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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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책이란 걸 해석하잖습니까? 그건 책에 관해 우리가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입니다. 그것대로도 괜찮아요. 책이란 게 우리 인생에 종속되는 존재고 그걸 실생활에 활용하는 게 ‘독서’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식으로 책을 읽는 것도 틀리진 않죠. 하지만 반대 패턴도 생각할 수 있잖아요? 책이란 게 우리 인생의 바깥쪽, 한 단 높은 곳에 존재하고 책이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한다는 패턴이죠. 그런데 그 경우 우리한테는 그 책이 수수께끼로 보이거든요. 수수께끼를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시점에서 우리가 그 책에 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생각했어요. 만약 여러 책이 내포하고 있는 수수께끼를 해석하지 않고 수수께끼인 채로 수집하면 어떻게 될까. 수수께끼를 수수께끼인 채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럼 세계의 중심에 있는 수수께끼의 시커먼 달 같은 게 떠오를 것 같지 않나요?” _34, 35쪽


간만에 빠져들듯이 읽었다. 천일야화를 읽는 듯한 느낌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액자식 구성의 이야기들에 한없이 넋을 잃었다. 시간의 바깥에서 후루룩 넘어가는 소설을 읽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 알에이치코리아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책이란 걸 해석하잖습니까? 그건 책에 관해 우리가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입니다. 그것대로도 괜찮아요. 책이란 게 우리 인생에 종속되는 존재고 그걸 실생활에 활용하는 게 ‘독서’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식으로 책을 읽는 것도 틀리진 않죠. 하지만 반대 패턴도 생각할 수 있잖아요? 책이란 게 우리 인생의 바깥쪽, 한 단 높은 곳에 존재하고 책이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한다는 패턴이죠. 그런데 그 경우 우리한테는 그 책이 수수께끼로 보이거든요. 수수께끼를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시점에서 우리가 그 책에 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생각했어요. 만약 여러 책이 내포하고 있는 수수께끼를 해석하지 않고 수수께끼인 채로 수집하면 어떻게 될까. 수수께끼를 수수께끼인 채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럼 세계의 중심에 있는 수수께끼의 시커먼 달 같은 게 떠오를 것 같지 않나요?" _34,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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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와 칸타의 장 - 마트 이야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5
이영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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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책을 대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릴 때는 가장 좋아하는 장르문학 작가였는데. 초기작들은 가벼운 문체 속에서 무게감 있는 주제의식을 담았다(다소 허세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근래 나오는 책들은... 어휴, 말을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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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조악한 것은 문장이다. 10대 감성의 헛소리와 끝맺음짓지 못하고 자꾸만 끊기는 대화. 이 불편함이 낯섦으로 다가와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와야 하는데, 20년 전 <드래곤라자>와 비슷한 수준의 농담들이다. 자기들끼리 자조적으로 뱉는 말들이 애들 소꿉장난 대사처럼 들린다. 그래, 아직 덜 성숙한 10, 20대 인간인 시하와 칸타는 그렇다고 치자. 긴 세월을 산 요정 데르긴마저 <드래곤라자> 후치의 재림을 보는 느낌이라니. 좋게 말하면 작가의 상징, 나쁘게 말하면 인물간의 자가복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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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한 묘사도 감점에 한몫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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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치로 포탄을 내리치는 것이나 진배없는 광경에 데르긴은 넋나간 웃음소리를 냈다. _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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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진배없는‘ 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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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역질 소리가 어떻게 좋은 자장가가 되느냐는 질문에 집착하던 데르긴은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옮겨 간 후에야 겨우 자신이 잠에서 깨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자신이 잠들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침인 듯했다 태양의 소재는 모호했지만 몸 곳곳의 반갑잖은 느낌은 그 판단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데르긴은 눈을 비비다가 싸늘한 느낌에 흠칫했다. 마트 왕복과 계속된 감정적 흥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위였나. 자신이 어떻게 깨닫지도 못한 채 잠들었는지에 대한 대강의 설명을 수립한 데르긴은 자신이 왜 얼어죽지 않았냐는 두번째 의문을 불성실하게 바라보았다. _163,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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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 환상의 나라라는 무대를 토대로 한글로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을까, 일부러 과장되고 극적이며 번역투의 문장을 쓴 것일까? 의도했다면 내 불찰이다. 그런데 주인공 ‘시하‘ 이름을 ‘XX시 하수처리장‘에서 따왔다며. 그럼 여기 한국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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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흐름이랄 것도 없고 가독성도 현저히 떨어져서 읽을 맛도 안 난다. 주제를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의 줄기도 얼기설기 조잡하다. 페이지터너도 못해, 주제의식도 못 던져, 그 어느것도 이루지 못한 졸작이라 감히 평한다. 정말로 과수원에 불이 나서 책을 썼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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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문학이라면 요새 젊은 작가들이 훨씬 잘 한다. 흠, 환상 문학은 시절에 좀 뒤쳐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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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 잘 팔리는 책들의 비밀
한승혜 지음 / 바틀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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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통 서평집하면 스테디셀러나 좋은 책, 고전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이런 책도 있습니다,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이런 의도에서 쓰인 책이니 명작이라 불리는 책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다. 특이하게도 이번 책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이하 ‘한번’)은 베스트셀러를 리뷰한다.  유튜브의 국내 최초 망한 영화 리뷰 채널인 ‘거의없다’와 비슷한 컨셉이랄까.



2.  책을 웬만큼 읽어온 독서가들은 베스트셀러(이하 베셀)를 말하면 진저리치곤 한다. 출판사의 마케팅일뿐이다, 전문성이 떨어지는 안 좋은 책이다, 트렌드에 맞춰서 만들어진 책이다, 등등. 저자는 이런 현상에 의문을 제기한다. 베셀를 단순히 하나의 기준으로 범주화가 가능할까? 단순히 베셀라는 이유로 <죽고 싶지만 떡볶이를 먹고 싶어>와 <사피엔스>를 어떤 공통점으로 묶기 힘들다(12쪽).



3.  고오오오급 취향을 가진 이들은 종종 베셀를 사고 읽는 독자를 도매금으로 ‘저급 독자’로 취급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저자는 베셀가 받는 비난에 맞서기 위해 글을 썼다. 단순히 비난만 하지 말고 그 책이 어째서 문제인지, 무엇 때문에 좋지 않은 평을 받는지 설명해야 독자도 납득이 가능하다(20쪽). 단순히 베셀를 나쁜 책이라고 취급해버리면 가뜩이나 작은 독서 시작은 양극화되어 불모지가 될 것이다.



4.  책은 최근 5년의 베셀 28권을 크게 자기계발서, 힐링도서, 대중소설, 유명 작가의 소설, 일반도서로 목록화했다. 대부분 독서가 취미인 사람뿐 아니라 책 읽기를 시작하려 책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대부분 들어봤을 제목이다.


<미움받을 용기>, <자존감 수업>, <언어의 온도>,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미 비포 유>, <82년생 김지영>,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1Q84>, <사피엔스>, <팩트풀니스>


평소 읽던 서평집과는 전혀 다른 목록들이잖아.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읽어보고 싶게 만든다.



5.  1장 ‘자기계발서’의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는 자기계발서를 이렇게 변명해준다.


그렇다고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이 100퍼센트 쓸모없고 무용한 행위는 아니다. 사람에 따라 특정 자기계발서를 읽고 큰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다만 그와 같이 책을 읽고 실질적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도움을 얻으려면, 무엇이 납득 가능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책에서 어떤 부분은 유용하고, 어떤 부분은 그렇지 않은지를 판가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_32쪽


자기계발서는 모두 쓰레기라는 말을 서슴치않게 하는 이들이 있지만, 저자의 말처럼 무의미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음으로써 열정을 찾아내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저자는 여기서 더 들어가 각 책마다 어떤 점이 좋고 나빴는지를 말한다. 자기계발서라는 큰 범주를 비판하지 않고 개별 도서를 분해하고 소감을 말했다는 점이 <한번>을 깊게 만들어주는 큰 요인이다.



6.  저자가 <언어의 온도>를 다루는 장에 오면, 어쩌면 나와 이렇게 생각이 비슷한지 읽다보면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온다. <언어의 온도>를 재밌게 읽으신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대체 이 책이 왜 잘 팔리고 심지어 몇번을 표지갈이하면서까지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마케팅이 승리라는 지인의 말에 200% 동의한다). 해당 꼭지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


본문 중 저자가 글쓰기 강의를 하러 다니는 내용도 종종 나오는데, 수강생들에게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하고 계실지 궁금해진다. 개인적으로는 글쓰기 가의보다 마케팅이나 세일즈 강의 쪽을 더 듣고 싶은 마음이다.  _95쪽


이외에도 비슷한 평을 내놓은 책이 많다. 공감력은 폭발하나 단지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트렌드를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잠재독자를 사라지게 만드는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줄거리는 평이하고 인물들은 전형적이지만 현실을 텍스트로 옮겼다는 의미가 있는 <82년생 김지영>까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평이 대다수다.



7.  물론 해석이 다른 글도 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다룬 글에서, 주인공이 화학적 거세를 당해서 성욕을 비롯한 모든 욕망에 초연해졌기 때문에 모든 일에 심드렁하다는 해석이다. 나는 이 책을 '사람이 빠진, 오로지 이데올로기만의 대립'의 역사의 폭력과 불행으로 해석했다. 비슷하다고 생각한 사람인데, 서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구나, 뜻밖의 부분에서 함부로 사람을 예단하면 안된다는 뜻깊은 교훈(?)을 얻기도 했다.



8.  다독가는 아니지만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많이 줏어들은 보람이 있다. 분석을 잘 하고 글 잘쓰는, 발전된 ‘나’를 보는듯한 기분이여서(저자께 죄송합니다…) 디테일보다는 크게 줄기만 읽었다. 전체적으로 조금 뻔하게 느껴지면서도, 지식이 모자라서 못한 말들을 반듯하게 잘해주어 의미 있는 책이다.



9.  "베스트셀러 읽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대신 "이 책도 읽어보시는 건 어떠세요?"라면서 더 좋은 책을 권해주는 일. 이게 북 큐레이션이고, 진짜 독서가의 역할이 아닌가 싶다. 잘난척 하지 마시고,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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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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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조우’(45쪽)을 읽고 - 본문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

대학 시절, 작가는 등단 소식을 어머니에게 전화로 전한다. 어머니는 그날 가게 문을 닫고 초저녁부터 노래방에 있었는데, 좀 취해 있었지만 딸의 좋은 소식에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가계의 형편이 어려워지던 무렵이어서 그의 어머니는 마음을 달래려 노래방에 몇 번 더 갔다고 한다. 그렇게, 가사를 잘 몰라도 박자를 놓쳐도 음치여도, 그저 흥이 나는대로 노래를 불렀을 사람들.

> 음치인 어머니가 삶의 진부함을 인정하며 목놓아 불렀을 노래, 노랫말도. 문학도 처음에는 모두 노래였으리라. _47쪽

문자가 없던 시절. 그때 문학이래봐야 뭐겠어, 시장바닥 길바닥에서 에헤! 어히! 하면서 가락에 맞춰 노래부르는 것 아니었겠어? 그때그때 감정에 충실해서 형식을 잊고 그저 소리를 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시간이 지나며 길바닥의 노래는 지면을 통해 언어로 순화되면서 단순해지고 정갈해졌다. 카버의 단편 중 하나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제빵사가 ‘한 뚝배기 하실래예?’라고 물어보는 대신 ‘당신들 뭘 좀 먹는 게 좋을 것 같소’라고 묻는 것처럼 말이다(37쪽)

길바닥의 노래는 우리에게 과잉된 감정을 남겨주었고, 일부는 부사로 전해내려오지 않았나 모르겠다. 글을 쓸 때 피해야 할 품사 1순위인 부사. 부사가 쓰인 문장이 보이면 나도 모르게 부사를 지우며 더 짧은 문장으로 바꿔본다. 하지만 그만큼 매력적이고 사랑스런 부사다. ‘당신을 정말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는, 다른 방법을 놔두고 단순하고 무능한 부사를 쓴다고 하지만 - 그만큼 촌스럽거나 순진하거나 다급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리라(88, 89쪽). 아름다움과 우아함만이 아닌, 글쓰기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과함이 있기에 우리를 흔드는 무언가가 있는 것들.

> 작가들은 그 말 주위를 부지런히 싸돌아다닌다. 삶이 가진 진부함의 잔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면서. 그러다 가끔은 말들의 뒤뚱거림 속에서 또 새로운 박자를 발견해가면서 말이다. _100쪽

음정도 박자도 엉망인 노래들 사이에서 작가는 본연의 감각으로 새로운 박자를 찾아 작품을 써내려간다. 아무 규칙이 없어 보이던 우리네 일상은 작가의 시선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때 느껴지는 한 줄기 아름다움은 우리의 단조로운 일상이 새로운 의미를 품은 작품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때마다 우리는 기저에 빛나는 무언가를 품고 있다는 것에 놀라곤 한다.

그러니까, 한번 토해내보자. 빛나는 무대에서 수상소감을 말하지 못하더라도, 가슴 속 이야기라도 속시원이 뻥! 하고 말이다. 무대 위에서야 보는 눈이 많다지만 코인 노래방에서 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하나 없다. 고야하고 아름다운 문학 말고, 거칠고 조악하고 저열하고 못생겼지만 - 내 목소리와 다정하고 따뜻한 감정이 가득 담긴 문학을 말해보고 싶다. 이 세계가 전부 노래방이다.

> 문학이란 어쩌면 당신들을 초대한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여기까지 기꺼이 와준 당신, 바로 그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문학은 하나의 선을 편드는 문학이 아니라, 이제 막 사람들 앞에 선 당선자의 허영, 그 헛폼 안에조차 삶의 이면을 비출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손들어주는 , 여러개의 팔을 가진 문학이었다. _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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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혼자도 결혼도 아닌, 조립식 가족의 탄생
김하나.황선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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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피라이터 김하나와 에디터 황선우가 함께 살면서 겪은 여러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쓴 에세이다. 그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함께 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다툼과 논쟁과 삐짐과 화해가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말한다. 책을 읽다보면 혼자 살기, 함께 살기,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게 한다.

2. 여전히 나는 혼자 먹는 밥이 맛있고 혼자 하는 여행의 간편한 기동력을 사랑한다. 그런 한편으로 또 믿게 되었다. 혼자 하는 모든 일은 기억이지만 같이 할 때는 추억이 된다는 이야기를. 감탄도 투덜거림도, 내적 독백으로 삼킬 만큼 삼켜본 뒤에는 입 밖에 내서 확인하고 싶어진다. _18쪽

3. 내 취향에는 김하나의 글이 더 재밌다. 황선우는 뭔가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적 문제를 고발할 듯한 글을 쓴다면, 김하나는 문자 그대로 통통 튀는 탱탱볼 같은 느낌의 글을 써내려간다. 책에서 뇌리에 남는 에피소드를 딱 하나 고르라면, 김하나가 황선우의 집을 청소하는 '집요정 도비의 탄생' 장이다. 이 부분만큼은 정말 깔깔대며 읽었다. 더럽다는 묘사를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감탄하면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좀 길지만,

> 냉장고를 열면 항상 물건이 우수수 떨어졌다. 요즘 욜로(YOLO)라는 말들을 하는데, 황선우의 냉장고를 열어보면 안다. 이 사람은 진짜다! 진짜 순혈 욜로다. 다음에 냉장고를 열 스스로를 배려할 시간 따위는 없다. 인생은 짧고, 당신은 인생을 단 한 번 살 뿐이다. 문을 열고, 우유와 햄 사이에 2.5cm 정도의 틈이 보이면 맥주캔을 그 틈에 어떻게든 욱여넣고, 서둘러 문을 닫는다. 그러니 열 때마다 제대로 자리를 못 잡은 물건들이 우수수 떨어졌고 그건 그냥 냉장고를 열 때마다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의식 같은 것이었다. 허락을 받고 냉장고를 정리하자 저 안쪽에서 고급 브랜드의 리미티드 에디션 초콜릿이 한 상자 나왔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나는 반색했지만 유통기한이 3년 정도 지나 있었다. 냉장고 얘기만으로도 이 글의 반 정도는 채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냥 채소통에서 비닐봉지에 싸인 미끌미끌하고 거무죽죽한, 거대하고 신비로운 굴을 꺼내 버리는 것으로 냉장고 청소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라고만 해두자. 그 굴은 언제 욜로의 성전에 들어가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는지 아무도 모를 양배추였다... (105쪽)

이 문단은 정말 무릎을 탁 치면서 읽었다니까.

4. 법이 정한 '정상 범주'의 가족이 아닌 다른 관계를 가진 이들은 각종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의 범위도 좁은 편이란다.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의 범주에 들면서 생활동반자법의 도입에 많이들 찬성하지만, 실질적으로 동반자의 범위를 어디까지 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참 의견이 엇갈렸다. 현실적인 문제가 되니 함부로 말할 수가 없구나. 이래서 입으로만 떠드는 나같은 인간은 몹쓸 놈이 되는 거야.

5. 평생을 약속하며 결혼이라는 단단한 구속으로 서로를 묶는 결정을 내리는 건 물론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한 삶의 생애 주기에서 어떤 시절에 서로를 보살피며 의지가 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충분히 따뜻한 일 아닌가. 개인이 서로에게 기꺼이 그런 복지가 되려 한다면, 법과 제도가 거들어주어야 마땅하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의 다채로운 가족들이 더 튼튼하고 건강해질 때, 그 집합체인 사회에도 행복의 총합이 늘어날 것이다. _271쪽

6. 재밌게는 읽었는데, 혼자 사는 것도 좋고 여럿이 사는 것도 좋은데, 그래서 앞으로 미래의 변화될 가족 형태에 맞춰 법과 제도를 바꾸고 서로의 편견을 깨는 것도 좋은데, 이 책을 다시 읽으라면 글쎄요, 딱히. 재치와 위트도 잠시 뿐이었다. 뭐, 그래도 생활동반자법이라든가 변화하는 가족의 형태에 대해 한번이라도 환기하고 곱씹게 만들어주었으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소임은 다 한 것 아닐까 싶다. 작가들도 뭐 거창한 주장을 하려고 책을 쓴 건 아닐테고 말이다.

7. 그나저나 망원동 아파트를 사기 위한 대출금을 2년만에 갚아버린 작가님들 존경합니다. 진심입니다. 역시 회사를 열심히 다니려면 대출로 돈 좀 땡겨야 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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