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진실
송승용 지음 / 엘도라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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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쓰자. 요약하자면 금융, 보험 회사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 다 자기들 수익 되는 상품을 팔고, 창구 직원조차도 자기 실적이 많이 플러스되는 상품을 추천한다는 것이다. 보험이고, 펀드고, 심지어 대출까지도 계약하려는 사람은 을이 아니라 고객이니 조건을 깐깐히 따져 물으라는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창구 직원은 아는 게 별로 없으니 물어보고 정 아니다 싶으면 지점장을 부르라는 이야기도. 지점장이 직접 응대를 안 한다면, 좀 더 프로페셔널한 직원을 붙여준다고. 대출 금리조차 협상권이 당연히 있다니, 금융도 서비스고 아는 만큼 누릴 수 있다는 말이 예외 없다. 그렇지만 마이너스 통장 기한 연장 전화 같은 게 걸려오면 늘 왠지 공손해지곤 했던 내가, 책 읽었다고 마통 담당 직원에게 당당해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한방에 다 갚아버리고 다른 은행으로 갈아탈 수 있을 정도되면 절로 떳떳해지지 않을까. 아닌 게 아니라 주택 담보 대출은 정말로 담보가 있으니 좀 당당할 수 있는 것 같다.

 

아버지 후배인 보험 설계사 분을 통해 연금, 자동차, 상해 등등 여러 가지 합친 보험 가입했는데 월 납입금이 지금 월급의 10퍼센트를 넘는다. 부모님이 강제 계약을 시켜버린 셈이라 그냥 하긴 한다만, 내 성격상 자동차 보험 말고는 나머지를 빵빵하게 들고 싶지는 않다. 보험이라는 게 나쁜 경우가 닥쳤을 때를 상정한 상품인데, 나쁜 경우를 대비하고 싶은 마음보단 그냥 나쁜 일이 내게는 닥치지 않으리라는 맹목으로 사는 편이기 때문이다. 특히 매년 빠르게 오르는 실질 물가를 감안했을 때 만기 환급금은 대부분 현재 가치보다 상당히 떨어진다는 저자의 강설을 읽으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현재를 빼앗기는 느낌으로 수십만 원씩 보험금 납입하다 정말로 중병 걸리거나 중상해 당해버려 일억 정도 내게 들어오면 그게 위안이 될까, 싶은 것이다. 병 안 걸리고 안 다치는 게 최대 행복이니 괜한 돈 쓰지 말자는 생각만... 이것도 다 지금 돈이 없어서 그렇다. 돈은 신성하다 정말.

 

그래서 결론은 이백만 원에 이년 연장해준다던 BMW 워런티 플러스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거. 금융회사만 그렇겠나, 자동차 회사도 그들 이익에 부합하니 워런티 연장하면 이러이러한 혜택 있다고 사탕발림 하는 거겠지. 절대 손해 보는 게임을 하지 않는 보험사,라고 말하는데 자동차 회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알아보니 소모품도 사설 업체에서 적당한 가격으로 교체하며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차 엔진이나 변속기 같은 건 절대 퍼질 리 없다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까짓것 퍼지면 당분간 백만 원짜리 중고 그랜저 XG 타지 뭐. 살다 보면 삶은 회복된다. 아 워런티 연장 안 하기로 결정하니 속이 다 후련하다.

 

실용적인 금융 지식에다 왠지 모를 용기까지 주는 좋은 책이었다. 하루 만에 읽을 수 있는 가벼운 분량은 덤.

 

"절대 손해 보는 게임을 하지 않는 보험사 (187p)"


"차라리 용돈으로 드리는 게 효도 (189p, 부모님 보험 가입시켜드릴 생각일랑 넣어두란 말)"

이렇게 만기 환급금에 대한 미련이 생각보다 훨씬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보험을 저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 것이다. 더구나 사망보험금을 연금재원으로 준다고 생각했다면 정말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연금은 사망보험금이 아닌 해약 환급금을 기준으로 지급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보장성 보험은 고유기능인 만일의 사태에 대한 보장이 가장 중요하다. 즉, 보장 내용에 중점을 두어 적은 비용으로 보험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최대한 저축으로 전환한다면 돈을 잘 불려나갈 수 있다. 투자의 시대로 접어든 현재 원금에 대한 미련은 버리자. 원금만 생각하다 보면 더 큰 기대손실이 생겨서 상대적으로 더 가난해진다. 1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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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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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뒷면 작가 사진을 본다. 흰머리와 흰 셔츠, 얼굴의 자연스러운 주름, 그리고 미소. 우아한 늙음이란 것도 있다면 이런 것일 테다. 문체는 화려하다기보단 정갈하고 이야기는 절제됐으니 소설도 작가의 얼굴을 닮는다고 해야겠다. 단편 소설 스페셜리스트로 201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앨리스 먼로의 초기 작품집이다.

 

영미권 단편 소설은 대개 적당한 중간 지점에서 설명 없이 시작해서 밋밋한 결말로 끝난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은 이런 전형을 따른다. 묵직한 한방이 기다리는 한국 단편 소설에 익숙해진 독자에겐 이런 구성이 별로 재미없다. 기술적으로 대단한 플롯도 없고, 감탄을 자아내는 미문도 딱히 없다. 특히 1960년대 캐나다 전원생활이나, 가든파티, 프롬 파티 같은 것들을 연상하기 어렵기에 잘 읽히지 않는다는 느낌이 계속 든다. 최근 소설을 모아놨던 <디어 라이프>처럼 가벼운 듯 묵중하게 스치는 맛도 없다. 그래서 종합 판정은 별로냐고? 아니다. 그럼에도 좋다고 말해야 한다. 올드 팝 듣는 사람이 기술적 세련미에 집착하지는 않잖나.

 

단편短篇 소설의 목표 중 하나는 인생의 단편斷片을 잘라내어 벼리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은 이 점에 충실하다. 분량은 요즘 단편보다 조금 더 짧다. 사건을 잘 교직하려 하지도 않는다. 한 가지 결정적 장면을 향해 내딛는다. 소설 속 인물들은 아버지에게 죽임 당할 말이 도망칠 때 울타리를 일부러 열고, 깨진 유리 접시를 괜찮다며 깔깔대며 주우면서 난 왜 안 되는지 묻고, 점점 원생이 떨어져 나가는 피아노 선생님의 자선 파티에서 지적장애아의 그다지 훌륭하지 않은 피아노 연주를 듣는다. 어떻게 보면 실패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러나 소설가는 이것들을 두고 실패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단지 장면으로 제시되고 독자는 그저 목도한다.

 

우리는 타인의 실패를 두고 냉정하고 혹독하게 평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자신의 실패에 더 혹독하다.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쏟을 수 있는 감각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실패를 이해 못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왜 실패했는지 잘 안다. 더욱이 우리에겐 자신을 혹독하게 비판할 수 있는 권리까지 주어진다. 섬세하고 윤리적인 인간일수록 스스로 무너질 가능성이 많다.

 

자신을 과대평가해서 교만해지는 걸 막기 위해 자기 객관화 능력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때론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않기 위해서도 자기 객관화 능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실패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실패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실패에 면죄부를 주자는 뜻이 아니라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앨리스 먼로의 결정적 장면을 다시 떠올려본다. 진짜 실패인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말 잘 풀어줬다고, 그래도 삶을 챙겨야 한다고, 마살레스 선생님의 볼품없는 파티는 여전히 아름답다고 말이다. 크고 작은 내 실패의 순간을 바라본다. 진짜 실패인가? 별거 아니었던 것도, 어쩔 수 없었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실패가 아닌 것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라도 좋다. 스스로에게 타인이 되어보는 경험 자체가 필요하다. 다만 그것이 그런 생각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무모한 여정. 처음이라서였을까?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올라서였을까? 아니다. 그건 로이스 때문이었다. 사랑을 할 때 어떤 사람은 조금만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꽤 멀리까지 가서 신비주의자처럼 아주 많은 것을 내던지기도 한다. 그 사랑의 신비주의자, 로이스가 이제는 꼬깃꼬깃 구겨지고 추운 모습으로 완전히 자기 안에 갇힌 사람처럼 자동차 좌석 한쪽 끝에 앉아 있었다. 내가 로이스에게 하고 싶었던 모든 말들이 머릿속에서만 요란하게 헛돌고 있었다. 널 보러 또 올게, 기억해, 사랑해 이런 말들을 나는 하지 못했다. 우리 사이에 놓인 공간을 절반조차도 제대로 건너지르지 못할 것 같았으므로. 다음번 나무 앞에서, 다음번 전신주 앞에서는 말하리라 나는 마음먹었다. 그러나 번번이 못했다. 다만 도시에 더 빨리 닿도록 속력을 높여 무섭도록 빨리 차를 몰았을 뿐이다. 15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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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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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선생이 저명한 문학 평론가인 줄은 진작 알았지만 그의 글을 이제야 처음 읽는다. 사람들이 꽤 많이 읽길래 대단한 에세이일 것이라 기대했는데 솔직히 기대보단 못했다. 내가 감히 황현산 선생의 문학적 소양과 깊은 비평에 대해 품평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단 장삼이사의 뛰어나지 않은 글이라도 신변잡기나 문학과 예술에 대한 비평에 채점표를 들이밀 순 없다. 정답 없는 사안에 대해 불평하는 것밖엔 안 되니까. 그러나 글이 사회, 경제, 세계의 정의를 말한다면 어쩔 수 없이 채점의 대상이 된다.

 

한 가지만 분명히 하자면, 챕터 2의 사진 비평과 중간중간 나오는 영화와 문학에 대한 통찰은 명불허전이었다. 과연 한 평생 문학에 매진한 사람의 통찰이었다. 가령 기형도의 시 <빈집>과 사람이 떠나가고 빗장만 걸린 '빈집'을 연결하여 이끌어 낸 "불안이 슬픔보다 더 끔찍하다"라는 통찰이나, 글로 서로를 연결하는 것은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사정을" 말하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선생은 문학적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문학의 울타리 안에선 그 시선이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투쟁하듯 살아가는 이 세계는 문학의 감수성으로 온전히 해석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선생은 오래된 것,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제일의 가치로 여겨 개발 논리를 종종 비판한다. 분명 그 논리의 일정 부분은 맞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에서 옛것이 그리움을 자아내고 자연이 안식처로 기능한다고 해서 현실의 옛것과 개발되지 않은 자연이 항상 그리움, 안식처와 동치 되진 않는다. 개발은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분명 우리가 지금 누리는 편리한 삶은 그 개발된 땅 위에 존재한다. 이미 누리고 있는 우리가 이제 와서 개발 논리를 감수성만으로 비판할 순 없다고 느낀다. 정치적 주장의 논거가 단순한 문학적 감수성에 기반을 둔 정의라면 그 주장은 정의롭긴 하지만 영 헛돈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글에선 사실에 기반을 둔 논리가 글의 아름다움을 보장할 것이다. 선생의 이러한 '문학으로 세상 바라보기'는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의 과학 수식을 이용한 철학 논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들은 단순한 언어상의 일치를 논증으로 확대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마찬가지다. 자금성은 규모가 크고 화려하지만 깊이가 없다? 근거는 오로지 문학적 감수성이다. 난 물음표를 찍을 수밖에 없다.

 

문학과 세계는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왜 이 세계가 꽃동산이 아닐까. 몇몇 악한의 악행으로 꽃동산이 망가지진 않을 것이다.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저지르는 죄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문학은 단순한 언더독보다 모두의 죄를 예민하고 구체적으로 그려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덮으며 이 에세이들에 좀 더 예민한 현실 인식이 더해졌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끝내 떨치지 못했다. 다만 문학의 본령은 약자와 잊힌 자를 기억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려 한다. 적어도 그 층위에서라면 선생의 문학적 세계관은 끝내 옳다. 선생은 말한다. "이 삶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고. 이 말을 오래 기억하려 한다. 꼭 투쟁적인 삶으로 돈을 더 벌겠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잊고 살았던 아름다움을 가끔 예술로 확인하자는 뜻에서. 밤을 잊지 않아야 낮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그 밤을 기억하자는 몸짓이 문학이고 예술일 것이다. 무기력한 허무주의로 살아도 문학의 정의와 세계의 정의 사이 간격을 좁히는 노력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믿고 싶다.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 정답이 여기에 있다. "밤이 선생이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는 잘 만들어진 실패담이다. 성장통과 실패담은 다르다. 두 번 다시 저지르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늘 다시 시작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떤 아름답고 거룩한 일에 제힘을 다 바쳐 실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 일에 뛰어드는 것을 만류하지 않는다. 그 실패담이 제 능력을 극한까지 발휘하였다는 승리의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봄날은 허망하게 가지 않는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것들은 조금 늦어지더라도 반드시 찾아오라고 말하면서 간다. 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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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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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페이지 넘는 소설이 술술 읽힌다. 순전 게을러서 읽는데 일주일 걸렸다. 집중해서 읽었으면 이틀이면 읽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사주신 세계 문학 전집에 <달과 6펜스>가 있었는데, 당연하게 읽지 않았다. 보통 고전은 재미없으니까. 지금은 내용도 잘 기억 안 나는 <적과 흑>, <좁은 문> 같은 소설에 시달린 중딩의 결론이었다. 중딩 인생 곱하기 2를 살아낸 지금에야 서머싯 몸을 읽었는데 이거 웬걸, 파리에 살지도 않고 1930년대에 살지도 않는 내가 읽어도 아주 재밌다. 어서 <달과 6펜스>도 읽어봐야겠다. 서평 끝.

 

은 농담이고, 쓰긴 써야지. 허나 이런 개인의 장대한 인생사들에 달리 내가 덧붙일 말이 있을까 싶다. 강제로 부여된 유예기간이 끝나가는 요즘, 생활과 습관 거기에다 취미까지도 모두 실용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조바심이 드는 바람에 소설 읽기를 조금 멀리했다. 곧 생활이 전쟁이 될 것 같은데 소설이나 읽고 앉아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러나 습관처럼 소설책을 펴고, 가상의 삶들을 읽고 상상하고 말았다.

 

소설에선 서머싯 몸이 작가로서의 자신 그대로 등장해 래리라는 청년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017년에 내 주변 누군가가 진정한 나를 찾겠다고 인도에 가겠다고 하면 그거 이십 년 전에나 힙했지 요즘은 아니야, 뭐 가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부디 장티푸스 조심하길,이라는 식으로 대답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소설 배경은 일세기 전이라 젊은 청년이 가진 것 다 버리고 인도로 떠나는 모습이 뜨악하면서도 멋져 보인다.

 

서머싯 몸이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으로 인도의 정신문화가 최고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설엔 래리의 삶 말고도 다른 삶들이 비중 있게 제시되기 때문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소설 내 최고 속물 엘리엇 조차도 미워할 수 없게 된다. 그 자신이 믿는 삶의 가치를 충실하게 지키며 베풀 줄 아는 인간이었으므로. 이렇게 생각하면 래리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 모든 삶엔 고통이 있고, 그것을 각자 방식으로 극복하는 그 자체에 삶의 의미가 있다는 의미로 소설을 읽고 싶다.

 

비단 소설이 아니더라도 살며 여러 삶을 간접적으로 접한다. 선과 악, 옳은 삶과 옳지 않은 삶, 잘 살아낸 삶과 잘못 살아낸 삶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을까? 난 구분할 능력도 없거니와 함부로 평가할 자격도 없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질문은 항상 나를 향해야 한다. 너는 어디쯤이느냐,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래리 쪽에 가까울까 엘리엇 쪽에 가까울까. 물론 엘리엇 쪽에 훨씬 가깝다. 래리처럼 살 자신도 없고. 일단 지금 여기 생활을 제대로 하자, 고 생각하고 만다.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대답은 여전히 못할 것이다. 말보단 삶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이러나저러나 모든 질문과 답에 상관없이 <면도날> 읽은 건 잘한 일이었다.

 

** 서머싯 몸의 풍부한 지성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시니컬 블랙 유머를 장착하고 싶다. 그럼 나 괴롭히는 사람에게 한방씩 툭툭 쏴줄 텐데. 그러면 직장에서 잘리고, 친구와 절교하고, 애인에게 차이고... 음 안 되겠다.

"난 단지 자기 확신이 얼마나 강력한 열정이 될 수 있는지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정욕도, 굶주림도 그 옆에서는 아주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지.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면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단정 짓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어. 그 확신의 대상은 중요하지 않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어쨌든 그것은 그 어떤 술보다도 중독성이 강하고, 그 어떤 사랑보다도 사랑을 지치게 만들고, 또 그 어떤 악덕보다도 강력하고 매혹적이야. 사람은 자신을 희생시키는 순간 하나님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가 되지. 왜냐면 전지전능한 하나님도 자신을 희생시키진 못했으니까. 기껏해야 자신의 독생자, 그러니까 예수만 희생시켰지." 3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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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미술관 - 사랑하고 싶은 그대를 위한 아주 특별한 전람회
이케가미 히데히로 지음, 김윤정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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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생각하지만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글쓰기는 어렵다. 그림은 여전히 2차원적인 평면 묘사밖에 할 줄 모르고, 미술관은 평생 몇 번 가 봤을 뿐이니 난 그야말로 '미알못'이다. 책은 재밌게 읽었으나 미알못이라 배경지식도 없고 작가의 안목을 평할 계제도 되지 않아 서평 쓰기 망설여진다. 그냥 맛집 평가하는 기분으로 가볍게만 쓰고 넘어가자.

 

책은 서양 미술사 전공한 양반이 사랑의 테마를 설정하고 그에 해당하는 작품을 골라 썰을 편하게 풀어놓은 것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시대 순으로 작품을 늘어놓았다면 참 고루했을 텐데, 테마별로 묶어서 시대와 상관없이 상황에 맞는 여러 작품을 끌어다 해설하는 구성이 좋았다.

 

요즘 (후근대 또는 현대가 되나?) 미술의 대세인지는 모르겠지만, 현대에 등장한 추상적/전위적인 미술 자체에서 서사를 찾긴 어렵다고 느낀다. 그에 반해 책에 소개된 근대까지의 미술 작품을 보니 미적 성취와 별개로 은유와 서사가 성실히 기록된 느낌이다. 그러니까, 순간을 그린 그림 한 장에도 그리스 신화나 당대의 종교/윤리관이 적극 반영된 것. 그러므로 그림의 감상에도 그런 배경 지식이 필요하고, 풍부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그림을 시대별로 들여다보면 당시의 사랑/연애/결혼 풍토를 짐작할 수 있겠다. 물론 우리에게 그런 소양은 없으니 그림 읽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책 읽고 나면 두어 시간 정도 똑똑한 가이드와 함께 사랑의 미술관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온 듯한 기분이 든다. 맹목의 큐피드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약간 꺼드럭 거릴 수 있을 것도 같고, 교양이 풍부해진 것 같은 근거 없는 충만감도 들고 ㅎㅎ.

 

그럼 미술이 반영한 시대의 사랑은 대체 무어냐고? 1세기경 폼페이 벽화의 여성 상위 자세로 교합하는 남녀 그림이라든지, 아내와 바람난 동생을 죽이려는 형의 그림이라든지, 또는 몰래 하는 키스나 멍하고 물에 들어가 있는 오필리아의 얼굴 같은 걸 보면 뻔하지 않나. 그러니까 김연수 말을 빌리면 '사랑은 제각각이지만 증오는 하나'인데, 그 제각각인 사랑의 모습조차 하나하나 이미 전부 과거에 존재했었다는 말. 늘 그렇듯 현재는 과거의 반복이고 사랑도 예외가 아님을 확인하는 독서였다,라고 말하면 사랑 쥐뿔도 모르는 놈이 건방 떠는 것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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