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여름, 내 책장 뽐내기!

1. 아버지의 서재 

아버지는 책을 참 좋아하셨다.
방 두개 짜리 집에서 할머니와 우리 삼남매, 부모님, 이렇게 여섯 식구가 복닥거리며 살다가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 드디어 방이 네개 있는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방이 여유가 생기자 아버지는 곧장 그중 하나를 아버지의 서재로 꾸미셨다. 아버지의 책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는 책장이 나란히 세개. 다른 멋진 가구나 인테리어로 꾸며지진 않았지만 그 방이 나는 참 자랑스러웠었다. 대단한 지위, 직장을 가지시진 않았어도 우리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2. 중학교때 수학선생님의 서재 

내가 중학교때 좋아하던 수학선생님이 계시다. 미혼의 여자 선생님이셨는데, 다음 해 다른 남자 중학교로 전근을 가신 후에 선생님을 찾아 뵈러 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 댁이라고 했지만 가보니 연립 주택 반지하 방에서 혼자 살고 계셨다. 그런데 그 단칸방을 채우고 있던 책, 책들. 여기도 책, 저기도 책, 금방 무너져 내릴 것 같이 쌓아올려진 책, 책.
"애들이 아무때나 와서 빌려가기 때문에 늘 정리 안된채 이 모양이야."
여기서 '애들'이란 선생님이 맡으신 반 학생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그 단칸방은 일종의 열린 도서관인 셈이었다. 지금도 그 방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3. 부러웠던 서재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남편 후배 집에 초대를 받아 방문한 적이 있다. 아이가 아직 없었던 후배 부부의 집은 널찍하고 흐트러짐 하나 없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집 구경을 시켜주는대로 따라 다니다가 2층 전망 좋은 곳에 있는 그 후배 와이프의 서재를 보았다. 웬만한 회사 중역의 사무실 같은 멋진 서재, 멋진 테이블, 멋진 책장. 그 당시 나는 남편과 원룸에서 살던 시절. 서재는 커녕 그 원룸 조차 내 짐과 남편 짐이 뒤죽박죽 정돈이 안되어 늘 금방 이사온 집 같은 상태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후배 와이프의 서재를 구경하는 동안 부러웠다...많이 부러웠다.

4. 지금 나의 집에는 서재가?

차를 타고 친정으로 가는 두시간 남짓 나와 아이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수다를 떤다.
"엄마, 우리 나중에 살고 싶은 집 꾸미기 해볼까요?"
아이가 제안하고 자기가 먼저 말해보겠단다.
"방을 다섯개 만들거예요. 하나는 잠 자는 방, 하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쓰실 방, 하나는 아빠 서재, 하나는 엄마 서재, 하나는 내 서재~"
"아빠, 엄마, 네가 다 각각 서재를 가진다고? 그러면 각자 자기 서재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러면 같이 얼굴 보고 얘기할 시간도 줄어들 것 같은데? 엄마는 우리 식구가 같이 쓰는 서재로 하고 대신 크게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대답했다.
방 갯수가 늘어났다가 줄었다가, 1층집이 되었다가, 3층집이 되었다가, 아이와 나는 한참을 집 짓는 얘기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5. 앞으로 가질 서재 

당장 공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나는 예나 지금이나 집에 책을 쌓아놓는 스타일이 아니다. 꼭 소장하고 싶은 책만 남기고 나머지는 읽은 후 남들에게 주거나 중고 시장에 내어 놓는 편. 남기는 것은 그 책을 읽은 기록이다. 내가 책을 읽은 후에 좋았건 별로였건 꼭 리뷰를 써서 남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잘 정돈되어 있는 다른 분들의 서재를 구경하노라면 감탄을 금할 수 없지만 나에게는 요원한 일이라는 것도 내가 잘 안다. 

 

언제 그린 그림인지 모르겠는데 그림을 그린 아이보다 남편이 더 강력한 목소리로 나에게 절대 버리지 말라고 한 그림이다. 아이가 앞으로 살고 싶은 집이라고 그린 것이란다.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이것 역시 내 스타일은 아니야~). 잘 보면 어딘가에 Library라고 써있는 방도 분명히 있다.
아이는 아이구나. 나는 이제 이런 그림을 그려볼 생각도 안하는데.
이 그림을 절대 버리지 말라고 한 남편의 뜻은 무얼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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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0-09-05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진 다린이와 부모님. 그림이 참 근사해요. 집 꾸미기 놀이도 얼마나 행복한지요. 근사한 서재보다 더 멋지고 부러운 풍경이에요.^^

hnine 2010-09-05 06:53   좋아요 0 | URL
상상놀이는 언제 어디서나 맘대로 할수 있는 놀이이지요 ^^
마노아님 서재도 구경하면 재미날 것 같은데...^^

무스탕 2010-09-05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기찻길 옆에 달러와 우리돈 그려넣은 뭉치가 참 재미있어요. 금고인가봐요 ^^
다린이는 참 섬세한 아이같아요. 풍류도 알고요. 이런건 정말 버리지 말고 잘 두셨다고 손자들에게 보여주세요.

hnine 2010-09-05 06:5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 돈 보따리 있는 방이 지하 금고라네요 참~
색칠을 다 하면 멋질 것 같아서 완성하라고 해도 안하고 있어요. 굴러다니는 것은 버리기 잘하는 저이지만 저 그림은 그냥 두어야겠지요? ^^

비로그인 2010-09-05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을 보고 있자니 귀엽고 재밌네요. CCTV도 빠뜨리지 않을걸 보면 아드님은 집을 참 아끼고 사랑하는 듯 합니다. 근데 집에 초대받아 들어간 사람은 무사한거죠? ㅎ

아! 다시 읽으며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이 외침은, 참 많은 걸 담고 있습니다. 저도 모르는 많은 걸요. 눈을 좀 감아보니 비록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만일 지금 그런 모습이 아니더라도 hnine님 서재가 막 만져질 것 같네요 ^^


hnine 2010-09-05 09:19   좋아요 0 | URL
집에 초대받아 들어간 사람은 고사하고 저도 어디가 어딘지 모를 지경인데요? ㅋㅋ 술래잡기 하기에는 참 좋을 듯 싶지요?
지금 사는 집에서 영원히 살지 않는다면, 언젠가 제가 살고 싶은 집을 직접 만들어 살 기회가 온다면, 그때는 서재가 먼저 생길지, 텃밭이 먼저 생길지, 아니면 그 무엇이...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마음 속으로 그려보는 동안의 재미이겠지요.

비로그인 2010-09-05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이 그림 완전 아트예요~~~~!!!

hnine 2010-09-05 08:45   좋아요 0 | URL
아이쿠~ 마기님. 아트는요 무슨. 아이의 마음이 담긴 '하트'라면 모를까...^^
그래도 잘 봐주시니 에미로서는 감사드리고 싶네요.

꿈꾸는섬 2010-09-05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멋져요.^^
아이와 나인님이 그리는 집의 모습, 그런 것을 대화 주제로 삼을 수 있다니...배워야겠어요.^^

hnine 2010-09-05 07:06   좋아요 0 | URL
몽상적인 대화를 종종 나누지요. '만약 ~ 라면' 이런 대화요. 남편은 별로 즐기지 않더군요. 저랑 아이는 좋아하는데...^^

순오기 2010-09-05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정아버님의 서재부터 다린이가 꿈꾸는 서재까지 멋져요!
다린이는 참 섬세하네요, 이런 건 코팅해서 영구보존 해야죠.^^

hnine 2010-09-05 07:09   좋아요 0 | URL
친정아버지 서재에서 나도 좀 읽을 책 없나 여기 저기 훑어보던 생각이 나요. '이방인'이라는 표지 제목을 보고 저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의아해하던 기억도 나고요. 궁금해서 펼쳐서 한 페이지 읽고서 '이게 도대체 뭔 소리야?' 이랬답니다 ㅋㅋ 초등 4학년때 이야기여요.
지금도 보이는 순오기님의 저 빽빽한 책장...^^

프레이야 2010-09-05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린이 그림이 보통 아닌걸요.
크리스마스 하우스에, 곳곳에 CCTV가 특이해요. library도 있고.
금고엔 달러주머니와 원화주머니, 각각 두군데에..ㅎㅎ
카세트에서 나오는 음표들 그위로 스피커.
자세히 볼수록 정말 멋지네요.
아이와 서재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자 모습도 참 좋아요.
다린이는 행복한 아이같아요.

hnine 2010-09-05 08:4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자세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좋게 말하면 디테일을 잘 살린 것인데 제가 보기엔 왜 그리 복잡하게만 보이는지...
사실 저런 그림이 저것 하나가 아니라 비슷한 것이 많기 때문에 저는 그냥 보고 지나쳤는데 남편은 그중 저 그림이 좀 맘에 들었는지 버리기 대장 저에게 미리 얘기를 해놓더라고요, 버리지 말라고 ^^

루체오페르 2010-09-05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좋네요! 설계사에게 맡기면 지금도 가능할듯 합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고양이 빌딩보다 좋습니다.ㅎㅎ

hnine 2010-09-05 19:45   좋아요 0 | URL
설계사라...멀지 않은 곳에 있긴 하지요 ^^

하늘바람 2010-09-05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린이 그림 정말 잘 그리네요.
정말 버리지 마셔요.

hnine 2010-09-05 19:45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잘 보관해두겠습니다 ^^

2010-09-05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5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상미 2010-09-05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린이 그림 아주 상세한걸... CCTV까지 ㅎㅎ

너희 아버지 서재는 나도 무척 부러웠단다.
네 책상만 거기에 있어서 , 네 동생들도 부러웠을거 같아.
나이 들어 부모가 되어 두녀석을 키우다 보니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더구나.

hnine 2010-09-05 19:47   좋아요 0 | URL
내 동생들이 나 하나도 안부러워했단다.
아빠 감시 속에 있어야 한다면서~ ㅋㅋ

yamoo 2010-09-05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멋진 그림이군요!

hnine 2010-09-06 08:07   좋아요 0 | URL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 2010-09-06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자랑스러운 아버님과 함께 한 hnine님의 어린 시절이 마치 그림처럼 그려지는군요. 그리고 'Library라고 써있는 방'도 있는 아이의 그림이 정말 보물처럼 아름답네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hnine 2010-09-06 21:45   좋아요 0 | URL
oren님 서재를 보니 책은 물론이고 TV (DVD player), 골프 연습대, 컴퓨터...정말 그 안에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하나의 작은 세계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역시 책은 방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것보다 한 곳에 모아놓는 것이 훨씬 좋은 것 같아요.
들러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하늘 2010-09-09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서재이야기네요.
글을 읽다가 다린이의 그림에 눈길이 멈춰 한참을 봤어요.
Library가 보이네요. 잘 보관해야할 멋진 그림입니다.^^

hnine 2010-09-10 07:26   좋아요 0 | URL
현재는 없고 과거와 미래만 있는 이야기였어요...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