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퇴장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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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퇴장이라니. 제목만 봐도 뒷방 늙은이가 쓸쓸하게 사라지는 이야기일 것 같다. 그게 필립 로스가 만날 하는 이야기니까. 그러나 필립 로스를 노년의 쇠락을 생생하게 그리는 작가 정도로만 이해해선 곤란하다. 육체와 정신은 좌절스럽게 쇠락하는데 어째서 욕망만은 쇠락하지 않는지, 살아남은 욕망이 어떻게 인간을 무너뜨리는지를 고찰하는 지점에 필립 로스 소설의 진가가 있다.


일흔한 살 유명 작가 클리먼은 요실금 치료를 위해 뉴욕에 돌아온다. 우연히 서른 살 제이미를 만나고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다. 소변 조절은커녕 발기도 안 되는데 사랑이라니, 이것 참 고약하다. 클리먼은 욕망을 모른 척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한다. 되든 안 되든 고,라고 하면 될까. 그는 생각한다. 이건 '그쪽으로 가면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통을 향해 가는 여정(60)'이라고. 이건 '정신 나간 열망(75)'이자 '욕망이라는 유령(92)'이라고. 그러나 승산 없음을 알면서 기꺼이 부딪혀 스러지는 게 인간이다.


차라리 사랑에서만 패배해 물러나는 유령이었으면 좋았을걸. 작가는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진다. 그가 평생을 매진한 문학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젊은 작가 클리먼은 주커먼의 정신적 스승 로노프의 전기를 작성하기 위해 주커먼에게 접근한다. 클리먼은 로노프가 젊었을 때 이복 누나와 근친상간했을 거라 추측하고 주커먼에게 증언을 요구한다. 그는 말한다. "이건 소설을 가장한 고통스러운 고백입니다."


주커먼에게 이건 몹시 부당한 요구다. 작가로서의 명성을 되찾아주기 위해 로노프의 인간성을 망쳐놓는 건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에겐 인간성의 보존이 문학 이전의 최소한의 윤리다. 


주커먼은 육체의 한계만큼이나 문학의 한계를 잘 안다. 그는 언젠가 생각한다. "우리에게 유일한 진통제는 감정을 극적으로 꾸미는 것"이라고. 반면 문학의 한계를 모르는 정력적인 클리먼은 주커먼에게 "선생님은 어쩌다 겁먹으신 거죠?"라고 일갈한다. 클리먼이 말하는 진실을 위한 탈윤리의 문학이느냐, 주커먼이 말하는 인간성을 보존하기 위한 윤리의 문학이느냐. 독자는 무엇이 옳은지 정확하게 알 순 없다. 상황마다 다를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 싸움의 승패는 저마다의 윤리적 당위성에 달려있지 않다. 그저 주커먼과 에이미(로노프의 애인)가 늙고 병들었기 때문에 패배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켜온 '문학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걸 목격하고 있는 유령(245)'이다.


나이 들어도 무모한 순간은 존재한다. 이것이 변함없는 필립 로스의 전언이다. 하지만 유령의 퇴장은 서글프다. 우리도 언젠가는 소거되지 않는 욕망에 고통받을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린 단지 '아직은 아닌 자들'일 뿐 아닌가. 독자의 서글픔이야 어찌 됐든 주커먼은 소설을 통해 못 이룬 욕망을 밀고 나간다. 모든 패배 후 마지막 순간 그의 문학은 개인의 구원을 위한 지극히 작은 것으로 졸아든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그녀는 오고 있는 중이고 그는 떠난다. 영영 가버린다." 주커먼은 구원받았을까.

그토록 의기양양해하다니 우스꽝스러운 짓이었다. 아마도 의사가 약속한 변화보다는, 은둔이라는 규율 그리고 인생에서 나와 내 일 사이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잘라내기로 한 결정의 대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의식조차 못하고 있었던 그 대가 말이다(자발적인 망각이야말로 규율의 으뜸가는 요소 아닌가). 시골에는 내 희망을 자극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난 내 희망과 화해했었다. 하지만 뉴욕으로 오자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뉴욕은 사람들에게 늘 저지르는 그 짓을 내게도 저질렀다. 가능성을 일깨워놓은 것이다. 희망이 터져나왔다. 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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