믜리도 괴리도 업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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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맑고 차가워지는 1월은 훈련하기 좋은 날이다. 또 이틀을 야외에서 잤다. 밝은 달이 별빛을 가리고 벌레 소리 대신 은은한 대남방송이 공기를 채운다. 구호소 텐트에 등유 난로를 피웠으니 다른 병과가 보면 글램핑이었겠다. 텐트 안이 나름 안락했으므로 그동안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었다. "믜리도 괴리도 없시"는 청산별곡 가사의 한 구절인데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6차 교육과정 끝물이었던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 교과서에서 청산별곡을 읽었다. 그러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저런 구절이 있었던가...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라는 중독성 강한 훅만 기억난다. 한민족은 오래전부터 후크송을 좋아했던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한다.


<블랙박스>의 블랙박스 판매원 박세권은 소설가 박세권에게 "어떻게 그렇게 남의 인생을 잘 아세요?"라고 묻는가 하면 단편 소설을 두곤 "조그만 게 엄청 복잡하고 좀 가지고 놀려고 하면 금방 부서지는 장난감 같"다고 말한다. 좀 더 지나선 "문학이 별거예요?"라고 묻다가 "야, 씨발아"까지 나아간다. 그가 정색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폭발한다. 맞다. 별것도 아닌 소설은 얼마나 연약한가.


작고한 문학 평론가 김현 선생은 책읽기의 괴로움에 대해 말했다. 책 속엔 삶의 원형이 있고, 그것은 "이 세계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으며, 우리는 왜 불행한가 하는 것을 반성케 하는 표지들"이라는 말이다. 또한 이런 책읽기는 "자기가 책을 통해 불행이나 결핍이 되어, 충족이나 행복을 싸워 얻게 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에 맞춰보기엔 성석제의 소설은 어딘가 기이한 면이 있다. 소설 속 삶의 원형들은 어딘가 부당하고 슬픈 것에 가까우며, 더욱이 작가의 글솜씨가 그것들을 별로 괴롭지 않게 읽어내려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책 속 그들보단 지금 여기 우리가 행복하다.


다만 책을 덮고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발 디딘 곳 밖으로 나가면 말도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라고. 단지 그것들을 보지 못하고 살았던 것 아닐까. '말도 안 된다'는 말은 물리적으로 구현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논리적/윤리적으로 부당하다는 뜻이다. 소설은 현실적인 비현실인데 요즘 세상은 점점 비현실적인 현실로만 보인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소설적인 세계를 살고 있다. 청산별곡 "믜리도 괴리도 업시" 구절의 앞뒤를 붙여서 해석해보면 이렇다. "어디다 던지는 돌인가, 누구를 맞히려던 돌인가.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맞아서 울고 있노라."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르는 돌 맞아서 울고 있는 사람이 많이 보인다. 그들을 달랠 수 있다면 아니, 그들의 존재라도 인식시켜준다면 별거 아닌 이야기라도 괜찮지 않겠는가. 김현 선생은 <책읽기의 괴로움> 마지막 문장에서 "나는 내 자신이 불행이고 결핍이다."라고 말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대가 바뀌었으므로 조금 더 나아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시대의 책 읽는 사람에겐 문장의 주어는 '나'에서 '우리'로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의 부당함은 지속되고 그것에 대한 탐구는 끝나지 않았으므로(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여전히 "별거" 아닌 소설을 읽는다. 새해엔 믜리도 괴리도 업시 우리 모두 함께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너 톨스토이가 무조건 싫다고 했지? 왜? 그 사람은 지난 세기 사람이야. 지금 톨스토이가 무덤에서 걸어나와서 <안나 카레리나>를 아무리 기가 막히게 잘 써낸다 해도 복잡한 현대인들의 여러 가지 심리를 다양한 각도에서 정교하게 묘사하는 건 불가능해. 말발이 안 먹힐 것 같으니까 도덕이나 인간의 도리 같은 걸로 독자를 찍어누르는 거지.그런 소설보다는 차라리 요새 나오는 신자본주의나 신경과학, 소비심리학 책을 참고하는 게 나아. 그쪽 저자들의 시각이 톨스토이보다 훨씬 다각적으로 예리하게 세상을, 사람들의 속셈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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