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으로 해가 바뀌었지만, 아직 음력 설을 지나지 않아 '임진년'이 되기 직전,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 중에 어느 저녁 김해자 선배와 술을 한 잔 했다. 홍어무침과 녹두빈대떡과 막걸리. 예전부터 김해자 선배의 산문을 참 좋아했다. 차분하게 일상을 풀어놓으시는데, 그 안에 녹아있는 따뜻한 마음과 삶의 지혜가 느껴져서 좋았다. 시인이지만 개인적으로 시보다 산문을 좋아했다.

 

김해자 선배와 보낸 짧은 시간 다양한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교류하고 계신 여러 작가들의 근황도 알려주시고, 시골 생활의 사소한 이야기들도 말씀해주시고, 현재 작업하고 계신 책에 대해서도 알려주셨다. 막걸리 통이 점점 비워지면서, 슬슬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선배와 헤어지면서, 내 이름을 불러줄 때 그 느낌이 참 좋았다. 친근하고 푸근한 느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배의 시집을 다시 한번 찾아 읽고, 글을 하나 올리려고 맘먹었는데, 뒤늦게 시를 하나 찾아 읽었다.

 

 

 

 

 

 

 

 

 

 

 

 

 

 

 

 

 

사람 숲에서 길을 잃다


너무 깊이 들어와버린 걸까
갈수록 숲은 어둡고
나무와 나무 사이 너무 멀다
동그랗고 야트막한 언덕배기
천지사방 후려치는 바람에
뼛속까지 마르는 은빛 억새로
함께 흔들려본 지 오래
막막한 허공 아래
오는 비 다 맞으며 젖어본 지 참 오래


깊이 들어와서가 아니다
내 아직 어두운 숲길을 헤매는 것은
헤매이다 길을 잃기도 하는 것은
아직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탓이다
깊은 골짝 지나 산등성이 높은 그곳에
키 낮은 꽃들 기대고 포개지며 엎드려 있으리
더 깊이 들어가야 하리
깊은 골짝 지나 솟구치는 산등성이
그 부드러운 잔등을 만날 때까지
높은 데 있어 낮은, 능선의
그 환하디환한 잔꽃들 만날 때까지


김해자 / 無花果는 없다 / 실천문학사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트랑 2012-01-30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멋진 시입니다.
돌아서서 반성하게 하는 시입니다.

사람의 숲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ㅠ.ㅠ

선배님 시인과 좋은 시를 포스팅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은빛 2012-02-01 20:36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김해자 선배의 시 보다 산문을 더 좋아합니다.
선배가 시를 참 잘쓰시고, 상도 여럿 받으셨지만,
제가 시를 잘 몰라서 그런지.
시보다는 산문에 더 맘이 가더라구요.

차트랑공님, 고맙습니다!

숲노래 2012-01-30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쓰는 분이랑
술 한 잔 걸치면
좋은 생각씨앗
오순도순 나누리라 믿어요.

감은빛 2012-02-01 20:38   좋아요 0 | URL
제가 시인을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한때 시인들과 술을 마시는 경우가 더러 있었어요.
확실히 시인들은 다른 작가들보다 더 감성적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시에 재주가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감수성이 다 말라버린 듯 해요.

마녀고양이 2012-01-3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너무 좋네요... 시집 살까,,
요즘 숲의 오솔길을 거니는 상상을 자주 합니다, 조금 답답해서 그런지.

아우, 첨에 김해자 시인을 감자전으로 읽었지 뭡니까... 이런.
배고파서 그런가봐요, 아침부터 여기 붙어있으니... 오늘은
리뷰를 써야해 라는 강박에 시달리면서도, 이곳저곳 놀러다니는 이 아침. ㅋ

감은빛 2012-02-01 20:42   좋아요 0 | URL
김해자 선배의 시집은 이것도 좋지만,
애지 출판사에서 나온 '축제'라는 시집도 좋습니다!
그 시집으로 '백석문학상'도 받았습니다.

감자전이라니! 정말 배가 고프셨나요?
아니면 아침부터 술이 고프신건 아니셨을까요? ^^
많이 바쁘시죠? 건강 꼭 잘 챙기세요!

진주 2012-02-02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시인이랑 마주 앉아서 막걸리와 홍어회무침을 드셨다는건가요?
우리집 냉장고에도 홍어회무침 있는데 어쩜..같은 홍어회무침을 먹고도
뽑아내는 건 이렇게 다를까 싶은 생각이 다 드네요 ㅎㅎㅎ

감은빛 2012-02-09 13:3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진주님.
답이 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네, 김해자 선배와 함께 홍어무침에 막거리를 마셨습니다. ^^
언제 한번 진주님과도 홍어무침에 막거리 한잔 하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