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00페이지 넘는 소설이 술술 읽힌다. 순전 게을러서 읽는데 일주일 걸렸다. 집중해서 읽었으면 이틀이면 읽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사주신 세계 문학 전집에 <달과 6펜스>가 있었는데, 당연하게 읽지 않았다. 보통 고전은 재미없으니까. 지금은 내용도 잘 기억 안 나는 <적과 흑>, <좁은 문> 같은 소설에 시달린 중딩의 결론이었다. 중딩 인생 곱하기 2를 살아낸 지금에야 서머싯 몸을 읽었는데 이거 웬걸, 파리에 살지도 않고 1930년대에 살지도 않는 내가 읽어도 아주 재밌다. 어서 <달과 6펜스>도 읽어봐야겠다. 서평 끝.

 

은 농담이고, 쓰긴 써야지. 허나 이런 개인의 장대한 인생사들에 달리 내가 덧붙일 말이 있을까 싶다. 강제로 부여된 유예기간이 끝나가는 요즘, 생활과 습관 거기에다 취미까지도 모두 실용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조바심이 드는 바람에 소설 읽기를 조금 멀리했다. 곧 생활이 전쟁이 될 것 같은데 소설이나 읽고 앉아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러나 습관처럼 소설책을 펴고, 가상의 삶들을 읽고 상상하고 말았다.

 

소설에선 서머싯 몸이 작가로서의 자신 그대로 등장해 래리라는 청년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017년에 내 주변 누군가가 진정한 나를 찾겠다고 인도에 가겠다고 하면 그거 이십 년 전에나 힙했지 요즘은 아니야, 뭐 가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부디 장티푸스 조심하길,이라는 식으로 대답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소설 배경은 일세기 전이라 젊은 청년이 가진 것 다 버리고 인도로 떠나는 모습이 뜨악하면서도 멋져 보인다.

 

서머싯 몸이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으로 인도의 정신문화가 최고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설엔 래리의 삶 말고도 다른 삶들이 비중 있게 제시되기 때문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소설 내 최고 속물 엘리엇 조차도 미워할 수 없게 된다. 그 자신이 믿는 삶의 가치를 충실하게 지키며 베풀 줄 아는 인간이었으므로. 이렇게 생각하면 래리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 모든 삶엔 고통이 있고, 그것을 각자 방식으로 극복하는 그 자체에 삶의 의미가 있다는 의미로 소설을 읽고 싶다.

 

비단 소설이 아니더라도 살며 여러 삶을 간접적으로 접한다. 선과 악, 옳은 삶과 옳지 않은 삶, 잘 살아낸 삶과 잘못 살아낸 삶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을까? 난 구분할 능력도 없거니와 함부로 평가할 자격도 없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질문은 항상 나를 향해야 한다. 너는 어디쯤이느냐,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래리 쪽에 가까울까 엘리엇 쪽에 가까울까. 물론 엘리엇 쪽에 훨씬 가깝다. 래리처럼 살 자신도 없고. 일단 지금 여기 생활을 제대로 하자, 고 생각하고 만다.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대답은 여전히 못할 것이다. 말보단 삶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이러나저러나 모든 질문과 답에 상관없이 <면도날> 읽은 건 잘한 일이었다.

 

** 서머싯 몸의 풍부한 지성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시니컬 블랙 유머를 장착하고 싶다. 그럼 나 괴롭히는 사람에게 한방씩 툭툭 쏴줄 텐데. 그러면 직장에서 잘리고, 친구와 절교하고, 애인에게 차이고... 음 안 되겠다.

"난 단지 자기 확신이 얼마나 강력한 열정이 될 수 있는지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정욕도, 굶주림도 그 옆에서는 아주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지.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면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단정 짓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어. 그 확신의 대상은 중요하지 않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어쨌든 그것은 그 어떤 술보다도 중독성이 강하고, 그 어떤 사랑보다도 사랑을 지치게 만들고, 또 그 어떤 악덕보다도 강력하고 매혹적이야. 사람은 자신을 희생시키는 순간 하나님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가 되지. 왜냐면 전지전능한 하나님도 자신을 희생시키진 못했으니까. 기껏해야 자신의 독생자, 그러니까 예수만 희생시켰지." 348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