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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을 가꾸다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7월
평점 :
일시품절
헤세의 ‘정신’으로의 초대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가벼운 아침 운동을 나섰다가 작은 산책로의 한쪽 귀퉁이에 피어 있는 백일홍을 보았다. 다른 꽃들과 같이 있어서 자칫 잘못해선 그냥 놓치고 지날 수 있었는데, 헤세의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속의 한 장인 <여름 편지>에서 읽은 ‘백일홍’의 기억이 선명해서, 우뚝, 그 꽃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우리네 옛 어른들은 배롱나무의, 훌라멩코를 추는 무희같은 꽃이 금세 지지 않고 오래간다 하여 ‘백일홍’나무라 불렀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식목일 숙제로 꽃씨 심기를 하는 중에 백일홍 씨앗을 뿌려 집에서 키워 본 적이 있는 나는 진짜배기 백일홍 꽃을 먼저 접하였다. 그래서 내 사전에는, 백일홍은 ‘꽃 치고는 키가 크게 자라나고, 길쭉하고 선명한 줄무늬가 있는 초록 잎이 있으며 붉은 꽃이 진짜 백일을 가는 것’이라고 새겨져 있다. 보슬보슬 윤기 나는 갈색의 토양에 씨앗을 심고, 물을 준다. 물기를 머금은 흙은 비릿하면서도 상쾌한 흙내음을 풍기며 한껏 무기질의 양분을 보듬는다. 백일홍의 싹이 트고 날로 날로 하늘을 향해 자라나는 줄기에 잎이 어긋지게 자라고... 드디어 꽃이 그 첫망울을 터뜨린 순간, 그 때의 희열은 불꽃놀이 터지는 황홀한 광경을 목도한 때와도 같았다. 한참 언어의 나열에 있어서 부족한 나의 표현으로는 이러할진대, 언어의 대가인 헤세는 백일홍에 관하여 이렇게 표현했다.
지금 정원에는 1년 중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꽃들이 피어 있지. 그러나 늦여름과 초가을의 다채로운 색을 상징하는 꽃은 아무래도 백일홍이지!(...)화병 속에서 서서히 빛이 바래 죽어가는 백일홍을 바라보며 나는 죽음의 춤을 체험하지. (...)친구여, 일주일 또는 열흘 동안 화병에 꽂힌 채 시들어가는 백일홍을 한번 관찰해보게! 싱싱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하고 황홀하던 색이 이제 섬세해지고 지쳐 아주 부드럽게 바래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걸세.
(...)탁해진 흰빛,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이며 호소하듯 슬픈 빛을 띤 붉은 잿빛, 그것은 증조할머니의 빛바랜 비단으로 만든 물건들이나 희미해진 낡은 수채화에서나 볼 수 있는 색일 거야.-96
내 기억 속의 백일홍과 헤세의 언어로 되살아난 백일홍은 같은 꽃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이리 그 떠오르는 모양새가 다를 수 있는 것인지...
아직 사물을 접하는 진지한 관찰과 관조의 자세가 터무니없이 자격미달임을 느끼며 헤세의 정원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일생 동안 그리고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꼭 정원을 만들고 가꾸었던 헤세. 직접 그린 그림들이 곁들여진 이 책을 읽는 동안 어느새 고요한 헤세의 ‘정원’이 아닌, ‘정신’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도 통할 것 같은 소박함의 진리를 설파한 <작은 기쁨>을 들여다보면 내가 서 있는 발밑을 두리번거리게 되며, 나의 자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한 조각의 하늘, 초록빛 나뭇가지들로 덮인 정원의 담장, 튼튼한 말, 멋진 개 한 마리, 삼삼오오 떼를 지어가는 어린아이들, 아름다운 여성의 머리 모양, 그 모든 것들을 놓치지 말자. 자연을 바라보기 시작한 사람은 거리를 걸어가면서도 단 1분도 허비하지 않고 소중한 것들을 바라볼 수 있다.-72
날마다 ‘작은 기쁨’들을 찾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방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새벽 이슬을 밟으며 풀숲을 헤치고 들어갔다 나오면 어느새 바지끝자락이 축축해져 있는 것을 느끼듯이, 헤세의 ‘정신’을 거닐다 보면 그야말로 맑은 영혼의 유희에 시나브로 빠져들게 된다.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아주 오래 전에 읽었는데, 유리알 유희에 나오는 음악의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이름이 아직도 기억 난다. 명상을 하며 음악을 통해 아름다운 정신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인 음악의 명인. ‘유리알 유희’라는 제목에 이끌려 보게 되었지만, 헤세를 아프락사스의 신화를 써낸 사람으로 기억했던 나는, 젊음의 방황과 세상에 대한 절망, 무서운 세계의 끝 세계대전 후의 치열한 자기 반성으로 씌여진 <데미안>이나 <골드문트와 나르치스>같은 작품으로만 헤세의 작품세계를 한정지으려 했던 내가 부끄러워졌었다.
포도덩굴 사이에서 한낮의 푸른 향기를 듣고, 서서히 발효하고 부패한 흙의 냄새를 맡으며, 붉고 노란 나무딸기로 식사를 하는, 동양의 현자와도 같은 유리알 유희의 명인은 다름 아닌 헤세 자신이 아니겠는가.
세계가 거칠고 격렬한 충동으로 지배되는 동안, 그들의 짐승과도 같은 만행에 무던히도 부끄러워하며 영혼의 고요함으로 맞서고자 했던 헤세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책 속에서 나는 명상의 명인이자 유희의 명인인 헤세를 발견했다.
충동으로 가득한 시대에 가치 있는 선함으로 현자의 발걸음을 내딛었던 헤세.
쓰레기, 녹색 식물, 뿌리들을 모아서 흙과 섞는다. 때로는 검은 색, 때로는 밝은색. 다양한 흙을 불태우고 체에 꼼꼼히 걸러 ‘현자의 돌’을 만들어서 작은 단지에 담아 들고 조금씩 정원에 나누어 뿌린다. 아끼는 꽃들과 꽃밭에 이 명상의 불과 희생의식의 숭고한 수확을 나누어 준다.
정원에서 식물을 일구는 기쁨과 함께 삶에 순간에 솟아나는 놀라운 성찰들을 완성해 갔던 헤세가 부럽다.
깊이가 없는 배경과 같이 모든 것이 어둡고 불투명하고 무서운 세상에서 헤세의 정신은 인어의 꼬리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며 무늬를 만들어간다. 서서히 드러나는 연하디 연한 무늬를 손으로 따라 그리다 보면 나의 어리고 어두운 영혼은 새벽의 여명과도 같은 밝음을 맞이하게 된다. 헤세의 정신은 정원에서 시작했고, 정원에서 피어나는 다채로운 꽃들과 그늘을 드리우고 무성한 잎을 다시 떨구는 나무들처럼 정원의 일상 속에서 사소한 기쁨을 피워올리고 있다.
‘옷자락이 다 해져 올이 성긴 바지를 입은 왜소하고 보잘 것 없는 문학가’가 성큼 내 눈 앞에 다가와서 농부의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안녕, 헤세 아저씨~”
대문호 헤르만 헤세는 헤세 아저씨가 되어 있다. ^^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