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이래 모든 언니들의 가르침대로, 세상엔 두 가지 종류의 남자가 있다.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남자와, 평생을 함께할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지만 지구가 멸망한다면 마지막 하루를 함께하고 싶은 남자. 재화가 용기를 생각할 때, 용기는 언제나 후자였다. 두 사람은 오래 친구였고, 잠시 연인이었으며, 이제는 멀리서 소식을 듣는 사이일 뿐이다. 그럼에도 재화는 가끔 용기를 생각했다.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볼일이야 없겠지만, 그 녀석이 어디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소행성이 맹렬히 날아오고 있다는 소식에 찾아라도 가지, 하고 말이다. -9~10쪽
이렇게 직구를 던지는 꼬마라니. 용기는 웃고 말았다. 여자친구는 변화구를 던지는 적이 없었다. 여자친구는 변화구를 던지는 적이 없었다. 당돌하게, 온당하게 사랑해달라고 요구해왔다. 처음에는 사실 부담스러웠던 적도 있었지만 이내 쉽고 직선적이어야 진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순리인 양 잘 굴러가야 맞는 거라고 말이다. 꼭 사랑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일이 다 그렇지 않은가. 패기 없는 젊은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역경을 이기고 성취해낸다든가 하는 거,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될 일은 쉽게 된다. 이뤄질 사랑은 쉽게 이뤄진다. 약간 어려워지는가 싶어도 고비조차 순하게 넘어간다. -28쪽
그런 기억들을 떠올려도 이제는 슬프지 않다. 헤어진 지 너무 오래된 거다. 한때의 친밀감을, 단념한 지 너무 오래. 친밀감이란 기분 좋은, 심지어 약간 맛있는 냄새가 나는 향초 같은 거다. 오래 초를 켜두어 드디어 집 안에 향이 밸까 싶었더니 사악한 계절풍이 모두 씻어가버렸다. 그토록 쉽게 사라진다. 단념, 품었던 생각을 아주 끊어버리다…… 그건 사실 꽤 굉장한 행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생각을, 기억을 잘라버릴 정도의 행위란 스스로를 위해서나 타인을 위해서나 대단한 것이다. -33쪽
인생이 테트리스라면, 더이상 긴 일자 막대는 내려오지 않는다. 갑자기 모든 게 좋아질 리가 없다. 이렇게 쌓여서, 해소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안고 버티는 거다. -54쪽
마음을 얘기하고 사랑을 얘기할 때는 역시 진지해야 해, 재화는 텔레파시를 통해 용기에게 말했다. 어디서 어떤 어린것을 사랑하고 있든 간에 조심해서 사랑을 말하길. 휘발성 없는 말들을 잘 고르고 골라서, 서늘한 곳에서 숙성을 시킨 그다음에, 늑골과 연구개와 온갖 내밀한 부분들을 다 거쳐 말해야 한다고. 그게 아니면, 그냥 하지 말든가. -107쪽
쉽게 사는 것 같아 보이는 행운아들도 사실은 피똥 싸게 어려운 게 아닐까? 정말 쉽다면…… 불공평한 거다. -149쪽
나는 오늘도 네 좌표를 알지 못해. 우리의 좌표가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알지 못해. 네가 나빴는지, 내가 나빴는지, 우주가 나빴는지 알지 못해. 그렇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 -164쪽
여튼, 잘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서는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되겠다고, 용기는 뒤늦게 생각했다. 영원히 알 수 없을 세계라면 특히. -177쪽
"좋겠다, 언니는. 누군가의 정답이라서." "정답은 무슨, 오답이면 어떡하나 걱정된다." "결혼할 용기가 있으면 정답인 거야. 계속 정답으로 지켜나가는 거지. 난 누군가의 유사답 정도는 되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 한 번도 정답은 못 되어봤네." 선이가 빨대 종이로 반지를 만들어 재화 손가락에 끼워줬다. "너도 누군가의 정답일 거야. 그 누가 아직 풀이를 제대로 못한 모양이지."-182쪽
그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권의 불완전한 책으로 세상을 조금 더 돌아다니는 것. 대단한 책도 아니고 뒤틀린 농담 같은 내용이지만 뭐 어떤가. 사실 세상은 너무 끔찍한 곳이라, 끔찍한 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남는 것이라고는 좋은 농담들 몇 개 정도일 것이다. -217쪽
생명력 있는 이야기는 결국 읽는 이들의 일상에 스며들어 농담이 되는 것 같아요. 몇 년 전, 연하 남자친구를 만나는 친구에게 다른 친구가 「메밀꽃 필 무렵」을 인용하여 "너 애숭이 빨문 죄 된다!" 일침하는 걸 보고 깔깔거렸던 기억이 나네요. 지나치게 긍정적인 직장 동료를 두고 "쟨 아큐인가?" 하고 비아냥거릴 때의 쾌감이란…… 또 파괴적인 연애에는 『폭풍의 언덕』 농담이 빠질 수 없겠죠. "아주 그냥 히스클리프 났네, 났어!"
이렇게 소설이 종이의 질량마저 버리고, 대신 세기를 뛰어넘는 에너지를 얻으면 농담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낯모르는 시간과 공간까지 날아가,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의 입속에서 슈팅스타처럼 톡톡 터지고 싶어요. 이야기가 그렇게 살아남는 것만큼 놀라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 -2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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