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바침 - 결코 소멸되지 않을 자명한 사물에 바치는 헌사
부르크하르트 슈피넨 지음, 리네 호벤 그림, 김인순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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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그런 것이다. 아니, 책이란 그러한 상대성을 뛰어넘는 무엇이다. 방대하고, 깊고, 풍요로우며, 지저분하고, 거추장스럽고, 아름답고, 찬란하고, 곤란한 무엇이다. 우리에게는-부르크하르트 슈피넨에 따르면-새 책, 헌책, 큰 책과 작은 책, 빌린 책, 두고 간 책, 사인 받은 책, 버린 책, 심지어 불에 타버린 책이 있다. 책을 정의내리기 위해서는 한 권의 책을 필요로한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애서가들은 책의 근사함을 보여주겠다는 소박한 열망으로 출발해 기어코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쓴다. 책의 속성은 그 자신이 책이 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애서가들의 귀에 속삭인다. 나를 써보지 않겠어? (김겨울 추천사 중)

초창기의 책이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크고 무거웠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책의 내용도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자산이 아니라 부와 권력을 지닌 소수의 전유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37쪽)

우리는 일상에서 텍스트와 책을 동일시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탓에 책이라는 낱말을 텍스트와 동의어로 사용한다. 그러나 실제로 ‘책‘을 쓰는 사람은 없다. 책이 아니라 나중에 인쇄되어 책으로 출판되길 바라는 ‘텍스트‘를 쓴다. (중략)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있어서 ‘좋아하는 책‘은 그야말로 ‘오롯한 책‘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택스트와 그것을 담은 물질적 형식이 자명하게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다. 즉 정신과 물질이 일치한다. (58쪽)

우리가 평생 읽는 책의 분량과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에 보관할 수 있는 책의 분량은 어느 정도 일치한다. 우리가 소장하는 책의 분량만큼, 딱 그만큼의 텍스트가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마련하는 모든 새 책은 그 책들이 우리의 책장을 차지하는 공간만큼 우리의 독서 생활을 차지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맞은‘ 책을 고르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이다. (60-61쪽)

물에 젖어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책일지라도 버리는 건 고통스러웠다. 나는 책들이 그런 상태에서 솔직히 고마웠다. 그런 상태는 내 행위를 변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반면에 훼손되지 않은 책을 버리는 것은 그야말로 신성 모독처럼 느껴졌다. (104-105쪽)

책은 과정이 아니다. 책은 다차원적인 것, 임의로 계속될 수 있는 것,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는 것이다. 책은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저술된 것,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물체다. (120-121쪽)

이토록 많은 책들에 둘러싸여 있고 싶은 욕망의 배후에는 실제로 무엇이 존재할까? 이 모든 사색과 반성의 결과가 무엇이었을까? (149-150쪽)

아무리 디지털 시대일지라도 책으로 가득 찬 서가는 인기 있고 사랑받는 표상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수천 명의 과학자, 성직자, 예술가, 정치인들이 책으로 가득 찬 서가들 배경으로 사진가와 카메라맨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 10초 남짓한 자신들의 진술 또는 성명이 더욱 진지하게 보이기를 바라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은 그런 분명한 신호를 요구한다. 바로 오늘날까지도 책으로 가득 찬 서가가 그 특정한 목적과 요구에 기여하는 듯 보이는 까닭이다. 물론 무엇보다도 그 서가의 주인을 위해서 말이다. (157쪽)

나는 보다 단단한 무언가에 얽매여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책에 담긴 텍스트가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 즉 책을 읽는 행위였다. (161쪽)

읽힌 책은 그것을 읽은 독자가 살아온 삶의 일부이다. 심지어는 아주 중요한 장의 특별한 한 단락이 삶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독자가 가장 머물러 있고 싶어 했던 부분, 가장 편안함을 느낀 부분이었다면 언제나 그렇다. 모든 텍스트는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이와 동시에 독자에게는 그 세계를 여행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따금씩 그 여행을 회상하기 위해서라도 읽힌 책은 여행 기록처럼 보관될 필요가 있다. 여행 기록들이 다 그렇듯이 기억을 생생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이처럼 개인 도서관은 자신만의 독서 생활을 위한 기록 보관소이다. (163쪽)

진정한, 정말로 진정한 장서광은 결국에는 자신의 책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개의치 않는다.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장서를 돌볼 시간이 없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다. 장서광은 중독된 자들이다. 모든 중독이 그렇듯이, 책 중독도 끊임없이 복용량을 늘려야 한다. (174쪽)

책의 물질적인 가치는 출판사나 경매소에서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그 실질적인 가치는 인간과 맺는 관계를 통해 획득된다. (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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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응답하는 기도 - 시편에서 발견하는 기도의 실제
유진 피터슨 지음, IVP 편집부 옮김 / IVP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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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도구지만, 한 가지 설명해야 할 것이 있다. 기도는 무엇을 하거나 무엇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존재하고(being) 존재가 되어 가기(becoming) 위한 도구다. (중략) 그러나 우리의 존재가 가고 또한 인간이 되어 가도록 해 주는 도구는 그렇게 쉽게 구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 시대를 무엇보다도 기술의 시대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대륙의 가장 큰 영역에는 기술이 매우 빈약한 상태다. (중략) 기도야말로 인간이 되어 가는 모든 과정에서 핵심 기술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몸과 영혼에 사용하시는 도구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다. (13쪽)

우리는 모두, 우리가 적절한 곳에 있다면 기도할 수 있으리라고 혹은 좀더 잘 기도할 수 있으리라고 가정한다. 우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곳 혹은 있기 원하는 곳에 가게 될 때까지 기도하는 일을 미룬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있는 바로 그곳을 겨냥하고 거기에서 우리의 응답을 이끌어 내는데, 우리는 환상과 환경이 그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하도록 그냥 둔다. (49쪽)

기도할 때 우리의 과제는 언어의 희소가치를 높여서 추상적인 영성으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날씨와 지리와 적대감의 은유로 언어를 풍부하게 해서 정직하고 실제적인 경험의 영성으로 만드는 일이다. 언어의 리듬과 시간의 관계는 언어의 은유와 장소의 관계와 같다. 하나님은 시공간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시공간 속에서 응답, 즉 기도해야 한다. (115쪽)

예배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또 하나님의 대답에 삶을 거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품는 것이다. 또 나 혼자만 그분이 아끼시는 자녀가 아니라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도 필요와 권리가 있음을 공손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예배는 만남의 공간을 명확하게 하고, 시간을 정하고, 순서를 부여한다. 기도는 시공간 안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129쪽)

기도는 고통과 감사, 분노와 같은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로 시작된다. 그것은 산발적으로 일어난다. 그것은 어떤 점진적인 변화 없이 갑자기 경험된다. 그러나 기도가 계속되는 동안, 모으고 정돈하는 물밑 작업이 진행되어 기도는 우리의 가장 종합적인 행동으로 발전한다. 기도는 기억하는 행위로 무르익는다. (중략) 기도에는 인생이 응집되어 있다. 인생은 깔끔하게 분류된 채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으며, 따라서 기도도 마찬가지다. 시편은 우리에게 인생의 물결이 우리에게 흘러오는 대로, 그 거친 물결이 우리를 적시는 대로 그 물결에 몸을 담그고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159쪽)

시편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믿음의 모험으로 삶을 감행하는 사람들의 모든 기도 경험은 찬양으로 귀결되는 철저한 결론에 도달한다. 어떤 기도든 모든 기도의 마지막은 찬양이다.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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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About Saul Leiter (Paperback) -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 원서
Saul Leiter / Thames & Hudson Ltd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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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thing is a photo... we live in a world today where almost everything is a photograph.
모든 게 사진이다.... 우리가 오늘날 살아가는 세상은 거의 모든 게 사진이다. (54쪽)

It is not where it is or what it is that matters but how you see it.
중요한 것은 장소나 사물이 아니라 자신의 시각이다. (90쪽)

A photographer‘s gift to the viewer is sometimes beauty in the overlooked ordinary.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사진가가 주는 선물은 일상의 간과된 아름다움일 경우가 종종 있다. (104쪽)

The history of photography keeps changing as one learns more about hidden and unknown things.
감춰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을 깨달아가면서 사진의 역사는 계속 바뀐다. (169쪽)

Life is full of unused opportunities or, as my friend Henry used to say, Saul, you have a talent for avoiding opportunities.
인생은 사용하지 않은 기회들로 가득하다. 내 친구 헨리는 자주 말했다. 사울, 자네는 기회를 피하는 재주가 있어.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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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여자
리지 스튜어트 지음, 하얀콩 옮김 / 숨쉬는책공장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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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나는 나를 둘로 나눠 본다.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과 뒤로 물러서는 여성의 모습으로. 내가 과연 어른처럼 보이는지, 어른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우리가 한 집단 또는 다른 집단을 공개적으로 설명하거나 무엇이 절대적이고, 올바른 행동인지를 말할 때 절반으로 나뉜 각각의 입장만을 따르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우리 편과 그들 편으로 나뉘어서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상대편에 대한 공격성과 혐오를 드러내고 그들을 각성하게 하기보다 탓하기만 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다.

다른 일들의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 삶을 우리 삶답게 만드는 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많은 결혼생활보다 오래 지속되는 우정, 슬픔을 이겨 내는 것, 어려운 이별을 마주하는 것, 더 쉬운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치 않은 삶의 길을 택하는 것, 마음을 바꾸는 일이 언제나 괜찮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면, 휘장이라도 만들어야 할까?

나는 다시 한 번 엄마를, 30대의 어린 엄마를 떠올리며 이 도시가 구불구불하게 펼쳐진 끝없는 기회의 장소가 아니라 최대한 적은 혼란을 겪으며 풀어야 할 문제의 장소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중략)
도시에서 여성 보행자로 걷다 보면 전투적이고 피곤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나 스스로 책임자라는 점을 상기하게 되고 그것은 항상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나는 걷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걷는 것이 왜 나를 분명하게 바라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인지 알아내려 애쓴다. 나는 그것이 불확실한 사람인 나를 확고하고 능력을 갖추고 전진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나는 걷는 것이 나를 머릿속을 떠나 세상으로 나오게 하기에 좋아한다. 걷기는 내가 삶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잘 모르지만 유색인종인 여성이 서양의 도시를 걷는 것은 아마도 나와는 다른 경험일 테고 내가 결코 만나지 못할 어떤 장애물을 마주쳐야 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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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리커버)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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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때 자신이 계급적 인간이라는 것을, 자신이 속한 계급이라는 걸 알았다. 이런 거였구나. 이웃의 취향으로부터 차단될 방법이 없다는 거. 계급이라는 이런 거였고 나는 이런 계급이었어. 왜냐하면......
왜냐하면 더 많은 돈을 가져서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수 잇다면 더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을 테니까. 더 좋은 집에서 산다는 것은 더 좋은 골목, 더 좋은 동네에 살게 된다는 것이고 더 좋은 동네라는 것은 이웃의 소음과 취향으로부터 차단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동네일 테니까. 그런 동네에서는 서로 간섭하거나 간섭되는 일이 없으니 사람들의 표정은 편안하고 너무하네, 라고 외친다거나...... 너무 친절하게구는 일도 없을 것이고 지속적인 소음에 시달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 세계는 좋을 것이다. 네게도 권리가 있어. 남들에게 시달리지 않을 권리가 말이다. (누가, 123-124쪽)

나는 이해한다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이해한다는 말은 복잡한 맥락을 무시한 채 편리하고도 단순하게 그것을, 혹은 너를 바라보고 잇다는 무신경한 자백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나 역시 남들처럼 습관적으로 아니면 다른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그 말을 할 때가 있었고 그러고 나면 낭패해 고개를 숙이곤 했다. 다른 사람에게 들었을 때는 나중에 좋지 않은 심보로 그 말을 되새겼다. (웃는남자, 165-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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