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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세월’을 봤다. 기억에 남은 것은 다른 유족들이 영하의 날씨에 바깥에서 잠에 들려 할 때 그 순간에도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문종택 씨에게 밤인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기록하는 자와 기록되는 자 사이의 애틋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비명들, 삭발한 머리를 땅에 찧으며 몸부림을 치는 유족을 말리는 유족들, 서로의 상처를 덧나지 않게 하려고 조심스럽게 유족을 대했다는 유족의 말씀, 문재인 정권에 기대를 걸었다가 배신당한 순간, 참사로 인해 세상을 뜬 학생들의 생의 흔적이 종이 상자에 담겨 교실을 떠나는 모습.
나는 세월호 유족들이 더 이상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이 유족임을 감추지 않고 떳떳하게 드러내도 그 누구도 ‘지겹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 사회가 도래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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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쉘'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두 개의 뜻이 나온다. 하나는 폭탄선언, 혹은 몹시 충격적인 일, 다른 하나는 아주 섹시한 금발 미녀. 영화 '밤쉘'은 후자보다는 전자의 뜻을 의미한다. 충격적인 일은 첫 장면에서부터 벌어진다. 까만 배경에 '가만히 서서 멍하니 있으면 어떤 여성도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라는 헤디 라마의 명언이 떴다 사리지고, '지그펠드 걸'의 한 장면이 나온다. 헤디는 꿈속을 헤매는 듯한 멍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그녀의 얼굴은 수많은 별 모양 액세서리에 둘러싸여 있다. 머리띠에는 별 모양 막대사탕 같은 것이 잔뜩 꽂혀 있고, 양쪽 어깨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여러 갈래의 장식은 탄력이 좋아 그녀가 걸음을 뗄 때마다 흔들린다. 누군가의 환상을 깨부수는 그녀의 말은 자신이 질리도록 연기했던 수많은 여성 인물을 지시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멍하고 아름다운 인물인 지그펠드 걸은 헤디 라마를 가리킨다. '지그펠드 걸'에서 헤디가 연기한 인물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기획자인 플로렌즈 지그펠드의 눈에 띄기 위해 '매력적인 여성'을 연기한다. 첫 장면은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배우로 평가되는 헤디 라마를 우리가 잘못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무지한 우리가 머지않아 충격에 휩싸이리라는 걸 암시한다.

세상에 타고난 이야기꾼과 재밌는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세상에 막대한 공헌을 한 인물의 내밀한 이야기가 담긴 테이프가 쓰레기통 뒤편에 놓여 있다가 사라질 뻔했다는 사실은 듣는 이의 머릿속을 한동안 마비시킨다. 테이프가 재생되면 헤디 라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명랑한 은둔자. 순간 떠오르는 헤디 라마의 모습이다. 그녀는 말한다. “어머니는 제가 아들이기를 바라셨죠.” 이야기는 그녀의 어린 시절로 향한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의 오스트리아로. 유복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네 살 때부터 사물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다. 처음으로 분해하고 재조립했던 물건은 오르골이다. 오르골은 그녀가 없는 현재, 노인이 된 아들의 손바닥 위에서 여전히 작동된다. 전쟁을 피해 영국으로, 영국에서 할리우드로 항해를 하는 중에도 오르골은 짐 속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감상적인 노랫소리가 그치면 똑똑하고 아름다운 헤디 라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은 그녀는 미모를 이용한다. 사람들이 대화를 하는 중에 등장하고, 소리가 일제히 잦아들고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는 걸 즐긴다. 그녀는 당연히 영화배우가 된다. 영화는 ‘알고 있음’에서 비롯된 극적인 효과를 원하니까.

알고 있기 때문에 불행해진다. 데뷔작 ‘엑스터시’에서 헤디 라마는 노출을 감행하고 유럽의 스타가 된다. 하지만 이때 생겨난 파격적인 이미지는 그녀가 활동을 하는 내내 걸림돌이 된다. 그녀가 아무리 우아하고, 자신감이 넘치고, 연기를 잘해도 누군가는 헤디 라마를 믿지 않는다. 여성을 ‘성녀’ 아니면 ‘창녀’라고밖에 여길 줄 모르는 그들은 헤디 라마가 아닌 모습을 경멸하는 동시에 사랑한다. 남편들도, 할리우드 최대의 영화사 MGM의 루이스 메이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오직 헤디 라마의 이미지를 탐한다. 캐서린 헵번, 루실 볼 등과 함께 MGM의 대스타였던 그녀는 루이스 메이어가 제안하는 배역을 거부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알제’, ‘삼손과 데릴라’의 주역을 차지한다. 한 해에 서너 작품에 출연하고 밤늦도록 촬영을 하고 나서도 집으로 돌아가면 쓰러지지 않는다. 헤디 라마는 어머니가 오스트리아에서 미국까지 무사히 항해하길 바라는 마음, 유엔군이 나치를 이기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세상에 진정한 자신을 보여주고 싶다는 야망으로 어뢰를 제어하는 보안 무선 통신 기술을 개발한다. 그녀가 리모컨의 초기 모델인 매직 박스를 보고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는 건 그저 놀라운 일이다. 오르골을 신기해했던 것처럼 매직 박스를 이리저리 뜯어보다 그녀는 문득 세상을 구할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그녀는 특허를 받는다. 하지만 기술은 쓰이지 않는다.

헤디 라마는 해군에게서 전시 채권이나 팔라는 말을 듣고 정말로 전시 채권을 판다.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유엔군의 사기를 돋우는 영화에도 출연한다. 그녀는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감추고 온몸으로 미국을 사랑한다. 하지만 제2의 조국은 전시 채권 수익을 챙기고 그녀가 특허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그녀가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그때부터 헤디 라마는 상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색다른 여성의 이야기를 만들자는 취지로 제작에 뛰어들지만 영화를 완성했음에도 배급사를 찾지 못한다. 삼손과 데릴라의 출연료까지 전부 잃어버린 그녀는 텍사스의 석유 재벌을 만난다. 칠 년의 결혼 생활 끝에 알코올중독자인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위자료로 요구한 건 딱 하나다. 오스트리아의 집을 본뜬 별장. 그녀는 원하는 걸 얻지 못한다. 홀로 육아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지우기 힘든 사랑과 상처를 준다. 향수병, 아버지처럼 자신의 진가를 알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영화사의 추천으로 촬영 내내 복용했던 마약의 후유증, 한때 가장 아름다웠던 배우를 향해 쏟아지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라는 말. 헤디 라마는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은둔자로 살아간다. 그러다 말년의 어느 날 특허권이 만료되기 전부터 정부가 자신의 기술을 써왔다는 것을 알아챈다. 하지만 그녀는 정부에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다.

수십 년이 지나 헤디 라마는 상을 받는다. 과학 기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녀의 공로를 기린다는 것이다. 헤디의 아들은 어머니를 대신해 무대에 오른다. 수상 소감을 말하려는 순간 전화를 받는다. 전화 말미에 그녀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린다. “사랑한다!” 장내는 웃음소리로 떠들썩해진다. 아마도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도입부에 나왔던 지그펠드 걸의 한 장면이 다시 나온다. 테이프에서는 헤디 라마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아름다운 글귀를 읽어드릴게요. 사람들은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에요. 그래도 그들을 사랑하세요. 당신이 잘하면 사람들은 이기적인 동기가 있을 거라고 매도할 거예요. 그래도 잘하세요. 가장 큰 생각을 가진 위인이 한없이 알량한 마음을 가진 소인배한테 무너질 수도 있어요. 그래도 크게 생각하세요. 오랜 세월 쌓아온 것들이 하룻밤 새에 무너질 수도 있어요. 그래도 쌓으세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세요. 그러다 궁지에 몰릴 수도 있어요. 그래도 최선을 다하세요.” 그녀가 말하는 도중 지그펠드 걸의 별 모양 머리 장식이 반짝인다. 그게 처음과 다른 점이다. 헤디 라마는 아름답고, 그녀의 머릿속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가득하다. 헤디 라마의 기술은 우주 산업, 위성 통신, 안보, 휴대폰, GPS 등에 널리 쓰이며 인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영화가 끝나고 휴대폰을 켜는 당신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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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도 냉소할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은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런 기억을 돌이킨다. 어떠한 충동에도 숨을 멈추지 않고 과거를 인내한다. 그러기까지 실패를 거듭했을 수도, 어쩌면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는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을 침착하게 해낸다. 한결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사건들 사이에 있었을 때처럼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면서, 그때와는 달리 영향력을 미친다.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줬던 사람들의 힘이나 사건들의 충격이 아닌, 정서에 초점을 맞춘다. 극적으로 기억의 장면을 넘기지 않는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찬찬히 읽는 듯 감정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온정적이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도 동정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지만 여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떠오른 기억 속에서 그들은 비로소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저마다의 복잡한 감정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다. 이야기를 품고 있다 병에 걸린 것 같다. 무력하고 어둡다. 모두의 고통 속에서 그는 조숙하다. 조숙한 아이의 호흡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늘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본다.

은희는 왜 하염없이 문을 두들길까. 왜 하필이면 아무 상관도 없는 문 앞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걸까.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잘못됐을지 모른다. 은희가 버튼을 잘못 눌렀거나 누군가가 은희가 무심코 내린 층에서 버튼을 눌러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은희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기 전부터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의식에 자리하고 있던 것이 눈앞에 나타난 순간 기억은 악몽으로 바뀐다. 비록 착각일지라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결코 꾸지 않았을 악몽 속에서 수도 없이 울부짖었던 걸 생각하면 안심이 될 리가 없다. 은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윗집으로 향한다. 벨을 누르고 기다린다.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엄마를 재촉하지 않는다. 말없이 대파가 든 봉지를 내민다. 그새 두려움을 몸속 깊숙이에 주워 담은 것 같다. 은희의 얼굴에는 엄마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불안감만 남아 있다. 은희의 표정으로, 은희의 감각으로 은희가 두려움을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 있다. 두려움은 은희를 관통하지 않고 작은 원을 그리며 맴돌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힐 만한 것은 아니지만 말하기에는 뭐한 것이다.

악몽 같은 기억에도 서사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상을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나 일상을 지속할 수 없을 때를 빼고는 악몽은 일상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평범하다 해도 악몽은 추억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떠오르곤 한다. 하룻밤의 꿈으로 끝이 나지 않기도 한다. 악몽은 어느 날을 향해 치닫는 일상을 보여준다. 악몽의 협소한 서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자꾸만 허무한 느낌을 준다. 삶이 기억의 연장처럼 느껴지게 한다. 은희가 자신의 기억을 그저 들여다보기로 결심한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은희는 자신의 감정을 따라가며 기억의 서사를 맞춘다. 학교에서는 그림을 그리며 부끄러움을 견디고, 학교가 파하면 남자 친구나 단짝 친구인 지숙이를 만나고, 안정을 찾은 뒤에는 집으로 향한다.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의 고독을, 가족과 있을 때는 가족의 고독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은희는 사건에서 악몽의 계기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은희의 감정은 익숙한 전개 방식에서 벗어나 끝없이 흐른다.

잘 짜여진 기억은 거짓될까. 은희의 기억에는 거침이 없다. 장면이 말 그대로 '마음대로' 전환되어 장면과 장면 사이에 의심이 파고들 여지가 없다. 만약 은희의 이야기가 산란된 기억에서 비롯되었더라면 은희는 고양된 마음이 가라앉는 장면을 떠올리지 못하거나 떠올렸더라도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은희의 이야기는 기억 조각의 모음일 뿐 이야기의 꼴을 갖추지는 못했을 것이다. 은희가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자신을 속일 생각이 있었다면 구태여 고통스러운 기억을 돌이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과는 상관없이 잘 짜여진 이야기를 통해 기억의 진위를 따지는 건 불가능하다. 이야기의 초반부에서 은희는 갑자기 귀 밑을 만진다. 혹이 만져지지만 은희는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 미심쩍은 표정은 점점 멍해진다. 아마도 이물감이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걸, 말로 하기에는 뭐한 불안감에 관하여 머지않아 말해야만 한다는 걸,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직감한 것 같다. 은희는 진실을 말하기를 망설인다. 진실을 말하면 진실에서 해방될지도 모른다며.

마음은 무엇 하나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마저 주저한다. 은희는 대치동에서 홀로 버스를 타고 성수대교를 건너 행당동에 있는 병원에 간다. 무슨 생각에 잠겨 차창을 보는 것일지 짐작할 수 없다.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다. 호명이 되기를 기다리는 은희는 조금은 심란해 보인다. 의사에게서 모르겠다는 말을 들으면 어쩌나 상상한 모양이다. 은희는 결국 혹의 정체를 모른 채 돌아간다. 하지만 얼마 뒤 조직검사를 받기 위해 또 혼자서 병원에 간다.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말에 의사를 재촉한다. 부모님이 바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마음이 급하기 때문일 테다. 아무런 진전도 없이 같은 길을 오가면서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경험을 더는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은희는 조직검사의 결과를 확인하러 병원을 다시 방문한다. 큰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으라는 말에 왜 그래야 하는지 묻는다. 낙담한 것 같지는 않다. 집에 가는 길에 엄마를 보고는 너무도 반가워한다. 엄마를 수없이 부른다. 은희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엄마에게 실망한다. 병이 도진듯 고통스러워한다.

마음 밖에 마음이 있다. 마음을 열면 고통스러워하는 타인이 보인다. 은희가 혹의 정체를 향해서 한 발짝 다가서자마자 엄마의 고독을 마주한 건 우연이 아니다. 마음을 열길 주저하는 마음 속에는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엄마의 고독 앞에서 은희의 얼굴과 음성은 점점 거칠어진다. 자신이 버려졌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아이 같다. 은희는 아랫집 문을 두들겼을 때처럼 돌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엄마의 고독에 빈틈이 없을 것이라는. 하지만 이번에 든 예감은 확신에 가깝다. '저' 사람은 틀림없는 '엄마'이기 때문이다. 은희는 숨소리를 죽인다. 엄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엄마는 하늘인지, 나무인지, 뭔가를 올려다보고 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다. 경이감 혹은 좌절감을 느끼는 것 같다. 다음 장면에서 은희는 안방에 누워 있는 엄마를 본다. 엄마는 밖에서보다 힘이 없어 보인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 버렸는지 은희가 의사의 말을 전해도 몸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다.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걱정 어린 말을 한다. 그때 은희는 엄마의 고독을 우두커니 내려다본다.

고독은 비밀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만연하다. 그러나 일단 마주하면 봐서는 안 될 것을 봤다는 느낌이 든다. 그 앞을 무심코 지나치기는 어렵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척을 하거나 더 나아가 없는 척을 할 수밖에 없다. 고독이 시선을 느끼지 못하도록. 고독을 목격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으로부터 고독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은희가 엄마를 부르면서도 좀처럼 엄마에게 다가서지 않는 건 은희가 엄마의 고독을 깨뜨리고 싶다는 충동보다 이런 의무감에 더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자신의 감정보다 타인의 고독에 경도된 은희는 변화를 겪고 있는 걸까. 고독을 사유하고 있는 걸까. 은희가 변화를 겪고 있는지 충격에 휩싸여 있는지는 은희의 표정이나 숨소리로는 알 수 없다. 한사코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은희는 엄마보다 먼저 사라진 것 같다. 엄마의 모습을 담을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해놓고 자리를 뜬 것 같다. 그곳에 없는 척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없는 것 같다. 비약적인 변화가 느껴진다. 은희는 고독에 경도되었으나 잠식되지는 않은 것이다.

고독은 비밀이 아니다. 밝힐 수 있는 것,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고독은 빛을 필요로 한다. 어디에도 빈틈이 없는 것 같지만 고독에 빛을 비추면 어딘가로 빛이 든다. 참을 수 없이 우울한 날 은희는 영지 선생님을 만나러 한문 학원에 간다. 그런데 교실 문을 열기 전에 잠깐 뜸을 들인다. 혼자 교실에 남아 고독을 견디고 있을 영지 선생님을 상상한다. 상상으로나마 영지 선생님을 헤아리는 것이다. 고독이 비밀이라면 이런 상상은 실례가 될 테지만 은희는 거리끼지 않고 영지 선생님을 비춘다. 그날 밤 영지 선생님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은희는 벅찬 듯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인다. 곧 수술을 받기 때문일까.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은희는 다시 한문 학원에 간다. 빛이 드는 층계참에서 영지 선생님과 작별 인사를 나눈다. 돌아서자마자 영지 선생님을 불러 세우고 선생님의 품으로 뛰어든다. 그 순간 은희는 선생님이 너무 좋다는 말을 하고, 영지 선생님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은희를 안아준다. 창밖으로 흔들리는 나뭇잎이 보이고, 장면은 눈이 부실 만큼 하얘진다. 빛은 다음 장면까지 퍼져 수술을 마친 은희를 비춘다.

은희는 이제 맞지 않는다. 맞서서 싸울 줄 안다. 기억 속 사람들을 이해한다. 그들의 고독에 상처받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지 못한 것에 더 이상은 외로워하지도, 분노하지도, 안타까워하지도 않는다. 은희는 기억을 돌이켜 그들에게 삶을 준다. 1994년 10월 21일이라는 시점을 향해 치닫는 삶, 특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희극과 비극으로 양분되는 삶이 아닌, 끝을 알 수 없는 삶을. 은희는 10월 21일 밤을 기억한다. 언니는 장면 한편에서 유령처럼 나타나서는 가족이 모여 있는 식탁 앞에 앉는다. 그의 뒷모습은 평소처럼 크고 새까맣다. 아빠가 그의 삶을 알리자 오빠가 그의 곁에서 울기 시작한다. 은희는 오빠가 우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언니를 본다. 언니는 아무런 원한도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령 같다. 그날 새벽 은희는 거울에 비친 언니를 엿본다. 언니는 단정하지만 평소보다 어둡고 무거워 보인다. 운 좋게 살아남은 것 같지 않다. 뜻밖에 삶을 떠안게 된 것 같다. 은희는 언니가 집을 나서는 소리를 듣는다. 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소리, 기억을 빠져나가는 발걸음 소리. 은희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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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18세기 후반 여자들의 화랑에서 시작된다. 화가 마리안느는 제자들 앞에서 모델을 서다가 무언가를 보고 외친다. 누가 그림을 꺼냈냐며. 그의 목소리에는 불쾌감이 묻어 있다. 하지만 그는 그림을 꺼낸 제자를 꾸짖지 않는다. 그림의 제목을 묻는 제자에게 말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그림 속에는 불이 붙은 드레스 자락을 끌고 어딘가로 향하는 것만 같은 여자가 있다. 마리안느는 여자를 보며 오랜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마리안느는 아버지의 지인인 백작 부인으로부터 딸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외딴 섬으로 향한다. 엘로이즈는 수녀원에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언니의 죽음으로 그의 운명을 떠맡게 된 처지다. 언니가 그랬듯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한다. 마리안느의 임무는 엘로이즈의 남편이 될 밀라노의 귀족에게 보낼 초상화를 완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심히 흔들리는 배를 타고 항해를 하는 것보다 어려운 문제가 있다. 엘로이즈가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작 부인의 말에 따르면 이전에 고용되었던 화가는 엘로이즈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그리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감춘다. 엘로이즈의 '산책 친구'가 된다. 엘로이즈가 언니처럼 자살을 할까 봐 두려워하는 백작 부인의 조언에 따라 엘로이즈와 함께 산책하며 그를 감시하기로 한다. 엘로이즈를 만나기도 전에 그를 구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갖는다. 엘로이즈와의 첫 번째 만남에서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뒷모습을 마주한다. 점점 더 걸음을 서두르는 그를 불러 세우지 않는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전속력을 다해 뛰지만 그를 붙잡지 않는다. 그러기도 전에 그의 얼굴을 본다. 그는 웃고 있다. 마리안느는 그 순간 자신이 일종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가 대상의 본질에 다가서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마리안느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첫 번째 산책을 마치고 엘로이즈의 부탁을 듣는다. 책을 빌려 달라는 말에 화구 옆에 있던 짐더미에서 책 한 권을 조심스럽게 꺼내 건네준다. 얼마 뒤에는 담배를 빌려주며 말한다. 내일 혼자 외출을 할 테니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엘로이즈가 혼자가 되면 자유로워지냐고 묻자 당황한다. 그렇지 않냐며 되묻는다. 다녀와서 소감을 알려주겠다는 말에 할 말을 잃는다. 잠깐의 침묵 끝에 엘로이즈의 외출 계획을 듣는다. 음악을 들으러 성당에 갈 거라는.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관현악을 들어본 적이 있냐며 묻는다. 그게 무엇인지 가르쳐 달라는 엘로이즈의 부탁에 하프시코드 앞에 앉는다. 음악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기억을 더듬어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을 연주한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려와 만물이 시름을 겪는 여름.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곁에서 음악을 듣는다. 마리안느는 혼자만의 외출에서 돌아온 엘로이즈에게서 고백을 받는다. “당신의 부재를 느꼈어요.”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돌아보지 않는다. 마음을 돌려 사실을 말하기로 한다.

완성된 그림 앞에서 마리안느는 힐책을 받는다. 엘로이즈의 분노에 담긴 논지는 여태껏 당신에게 내가 고작 이 정도였다니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마리안느는 화가로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며 자신을 두둔하지만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그림을 망쳐버린다. 엘로이즈는 생기가 없는 얼굴이 사라진 걸 보고는 웃는다. 마리안느가 화가가 아닌 연인으로서의 선택을 한 것을 알아본 것이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기행으로 인해 황당해하는 백작 부인을 간단히 안심시킨다. 포즈를 취하겠노라고 선언한다.

백작 부인이 집을 비운 사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에게 평화가 깃든다. 그들은 하녀 소피의 낙태를 돕는다. 해변에서 소피가 그들 사이를 뛰게 하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밭에서 약초를 찾는다. 공중에 매달려 하중이 밑으로 쏠리도록 안간힘을 쓰는 소피의 곁을 지키고, 한밤에 소피를 따라 여자들만의 모임에 참석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소피가 낙태 시술자와 시술 약속을 하는 틈에 모닥불을 사이에 둔 채 서로를 마주한다. 여자들의 노래를 들으며 웃음과 정적을 나눈다. 하염없이 반복되는 라틴어 가사에 그들은 정신을 놓은 것만 같다. ‘Fugere non possum(나는 벗어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용인하는 가난한 여자들의 노래가 그들에게 깨달음을 준다.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시야 한편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곳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곧 불이 붙은 드레스 자락을 내려다본다. 마리안느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타오르는 엘로이즈를 멍하니 본다. 누군가가 뛰어와 불을 꺼주자 비로소 이성을 찾는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붙잡는다. 현실을 받아들인다.

기암 사이에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키스를 한다. 엘로이즈는 도망치듯 자리를 뜨고,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찾는다. 그런데 자신의 방 앞에서 엘로이즈의 환영과 마주친다. 환영은 아름다운 결혼식 예복을 입고 있다. 마리안느는 환영을 등지고 방으로 들어선다. 벽난로 앞에서 엘로이즈와 다시금 입을 맞춘다. 그 뒤로도 종종 환영과 맞닥뜨리지만 결코 놀라지 않는다. 환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사랑을 지속한다.

마침내 완성된 초상화 앞에서 엘로이즈는 만족한다. 하지만 그는 또 분노에 사로잡힌다. 그림을 망쳐버리고 싶다는 마리안느에게 자신을 몰아세우지 말라고 당부한다. 결혼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말릴 수는 없는 마리안느의 처지를 지적한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쫓아 바다로 내달린다. 그를 끌어안고 용서를 빈다. 곧 백작 부인이 돌아올 거라는 소식을 전한다. 엘로이즈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다시 포즈를 취하는 엘로이즈를 부른다.

기억에서 돌아온 마리안느가 말한다. “이제는 슬프지 않아.” 하지만 제자의 그림 속에서 그는 어쩐지 슬퍼 보인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꺼내 오랜 기억을 불러일으켰던 제자는 그의 실체를 가늠한다. 그에게는 떨쳐낼 수 없는 슬픔이 있다. 비록 이별 후에도 사랑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았지만, 틀림없는 사랑의 근거를 찾았지만.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순간을 기억한다. 콘서트홀에서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맞은편에 있었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이 시작되자 간신히 숨을 쉬며 울고 웃었다. 마리안느는 그런 엘로이즈를 바라봤다. 탄식도 하지 않았다. 연인이 아닌 시인으로서의 선택을 했다. 영원히 사랑을 기억하고 노래하기 위해.

감독 셀린 샴마는 연인의 슬픔에 주목한다. 그것이 어떤 슬픔인지, 어떤 이별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는 그들이 잃어버린 건 ‘평등에서 오는 평화’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들은 현실을 안다. 밖으로 나가면 평화로운 사랑을 다시는 할 수 없다. 그들 내부에 그려진 그림은 금기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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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오프닝 타이틀부터 끝까지 완성도가 높은 영화다. 알렉 기네스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도 탁월하다.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한 로렌스라는 인물의 매몰된 정신을 보여주는 연출은 경이롭다. 하지만 감독 데이비드 린은 그런 로렌스에게 틀림없이 숭고한 면이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로렌스는 영국군 장교지만 자신만의 도덕적 가치를 중동에서 추구하려 든다는 점에서 너무도 순진무구하다. 그 점이 도를 지나쳐 기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영화 속 수많은 중동 사람들이 그를 따른다. 특히 오마 샤리프가 연기한 알리는 로렌스를 사랑한다.


알리는 허구의 인물이다. 중요 인물들 중 허구의 인물은 그가 유일하다. 그는 자신의 부족을 위하기보다는 로렌스와 함께한다. 점점 잔인해지는 로렌스의 변화를 알아채고 전투에서는 그를 달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내밀하게 느껴진다.


로렌스를 향한 알리의 사랑은 정도에 맞지 않다. 그것은 중동의 정세와 영국군이 개입을 하고 있다는 현실을 초월해 조작된 것이다. 어쩌면 알리가 로렌스의 사상에 경도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알리는 마음속 깊이 로렌스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알리의 사랑에는 누구의 마음이 투영되어 있을까. 로렌스의 사상은 정황상 실현될 수 없다. 영국군 장교라는 그의 입장은 한계로 작용한다. 로렌스를 제외한 모두가 그 사실을 안다. 족장 알리도 그런 한계를 인지한다. 그럼에도 부족의 목소리보다 로렌스의 사상을 숭고하게 여기며 로렌스를 좇는다.


알리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다. 도구적으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인지, 로렌스와 이상을 함께 그렸을지도 모르는 인물인지. 하지만 알리가 어떤 사람이든 그는 신기루나 다름이 없는 로렌스의 이상에 휘말린 자다. 로렌스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더라면 알리는 상처받지 않았을 거다.


알리라는 인물은 존재 자체로 중동 사람들에게는 모욕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가 로렌스에게 마음을 내주기까지 넘어섰던 수많은 경계와 그의 눈에 비친 로렌스의 숭고한 모습을 떠올리면 말이다. 로렌스가 무시한 당사자성이 이 미적으로 우수한 영화에도 빠져 있다.


조만간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책을 읽어보려고 한다. 로렌스가 자기 자신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하다. 그토록 무모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를 알고 싶다. 책에는 당시 중동의 정세에 관해서도 상세히 나와 있다고 한다. 중동을 잘 모르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 많은 공부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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