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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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엔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어야 친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선배가 나온다. 소설이 말하는 상실감에 경도된 중딩이 책을 덮은 후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상실의 시대>는 몇 번을 다시 읽은 반면 <위대한 개츠비>는 별 감흥 없었다. 16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의 느낌조차 남아 있지 않다. 누가 죽는 이야기였더라?


문제는 소설을 다 읽고도 개츠비가 왜 위대한지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흙수저 청년이 야망에 불타올라 불법 사업으로 졸부가 되고, 잊지 못한 첫사랑 그녀(게다가 지금은 남의 부인)에게 헌신하는 이야기? 오 촌스러워라. 내가 그 돈 가지고 있었다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소설의 화자 닉 캐러웨이는 도입부에서 자신이 판단을 유보하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런 닉이 소설 후반부에선 이렇게 말한다. "그 인간들은 썩어빠진 족속이오." "당신 한 사람이 그들을 모두 합쳐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합니다."


왜 위대한가. 이 질문에 앞서 소설의 배경인 1920년대 미국이 어떤 곳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곳에선 거대한 병원 광고판에 그려진 안과 의사의 눈이 마치 도시의 인간을 내려다보는 하나님의 눈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돈이 전부인 세상이다. 너도 나도 속물로 사는 세상에서 개츠비 혼자 '타락할 수 없는 꿈(217)'을 간직하고 사는 걸 닉은 알았다. 전부 돈을 좇으니 역설적으로 돈 따윈 아무것도 아닌 무엇이 된다. 모두가 모두를 속이는 세상에서 자신조차 속이며 살지 못한 개츠비의 죽음은 과연 "값비싼 대가"다. 나이 들어 다시 읽어도 무조건적인 사랑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젠 개츠비의 왠지 모를 불나방스러움을 이해는 한다. 적어도 개츠비가 잘못 살았다고 말하진 못 하겠다.


어쨌든 개츠비가 '위대한 개츠비'였다는 생각은 화자 닉 캐러웨이의 것인데, 그는 아무도 추모하지 않는 개츠비를 홀로 추모한다. 물론 닉은 아무도 속이지 않으며 살고, 사기 골프 치는 조던 베이커를 차버리고, 속물들의 세상 동부를 떠난다. 진정 위대한 인물이다. 개츠비처럼은 못 살아도 캐러웨이처럼은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서평 쓰고 있는데 의무병이 전화로 30분 쩔쩔매더니 핸드폰을 빌려 갔다. 페이스북에서 자신이 여사친들이랑 리플로 시시덕거리는 걸 보고 여친이 화를 냈다는 것이었다. 그걸 일일이 지우는 데 또 30분이 걸렸다. 아아 사랑이란 대저 무엇인가. 이런 식이라면 사랑은 즐거움을 포기하고 유치함을 인내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무언가가 아닌가. 그런고로 책을 덮은 세상에도 위대한 사람은 참 많다고 생각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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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2017-04-21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너어무 좋아요, 특히 마지막 문단٩(๑′ᴗ‵๑)۶

쥬드 2017-04-25 11:0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좋은 하루 보내세요
 
유령 퇴장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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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퇴장이라니. 제목만 봐도 뒷방 늙은이가 쓸쓸하게 사라지는 이야기일 것 같다. 그게 필립 로스가 만날 하는 이야기니까. 그러나 필립 로스를 노년의 쇠락을 생생하게 그리는 작가 정도로만 이해해선 곤란하다. 육체와 정신은 좌절스럽게 쇠락하는데 어째서 욕망만은 쇠락하지 않는지, 살아남은 욕망이 어떻게 인간을 무너뜨리는지를 고찰하는 지점에 필립 로스 소설의 진가가 있다.


일흔한 살 유명 작가 클리먼은 요실금 치료를 위해 뉴욕에 돌아온다. 우연히 서른 살 제이미를 만나고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다. 소변 조절은커녕 발기도 안 되는데 사랑이라니, 이것 참 고약하다. 클리먼은 욕망을 모른 척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한다. 되든 안 되든 고,라고 하면 될까. 그는 생각한다. 이건 '그쪽으로 가면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통을 향해 가는 여정(60)'이라고. 이건 '정신 나간 열망(75)'이자 '욕망이라는 유령(92)'이라고. 그러나 승산 없음을 알면서 기꺼이 부딪혀 스러지는 게 인간이다.


차라리 사랑에서만 패배해 물러나는 유령이었으면 좋았을걸. 작가는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진다. 그가 평생을 매진한 문학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젊은 작가 클리먼은 주커먼의 정신적 스승 로노프의 전기를 작성하기 위해 주커먼에게 접근한다. 클리먼은 로노프가 젊었을 때 이복 누나와 근친상간했을 거라 추측하고 주커먼에게 증언을 요구한다. 그는 말한다. "이건 소설을 가장한 고통스러운 고백입니다."


주커먼에게 이건 몹시 부당한 요구다. 작가로서의 명성을 되찾아주기 위해 로노프의 인간성을 망쳐놓는 건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에겐 인간성의 보존이 문학 이전의 최소한의 윤리다. 


주커먼은 육체의 한계만큼이나 문학의 한계를 잘 안다. 그는 언젠가 생각한다. "우리에게 유일한 진통제는 감정을 극적으로 꾸미는 것"이라고. 반면 문학의 한계를 모르는 정력적인 클리먼은 주커먼에게 "선생님은 어쩌다 겁먹으신 거죠?"라고 일갈한다. 클리먼이 말하는 진실을 위한 탈윤리의 문학이느냐, 주커먼이 말하는 인간성을 보존하기 위한 윤리의 문학이느냐. 독자는 무엇이 옳은지 정확하게 알 순 없다. 상황마다 다를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 싸움의 승패는 저마다의 윤리적 당위성에 달려있지 않다. 그저 주커먼과 에이미(로노프의 애인)가 늙고 병들었기 때문에 패배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켜온 '문학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걸 목격하고 있는 유령(245)'이다.


나이 들어도 무모한 순간은 존재한다. 이것이 변함없는 필립 로스의 전언이다. 하지만 유령의 퇴장은 서글프다. 우리도 언젠가는 소거되지 않는 욕망에 고통받을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린 단지 '아직은 아닌 자들'일 뿐 아닌가. 독자의 서글픔이야 어찌 됐든 주커먼은 소설을 통해 못 이룬 욕망을 밀고 나간다. 모든 패배 후 마지막 순간 그의 문학은 개인의 구원을 위한 지극히 작은 것으로 졸아든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그녀는 오고 있는 중이고 그는 떠난다. 영영 가버린다." 주커먼은 구원받았을까.

그토록 의기양양해하다니 우스꽝스러운 짓이었다. 아마도 의사가 약속한 변화보다는, 은둔이라는 규율 그리고 인생에서 나와 내 일 사이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잘라내기로 한 결정의 대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의식조차 못하고 있었던 그 대가 말이다(자발적인 망각이야말로 규율의 으뜸가는 요소 아닌가). 시골에는 내 희망을 자극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난 내 희망과 화해했었다. 하지만 뉴욕으로 오자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뉴욕은 사람들에게 늘 저지르는 그 짓을 내게도 저질렀다. 가능성을 일깨워놓은 것이다. 희망이 터져나왔다. 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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믜리도 괴리도 업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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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맑고 차가워지는 1월은 훈련하기 좋은 날이다. 또 이틀을 야외에서 잤다. 밝은 달이 별빛을 가리고 벌레 소리 대신 은은한 대남방송이 공기를 채운다. 구호소 텐트에 등유 난로를 피웠으니 다른 병과가 보면 글램핑이었겠다. 텐트 안이 나름 안락했으므로 그동안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었다. "믜리도 괴리도 없시"는 청산별곡 가사의 한 구절인데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6차 교육과정 끝물이었던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 교과서에서 청산별곡을 읽었다. 그러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저런 구절이 있었던가...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라는 중독성 강한 훅만 기억난다. 한민족은 오래전부터 후크송을 좋아했던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한다.


<블랙박스>의 블랙박스 판매원 박세권은 소설가 박세권에게 "어떻게 그렇게 남의 인생을 잘 아세요?"라고 묻는가 하면 단편 소설을 두곤 "조그만 게 엄청 복잡하고 좀 가지고 놀려고 하면 금방 부서지는 장난감 같"다고 말한다. 좀 더 지나선 "문학이 별거예요?"라고 묻다가 "야, 씨발아"까지 나아간다. 그가 정색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폭발한다. 맞다. 별것도 아닌 소설은 얼마나 연약한가.


작고한 문학 평론가 김현 선생은 책읽기의 괴로움에 대해 말했다. 책 속엔 삶의 원형이 있고, 그것은 "이 세계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으며, 우리는 왜 불행한가 하는 것을 반성케 하는 표지들"이라는 말이다. 또한 이런 책읽기는 "자기가 책을 통해 불행이나 결핍이 되어, 충족이나 행복을 싸워 얻게 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에 맞춰보기엔 성석제의 소설은 어딘가 기이한 면이 있다. 소설 속 삶의 원형들은 어딘가 부당하고 슬픈 것에 가까우며, 더욱이 작가의 글솜씨가 그것들을 별로 괴롭지 않게 읽어내려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책 속 그들보단 지금 여기 우리가 행복하다.


다만 책을 덮고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발 디딘 곳 밖으로 나가면 말도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라고. 단지 그것들을 보지 못하고 살았던 것 아닐까. '말도 안 된다'는 말은 물리적으로 구현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논리적/윤리적으로 부당하다는 뜻이다. 소설은 현실적인 비현실인데 요즘 세상은 점점 비현실적인 현실로만 보인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소설적인 세계를 살고 있다. 청산별곡 "믜리도 괴리도 업시" 구절의 앞뒤를 붙여서 해석해보면 이렇다. "어디다 던지는 돌인가, 누구를 맞히려던 돌인가.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맞아서 울고 있노라."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르는 돌 맞아서 울고 있는 사람이 많이 보인다. 그들을 달랠 수 있다면 아니, 그들의 존재라도 인식시켜준다면 별거 아닌 이야기라도 괜찮지 않겠는가. 김현 선생은 <책읽기의 괴로움> 마지막 문장에서 "나는 내 자신이 불행이고 결핍이다."라고 말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대가 바뀌었으므로 조금 더 나아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시대의 책 읽는 사람에겐 문장의 주어는 '나'에서 '우리'로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의 부당함은 지속되고 그것에 대한 탐구는 끝나지 않았으므로(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여전히 "별거" 아닌 소설을 읽는다. 새해엔 믜리도 괴리도 업시 우리 모두 함께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너 톨스토이가 무조건 싫다고 했지? 왜? 그 사람은 지난 세기 사람이야. 지금 톨스토이가 무덤에서 걸어나와서 <안나 카레리나>를 아무리 기가 막히게 잘 써낸다 해도 복잡한 현대인들의 여러 가지 심리를 다양한 각도에서 정교하게 묘사하는 건 불가능해. 말발이 안 먹힐 것 같으니까 도덕이나 인간의 도리 같은 걸로 독자를 찍어누르는 거지.그런 소설보다는 차라리 요새 나오는 신자본주의나 신경과학, 소비심리학 책을 참고하는 게 나아. 그쪽 저자들의 시각이 톨스토이보다 훨씬 다각적으로 예리하게 세상을, 사람들의 속셈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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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도요타인가 - 위기의 한국기업에 해법 내미는 도요타 제2창업 스토리
최원석 지음 / 더퀘스트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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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렉서스 차량 탑승 일가족 사망 사건을 접해봤을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차량 속도가 줄어들지 않았고 당시 운전자와 911과의 긴박한 통화 내용이 그대로 기록되어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도요타는 차량 결함 가능성을 부정하고 사고를 운전자 책임으로 돌렸다. "매트가 액셀과 바닥 사이에 끼어서"라는 식의 설명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비슷한 사고는 계속 발생하여 2,000건에 이르고 사망자만 20여 명이었다. 추후 사고의 원인이 전자제어 소프트웨어 결함으로 밝혀졌고 도요타는 소비자를 기만했다는 이유로 12억 달러의 벌금을 선고받았다. 리콜 규모는 사상 최대인 1,000만 대였다. 품질과 신뢰보단 원가절감에 집중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였다. 차량 기능의 진화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개발·생산 프로세스의 복잡성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창업가 3세 도요다 아키오 사장은 2010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사과 발언을 하며 울먹거렸다.


이랬던 도요타가 절치부심하고 2015년 기준 세계 자동차 판매 순위 1위를 기록했다. 판매 대수로는 1,015만 대, 연간 매출은 한화로 약 310조 원, 연간 영업이익은 31조 원이었다. '세계 자동차 역사에서도 한 회사가 연간 영업이익 30조 원대를 넘어선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7)' 도요타는 리콜 사태 이후 불과 1년 만에 흑자 전화에 성공했다. 2000년대 후반의 리먼 쇼크, 초엔고 상황에서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을까? 그것의 이유로는 반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생산설비를 줄인 것이 지목된다. 부품 조달과 공장 가동에서 비용 절감을 했고 (9,900억 엔), 중국과 아시아 시장에서 선전한 것이 흑자 전환에 큰 역할을 했다. 저자는 리콜 사태로 기업 이미지에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기업의 근본 체질이나 경영 시스템 그리고 제품의 품질과 성능이 큰 손상을 입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도요다 아키오 사장은 개발 과정의 의사소통 부족, 결함 발생 이후 초기 대응 실패, 본사·현장의 통합 위기 대책 부재 등이 종합적으로 맞물려 문제가 커졌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도요타가 수리한 것은 결함이라는 '하드웨어' 문제만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 즉 '소프트웨어' 문제였다. 도요타는 본사와 부품 제조사, 일본과 해외 조직 사이의 책임과 권한을 분명히 하는 한편 문제 상황에서의 빠른 대응을 위해 각 해외 본부에 자율성을 준 것이다. '중요 사안에 대해서는 해외 본부가 일본 본사에 실시간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본사 역시 최대한 빨리 그에 대한 판단을 내려주는 쪽으로 시스템을 뜯어고쳤다(25)'


2011년엔 동일본 대지진으로 2011년 2월에 가동한 미야기 현 신新공장이 궤멸적 피해를 입었다. "아키오 사장은 고위 간부들에게 '현장 직원들한테 보고서 올리라고 하지 말고, 직접 가서 듣고 바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27)' 2009년 1,000만 대 리콜 때 겪었던 현장과 본사의 커뮤니케이션 실패, 관료주의적 보고서 문화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지시였다. 도요타는 석 달 만에 지진 피해를 모두 복구하고 전 생산시설을 정상화했다. 이후 도요타는 부품 조달 시스템의 문제를 깨닫고 부품 공장 전체를 대상으로 대재난 발생 시의 비상 복구체제를 재정비했다. 2016년 4월, 규슈 구마모토의 지진은 도요타 후쿠오카 공장을 정지시키고, 구마모토의 부품회사 공장을 부쉈다. 이 때문에 일본 내 16개 공장 가운데 15곳의 가동이 중단됐는데 도요타는 2011년 이후 지진 피해 공장의 복구에 대한 준비와 훈련이 돼 있었다. 2016년의 지진 때 도요타는 2주 만에 전 공장을 재가동했다.


지금까지는 도요타의 위기 극복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도요타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조직 대개편에 착수한다. 기능 중심에서 제품 중심의 조직으로 회사를 7개로 분리한 것이다. 일명 '컴퍼니'제인데 차종별로는 소형차/ 중·대형차/상용차/고급차(렉서스) 4개 차량 컴퍼니를 만들었고 개발 분야별로는 선진기술개발/파워트레인/커넥티드 부분의 3개 개발 컴퍼니를 만들었다. 이런 컴퍼니제가 무조건 효율적이진 않다. 소니도 컴퍼니제를 택했지만 컴퍼니 간의 중복 투자나 출혈 경쟁으로 실패를 겪었다. 그러나 도요타는 이를 철저히 연구하고 이미 컴퍼니제를 시행 중인 한국의 전자 업계를 벤치마킹한다. 컴퍼니제의 우려되는 단점에도 그것을 단행한 것은 '도요타의 대기업병을 치유하는 효과가 컴퍼니제 도입에 따른 위험 부담보다 훨씬 더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독립채산제의 장점은 명확한 책임소재와 그에  따른 빠른 실행이다. 이는 어떤 일을 내 일이라고 여겼을 때 인간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즉, 이 일은 내가 해야만 한다, 내가 책임을 지고 그 결과에 대한 보상을 직접적으로 받는다는 의식이 있을 때 인간은 스스로 움직이게 된다. (301)' 조직이 너무 비대해지면 내부 조율에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고, 참신한 아이디어나 성장 동력을 찾기는 어려워진다. 컴퍼니제는 이런 규모의 불경제와 복잡성의 폭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도요타의 처방이다.


도요타의 개혁은 컴퍼니제 말고도 TGNA(Toyota New Global Architecture)라고 불리는 일종의 레고블록식 차량 생산 설계로도 나타난다. 도요타는 폭스바겐의 MQB(Modularer Querbaukasten) 기본 개념을 일부 가져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런 레고블록형 설계 전략은 그만큼 혁신적이기 때문이다. 레고블록이 있으면 온갖 형태를 쉽게 만들어낼 수 있듯이 수십 가지의 부품군을 레고블록 쌓듯 조립하여 새로운 차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레고블록형 설계 전략은 대폭적인 개발비·부품비를 낮추고, 특히 자동차 무게를 크게 줄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책의 마지막 챕터 제목은 <개인을 탓하기 전에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라>이다. 뻔한 말로 동기부여만 외치지 말고 실제로 직원 개인이 동기를 가질 수 있는 조직 구조를 만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주도권을 스스로 갖고, 그 일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지는 직원을 늘리는 것이다. 신체제 개편을 통해 도요타는 7개의 컴퍼니로 헤쳐 모이게 됐고 각각의 컴퍼니 사장이 각 회사의 모든 업무를 스스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업무를 스스로 주도할 수 있는 직원들이 훨씬 늘어났다.


"왜 다시 도요타인가"란 질문의 답은 결국 끊임없는 자기혁신으로 요약된다. 조직이 거대해질수록 업무 프로세스 속도의 지연과 비효율이 증가하고, 책임 회피를 우선으로 하는 일처리가 만연하게 된다. 조직원은 조직의 정체를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내가 60만 명이 일하는 조직에 있다 보니 뼈저리게 느낀다 (ㅎㅎ). 어쨌든 책의 주장이 "기-승-전-컴퍼니제 짱짱"으로 읽힐 만큼 저자는 컴퍼니제의 예상되는 장점을 설명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더불어 비교할 수밖에 없게 되는 현대 자동차의 기업 구조 문제에 대해서 틈틈이 말한다. 컴퍼니제가 정말로 최고의 전략이라 10년 후 도요타 자동차가 더 좋은 실적을 누릴지는 두고 봐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책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예상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품질 향상에 힘쓴다고 외치고 실제론 건물 부지 매매에 10조 원을 쓰는 것으로 정체성을 보여주는 회사의 앞날이 그리 밝지 않다고 예상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 현대차의 내수 점유율은 계속 내려가는 중이다. 현대차도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을 텐데 어떻게 자기혁신을 할까. 궁금하다.


재밌게 읽었다. 도요타뿐만 아니라 여러 기업의 성공과 실패 사례가 흥미로웠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 심사가 진행되는 중이다. 노조가 없어도, 갤럭시 노트가 터져나가도 삼성전자는 여전히 아주 잘 나간다. 신기한 기업이다. 기술과 경제에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나로선 오너의 비도덕 때문에 기업이 최대 이윤을 누리는 것인지, 오너의 비도덕이 없었을 때 기업이 더 큰 발전을 이루게 될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도요타만큼이나 신기한 삼성도 누가 객관적으로 분석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도요타는 지금의 젊은 직원들이 초창기 직원들의 마음가짐을 갖도록 만들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초창기 도요타 직원들이 느꼈을 그 절박함을 지금의 직원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신체제에서는 7개의 컴퍼니마다 각각 실무를 책임지는 직원들이 필요하다. 이들은 사내에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자동차업체에서 같은 일을 하는 이들과 경쟁해야 한다. 초창기 멤버들처럼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며 과정을 이끌어가야 하는 직원이 늘어나는 것이다.
도요타가 회사를 7개의 컴퍼니로 쪼갠 것은 도요타가 아주 작았을 때, 뭔가 결핍이 있었을 때 이를 채워나가기 위해 조직원들이 최선을 다해 일하던 그때의 분위기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도 있다. 도요타가 시행하게 된 컴퍼니제, 즉 독립채산제의 장점은 명확한 책임소재와 그에 따른 빠른 실행이다. 이는 어떤 일을 내 일이라고 여겼을 때 인간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즉, 이 일은 내가 해야만 한다, 내가 책임을 지고 그 결과에 대한 보상을 직접적으로 받는다는 의식이 있을 때 인간은 스스로 움직이게 된다. 3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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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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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지나가는 짧은 순간 방관자가 되기도 한다. 언젠가 차 타고 영등포 시장 사거리를 지나갈 때 중년 여성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휘청거리는 걸 봤다. 청바지엔 피가 굳은 것으로 보이는 얼룩이 있었다. 으레 그렇듯 그 동네에 많은 취한 여성일 거라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녹색 신호가 켜져서 차를 움직였다. 그 뒤로 그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래도 일어나 걸었으니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할 뿐이다. 만약 내가 차 안이 아니라 그의 곁이었다면 도와줬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가 다시 쓰러졌다면 그땐 지나가는 사람 누군가가 도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끔은 생각한다. 그때 119에 전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었느냐고. 찝찝한 기억이다. 다행인 건 같은 공간에 있던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가 잘못되었어도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이 내 윤리적 책임과 죄책감을 분산시켜줄 것이니까. 고백하자면 이 기억도 소설을 읽고서 오랜만에 떠올렸다. 무엇이든 합리화하며 살기는 참 쉽다고 생각한다.

 

어쩌라고요,라고 <양의 미래>의 화자는 생각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소녀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납치가 의심되는 상황에서 그걸 방관한 비정한 목격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발화로 옮겨지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이 뚜렷하지 않은 억울함보다 딸을 잃은 아주머니의 슬픔이 크기 때문이다.

 

한편 <누가>의 화자는 '그게 내 탓인가'라고 생각한다. 정당하게 세를 내고 들어간 집이지만 자신 때문에 노인이 더 좋지 않은 곳으로 쫓겨났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맞다. 화자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노인이 조금 더 가난했을 뿐이다.

 

조금 더 직접적인 죄책감에 시달리는 <웃는 남자>의 화자는 '내 잘못이 무엇인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폭염에 쓰러지는 노인을 한 발 차이로 피하고 마침 오는 버스를 탄다. 어느 날 버스 사고 순간엔 무의식적으로 애인의 몸이 아닌 가방을 잡는다.

 

우리는 많은 순간 윤리와 비윤리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놓인다. 우리가 놓이지 않는다면 남들이 그 자리에 놓인 것을 본다. 그 순간 우리는 경계선에 선 나/너를 탓해야 하는가? "몸에 와 닿는 최악은 대부분 우리끼리, 에서 비롯(196)"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의 잘못인 것이다. 한편으론 "상류엔 맹금류"가 있으며 그거 다 "짐승들 똥물이라고(86)" 말할 수도 있다. 우리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무엇이 옳을까? 이 소설의 입장은 후자에 가깝다. 자식의 죽음 같은 불행엔 이유가 없고, 상류의 똥물과 위층의 쿵쿵 찧는 소리는 피할 수 없다. "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88)"다. 단지 그날의 태양이 너무 뜨거웠고 모두 각자의 이유로 지쳐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라진 소녀를 끝까지 잊지 못하고, 할 말이 많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한 채 살고, 어두운 방에서 홀로 생쌀을 씹는다. 스스로를 처벌하는 것에 가깝다. 이 자학으로 일련의 윤리가 완성된다. 적어도 소설 내적으로는 그들의 애매한 죄와 죄의식은 해결된다. 독자는 그들을 탓할 수 없다.

 

그러니까, 결국 소설가는 하류의 고통과 자학을 보여주며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런 식의 생각이 약간은 비겁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소설에서 문제없이 작동하는 윤리관을 소설 밖으로 꺼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맹금류는 상류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도 생각한다. 특히, 소설 읽으며 자신의 애매한 비윤리를 쉽게 넘겨버리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단, 이렇게는 생각한다. 세상엔 사는 사람이 있고 살아내는 사람이 있다고. 살아내는 일은 경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 것이다. 이 이야기들은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는 사는 사람이다. 사는 사람의 논리로만 책을 읽을 수는 없다.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냥 하던 대로 했겠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결정적일 때 한 발 비켜서는 인간은 그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 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그것 같은 게 아니었을까. 결정적으로 그, 라는 인간이 되는 것. 땋던 방식대로 땋기. 늘 하던 가락대로 땋는 것.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피륙이 있고 그것의 무늬는 대개 이런 꼴로 짜이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 1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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