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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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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썼으므로 내가 읽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대를 앞서 고민하는 이가 문학인이라 했었나. 그들이 맨처음 어떤 방식으로 사유하고 어떻게 생각을 만들어내고 무엇으로 쓰기 시작하는지 알려주지 않았기에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종종 언문일치의 벽을 깨부수고 나온 문학을 만날 때에만 세상이 만들어낸 뻔한 거짓말을 알아채곤 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앞선 고민이 문학이라면, 문학이 세상을 지배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 좀 더 뒤엔 알 수 없는 감정이 찾아왔다. 의식의 제일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쓰라던 어느 작가의 말처럼 그러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흘러내린 절망을 추어올리면 그게 희망일 수도 있단 사실을.  

어릴 때부터 유난히 공상이 많은 아이였다. 꼬맹이때부터 말하고 느껴온 것들을 글로 썼다면 수만장은 됐을 것이고, 알맹이가 훌륭했다면 사유의 세계라 불러도 썩 괜찮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지루하게 읽히고 내겐 더없이 훌륭한 의식소설로 읽혔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라는 수식을 빼고도 쿳시는 충분히 난해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의 출생과 시대가 말해주고, 나열하기에도 벅찬 작품들이 또 한 번 증명한다. 인기스타가 나오는 일본 드라마에 몇 시간 올인하다가 축구 한일전이 열릴 때면 [절대 이겨야 한다]를 부르짖는 이중성을 좀 더 고민해서 쿳시처럼 문학으로 표출시킬 수만 있다면 나도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달콤한 생각이 따랐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한계를 한계라고 인식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일 뿐, 세상에 무한정이란 건 절대적으로 없는 영역인지도 모른다(여기서 '무한정'이란 <노팅힐>의 줄리아 로버츠 대사에서 따온 'indefinitely'가 아니다). <나라의 심장부에서>는 비교적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전달하는 주제가 명확하다. 전달하는 방식이나 문체가 난해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읽혀야 한다. 무척 매력적이고 아름답다. 아프리카의 황량한 사막에 핀 한 송이의 장미를 상상하며 읽었다. 오히려 척박한 땅의 질척함과 절망, 고독과 스산함 또 두려움이 제 존재를 더욱 또렷이 드러낸다. 등장인물은 몇 없다. 사유의 주인공 마그다와 그녀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여자, 아버지 농장에서 일하는 하인 헨드릭과 그의 아내 안나가 벌이는 조용한 향연이다. 그런데 그조차도 어렵다. 마그다의 의식인지 실제인지 분간해가며 읽는 노력을 중간에 그만뒀을 정도다(어차피 알 수도 없었겠지만).

마그다의 독백은 존재의 정체성을 찾아 끊임없이 유영한다.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닮아있는 마그다와 헨드릭의 관계에서 언뜻 오리엔탈리즘을 대입해 읽고 분석 보고서를 썼던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떠올렸다. 메마른 식민의 땅이긴 해도 백인여자이자 농장주의 딸로 살아가는 일이 기댈 곳 없는 흑인남자 헨드릭보다 고통스럽진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여자이기에 식민의 삶이 고달프다 말한다. 그녀는 억울한 것이다. 부당을 잘못됐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보다야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식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의 진수를 보여주는 문장을 곱씹는 일은 녹록지 않다. 뱉어냈다가 담고, 다시 밀어내고 또 주워담는 일련의 호흡은 쿳시의 문장이 아니라 마그다의 호흡이다. 의식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파도처럼 넘나드는 사유 속에서 그녀는 못 가는 곳이 없고, 안 가는 길이 없다. 욕망을 드러내는 일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고통의 밑바닥으로 침잠하는 일이란 걸 그녀에게서 배운다. 남자가 이런 감성, 대체 어디서 배웠을까?

   
  167.
(중략)
그는 내가 혼자 침대에서 뭘 하는지 얘기한다. 내가 밤에 집 안을 돌아다닌다고 그녀에게 얘기한다. 그는 내가 무슨 꿈을 꾸는지 얘기한다.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얘기한다. 나를 여자로 만들어주고 감싸줄 남자가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내가 나이를 먹었어도 어린애라고, 늙은 어린애라고, 곰팡내 나는 체액으로 가득한 사악한 늙은 어린애라고 얘기한다. 그는 누군가가 나를 여자로 만들어줘야 한다고, 누군가가 내 몸에 구멍을 내서 낡은 체액을 빼줘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는 그녀에게 묻는다. 그 일을 해줄 사람이, 밤중에 창문으로 기어올라 그녀 옆에 누워 그녀를 여자로 만들어주고 새벽녘에 빠져나올 사람이 나여야 할까? 당신 생각에는 내가 그렇게 하도록 그녀가 내버려둘 것 같아? 그냥 꿈인 척하고 내버려둘까? 아니면 완력을 써야 할까? 내가 그녀의 앙상은 무릎을 벌릴 수 있을까? 그녀는 허둥대면서 소리를 지를까? 내가 그녀의 입을 닥치게 해야 할까? 그녀는 끝까지 가죽처럼 단단하고 마르고 질길까? 내가 그 건조한 구멍으로 강제로 들어가면 결국 바이스 같은 뼈에 으깨져 흐물흐물해질까? 혹은 결국 그녀도 여자가 부드럽듯이, 당신이 부드럽듯이 여기가 부드러울까? 안나는 어둠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남자한테 달라붙는다. (pp.165~166)   
 
   


p.s. 그때 생각이 났다. 아주 추운 겨울 비엔나에 있었다. 해가 빨리 떨어지는 우기여서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가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쩌면 시내마다 연결된 트램을 타고 돌아다니느라 좀 여유로웠는지도 모르겠다. 벨베데레 궁전에 들어갔다. 클림트를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클림트 옆의 쉴레 그림 앞에서 나는 오래도록 발걸음을 멈췄다. 그때 나는 이상한 나라로 빨려들어가는 중의 앨리스 같았을 거라고 훗날 생각했다. 책을 덮고난 느낌이 딱 그때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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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1-29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운 겨울의 비엔나, 그리고 쉴레 앞에 서 있는 아이리시스님.
전 이상한 나라로 막 빨려들어가는 앨리스를 문틈으로 지켜보는 어떤 존재쯤 될까요.

이 책..도서관 신간코너에서 본 것 같은데, 제목만 보고 정치관련 책인줄 알았다는..ㅎㅎㅎㅎ
이래서 사람은 보고 배워야 해요.

아이리시스 2011-01-30 02:49   좋아요 0 | URL
거긴 진짜 너무 추웠어요. 여행했지만 기억나는게 <서역> 뿐이라니까요, 히히.
길모르면 계속 기차역을 왔다갔다 하게 되고 지하철역 서성거리게 되고 그렇잖아요.ㅋ

정치관련으로 오해받을만 하네요. 나라, 심장부.. 아하하, 웃긴다.

쉴레의 <포옹>이죠, 저 그림.
제가 친구한테 말이죠, 성욕이 느껴지는 그림이야, 라고 했어요.
친구가 웃겼을 거예요, 이상한 나라로 막 빨려들어가는 앨리스를 문틈으로 보면서,ㅋㅋㅋ

마녀고양이 2011-01-29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지... 인용글을 보고, 멍하니 멍하니.....
아, 너무 좋아여, 글이, 문체가, 모호하게 떠다니는 말들. 정말 현실같이.

어릴 때 말이죠,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왜 훔쳐보지 못 할까, 왜 다른 이와 똑같은 생각을 하지 못 할까,
그게 가능하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되는건가... 등의 밑도 끝도 없는 희안한 상상을 하고 살았답니다. 흐.

아이리시스 2011-01-30 03:00   좋아요 0 | URL
온통 이래요, 물론 멋진 장면이기도 하지만.
침대에서의 대화, 그것도 제3자가 자신에 대해 이런 대화를 할 것이다.. 라니 특별하잖아요. 크.

저는요, 침실에서의 얘기를 어떻게 풀어내는가에 관심이 있어요.
글로 표현하기 참 애매하고, 그래서 대부분의 문학들이 비슷비슷할 수밖에 없는데 이건 특별해요.
저도 모르게 접어둔 문장에 요런 장면 많아요, 종종.
저 너무 이상해요, 아하하.

모호하게 떠다니는 말들. 정말 현실같이.
빙고!!

마고 님 20대는 정말 예뻤을 것 같아요.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채정안이 이선균에게 묻잖아요, 내 20대는 어땠어? 하고.
그래서 남자가 대답하죠.
참 정신없고 바쁘게 달려가는데 눈에 보이는 건 별로 없고,
그런데 그게 참 반짝이고 빛났어, 라고.
대충 그런 내용의 대답이었는데, 누군가의 20대를 온통 알고 있어야 할 수 있는 말이잖아요.
언젠가 마고 님 20대를 아는 분께 똑같이 묻고 싶어요.^^

cyrus 2011-01-29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덕분에 이 책 읽고 있어요. 신기하게도 요즘은 노벨문학상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있는거 같아요. 알고보니 존 쿳시도 2004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더군요.
인용문이 에곤 쉴레의 그림이랑 잘 어울려요. 간혹 소설 속의 문장이나 내용을 읽다보면
그림이나 영화, 다른 소설 속의 장면 같은게 연상할 수 있다는게 참 좋아요. 이제 슬슬 이 소설을
읽어봐야겠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그런데 서재 구조가 살짝 바꼈네요 ㅎㅎ

아이리시스 2011-01-30 03:04   좋아요 0 | URL
예쁘고 특별한 배경으로 바꾸고 싶었는데 안됐어요, 크하하.

저는 존 쿳시를 재작년쯤에 김혜수가 추천해서 알았어요.
기사였는데 <추락>을 읽고 있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잊었다가 이번에 만났죠, 처음이예요.

역자의 말에 의하면 쿳시의 작품을 여럿 번역했는데 이게 제일 좋았대요.
처음으로 읽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문장이나 내용에서 그림이나 영화, 다른 소설의 장면을 연상할 줄 알게 되면 글을 잘 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쓰긴 쓰되 본인이 좀 더 수월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야깃거리가 늘어나는 거니까. 저도 늘 그런 지점을 잡아낼 줄 아는 사람, 아니 글을 쓰고 싶어요.^^

시루스 님도 다 읽으시고 리뷰 꼭 써주실거죠?

sslmo 2011-01-31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진짜 멋진걸요.
이 책의 책속 밑줄긋기를 보는 순간, 실은 님의 리뷰가 궁금했었어요.
이쯤 되면 '리뷰를 쓰는 데 창피했다'는 '지독한 엄살이다'로 해석돼요.
찌찌뽕이네요, 저도 김혜수 때문에 존 쿳시를 알게 됐는걸요.
하지만 잊고 있다가 이 책이 시작이었어요.^^

아이리시스 2011-01-31 18:55   좋아요 0 | URL
김혜수랑 존 쿳시가 어울리는 조합도 아닌데 와우, 나무꾼님도?
그때부터 노벨수상작 읽는 배우라면서 더 좋아하잖아요, 아하하.

밑줄그은 문장 되게 많은데 제가 잠결에 막 휴지조각으로 표시해놨더라고요.
일어나서 보니까 사실 다 그어야겠어서 마음에서 그만 보내주기로 했어요.
훗날 다시 한 번 읽어야지,ㅋㅋㅋ
<추락> 읽어보고 싶어요, 일단 구입부터 하고.^^

cyrus 2011-02-13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 존 쿳시의 처녀작을 알고 싶다고한신 댓글을 보고 여기서 답글을 남겨봅니다.

<어둠의 땅>이라는 책인데요,,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내용이에요, 그런데 존 쿳시라는 작가가
정말 대단한거 같아요.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권>이라는 일종의
북 다이제스트 형식으로 된 책에서 보면 의외로 존 쿳시의 소설들이 꽤 많이 소개되었더군요.
<추락><어둠의 땅(원제; Dusklands 더스크랜드)><나라의 심장부에서>
<마이클 K(원제: 마이클 K의 삶과 시대)> 총 4권이 소개되었어요, 그래서 이왕이면
존 쿳시라는 작가를 알기 위해서 처녀작부터 읽어보려고 했던거에요.

아이리시스 2011-02-13 17:50   좋아요 0 | URL
존 쿳시가 출생이 특이하더라구요.
제국주의 국가 출신으로 식민지국에 살면서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들을 인지하고 있었어요.
초기작이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했다니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권>에 나오는 책 언제 다 읽을까 했던 적 있는데
거기에 4권이나 소개되었군요. 저도 기억해둘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