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백준의 소프트웨어 산책
임백준 지음 / 한빛미디어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미국에서 현업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는 임백준이 쓴 <임백준의 소프트웨어 산책>을 읽었습니다. 저자 임백준에게 이 책은 벌써 세 번째입니다. 전에 낸 두 권의 책이 제법 인기를 끌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이 책을 다 읽고난 지금, 그 두 권의 책도 마저 읽고 싶습니다.

저자는 삼성SDS와 루슨트 테크놀로지를 거쳐, 지금은 뉴욕의 한 금융회사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석사공부를 마치고 잠깐 한국에 들어왔다가 아르바이트 삼아 구직광고를 낸 적이 있는데, 미국으로 다시 간 이후에도 그 내용이 남아있어 한국의 모 출판사로부터 번역 제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프로그래밍 서적 번역과 직접 집필까지 하게 된 계기였다고 합니다.
대개 프로그래머라고 하면 글쓰기와는 전혀 무관한 직종의 사람처럼 보입니다. 혹시 기술서를 쓰더라도 기술적인 내용만 다룰 뿐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아직 글 잘 쓰는 프로그래머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저자는 예외입니다. 10년 이상의 프로그래밍 경력을 가진 현업 프로그래머로서, 그의 지식과 경험을 쉽게 풀어내는 능력이 돋보입니다.

전문가들도 이제는 글쓰기를 잘해야 자기 분야에서도 인정을 받고 대중과도 소통할 수 있는 스타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 <과학콘서트>의 정재승, <영혼이 있는 승부>의 안철수 등이 그러합니다. 그 외에도 화가 김병종, 한젬마, 김점선 씨와 건축가 김진애, 서울법대 안경환 교수나 생명과학부의 최재천 교수도 필력을 갖춘 전문가들입니다. 최재천 교수는 지난달 한겨레21에 "글 못 쓰는 이공계, 보따리 싸라"라는 글을 실은 적이 있습니다. 과학분야일수록 실제 글쓰기가 더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에 충분히 공감이 갔습니다.

<임백준의 소프트웨어 산책>은 프로그래머라면 지겹도록 들었을법한 객체지향과 디자인 패턴, 리팩토링, 소프트웨어 공학, XML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소설도 한 편 실려있습니다. 문학적 완성도에 대해서는 제가 평가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실력 있는 프로그래머를 채용하기 위한 구글(goole)의 광고를 모티프로 한 그의 글에는 프로그래머만이 느낄 수 있는 경험들을 잘 녹아 있습니다.

저는 현업 프로그래머도 아니고 전직 프로그래머도 아닙니다. 다만 몇 년 전부터 프로그래머와 함께 일할 기회가 많았던, 굳이 분류하자면 기획자에 가깝습니다. 그런 제 입장에서 봤을 때, (전체가 모두 재미있었지만) <소프트웨어 공학>을 다룬 4장을 특히 관심 있게 읽었습니다.
이 장에서는 소프트웨어 프로젝트 관리 방법론 중의 하나인 '애자일(agile)' 방법론과 애자일 철학을 가장 충실히 구현한 XP(eXtreme Programming)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개발자와 사용자의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의사소통'을 강조하는 이 방법론은, 짧은 제 경험으로 볼 때도 가장 명쾌하고 '현실적'인 방법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계 설비 제조업에서 사용하는 프로젝트 관리 방법론을 본뜬, 일명 '폭포 모형'에서는 '요구사항 분석', '디자인', '구현', '테스트'라는 일련의 단계가 있습니다. 이 과정은 순차적이며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 앞 단계로의 피드백이 진행됩니다. 이런 과정에서는 소프트웨어가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을 때, 만약 사용자(클라이언트)가 기능상의 결함이나 빠진 부분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품에 반영할 기회가 원천 봉쇄됩니다.
위와 같은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 보신 분들은, 저자의 다음 말에 뼛속까지 공감합니다.

"사용자의 요구사항이 수시로 '변경'되는 것은 그들의 남다른 변덕이나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 시장의 요구와 비즈니스의 방향이 수시로 변화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한 번 합의된 사용자의 요구사항이 영원히 고정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만인의 합의하에 확정된 요구사항이라도 시장의 변화로 인해서 달라져야 한다면, 그것은 달라져야 한다. 어제의 요구사항에 기초해서 이미 소프트웨어를 설계하고 구현까지 마쳤기 때문에 요구사항이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독선이다."(p.128)

이와 같은 철학이 바탕된 소프트웨어 관리 방법론 중 대표적인 것이 XP입니다(Windows XP가 아닙니다^^).
"XP는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를 네 가지 근본적인 방식으로 개선한다. 그 네 가지란 의사소통, 단순성, 피드백, 그리고 용기를 의미한다. XP 프로그래머는 사용자 그리고 동료 프로그래머들과 의사소통을 한다. 그들은 설계를 매우 단순하고 깔끔하게 유지한다. 그들은 그들이 작성한 소프트웨어를 첫날부터 테스트하고 피드백을 구한다. 그들은 사용자에게 시스템을 최대한 일찍 전달하고 사용자들이 제안하는 방식에 따라서 수정한다. XP 프로그래머들은 이러한 내용에 기초해서 요구사항의 변경과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용감하게 대처할 수 있다." (www.extremeprogramming.org)

이 책에서 저는 처음으로 XP 방법론과 페어 프로그래밍(pair programming), 테스트 중심 개발 기법(TDD;Test Driven Development)을 알았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의 컴퓨터 앞에서 일한다는 페어 프로그래밍은 상식을 깨뜨립니다.
뿐만 아니라 리팩토링과 디자인 패턴에 대해서도, 단순의 그 말의 표면적인 뜻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철학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현업 프로그래머로서 프로그래밍의 역사와 최신 기술 지식을 쉽게 풀어낼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담긴 '철학'을 끄집어 내어 널리 이해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능력은 탁월합니다.
소프트웨어(개발)라는 전문 지식과 글쓰기가 조화를 이룬 에세이는 처음 읽었습니다. 기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저자의 전작 두 편도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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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깨찰빵을 만들어 먹었다. 원재료를 모두 구해서 만든 건 아니고, 깨찰방 재료를 미리 섞어 놓은 '깨찰빵 믹스'를 사서 계란을 섞어 반죽하여 만들었다.

큐원 깨찰빵 믹스(삼양사)를 사면 250g짜리 두 봉지가 들어 있다. 250g 한 봉지에 계란 1개, 물 70ml를 섞어 반죽한다. 그 사이 오븐은 180도로 예열해 두고, 반죽한 밀가루는 7~9개 정도로 나누어 동글동들하게 만든다. 굽기용 오븐판에 얹어 30~40분 정도 굽는다. 표면이 약간 갈색이 돌기 시작하면 꺼내면 된다.

그러면 이렇게 된다.

갓 구워낸 따끈따끈한 빵은 기막히게 맛있다. 즉석에서 나 두 개, 아내 두 개, 그리고 딸 하나 먹고, 나머지 세 개는 내일 점심 대용으로 싸갈 예정.

시행착오 : 머핀이나 다른 빵을 만들 때처럼 굽기용 오븐판 위에 유산지(기름종이)를 깔고 구웠는데, 이러면 안 된다. 유산지가 깨찰빵 아래에 달라붙어 떼내기 곤란하다. 굽기용 판 위에 바로 깨찰빵 반죽을 얹어 구워야 한다.

참고 : 깨찰빵 믹스 주요 성분 : 타피오카변성전분(태국산), 찰옥수수변성전분, 밀가루(미국,캐나다산), 유미분, 설탕, 대두유, 참깨 1.5%(중국산), 탈지분유(우유) 등
변성전분, 설탕, 이런 재료명들에 약간의 불신은 있지만, 달리 대안이 없어 그대로 만들었다. 프랑스의 리오넬 푸알란이 만든 것 같은 빵을 먹고 싶다. 그러나 그는 죽었고, 나 또한 음식 만드는 데에는 도무지 재능이 없어 평생 못 먹어볼 것 같다.

* 리오넬 푸알란 - 2002년 57세의 나이로 떠난 빵의 명장. 총리가 애도 성명을 내고 TV는 추도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그의 빵에는 향료는 물론이고 조미료도 일절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빵을 16세기 전통 제빵 기법에 의해 만들었다. 오로지 밀가루, 누룩, 식염 등 세 가지 재료만으로 만들었다. 밀가루도 맷돌로 직접 분쇄해 사용했다. 발효도 상업용 이스트가 아니라 누룩을 사용했다. 소금도 전통 천일염만 사용했다. 오븐은 진흙과 벽돌로 만든 화덕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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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좋은날 2005-06-13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있겠죠? 정말 맛있습니다!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
안병수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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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해, 미국 캘리포니아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한 젊은이가 아이스크림 가게를 열었습니다. 그는 아이스크림 사업에 관심이 많고 사업 수완이 좋은 친척 동생 한 사람을 설득하여 함께 사업을 꾸려나갔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신제품을 개발하고, 나날이 점포수를 늘려나갔습니다. 창업한 지 10여 년 만에 그들은 미국 전역에 사업장을 갖게 되고, 제품수도 수십 종에 달해 그들의 가게를 찾는 고객은 한 달 동안 매일 다른 맛의 아이스크림 맛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사업을 시작한 지 약 20년이 지난 1967년, 창업자 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업 수완이 좋았던 그 친척 동생이었는데, 당시 나이 54세, 한참 일할 나이였습니다. 사인은 심장마비.
또 다른 창업자 역시 건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역시 비만과 고혈압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이스크림 재벌이 되어 그의 사업을 하나뿐인 아들이 이어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나이 갓 스물을 넘긴 이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끝내 거역하고 가출해버립니다. 자기가 그렇게 존경하던 아저씨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이유가 아이스크림 때문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설 같지요? 눈치 빠른 분은 이미 눈치를 채셨겠지만,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한 달 내내 매일 다른 맛을 즐길 수 있는 아이스크림, 골라 먹는 재미가 있는,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아이스크림 회사의 이야기입니다.
창업자의 이름은 어브 로빈스, 일찍 죽은 동생의 이름은 버트 배스킨. 이 둘의 이름을 딴 아이스크림 회사가 바로 배스킨 로빈스 31. 어브 로빈스의 외아들 이름은 존 로빈스. 세계적인 식품회사의 외아들로 엄청난 부의 계승자였지만, 모든 걸 포기하고 브리티시 컬럼비아 해안의 작은 섬으로 들어가 철저한 채식주의 생활을 실천한 그는 1980년대 후반 미국 육가공업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 Diet for a new America>의 저자입니다. 부친의 아이스크림 사업을 비롯하여 인간,자연,식품의 숭고한 질서를 거역하는 모든 제품을 비판하고 회사를 고발한 그는 지금은 세계적인 환경운동가로 유명합니다.

이야기를 계속해서, 어브 로빈스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어 콜레스테롤 수치가 위험 수준을 훨씬 넘긴 300에 도달했고, 악화된 당뇨 증세는 실명과 괴저의 위험까지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아들의 권고로 식생활을 바꾸었고,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건강이 드디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가 만든 회사에서 나오는 식품을 먹지 않습니다. 그가 만든 제품은 그와 그의 가족만은 먹지 않습니다.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의 프롤로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국내 유명 제과업체의 제과 기술자로 10년이 넘게 일해 오다, 몇 년 전 회사를 그만 두었습니다. 건강이 나빠지고, 기분이 불쾌해진 그 원인이 바로 자신의 직업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결심을 했습니다. 집의 냉장고부터 비웠습니다. 과자 뿐만 아니라 청량 음료와 일체의 가공 식품을 거부하는 그의 반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 이 책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핏 들었던 정제당과 나쁜 지방, 식품 첨가물에 대한 엄청난 비밀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가히 충격적입니다.

'나쁜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나와 내 가족의 건강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냉장고에서 가공 식품을 모두 꺼내세요.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닙니다. 책 한 권 읽고 괜히 제가 호들갑 떤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이 책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초코파이와 바나나우유, 각종 드링크제와 소세지를 예로 들어, 정제당이 몸에 흡수되어 인슐린의 과다 분비를 일으켜 치명적인 장애로 발전하는 원리, 식물성 지방이라고 포장된 정제유의 비밀, 독극물로 분류된 첨가물로 만들어진 가공 식품의 뒷 얘기를 직접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 하나 직접 확인하고,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행동이 바뀌니까요.
저부터 실천하겠습니다.

*
뱀발) 건강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의 육체와 정신적 고통은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유전적 심리적으로 전염됩니다.
**
관련기사 : "아이에게 과자 주느니 담배를 권하라" (2005.6.2 문화일보)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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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스미스 주연의 미스터 히치를 봤다. 내가 좋아하는 로맨틱 코미디다. 영화 좀 보는 사람들은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수준이 좀 떨어지는 장르로 생각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내 경우만 본다면 맞다.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았으니, 아직은 즐겁게 웃고 뒷끝이 깨끗한 영화가 좋다. 다른 영화의 맛은 아직 잘 모른다.

연애 전문 직업 코치라니, 설정부터 너무 웃기지 않은가?
마지막 결론 부분을 앞두고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긴 했으나, 종반에 다가가기까지 그야말로 윌 스미스의 활약은 대단했다. 소리 내어 크게 웃지는 않았지만 키득키득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결말이 늘 그러하듯, 중후반부부터 사랑 예찬으로 흘러가면서 끝을 미리 상상할 수 있어 재미가 반감되긴 했지만, 전반부의 경쾌함이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것 같다.

윌 스미스는 연애 전문 직업 코치다. 그러나 정작 그는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고, 실제 새라(에바 맨데스 역)와의 사랑은 실패 직전까지 간다. 뭐, 이 정도의 갈등 구조는 있어야 영화가 되니까^^ 물론 결론은 해피 엔딩이다. 둘은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된다는 그렇고 그런...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별로 할 말이 없다. 직접 보시라. ㅋㅋ

윌 스미스의 직업이 참 매력적이다. 쉽게 말해 여자를 '꼬시는' 방법을 전수하는 전문가인데, 저질인 놈의 의뢰는 받지 않는다. 그런 놈에게는 주먹으로 보답한다. 대신 사랑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이들을 도와준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10만 명의 뉴요커들의 설문을 통한 연애담과 실수담을 기초로 만들었다고 한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보는 내내 큭큭거리며 웃는 이유는, 눈 앞의 저 상황이 너무나 진실되게 다가오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아내도 이런 류의 영화 참 좋아할텐데. 함께 못 봐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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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나를 포함하여 우리 가족은 문화 생활을 거의 하지 않는다. TV 시청 시간은 평일에는 거의 없고 주말이라도 1시간이 채 안 된다. 영화는 일 년 내내 두 세 편 볼까말까 한다. 놀이 공원? 그렇게 복잡한 곳은 안 간다. 쉬는 날이면 그저 집에서 또는 얼마 전부터 시작한 주말 농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전부다. 이렇게 살면 집에 쫓겨난다고 걱정하지는 마시라. 나 뿐만 아니라 아내도 마찬가지다. 혹시 영화를 볼 기회를 어렵사리 만들더라도 볼만한 영화를 고르기가 만만찮다. 액션도 싫고 공포 영화는 절대로 안 되고 무섭거나 우울한 영화는 삼간다. 그러면 남는 건 단 하나, 로맨틱 코미디 정도다. 힘들게 시간 냈는데 무섭거나 우울해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게 우리 부부 생각이다. 한심하다고 욕하지는 마시라. 사람마다 사는 법이 제각각이니 그러려니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지지난 주엔가 아파트 앞 비디오 가게를 지나다가 처음으로 비디오를 빌려봤다. <그때 그사람들> <황산벌>을 빌렸다. 한 편에 500원씩. 이렇게 해서 가게가 운영되는지 괜한 걱정이 앞섰다. 기존에 있던 비디오 가게 바로 앞, 정말 몇 미터 되지도 않는 바로 앞에 큰 가게가 하나 더 생겼다. 그래서 가격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정이야 딱하지만 그날 비디오를 재밌게 본 기억이 있다.
오늘은 <말죽거리잔혹사>를 빌려봤다. 이미 볼 사람은 다 봤겠지만, 이미 말했듯이 요근래 나에게는 문화혁명 기간이나 마찬가지다. 한 번 시작하면 또 웬만큼 오래 지속할 자신이 있다. 매주 적어도 한 편씩은 봐야겠다. 그동안에는 시간이 아까워 보지 않았을 뿐, 영화 자체를 재미 없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무대는 1970년대 후반 서울 강남 말죽거리에 있는 정문고등학교다. 70년대 후반이니 유신 말기다. 영화 속의 학교는 학교가 아니라 군대다. 학생들은 교문에서부터 선배에게 '충성' 경례를 하고, 복장이 불량하여 야구 방망이로 얻어 터진다. 욕은 생활 용어이고 공부하는 학생의 모습은 없다. 도색 잡지를 빌려주고 돈을 버는 놈과 여학생을 보면서 사귀고 싶다가 아니라 '먹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놈들이 주인공들이다. 엽전, 꼴통, 쓰레기, 이 새끼, 아메바는 이런 주인공들을 대하는 교사들의 호칭법이다.
이곳에 현수(권상우)가 전학온다. 그 시대 다들 그랬겠지만 이소룔을 무척 좋아한다. 아버지는 태권도장 관장이고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온다.
대개가 그러하지만 이 영화도 남녀의 사랑 얘기가 빠질 수 없다. 현수는 은주(한가인)를 보자마자 한 눈에 반한다. 겨우겨우 용기를 내어 비오는 날 우산을 씌워주는 '역사'를 이루지만, 학교 짱 우식(이정진)은 너무 쉽게 그녀 가까이에 다가간다. 우식은 학교짱 자리를 놓고 선도부 종훈(이종혁)과 싸우고 학교를 쫓겨난다. 그리고 현수가 그렇게 좋아하는 은주와 함께 가출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현수는 이래저래 패배자다. 은주마저 자신을 배신(?)하고 사라져버린 것을 안 순간 그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드디어 '목표'가 생긴다. 이소룡의 절권도를 익히며 폭발의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어느날 선도부 종훈과 한판 대결을 벌이고 장엄하게 학교를 버린다. 1년 후 종훈과 은주는 버스에서 만난다. 짧은 대화를 나누고 그들은 헤어진다.

감독은 무얼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나의 이런 자세가 문제다. 그냥 재미로 보면 될 걸, 그리고 느끼면 될 걸, 왜 따지는가....)
나는 8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때는 저만큼은 아니었다. 영화 속의 학교는 아수라 그 자체다. 영화 속의 체벌은 사라졌고 학교 내의 군인도 이미 사라졌다. 그런데 왜 그 때 그 이야기를 하는 걸까? 껍데기는 사라졌지만 아직 아니라고?
모르겠다. 알듯말듯하다.
그러나 이런 복고풍의 드라마를 보면 한결같이 드는 생각이 있다.
지금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저 시절 저 장면, 바로 얼마 전의 현실이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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