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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치버의 일기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평점 :
이 책을 누구에게 추천할 수 있을까. 소설을 쓰는 사람, 평생 한 가지의 일을 하기로 마음 먹은 사람, 자기 자신이 부끄럽지 않지만 성지향성을 밝히고 싶지는 않다는 성소수자. 나는 내가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는 존 치버가 수백 페이지에 걸쳐 쓴 기록에 여전히 영향을 받는다. 1910년대에 태어나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고 에이즈가 창궐하기 직전인 1980년대 초반에 세상을 떠난 소설가. 존 치버는 평생 우울증과 애정 결핍, 자기 혐오, 알코올중독에 시달렸다. 중년에 메리와 결혼을 해서 세 아이를 낳고 가족을 숭배하다시피 하면서도 수많은 남녀를 만났다. 언젠가는 죄책감에 키스만 나누고, 언제는 섹스도 하고, 언제는 눈만 맞추고 돌아섰다. 그가 쓴 일기의 20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존 치버의 일기'는 무려 900페이지가 넘는데 나는 그 방대한 양에 걸맞게 내 감정과 그를 보는 시선이 점차 변해가는 걸 느꼈다. 초반에는 부인 메리 치버의 우울증을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 같아 그에게 분노와 연민을 느꼈고 중반부에서부터는 가족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후반부에서는 그가 장성한 자식들과 이별하고, 익명의 알코올중독 모임에 계속해서 참석하고, 매일 같이 자신을 위해 가정을 지켜준 메리에게 감사를 표하는 모습을 보면서 존 치버라는 사람의 고독을 느꼈다.
존 치버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을 꾸리고 싶어 했다. 그 자신과 부인, 자식들로 이루어진. 비록 메리와 매일 같이 싸우고, 행복한 날에 비해 실망스러운 날을 터무니 없이 많이 보낸 것 같지만 그는 가족에게 숭고한 의미를 부여하고, 놀라울 만큼 집요하게 그들의 사랑을 갈구하고, 애정 어린 눈길로 지켜봤다. 하지만 늘 상처를 받았고,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언덕에서 썰매를 타고 수도 없이 미끄러지고, 브로콜리를 가지런히 심고, 어쩔 수가 없다면서 술을 마셔댔다. 단지 가족에게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해내지는 않았을 테다. 그는 가족을 통해 가족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상처를 상기하곤 했다. 그는 부인 메리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극심히 우울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그녀를 비롯한 다른 사람에게서 애정을 바란 것에 반해 메리는 그런 그를 내치고,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우울증을 달래고자 했다. 그는 오래도록 메리에게서 상처투성이의 말을 들었다. 아픈 사람이 하는 말에 상처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면서도 어김없이 대꾸했다. 그는 왜 그렇게 마음이 상하고, 자신이 한 말과 행동에 후회를 하면서도 메리와 끝내 헤어지지 않았을까. 죽는 날까지 지칠 줄도 모르고 가족을 사랑했을까. 시간이 흘러 그는 바뀌었다. 예전처럼 성지향성 때문에 자신을 혐오하거나 연민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연인 M을 만났다. 메리의 퉁명스러운 말에도 귀를 기울였고, 자식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M과의 우정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함께 길을 가며 서로를 도와주는 여행자 같은 사이라고 흔쾌히 말하겠다. 정착된 삶이 아니라 여행 말이다. 여행 중에 그는 내가 처해 있는 악조건을 바로잡거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준다."
말년의 존 치버는 암에 시달렸다. 죽어가는 자신에게 다가왔다가 멀어져가는 가족과 연인 M을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모습에 여느 때보다 마음이 넓어졌다. 그는 글을 쓰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었고,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잃었지만 사랑으로 충만했다. 장남 벤저민 치버는 서문에 썼다. 아버지의 일기를 출간하기까지 어머니 메리에게는 시간이, 다른 가족에게는 용기가 필요했다고. 그들은 일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일단 그들 자신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벤저민은 어렸을 때는 존 치버의 일기장에 손도 못 댔지만 그 수많은 노트를 출간해달라는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줬다. 존 치버는 언제나 자신의 모든 글을 출간하고 싶어 했다면서. 나는 일기마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던 한 소설가를 생각한다. 그는 아픈 몸으로 도서관 사서들에게 일기장을 보내고 평가를 기다렸다. 아들에게는 반드시 자신이 죽고 나서 일기를 출간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살아 남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을 하나의 이야기로 읽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는 존 치버의 기록을 읽고 정리해서 믿음직한 편집인에게 일을 맡긴 그의 가족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존 치버의 일기'에 자신들과 존 치버의 치부보다는 생을 위한 '망설임'과 '용기'가 담겨 있다고 여겼다. 그가 일기를 쓰면서 느꼈던 것을, 그들은 그의 일기를 세상에 보이면서 느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