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세 미키오의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를 봤다. 긴자의 바에서 호스테스들의 마마로 살아가는 게이코의 겨울 이야기이다. 호스테스들의 치열한 경쟁과 화려하지만 고독한 삶, 그리고 그 사이에서 빛을 발하는 게이코의 위엄 있는 매력을 볼 수 있다. 그런 게이코에게도 남몰래 싫어하는 것이 있다는 게이코의 독백은 게이코의 매력을 깨뜨리기는커녕 한없이 진솔하게 느껴지게 한다.

게이코는 남편과의 사별 뒤 집안의 모든 돈 문제를 떠맡았다. 큰 돈을 벌기 위해서 호스테스로서의 삶을 시작한 그는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매력'으로 마담의 자리까지 올라섰다. 그런 그가 역시 싫어하는 건 계단, 갈등과 상념을 오르내리게 하는 여백이다. 싫어하는 순간은 바를 향해서 계단을 오를 때이다. 바에 이르면 모든 고민을 떨쳐낼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러기까지, 아무렇지 않게 손님을 환대해야 하는 모습으로 바뀌기까지의 그 찰나가 그는 무엇보다 싫은 것이다. 그런 갈등은 그가 현실에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고, 그 혼란을 즐길 수 없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어쩌면 그가 종종 듣곤 하는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매력'이란 그 스스로가 자신을 그곳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로 느끼기 때문에 부각되는 것일 수도 있다. 겨울 동안의 병가, 사랑하는 사람과 통하자마자 찾아온 이별로 인해 그는 다시 자신의 매력을 그곳과 잘 어우러지는 것으로 만들 힘을 낸다.

짧은 숏들을 하나의 기다란 숏처럼 보이게 하는 나루세 미키오의 편집 기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표정에 표정이 눈처럼 쌓인다. 이 작품은 그 자체로 혹독하고 찬란한 눈과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게이코의 매력도 그렇고, 촬영 기술 또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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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를 봤다. 작가 하야시 후미코의 자전적 소설 ‘방랑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후미코는 행상을 하는 부모님을 따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막 어른이 되었을 무렵 부모님과 헤어져 홀로 생활한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배운 바가 많지 않아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지 못한다. 인형 공장을 다니다 카페 종업원, 호스테스 일을 해 돈을 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그는 계속해서 글을 쓴다. 시든 소설이든 동화든 동시든 가리지 않고 쓴다.

후미코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카페 종업원이나 호스테스로 일을 할 때는 자신의 손님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사람에게 버림 받으면서도 사람을 끊임없이 원한다. 그의 외로움은 사람과 직결되어 있다. 사람에게 얽매이길 바라는 욕망은 그의 단점이자 창작의 요소가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다행인 것은 그가 외로움을 달래는 것을 갈구하기도 하지만 외로움, 방랑 그 자체를 바라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는 누군가에게 집착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홀연히 떠날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그런 점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답답한 마음이 찰 때가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근심과 걱정이 말끔히 사라진 장면이 다음 차례로 나온다. 숏들은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후미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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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로 ‘보이즈 인 더 밴드’ 리메이크작을 봤다. 1968년이 배경이고 모든 인물이 퀴어다. 게이, 혹은 바이섹슈얼, 아니면 디나이얼 게이. 배역을 맡은 모든 배우들은 오픈리 게이 또는 바이섹슈얼들이다. 원작의 배우들은 대부분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했는데 리메이크작의 연출자인 존 만텔로는 그 부분을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지 않은 것 같다. 노화에 관한 강박을 갖고 있는 인물 해롤드(재커리 퀸토)가 생일을 맞이한 주인공이지만 죽음에 가까운 으스스한 캐릭터를 갖고 있는데 그를 통해서 얼마든지 운명을 달리한 이들을 암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연출을 해내지 못하고 디나이얼 게이에게만 치중한 것 같아서 그 점이 아쉽다.

희곡 작품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라 대사가 아주 많은데 짐 파슨스, 재커리 퀸토, 맷 보머, 브라이언 허치슨 등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 연기를 잘 해냈다. 하지만 이것이 ‘이 작품을 왜 하필이면 지금 리메이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관한 답이 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에이즈 합병증으로 죽음을 맞은 성소수자들을 향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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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르지 스콜리모우스키의 ‘당나귀 EO’를 봤다. 서커스단에서 연기를 하던 당나귀 EO가 동물보호단체의 시위로 서커스단에서 풀려나 소를 키우는 농가로 향하기까지의 여정이다.

EO는 여정 내내 자신에게 유일하게 진심을 담아 애정을 베풀었던 서커스단의 단원을 그리워한다. EO는 야생에 있을 때도, 도살장으로 향하는 트럭 안에서도 그의 손길과 입맞춤을 떠올린다. 하지만 서커스단이 와해되는 바람에 EO를 사랑하는 단원도 EO처럼 방랑의 길에 오를 수밖에 없다. EO가 사랑이 있는 곳에서도 안정을 누릴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그려진 EO와 단원과의 이별로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동물을 착취하는 사람의 손길을, 애정 어린 손길의 배신을 동물은 거부할 수 없다. EO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더라도 그 끝은 죽음에서 멀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알면서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EO의 여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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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콧의 ‘하우스 오브 구찌’를 봤다. 이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출세를 향한 야망이 있는 여성 패트리시아 레지오니가 구찌의 후계자가 될 마우리치오 구찌를 만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패트리시아는 구찌의 경영자가 된 마우리치오에게 여러 의견을 제시하고 적극적으로 경영에 일조하지만 끝내는 동업자로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동반자의 자리에서도 내몰린다.

이 영화의 주요한 소재는 명석하고 담대하면서도 유약한 인물인 패트리시아 레지오니의 매력이다. 시작부터 그 점이 강조된다. 누가 봐도 매력적이고 절대 구석에서 안주하지 않을 것만 같은 인물로 보이는 점. 감독은 레이디 가가라는 용의주도한 배우를 통해 그런 패트리시아 레지오니를 묘사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의 유약한 면이 그 자신의 독으로 작용하는 과정들은 코미디로 보일 정도로 허무하게 그려낸다. 잘못된 선택 또한 패트리시아가 언제나 그랬듯 열정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범죄자를 다루는 것에 어떤 도덕적 딜레마가 작용했는지 그러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패트리시어 레지오니는 멋을 잃어버렸다.

이탈리아의 패션을 이끌었던 가문의 일원들이 이탈리아어가 아닌 이탈리아식 영어를 쓰는 것이 영화를 보는 내내 거슬렸다. 특히 애덤 드라이버는 미국인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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