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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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소설을 갓 읽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국내에 소개된 일본현대작가가 별로 없어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나름 많이 읽었지만, 어느새부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외에 다른 좋은 작품들도 많이 소개된데다 무슨 공장도 아니고 쉴 새 없이 작품을 쏟아내는 속도에 기함해 어느샌가 손을 놓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게 무슨 작품이었는지 가물할 지경이라(아마 가가 형사 때문에 읽은 <신참자>가 아니었나 싶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알라딘 머그컵이나 받아야지 하는 불순한 동기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구입했다. 제목만 봐서는 어떤 내용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고, 그저 히가시노 게이고니까 잘 읽히긴 하겠지, 하는 마음에 별 기대 없이 책을 펼쳐 들었다.

 

  강도짓을 한 세 청년이 경찰의 눈을 피해 밤을 지샐 곳을 찾던 중 우연찮게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간판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낡은 '나미야 잡화점'에 들어간다. 조용히 숨어 있다가 새벽이 되면 첫차를 타고 도주할 예정이었던 그들에게 느닷없이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얼결에 편지를 열어보니 그 속에는 어떤 이의 고민이 담겨 있었다. 장난인가 하고 무시하려다가 어느샌가 답장을 쓰게 된 이들. 하지만 답장을 보내기가 무섭게 다시 편지가 날아든다. 시간이 이상하게 뒤틀린 나미야 잡화점이라는 공간에서 세 청년은 어느새 진지하게 누군가의 고민을 상담하기 시작한다. 첫 이야기인 <답장은 우유 상자에>가 이렇게 다소 독특한(?) 설정으로 시작되지만, 이 점을 내려놓고 본다면 다섯 편의 연작은 '나미야 잡화점'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평범한 이들의 고민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가끔 아무 생각 없이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다 보면 세상엔 이렇게 누구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하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소소하게는 일상생활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자신을 아는 누군가에게는 선뜻 말하지 못할 고민이나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을 때 그냥 누구라도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줬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독백 비슷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이렇게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할 때, 누군가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경청해준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까?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그런 마음이다. 결혼을 예정한 애인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으나 올림픽 대표선수 선발이 얼마 남지 않아 고민인 이도, 가업인 생선가게를 물려받는 것과 꿈인 가수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도, 부모와 함께 야반도주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 이도, 어떻게든 성공을 하고 싶어 사무보조일을 그만두고 호스티스의 길을 걸을까 고민하는 이도 모두 나미야 잡화점에 고민상담 편지를 보낸다. 자신이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일 때도 있고, 누가 내 등을 떠밀어줬으면 하는 마음일 때도 있었지만 고민을 글로 옮기고,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이들은 스스로의 마음과 마주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하는 사람이야 당연히 그렇다 쳐도 이를 들어주는 이들의 입장도 사뭇 진지하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장난에서부터 시작한 고민 상담이었지만, 나미야 잡화점을 운영하는 할아버지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어떤 것이든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면서 "대부분의 경우, 상담자는 이미 답을 알"고 있고 "상담을 통해 그 답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라고 인정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구멍이 휑하니 뚫린"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대면해 보듬어준다. 나미야 잡화점 할아버지뿐이 아니다. 엉겁결에 나미야 잡화점에 들어온 좀도둑 패거리도 "아니, 몇 마디만 써 보내도 그쪽은 느낌이 다를 거야. 내 얘기를 누가 들어주기만 해도 고마웠던 일, 자주 있었잖아? 이 사람도 자기 얘기를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거야. 별로 대단한 충고는 못해주더라도, 당신이 힘들어한다는 건 충분히 잘 알겠다, 어떻든 열심히 살아달라, 그런 대답만 해줘도 틀림없이 조금쯤 마음이 편안해질 거"라고 하면서 누군가에 고민에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기 시작한다. 연륜이 있는 할아버지가 하는 조언이든, 가방끈 짧고 누군가의 고민이라고는 진지하게 들어본 적 없는 좀도둑들의 조언이든 이들의 조언은 그 조언을 받는 이들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전해준다. 


  기존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분명 갸웃할 만한 책이다. 이 책에는 탐정도, 시체도, 살인범도 존재하지 않는다. 끽해야(라기는 그렇지만) 좀도둑 정도가 등장할 뿐이다. 주요 사건도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의 고민과 삶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는 담겨 있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몰입력은 분명 히가시노 게이고인데 그 소재가 예전 작품과 사뭇 달라 '이거 의외네' 하면서 쉴 새 없이 읽었다. 책을 읽다보면 '나미야 잡화점'이 어딘가에 아직도 남아 있지 않을까, 무슨 고민을 써서 보낼까, 무슨 답장을 받게 될까 괜한 몽상에 빠져들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면 스토리로는 이미 산전수전 다 써본 작가가 아닌가 싶었는데 이런 작품도 쓸 줄 안다니 솔직히 좀 의외였다. 미스터리 요소가 거의 배제됐지만, 각각의 이야기에 던져놓은 조각을 다른 이야기에서 맞추는 식으로 큰 그림을 완성해가는 정도의 떡밥은 있어서 등장인물들의 삶을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기대했던 미스터리는 아니었지만, 추운 겨울밤 이불 속에서 뒹굴거리며 읽다보면 어느샌가 이불의 온기만큼이나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이야기였다. 역자의 말처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망설임 없이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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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품절


"처음 상담을 시작한 것은 이 근처 아이들과의 말장난 때문이었어요. 나미야라는 우리 잡화점 이름을 짖궂게 '나야미, 나야미' 하면서 놀리더라고요. 간판에 '상품 주문 가능. 상담해드립니다'라고 써 있는데, 아이들이 그럼 나야미(고민) 상담도 해주느냐고 자꾸 묻는 거예요. 그래서 그야 물론이다, 어떤 것이든 다 받아주겠다, 라고 했더니 정말로 아이들이 고민을 상담하겠다고 찾아오더군요.
우스갯소리처럼 시작된 일이라서 그런지 처음에는 장난기 가득한 상담만 들어왔어요. 공부는 하기 싫은데 성적표에는 모두 '수'를 받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라는 식이에요. 하지만 나도 고집이 있는지라 그런 상담에도 진지하게 답을 써서 벽에 붙여줬죠. 그랬더니 차츰 진지한 내용이 많아지더군요. 아버지 어머니가 자꾸 싸워서 힘들다든가, 하는 것이었어요. 나중에는 상담 내용을 가게 앞 셔터의 우편함에 넣도록 했습니다. 답장은 가게 뒤쪽 출입문에 달린 목제 우유 상자에 넣어줍니다. 그러면 익명으로 상담하려는 사람들도 마음 편히 편지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랬더니 언제부터인지 어른들도 고민거리를 편지로 써서 넣어주더라고요."-24쪽

"아니, 몇 마디만 써 보내도 그쪽은 느낌이 크게 다를 거야. 내 얘기를 누가 들어주기만 해도 고마웠던 일, 자주 있었잖아? 이 사람도 자기 얘기를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거야. 별로 대단한 충고는 못해주더라도, 당신이 힘들어한다는 건 충분히 잘 알겠다, 어떻든 열심히 살아달라, 그런 대답만 해줘도 틀림없이 조금쯤 마음이 편안해질 거라고."-31~2쪽

"해코지가 됐든 못된 장난질이 됐든 나미야 잡화점에 이런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다른 상담자들과 근본적으로는 똑같아.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휑하니 뚫렸고 거기서 중요한 뭔가가 쏟아져 나온 거야. 증거를 대볼까? 그런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반드시 답장을 받으러 찾아와. 우유 상자 안을 들여다보러 온단 말이야. 자신이 보낸 편지에 나미야 영감이 어떤 답장을 해줄지 너무 궁금한 거야. 생각 좀 해봐라. 설령 엉터리 같은 내용이라도 서른 통이나 이 궁리 저 궁리 해가며 편지를 써 보낼 때는 얼마나 힘이 들었겠냐. 그런 수고를 하고서도 답장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없어. 그래서 내가 답장을 써주려는 거야. 물론 착실히 답을 내려줘야지. 인간의 마음 속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어떤 것이든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돼."-158~9쪽

"내가 몇 년째 상담 글을 읽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 대부분의 경우, 상담자는 이미 답을 알아. 다만 상담을 통해 그 답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상담자 중에는 답장을 받은 뒤에 다시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많아. 답장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지."-167쪽

하긴 이별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고스케는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 끊기는 것은 뭔가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서 아니다. 아니, 표면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서로의 마음이 이미 단절된 뒤에 생겨난 것, 나중에 억지로 갖다 붙인 변명 같은 게 아닐까. 마음이 이어져 있다면 인연이 끊길 만한 상황이 되었을 때 누군가는 어떻게든 회복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이미 인연이 끊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몰하는 배를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 네 명의 멤버들은 비틀스를 구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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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아래 봄에 죽기를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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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국내에도 많은 팬을 갖고 있어 더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심야식당>.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손님들이 밤이면 심야식당을 찾는다. 그렇게 그곳을 찾은 이들에게 마스터는 '음식'으로 그곳을 찾는 이들과 소통하고 그들을 위로한다. <꽃 아래 봄에 죽기를> 속의 '가나리야'도 일견 심야식당과 비슷하다. 가나리야의 주인장인 구도 데쓰야는 손님들의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 혹은 비밀을 조용히 듣고는 나름대로 조용히 해결해내기 때문이다. 심야식당에서 마스터는 "메뉴는 이것뿐"이라고 하지만 가나리야에서는 "맥주는 이것뿐"이다. 손님들의 상태를 캐치해 구도는 네 가지 도수의 맥주 중 하나를 알맞게 골라주고 필요하다면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이 가게에는 특유의 게임 비슷한 것이 존재한다. 참가 조건은 명쾌하다.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 양쪽을 겸하는 사람, 셋 중 하나면 된다"라는 책 속의 설명처럼 가나리야는 단순한 바가 아닌 일상 수수께끼의 공동체다.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적절한 도수의 맥주와 구도가 내놓는 맛있는 음식과 함께 하는 일상미스터리의 만찬이 <꽃 아래 봄에 죽기를>에는 담겨 있다. 


  제52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 및 연작단편집 부문 수상작인 이 책에는 총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맨 처음 단편이자 표제작인 <꽃 아래 봄에 죽기를>과 마지막에 실린 <물고기의 교제>를 제외하면 각각의 이야기는 가나리야를 접점으로 하고 있지만 별개의 이야기다. 신원 불명의 하이쿠 시인의 죽음과 그의 과거를 다룬 <꽃 아래 봄에 죽기를> <물고기의 교제>, 역내 대여서가에 꽂혀 있는 책 여기저기에 꽂혀 있는 가족사진에 얽힌 <가족사진>, 강가에 오두막을 짓고 사는 노부부를 찍은 사진으로 보도사진상을 수상해 개인전을 여는 사진가가 거리에 붙여놓은 포스터를 잃어버리는 기묘한 사건을 다룬 <마지막 거처>, 살인사건이 발생한 뒤 인근 초등학생들 사이에 빨간 손의 악마에 대한 소문이 도는 것을 다룬 <살인자의 빨간 손>, 회전초밥집에서 참치초밥을 일곱 접시씩 먹는 남자에 대해 다룬 <일곱 접시는 너무 많다>까지 전체적으로 소소한 이야기가 그려진다.


  "손님과 시간을 포함하여 가게의 움직임이 모두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이곳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지만 "그런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결코 과시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사람들이 "이곳에서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는 구도를 만나러 "삼나무 문을 사이에 두고 세상과 격리된" 가나리야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굳이 따지자면 안락의자형 탐정이지만 구도라는 인물은 그 범위와도 조금은 거리가 있는, 자기만의 주관이 강하다거나 개성이 강한 인물이 아니라 어쩐지 코끝을 간질이는 은근한 향 같은 캐릭터라 재미있었다. '미스터리'에 포커스를 맞춘다면 굉장히 시시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갑남을녀가 비밀스레 품어온 이야기들은 분명 어떤 울림을 전달한다. 가나리야에 들어선 순간, 특별한 삶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남 모를 상처가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다고,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술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구나 싶어 위안이 됐다. 약간의 미스터리가 가미된 잔잔한 힐링소설 정도로 읽으면 의외의 만남이 될 작품. 가나리야에서 파는 필스너는 아니지만, 아쉬운대로 드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읽으니 어느샌가 나도 가나리야 테이블에 앉아 함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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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2-22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이 책 반가워요. 저도 흥미롭게 읽고 은근한 위로가 되었던 책이거든요. ^^

이매지 2012-12-22 12:16   좋아요 0 | URL
아직 정리를 덜해서 비밀글로 올렸다고 생각했는데 댓글 달렸다고 해서 놀랐네요. ㅎㅎ 사실 봄에 읽었었는데 이제사 리뷰 쓰려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다시 읽었는데 그래도 좋더라구요. :)
 
꽃 아래 봄에 죽기를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5월
절판


'이런 마을에 살고 싶다'는 마음은 늘 이방인의 달콤한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마을이 실제로 있긴 있다. -48쪽

구도가 카운터 안쪽에서 팔짱을 끼며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이야기를 해도 될지 생각에 빠져 있는 그 모습이 붉은 에이프런에 수놓인 요크셔테리어와 매우 닮았다. 아주 짧은 순간, 손님과 시간을 포함하여 가게의 움직임이 모두 멈춘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 이유는 삼나무 문을 사이에 두고 세상과 격리된 이 장소가 구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단, 이 가게의 맹주는 그런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결코 과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의식조차 못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에 농락당하는 것도 모른 채 단지 이곳에서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낼 뿐이다. -70쪽

자유는 혼자 된 자신을 차가운 손바닥으로 내리누르고 있었다. 혼자서 집을 나설 때, 기다릴 사람 없는 집으로 돌아올 때, 부재중 전화 하나 없는 자동 응답기를 볼 때, 욕조에 몸을 담그고 혼잣말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자유가 고독으로 바뀐 순간부터 노다에게 다른 감정이 생겨났다.
공포와 한없이 닮아 있었다.
'나 이외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그 생각은 가나리야를 드나드는 지금도 노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응어리로 남아 욱신거리고 있다.
누구나 얼굴 뒤편에 슬픔을 담아 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동시에 누구나 자신의 슬픔이 최악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도 괴로운 법이다."-90~1쪽

이번에는 자신의 전용 고블릿을 비어서버 꼭지에 대었다. 구도가 맥주를 마신다는 것은 천천히 이야기를 듣겠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가게의 손님들이 안고 있는 작은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101쪽

'기원, 소원, 소망, 희망, 절망, 동경.'
사람이 살면서 하는 이런 말들 중 몇 개가 현실이 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신앙을 찾는 것이다.
점술이 그렇고 주술이 그렇다. -130쪽

히즈루도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기본 룰을 간신히 이해했다. 이 가게에는 특유의 게임 비슷한 것이 존재한다. 참가 조건은 명쾌하다.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 양쪽을 겸하는 사람, 셋 중 하나면 된다.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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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이든 필포츠 지음, 이경아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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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2012년의 달력도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아직 한 달이 남긴 했지만, 2012년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남들한테는 큰 의미도 없겠지만 혼자 올해의 책, 올해의 영화 이런 걸 두고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그래도 올해의 시리즈만큼은 고민 없이 정할 수 있겠구나 싶어 흐뭇했다. 몇 초의 고민도 없이 올해의 시리즈로 꼽은 것은 바로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이다. 기존에 DMB(동서미스터리북스)과 라인업이 겹쳐서 <환상의 여인>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이미 본 책인데...'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DMB와는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 홀딱 반한 뒤 <가짜 경감 듀> <어두운 거울 속으로> 등 별 다섯을 줘도 아깝지 않을 작품을 잇달아 만나는 행복을 누렸다. 그리고 연말, 마치 선물처럼 또 한 권의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이 채워졌다. 바로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이다. 이 작품 또한 기존에 DMB에서 <빨강머리 레드메인즈>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지만, 다행히 아직 읽기 전이었던 터라 편견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서른다섯이라는 젊다면 젊다고 할 수 있는 나이에 런던경시청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실력 있는 형사 마크 브렌던. 매년 다트무어에서 송어 낚시로 휴가를 보내는 것 외에는 딱히 한눈팔지 않고 범죄자들을 체포하며 활약한다. 여느 해처럼 앞만 보고 달리다 휴가차 다트무어를 찾은 마크는 난생처음으로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러던 차에 낚시차 간 외딴 채석장에서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여자보다 아름다운 여자와 우연히 마주친다. 하지만 자신감이 없었던 마크는 그녀처럼 예쁜 여자가 혼자일리 없다고, 그녀 같은 사람이 자신을 쉽게 좋아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그저 스쳐보낸다. 그렇게 아쉬운 만남과 이별 뒤 그녀의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 마을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피해자의 아내가 마크에게 도움을 요청해 그는 어쩔 수 없이 수사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피해자의 집에서 그가 만난 것은 그의 마음을 빼앗아간 그 여인. 삼촌이 남편을 죽인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그녀를 위해서 마크는 온힘을 다해 사건을 해결하려 한다. 오토바이로 도주하는 처삼촌(로버트 레드메인)의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되었기에 쉽게 끝날 것 같이 보였던 이 사건은 예상 외로 로버트 레드메인의 행방은 묘연해지면서 미궁에 빠진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흐른 뒤, 해외로 도주했으리라 추정했던 로버트 레드메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형을 살해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양상으로 흐른다.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은 독특하게도 탐정이 두 명 등장한다. 전반부를 영국인 형사 마크 브렌던이 담당한다면 후반전은 미국인 탐정 피터 건스의 몫이다. 하지만 탐정이 두 명이라고 해서 독자가 혼란스러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초반에 작가가 한껏 띄워준 명성에 걸맞지 않게 마크 브렌던이 형사로, 탐정으로 실격에 가까울 정도로 정줄을 놓고 끊임없이 자충수를 두기 때문이다. 사랑에 눈이 멀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덕분에 끝까지 바보 인증을 하는 마크는 심하게 얘기하자면 탐정실격이다. 피해자의 아내 제니를 자신이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저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마크의 모습에서 몇 번이나 '저기, 니가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좀 정신 좀 차리고 객관적으로 봐야 하는 거 아니니' 하며 가슴을 쳤다. 마크 때문에 때론 속이 터졌지만 사실 그게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의 매력이기도 하다. 엘릭시르 편집부에서는 띠지에서 "이 작품은 '사건'이 아니라 '인물'을 따라 읽으세요"라고 권장(?)했는데, 그 말처럼 이 책은 인물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에 눈이 먼 형사 마크 브렌던과  제3의 눈으로 통찰력 있게 사건을 조사하는 베테랑 탐정 피터 건스를 각각의 축으로 놓고 봐도 재미있겠지만, 이 책에서 (그들의 붉은 머리색만큼이나) 눈에 띄는 것은 레드메인 가문의 사람들이다. 도주중인 로버트 레드메인을 비롯해 서적수집가인 앨버트 레드메인, 형과 달리 책이라곤 <모비딕>만 소중히 읽을 뿐인 퇴역 선장 벤디고 레드메인, 그리고 삼촌에 의해 남편을 잃은 제니 펜딘. 이들의 행동과 심리가 다른 어떤 추리소설보다 꼼꼼하게 묘사된다. 여기에 남편을 잃은 제니의 마음을 어느샌가 사로잡아 마크의 질투를 사는 이탈리아인 주제페 도리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압권은 거의 마지막 챕터인 '고백'인데, 사이코패스의 이 고백 앞에서는 오싹하지 않을 독자가 몇 안 되지 싶었다.  


  인물뿐 아니라 영국의 다트무어, 크로우즈 네스트, 이탈리아의 코모 등의 배경에 대한 묘사도 돋보였고, 각각의 배경이 인물의 성격과도 잘 어울리는 듯했고, 같은 인물이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성격으로 변하는 것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사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이거 진짜 물건인데' 싶었지만, 밑줄 그어둔 부분을 옮기느라 부분부분 들춰보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모르는 사이에 그냥 스쳐간 복선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작가가 잘 짜놓은 프레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어리숙한 독자는 그저 읽었을 때 한 번, 읽고 나서 시간이 흘렀을 때 다시 한 번 놀랄 뿐이다. 세계문학전집으로도, 미스터리 시리즈로도, 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작품. 엘릭시르가 다음에는 또 어떤 책으로 '미스터리 책장'을 채워줄지 설렌다.  


덧) 작품만큼이나 역자 후기도 깨알같이 재미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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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2-12-04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재미있어 보이는걸요? 고전 중의 고전이라 하시니~

이매지 2012-12-04 10:16   좋아요 0 | URL
저 빈말하는 사람 아닙니다. ㅎㅎㅎㅎ
저 믿고 일단 한 번 읽어보세요. (읭?!)

2012-12-04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4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4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5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재는재로 2012-12-05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는 말이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명?수사관 마크 후반의 피터건즈의 실수도 솔직히 아무리 봐도 저정도면 대충 눈치가 올텐데 여자한테 빠져 그대로 살인을 방조하는 마크의 호구짓은 진짜 필포츠의 다른작품 어둠의 소리도 괜찮죠 근데 필포츠 다른작품 혹시 알고 계신가요..

이매지 2012-12-05 10:26   좋아요 0 | URL
정말 마크의 삽질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죠. ㅋㅋㅋ 피터 건즈의 실수도 그의 인간미(?)를 돋보이게 하려는 장치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참 그렇죠. 필포츠 다른 작품은 저도 읽어본 것이 없어요. ㅠㅠ 국내에 좀 더 소개돼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죠. :)

노이에자이트 2012-12-06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포츠는 다트무어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많이 썼죠.<바스커빌 가의 개>에도 나오는 지역이라 관심이 있습니다.이매지 님도 가보고 싶죠?

이매지 2012-12-06 13:54   좋아요 0 | URL
다트무어는 물론이고 영국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가보고 싶네요 ㅎㅎ
그곳에서 <바스커빌 가의 개>나 필포츠의 소설을 읽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