이코인 게 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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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에 반복이 계속되니 한번 우울함에 빠지고나서 그 기운이 계속 되먹임돼 헤어날 수 없었다. 덕분에 책도 잘 못 읽었는데 나름 가벼운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에세이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으니 조금 상쾌해졌다. 하정우의 글도 얼마 남지 않아 다음 읽을 책을 골라보았다. 밝고 블링블링한 친구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내 감정을 대변하듯이 <로미오와 줄리엣>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딸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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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어디서 보고 읽은 내용이지만 책 그대로를 읽은 건 거의 처음인듯. 희극을 읽으려고 했으나 어쩌다보니 비극이 손에 잡혔다. 베르테르는, 연애는 커녕 여자와 눈도 잘 못 마주치는 나로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책이었지만 근래에 느낀 감정이 있으니까 조금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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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시인의 대표 시집인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를 두 달 넘게 읽으면서, 대중적이고 잘 팔리는 시집이어도 나는 이해를 못하는구나, 좌절감을 느꼈더랬다. 그래도 읽어야겠지. 이 시집의 마지막에 발문을 쓴 시인이 얼마 전 작고하신 허수경 시인이다. 무식해서 별세 소식을 듣기 전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시인이었지만 문득 슬퍼졌다. 슬픔 감정을 토대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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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는 매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열다섯 권이 나오는 동안 겨우 세 권 읽은 릿터 15호와, 그래도 꾸준히 읽는 뉴 필로소퍼 5호, 민음사에서 새로 펴낸 비평 무크지 크릿터도 2월까지 함께 한다. 감정의 여유가 되면 정혜신 박사의 <당신이 옳다>도 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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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다섯 권 중 네 권이 문학이다. 내 독서의 기초가 문학이기는 하지만 매년 초는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과학 등 마음이 더 동하는 분야가 많았는데. 책도 결국 루틴에 빠지게 된 건 아닐까. 이게 오늘 잡담의 마지막 줄인데 유독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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