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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라디오 - 오래 걸을 때 나누고 싶은 이야기
정혜윤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마술 라디오]

 

마술같은 책이 라디오의 애잔함을 잔뜩 머금고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병아리의 삐약거리는 소리를 내던 노란 종이는 샛노란 병아리가 볏이 나고 부리가 튼튼해지며 퍼드덕거리는 날개에 힘이 생긴 닭으로 성장해갈 때 털빛이 퇴색해가는 것처럼 점점 옅어진다. 정혜윤의 마술에 빠져들어서 이야기를 따라 울고 웃다가 병아리가 닭으로 변해가는 것을 책이 끝나고서야 알았다.

이제는 닭이 알을 낳을 시간이다.

 

지직, 지직.

안테나를 세워 주파수를 맞춘 다음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 손도, 눈도 꼼짝 않고 귀만 열어 놓았었다. 귀는 말랑말랑했으며 베개에 닿은 한쪽 귀는 따뜻하기도 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잡아놓은 라디오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풍문으로 들었소, 하고 흘려보낼 수도 있었을 이야기들을 내 귀로 흘러들게 했다.

그렇게 흘러든 이야기들엔 슬픈 사연도, 기쁜 사연도 있었다.

 

눈으로 보지 않고 소리로만 접했을 때, 마음 속에서 그려지는 풍경의 화폭은 엄청나게 커진다.

눈으로 보는 풍경은 TV의 사양에 따라 흑백일 수도, 컬러일수도, 16인치일수도, 50인치일 수도 있지만, 소리로 듣는 풍경은 내 멋대로이다.

작은 프레임에 가두고 싶은 슬픈 이야기들은 작아지고, 넓고 깊은 울림을 가진 이야기들은 작게 상상해도 점점 커진다.

내성적이었던 나는 내 이야기를 밖에다 대고 하는 것에 서툴렀다.

그나마 내 속마음을 털어놓는 곳은 하얀 여백으로 들어찬 일기장 뿐.

그러면서 한없이 밑으로 밑으로, 안으로 안으로 침잠해 들어만 가려 했던 내 무거운 어깨를 쓰윽 잡아 일으켜준 것은 라디오 속 이야기들이었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라디오에서 들었음직한 이야기들이 가식적인 옷을 벗어던진 채 정혜윤의 책 속에서 다시 나타났을 때, 왠지 모르게 따뜻한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 귓바퀴에 고여들었다.

책을 읽고 있을 때의 내 자세 때문이기도 하지만...눈물이 두 볼을 , 턱을 적시지 않고 귓바퀴에 고여들었을 때 그 차갑고 축축한 느낌을 내가 많이도 그리워했다는 것을 나는 알아차렸다.

 

이제는 왠만한 일에 끄떡도 않는 천하장사 아줌마가 되어 이런 일은 이렇게 저런 일은 저렇게 넘겨버릴 수 있는 강심장이 되었지만, 그 때는 왜 그렇게 유리의 심장을 가졌었는지.

라디오가 들려주는 청취자들의 사연이 그렇게 눈물겨울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한쪽 귀를 베개에 댄 채 누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댔는지, 다음 날 아침이면 베갯잇에 하얗게 말라붙은 소금자국이 이불에 그린 오줌지도처럼 선명하게 그 흔적을 드러내었었다. 참, 민망하기도 하지.

 

정혜윤의 [마술 라디오]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그처럼 눈물겨운 이야기들을 다시 들려주자, 나는 "소녀"로 되돌아갔다.

끝도 없이 연결되며 뒤집어도 뒤집어도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이야기 주머니를 장착한 정혜윤은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는 도깨비였던 것이었다.

도깨비의 장난 중에 말끝을 잡아채어 똑같이 따라하는 재미난 장난이 있었지.

나는 그 도깨비가 되어 정혜윤의 말을 따라하고 곱씹고 꿀꺽 삼켜버렸다.

그녀가 던진 질문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따라말하며 내 마음 속에 차곡차곡 접어넣었다.

왜? 나와 어느 한구석이 통하는 누군가와 만나면 나도 이런 질문을 던지며  길고 긴 이야기를 한 번 만들어보려고.

 

어부는 어떻게 부모의 부재 같은 슬픈 과거, 쓸쓸한 과거를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었을까? 그는 어떻게 그렇게 오래 고마움을 간직하고 살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어떻게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있었을까?-78

 

내게 진짜 어두운 것은 심연이 아니고 표면이고 얕음이에요. 두려운 것은 무한히 반복되는 얕음이죠. 제 인생의 질문 중 하나예요. 어떻게 깊어질 수 있으려나? 어떻게 사랑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186

 

카뮈가 자신의 젊은 날 맨 처음 쓴 글에 '안과 밖'이란 제목을 단 이유는 뭐였을까? '안'이 '밖'을 만든다는 것은 아니었을까?-281

 

여러 가지 이유로 편집되어서 결코 방송에 나가지 못한 이야기. 그런데도 이상하게 잊히지 않고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이야기들이 마술라디오에 들어 있다.

티켓 다방에서 일하는 아가씨를 사랑했으나 끝내 잡아두지 못하고 두 갈래 길에서 방황하던 어느 청춘의 이야기.

<유리 동물원>을 함께 보았던 첫사랑을 배신한 한 남자가 '요리 없이 사랑 없다'는 말에 요리사가 되었다는 이야기.

경영난으로 지금은 문을 닫은 통영의 '이문당 서점' 과 기이한 인연을 쌓은, 글귀를 가슴에 새긴 장승 깎는 노인 이야기.

탈출을 꿈꾸는 아들 빠삐용을 생각하며 울먹이는, 제주도에서 만난 한 낚시꾼 이야기.

버섯에 부채질하는 시장상인을 비롯해서 '슬픈데도 행복하니까 강한 인간이다'라며 웅성웅성 파도타기처럼 말을 이어가는 노점상 아주머니들이 있는 시장 이야기.

 

 

단 한 번도 자기 목소리로 말해 보지 못한 것 또한 비참한 일이라고 했던가.

내가 살아온 동안의 이야기도 결코 평범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텐데...

나는 내 목소리로 말해보지 못했다.

이제 정혜윤의 마술에 걸렸다는 핑계로 내 이야기를 한 번 만들어볼까 한다.

보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오늘밤은 마술에 걸린 행복한 기분으로 불면의 밤을 꼬박 새게 생겼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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