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임브리지 대중 음악의 이해
사이먼 프리스.윌 스트로.존 스트리트 엮음, 장호연 옮김 / 한나래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대중 음악에 대한 포괄적 이해

TV를 보면서 우리는 음악을 보기도 하고, MP3를 들고 다니면서 이어폰으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거리를 걷기도 하고, 이따금은 라디오에 나오는 선곡된 곡들을 들을 뿐더러, 인터넷의 자신의 블로그에 정체성을 드러내는 음악들을 배경음악으로 걸어놓기도 한다.

음악은 어디에도 정확한 위치를 잡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서도 우리는 음악을 배제하고서 살 수는 없다. 이런 '음악이 범람'하는 시대에 도대체 그 '음악'이란 놈은 무엇일까? 더 좁혀서 들어가보자,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하고 있는 '대중 음악'이라는 놈은 뭐하는 놈인가??

동시에 나에게 특별한 문제의식 하나더,

'사회적 저항 혹은 변화'를 추동하는 '음악'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떤 음악'의 형태인건가? 내용은 어때야 하는가??

그 때문에 이 책을 잡기 시작했다.

이 책만을 읽은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쉬이 가기 위해서 신현준의 "빽판 키드의 추억"을 읽었고, 책 장 한켠에서 쳐박혀 있던 이영미의 "서태지와 꽃다지"를 읽었고, 그 사이에 신현준의 "록 음악의 아홉가지 갈래들"도 오늘은 읽었다.

어떤 책 한권을 읽고서 그 책을 장악하고, 그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내 관점에서 소화하고 나의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말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사실 나름대로 음악 좀 안다고 까불었고,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눈도 나름대로 키우고 있었다고 생각했었으나, 이 책은 나의 자세에 일침을 가했다. 그냥 제대로 한방 먹었다.

이 책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어렵다기보다는, 차분히 공부하는 자세로 하나 하나 생각해가면서 읽고, 또 정리하고 관련된 논의들을 살펴야 하는 '교과서'로서의 책이었으나, 난 그냥 에세이 수준으로 생각하고, 주욱 읽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덕택에 일을 핑계로 진도는 점차 밀려갔다.

열흘 이상을 끙끙대고 있었고, 일독을 한 지금에도 계속해서 차근 차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주고 있다.

"케임브리지 대중 음악의 이해"는 말 그대로 포괄적인 대중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들의 종합적인 서적이다.

우리는 흔히 대중 음악에 대해서 단순히 그 장르와 상업성 정도로 포착하는 수준 정도에서 식자로서의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의 관점을 바라보자면, 그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대중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테크놀로지의 구도를 알아야하고, 대중 음악 산업의 구도를 알아야 하며, 대중의 소비 패턴이라는 것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음악 테크놀로지가 악기, 레코딩 장비, 재생 장비를 임의로 모아둔 것 이상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테크놀로지는 우리가 음악에 관해 경험하고 생각하는 환경이기도 하다. 우리가 음악적 소리를 만들고 들을 때 관여하는 실제의 집합이며, 우리의 경험을 공유하고 평가하며 그 과정에서 음악잉란 무엇인지, 또 무엇일 수 있는지 규정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담론의 한 요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의 음악 제작, 유통, 경험에 사용되는 전자 장비의 집합은 그저 우리가 그것을 통해 음악을 경험하는 기술적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테크놀로지는 음악 생산과 소비의 '양태'가 되었다. 다시 말해, 테크놀로지는 음악 만들기의 전제 조건이자, 음악적 소리와 스타일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음악 변화의 촉매가 된 것이다."(pp.33~34)

일전에 이영미의 "서태지와 꽃다지"의 입장에 대해서 이 책의 입장으로 비판하자면, 이영미는, 그 테크놀로지의 구도에서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펼쳐지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전무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비판'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풍의 비판은 할 수 있었지만, 구도를 다차원화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약한 비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특정 장르를 (나 같은 경우에는 싸이키델리록과, 히피즘, 그리고 최근의 RATM 같은 민중지향적 음악) '대안'으로 쉽게 설정하기 어려운 이유 등도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3부의 논쟁들은 그런 축들을 명확히 보여준다. 팝과 록을 바라보는 관점, 대중 음악과 성차, 섹슈얼리티, 록의 정치, 인종 문제, 로컬/글로벌 에 대한 논쟁들을 펼쳐 놓고 있으며, 순전한 '인상 비평'의 수준이 아닌, 텍스트에 치밀히 기어들어가서, 또한 그 형식을 조목조목 뜯어보면서, 게다가 그 산업적 함의까지 '악착같이' 논의하는 저자들의 성실함이 보인다.

이 책은 '용감한' 비평가들에 대해서 일갈을 가하며, 더 나은 논의를 위해서 바라봐야 할 것들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읽고나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 책의 편집자 중 한명인, "사이먼 프리스"라는 사람은 굉장한 영미권에서의 '대중음악학'의 대가다. 2차원적인 형식/내용의 분류법에서 벗어나서, 그 기저에 깔린 대중음악의 사회적 의미를 발굴하기 시작한, 세대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대중음악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 읽어봤어야 할 책이었고, 찬찬히 한 번 더 뜯어봐야 할 책으로 보인다.

가능하면, 이 책에 대해서 완벽하게 '장악'하고 '자근자근' 비평하고 싶으나, 그 이상으로 지금 나아가기에는 무리인 것 같다.

지금은 그냥 마냥 이 책의 저자들이 대단해 보이니 말이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인데, "공부할 건 참 미어터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록 음악의 아홉가지 갈래들 - 문화마당 6 (구) 문지 스펙트럼 6
신현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 역시 대중음악에 대한 이해를 위한 연속 선상에서 읽었으며, 나를 한참 대중음악이라는 것에서 허덕거리게 만들어버린 신현준의 작품이다.

뭔가를 안다는 것의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몸으로 부대껴 가면서, 근육으로 기억하는 방법이 있을테고, 

한편으로는 읽고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해가면서 숙지하는 방법이 있을텐데,

신현준은, 음악을 듣다가, 잠깐 아마추어로 하다가, 나중에 (사회적)'입장'이라는 걸 갖추면서 다시금 자신이 듣던 그 음악들을 '재해석'하기 시작했고, 평론가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하게 '음악만'을 한 사람이 아니기에, 한 발 떨어져서 대중음악에 대해서 평론하는 데 약간의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평론'이라는 것이 오로지 '양'에서 승부가 판가름 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의 '음악'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은, 나름의 '음악계에서의 도제'훈련 보다는, 사회에서 부대껴가면서 만들어진 '아웃사이더'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편으로 표준화되지 않은 '근육'의 감으로 느낀 '음악'의 질감이었을 테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에서의 활동으로 해석된 것이기 때문에 '사회학적 관점'으로 해석된 '음악'의 파장이었으리라.

그렇다고 이 책이 뭐 굉장한 평론을 싣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된 논의는 각 9가지로 분류된 록 음악의 가닥가닥의 정의와 그 전개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신현준은 이 책에서 어떤 '논의'를 하고 싶어하기보다는, 자신이 록음악을 들으면서 기록해두었던 '써머리'를 풀어해치는 감이 더 크다.

블루스부터 시작해서 책을 쓰는 시점에서의 최신 조류였던 얼터너티브-그런지 계열의 음악들과 흑인 음악에서 치고 올라오던 (지금은 정착한 감이 있지만) 소울/훵크/힙합/트립합 류의 음악에 대한 이해까지 망라하고 있다. 어렵지 않게 쓰여있기 때문에, 속도감 있게 무협지 읽듯이 읽어도 무리가 없고, 조금 관심을 가지고 차분히 읽다보면 종종 들을 만한 올드락 넘버정도는 건져올릴 수 있다.

그런 개괄적 이해로 이야기를 마치나 했더니 마지막에는 역시 슬며시 그의 록 음악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더라.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한편에는 팝음악이라는 거대한 포획장치, 다른 한편에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사운드의 전투 기계가 있고, 양자 사이에 록 음악이 위치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대립구도가 도덕적 대립 구도는 아닐지 몰라도, 그리 깊은 통찰의 산물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이 낡은 틀을 허물어 뜨리고 변이의 운동이 발생할 때에만 새로운 사운드의 생성이 가능할 것이다."(p.249)

결국 그의 의지가 슬몃 나온다. 그는 "새로운 사운드"를 바라는 것일 테고, 그것은 결국 다른 저작에서도 말하지만 그의 사회적 견해와도 밀접한 것들이다. 난 아직 그의 견해가 '탐구'의 단계에 머물러있다고 생각하고, 한 발 더 나아간 '사회이론으로의 대중음악'을 발견하는 것을 기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각하는 수학 - 개념으로 읽는 수학의 역사
야노 겐타로 지음, 정구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수학 2까지 선행학습을 통해서 배웠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수학은 나에게 '짜증'나는 적에 불과했다. 최소한 19살까지는.

증명과정을 통해서 공리와 정리를 알아내는 일들은 굉장히 즐거운 것이었지만, 응용 문제와 실력 정석 따위의 유제와 연습 문제는

나를 괴롭히는 괴물들이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난 문과였고(사실은 물리가 싫어서가 더 강했다) 대학도 문과로 왔고,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도 문과로 갔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건데, 내가 수학을 싫어했던 건 아니다.

수학적 사고에 대해서는 알게 모르게 계속 선망했고, 양적으로 뭔가를 사고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게 된것도 어쩌면 수학을 못했던 자책감에서 나온 시샘이었을 지도 모른다.

수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강박관념을 갖기 시작한 건, 학부 3학년 이후였던 것 같다.

그 단초는, 경제학과 다전공을 들을 때 주류 경제학을 밟으려면 수학을 더 잘해야한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었을 테고,

4학년 때, 국제정치경제(내 현재 전공)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방법론'에 대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어쨌거나 수학은 넘어야 할 산으로 보였다.

기실,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한 수학은, "경제,경영 수학" 정도에 미적분학의 기초와 통계를 굴릴 수 있을만큼의 능력이면 되겠지만,

그 전제들을 뒤집기 위해서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고, 수학적 전제가 마련이 되어있어야 한다.

여튼, 그런 생각들을 갖고 있은 지 꽤 되었으나, 여러가지 사정과 핑계들로,,, (결정적으로는 군입대로)

한동안 수학과 조우해보자는 생각은 접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수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경제학을 전공한 군대 동기 방에서, 대학 수학책을 뺏어와서는, 방에서 풀고 있다가,

더 근본적인 논의들을 살펴보자는 생각을 했다(사실 내 고질병이다. -_-).

그래서 좀 가볍지만, 폭 넓게 수학을 어루만질 수 있는 저작을 찾고자 했고, 쉬우면서도 간결한 야노 겐타로의 "생각하는 수학"을 집어들었다.

도서관에서 피로에 쩔어서 졸면서 수면제로 활용하려했으나, 생각보다 재미있는 구성이었다.

고등학교 때 배우던 수학들의 현재적 입지와 왜 그것들을 배우는 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내가 알고 있던 철학자들이 어떤 수학적 포지션을 갖고 있었는 지에 대해서 깨달았다. 예를 들면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물론 이 책이 나에게 수학적 사고를 순식간에 끌어올려주었다 믿지 않는다. 다만, 이 책이 시작이었던 건 썩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다시금 수학을 시작하면서, 지치지 않을 약간의 이유를 얻은 것 같다. 기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 - 내가 뉴스를, 뉴스가 나를 말하다
김주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풍문고에 갔다. 김주하 싸인회라는 말에 사진이나 찍을까 하고 옆에 있다가, 왠지 싸인을 받고 싶다는 생각에 책을 충동구매했다.

책 내용을 살펴볼 여유를 전혀 갖지 않고, 마치 백화점에서 괜찮은 옷을 보고 지름신이 강림하듯, 아무 생각없이 책을 샀다.

아니, 정확하게는 TV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당찬 '이미지'를 믿으면서 말이다.

집에 오는 길, 집에서, 그리고 집에서 부대로 복귀하는 길에 책을 읽었다.

정확히 2시간 반정도를 읽었다.

처음엔 기대를 가지면서 읽다가, 마지막에 덮을 즈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너무 많은 걸 기대했나? 아니면 거창한 뭔가를 제공할 거라고 믿은 게 실수였나?

김주하의 Prologue에 써있는 말:

"처음 집필 제의를 받았을 때 나는 절대로 마흔 이전에는 책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경험도 부족할 것이고 책은 단지 아는 것이 많다고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얼굴이 알려졌다는 것을 이요한 상술로 여겨지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또한 있었다."

사람들은, 통상 어떤 시인이나 소설가(요즘으로 치자면, 김영하, 김훈 정도나 황석영, 이외수, 박민규 정도를 제외한다면야)의 싸인회에 그리 많은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아까의 그 자리는 어떤 '팬 클럽 모임'의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김주하는 '커리어 우먼'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20대 여성들이 뽑는 '닮고 싶은 여성'에 항상 강금실 정도의 사람과 함께 상위권에 랭크되고 있고, 아나운서와 동시에 기자를 겸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직업인으로서의 프로페셔널함'이라는 굉장한 '비교우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굉장함을 기대했다. 뭔가가 있기에 그랬을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그녀는 30대 직업인으로서의 언론인 그 정도로 보였다. 그게 뭔가 문제라는 건 아니다.
다만 그녀의 "마흔 이전"에 책을 쓰지 않으려 했던 이유에 좀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녀의 글에는 직업인의 투철함은 보이지만, 언론인에게 기대하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근본적 인식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걸 기대하는 내가 잘못된 거인지는 몰라도, 내게 그녀의 그런 인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겪으면서 계속 재정립해가는 과정에서 변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나에게는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손석희를 가장 닮고 싶어하는 김주하 아나운서지만, 팩트와 팩트 사이의 행간보다는, 팩트 그 자체를 일단 더 우선시 한다는 점에서 손석희 아나운서의 날카로움과는 다른 무디고 둥그런 점을 발견한다. 행간을 파고드는 날카로움을 그녀에게 기대했었던거다. 나는..

그렇다고 그녀에게 더 시비를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한 발 더 나아간 그녀를 기대할 뿐.

다만, 그녀를 조망하는 언론의 프레임이 정말 '상업적'이라는 생각이 굳어간다.

'커리어 우먼' 신드롬을 통해 보여지는 것 자체(이쁜데다가 당차게 보이는)로 언론인을 위치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언론인은 어떤 위치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내용을 대중에게 말하고 설득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게 40대에 그녀가 글을 쓰고 싶은 이유였고 목표였다면, 이 글은 오히려 실패가 아닌 '성공'이다. '달콤한 쵸콜릿'으로서만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거부한다면 말이다. 

이제 한 발 더 나아가, 손석희 같은 방송인으로서의 그녀를 기대해 본다.

10년후의 그녀의 자서전에는 그녀의 당당함과 행간을 꿰뚫는 날카로움의 공존을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유원의 이론에 기댄 Hendrix의 '冊論'

세상에는 겁대가리 없이 분류해 보자면, 5가지의 책이 있다.

1. 계속 읽을 책들

이런 책에는 함부로 줄을 긋지 않는 편이 좋다. 왜냐면, 계속 읽어가면서 머리 속에 그 구도 자체를 찬찬히 각인시키는 근육의 독서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쉽게 넘지 못할 책들은, 천천히 '자근 자근 씹어주면서' 읽어줄 필요가 있겠다. 게다가 여러번 읽어야 하니, 굉장한 인내가 필요하지만, 덕택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책이라 하겠다.

2. 요약해가면서 정리해가면서 읽을 책들

이런 책은 일단 한번 주욱 보고선, 한번 더 읽을 때, 옆줄(!)을 긋고 독서 노트 한권을 정리해가면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정리된 바를 머리속에 갈무리 해가면서 읽어야 할 것이다. 교과서는 이런 식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3. 지식을 쌓기 위해서 읽는 책들

이런 책들은 한번 읽고선, 다시 뒤척여가면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부분을, 독서 카드 등에 기록할 수 있는 책들이다. 계속 볼 필요는 없고, 필요한 부분을 발췌할 것. 대신 처음 읽을 때 통독을 하고, 다음 번부터는 필요한 부분을 독서 카드를 통해서 읽으면 된다. 논문을 쓰기 위해서 읽는 자료들을 이렇게 처리하면 되겠다.

4. 한 번 죽 읽으면 되는 책들

가벼운 맘으로 읽으면 되는 책들이다. 그냥 읽고나서 인상만 남으면 되는 그런 책들은 이렇게 읽으면 된다. 대신 책값은 노래방이나 비디오방에서 노는 대신으로 지불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노래방은 한시간에 15000원이지만, 4시간정도를 10000원 정도에 해결할 수 있다면, 이것도 나쁘진 않은 휴식법이라 할 수 있겠다.
 

5. 읽다가 찢어야 할 책들

책으로 느껴지지 않는 책은 읽다가 과감하게 찢어도 된다. 다만 그런 '찢는 행위'를 저지르는 판단에 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확고하게 그런 판단이 섰다면, 그런 책은, 찢던지 라면 받침으로 쓰면 된다. 확고한 판단이라면, 고민할 것도 없다.

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그건 바로 이 분류들이 강유원이 말하는 책의 분류에 기인해 있기 때문이다. 그 만큼 나에게 강유원은 지적인 토대를 구축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강유원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이윤기가 번역했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오역을 지적하면서 부터였다.

그 전까지 홉스, 로크 연구자이자 회사원이라는 이름으로 몇 몇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의 철저한 독서에서 비롯된

그런 오역의 지적과, 곧바로 이어진 이윤기의 개정판의 펴냄은 그를 꽤 많은 이들에게 알리게 했다.

요새 주로 들어가서 많은 도움을 받는 지식인들의 블로그가 있다면, 바로 우석훈의 블로그("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의 저자 : economos.egloos.com)와 강유원의 블로그(armarius.net)이다.

우석훈의 블로그가 최근의 어젠다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발칙한 상상을 할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한다면,

강유원의 블로그가 가진 매력은 바로 "튼튼한 토대"에서 나오는 글들이 많고, 항상 그것들이 많은 고민거리를 제공한다는 거다.

그리고 그의 책에 대한 평가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는 거다. 그 만큼 빽빽하고 치밀한 서평을 쓰기 때문이다. 

요근래는 여성의 흡연이나, '혼전순결'의 문제등이 거론되었는데, 인터넷 어느 게시판에서도 볼 수 없는 건강한 논의가 펼쳐졌었다.


그것 역시 armarius 커뮤니티의 '지적인' 신뢰성의 예라 할 수 있겠다.

'책과 세계'

사실 이 책은 그 전에 썼었던 "서양문명의 기반"을 연구하면서 나온 화두 하나에 대한 탐구이다. 그는 서양문명의 기반을 연구하기 위한 책들을 읽으면서 나오는 단상들을 가지고 이 책을 쓴 것이다.

강유원식 스타일이란 그런 거다. 물론 내 규정이지만, 하나하나 차근차근 포기하지 않고 급하지 않고 무거운 책을 읽어내는 정성. 그리고 그것을 통한 사유. 그가 '방방' 떠다니는 현대 프랑스 철학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철퇴를 퍼붓는 데에도 이유는 있는 거다. '직관'적 철학에 대한 회의라고 할까?? (그런데 나는 이를테면 프랑스 철학을 더욱 더 단단하게 보강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의 스타일대로 추구하는 독서는 느리지만 사유의 깊이를 확실하게 보장해 주고, 그는 통찰력의 확장을 얻어내고 있는 거다.

책과 세계. 무엇을 이야기하는 건가??

"책 자체가 아닌 세계, 즉 책이 놓인 공간 속에서 책의 의미를 살펴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언명의 비진리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책, 넓게 말해서 텍스트는 본래 세계라는 맥락에서 생겨났다. 즉, 세계가 텍스트에 앞서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어느덧 텍스트는 .... 자신에 앞서 있던 세계를 희롱하기 시작했고, ... 그것 자체로 일정한 힘까지 가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세계와 일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텍스트도 생겨났다. 이것은 인간 의식의 분열인 동시에 세계의 분열이다."(p.4)

이러한 토대에서 독서는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가?

"텍스트와 그 텍스트가 생산된 컨텍스트로서의 세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이제 정확하게 알아낼 도리가 없게 되었다. ... 차라리 컨텍스트의 산물일지도 모를 텍스트들 스스로가 말하게 하고, 텍스트에 의해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컨텍스트 스스로가 드러나게 하는 편이 더 나을 듯하다."(p.5)

즉, 책 그 내용 자체로의 책과, 그 책과 조우한 세계, 그리고 그 책이 바꿔놓은 세계라는 3개의 축으로 볼 수 있는거다. 더 정확히는 헤겔적 정-반-합의 구도를 이야기할 수 있을 거다.

정(그 자체로의 책-텍스트) ----- 반(책과 조우한 세계-컨텍스트(맥락))

                                       ▽

                               합(책이 바꿔놓은 세계)

이러한 구도 안에서 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전들과 당대의 컨텍스트와 그 책들이 미친 파급력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컨텍스트(사회경제적 배경, 정치적 역학관계)를 제외하고 또 하나의 파급으로 "매체"를 언급한다.

마샬 맥루한을 연상시키는 논의(사실 이 부분도 여러가지 첨예한 논증들이 있으나 생략한다.)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런 논의들의 섞임에도 불과하고 그의 글을 쓰는 방식은 기민하고 늘어지지 않는다. 그게 그의 글의 장점이다.
 

예전에 강유원이 강의에서 했었던 말이 있는데,

"<<책과 세계>>의 '환상적 불멸성 : 신국'을 한번 보자. 글을 자세히 보면 뒷문장이 앞문장의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야 독자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책은 일관되게 다른 생각을 들지 않게 하는 책이다.

그래서 강유원의 저술이 빛이 난다.
 

천천히 공부한 자가 한 마디를 할 때의 묵직함이 묻어나는 짧지만 강한 저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