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으로 해가 바뀌었지만, 아직 음력 설을 지나지 않아 '임진년'이 되기 직전,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 중에 어느 저녁 김해자 선배와 술을 한 잔 했다. 홍어무침과 녹두빈대떡과 막걸리. 예전부터 김해자 선배의 산문을 참 좋아했다. 차분하게 일상을 풀어놓으시는데, 그 안에 녹아있는 따뜻한 마음과 삶의 지혜가 느껴져서 좋았다. 시인이지만 개인적으로 시보다 산문을 좋아했다.
김해자 선배와 보낸 짧은 시간 다양한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교류하고 계신 여러 작가들의 근황도 알려주시고, 시골 생활의 사소한 이야기들도 말씀해주시고, 현재 작업하고 계신 책에 대해서도 알려주셨다. 막걸리 통이 점점 비워지면서, 슬슬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선배와 헤어지면서, 내 이름을 불러줄 때 그 느낌이 참 좋았다. 친근하고 푸근한 느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배의 시집을 다시 한번 찾아 읽고, 글을 하나 올리려고 맘먹었는데, 뒤늦게 시를 하나 찾아 읽었다.
사람 숲에서 길을 잃다
너무 깊이 들어와버린 걸까
갈수록 숲은 어둡고
나무와 나무 사이 너무 멀다
동그랗고 야트막한 언덕배기
천지사방 후려치는 바람에
뼛속까지 마르는 은빛 억새로
함께 흔들려본 지 오래
막막한 허공 아래
오는 비 다 맞으며 젖어본 지 참 오래
깊이 들어와서가 아니다
내 아직 어두운 숲길을 헤매는 것은
헤매이다 길을 잃기도 하는 것은
아직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탓이다
깊은 골짝 지나 산등성이 높은 그곳에
키 낮은 꽃들 기대고 포개지며 엎드려 있으리
더 깊이 들어가야 하리
깊은 골짝 지나 솟구치는 산등성이
그 부드러운 잔등을 만날 때까지
높은 데 있어 낮은, 능선의
그 환하디환한 잔꽃들 만날 때까지
김해자 / 無花果는 없다 / 실천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