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보다 젊었을 때, 드넓은 대학 캠퍼스에서 여학생들이 강간을 당하자 대학 측은 모든 여학생에게 해가 지면 밖에 나가지 말라고, 아니면 아예 나돌아다니지 말라고 일렀다. 건물 안에 있어라. (감금은 호시탐탐 여성을 감싸려고 대기하고 있다.) 그러자 웬 장난꾸러기들이 다른 처방법을 주장하는 포스터를 내붙였다. 해가 진 뒤에는 캠퍼스에서 남자들을 몽땅 몰아내자는 처방이었다. 그것은 똑같이 논리적인 해법이었지만, 남자들은 겨우 한 남자의 폭력 때문에 모든 남자더러 사라지라는, 이동과 참여의 자유를 포기하라는 말을 들은 데 대해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p.111)

















여자들하고만 술을 마실 때는 술집을 고르기가 편하다. 조용할 것,  안주가 맛이 있을 것, 같은 조건 외에 필수적인 게 '화장실이 안에 있을 것'이다. 이건 강남살인 사건이 있기 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 나는, 우리는, 무서웠다. 술집 바깥으로 나가서 어두컴컴한 계단을, 혹은 밝은 계단을 올라가고 문을 열고 화장실을 들어가는 것. 그것은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그런 화장실을 갖춘 술집에 가게 되면 '같이가자'고 말하고 서로 기다려주고는 했다. 상대와 나 둘 뿐이라면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에 갔다. 그렇게 화장실이 안에 있는 술집을 찾느라고 우리는 꽤 많은 시간을 밖에서 허비하기도 했다. 그랬다.


내일  술약속이 있고 장소는 내가 편한 데로 가기로 했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와 내가 일하는 동네의 술집을 검색해서 조용하고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내가 '회사 근처에 조용하게 술 마실 데가 어디 있을까?' 라고 동료 여직원에게 물으니 잠시후에 링크가 왔다. 강남살인 사건이 있기 전이었다. 그 직원은 링크를 보내주며 이렇게 덧붙였다.



여기, 화장실이 안에 있대요.



링크를 읽어보니 글쓴 이는 '화장실이 안에 있어서 좋다'고 써놓았더라. 몇달 전에 쓴 글이었다.



나는 우리 동네에서 괜찮은 술집을 발견하고 전화를 해서 거기는 화장실이 술집 안에 있냐고 묻고 싶었는데 시간이 낮이라 아직 오픈을 안했더라. 그래서 검색해봤다. 술집의 이름과 화장실을 넣고. 그러자 역시나 누군가 포스팅 해놓았더라.



화장실이 안에 있어서 너무 좋아요!


라고..



보노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한결같은 고민을, 항상 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남자들이 혹여 술집 포스팅을 쓴다면 '화장실이 안에 있어서 좋다'는 글을 쓸까? 하게 되는 궁금증도 생겼다. 여성전용화장실, 여성전용주차장, 여성전용휴게소, 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남자들이 있다는 걸 안다. 그것들이 '왜' 있는건지 전혀 모르는걸까?




어제는 내내, 위에 인용한 레베카 솔닛의 문장이 떠올랐다. 남자들아, 밤에 돌아다니지 마, 밤 늦게까지 싸돌아다니지마..



일부 남자들은 솔직히 "나는 안 그런데" 라고 말하고 싶어서거나 아니면, 현실의  시체나 피해자는 물론이거니와 현실의 범인을 논하는 문제로부터 방관자 남성들의 안락함을 보호하는 문제로 대화의 초점을 돌리기 위해서 그런 반응을 보인다. 한 여성은 격분해서 내게 말했다. "남자들은 대체 뭘 바라는 거예요, 여자를 때리거나 강간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고 상으로 과자라도 받고 싶은 거예요?"

여자들은 늘 강간과 살해를 두려워하면서 산다. 때로는 그런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남자들의 안락함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제니 추(Jenny Chiu)라는 여성은 트위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여성 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 (p.182-183)



위의 인용문에 해당하는 트윗을 오늘 보았다.




(그림: 만화가 박종원)



내가 아무리 '안에 있는' 화장실을 가려고 노력해도 언제나 그럴 수만은 없다. 모든 음식점이 화장실은 안에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도 수없이 바깥에 있는 화장실을 가봤고, 바깥으로 나가서 빌딩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혹은 내려가야 하는 화장실에 가봤다. 그런 나는 정말이지 운좋게도 살아남았다. 살아남았다 라는 말로 밖에는 표현이 안된다.



내가 어릴 적 다니던 교회의 목사가 내게 바지를 벗어보라 한 적이 있다. 어른이 되어서는 택시 안에서 '네 젖꼭지 색깔은 무슨 색깔이냐' 라고 묻는 택시 기사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던 적도 있다. 기사가 운전대를 쥐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무사히 내릴 수 있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만원 버스 안에서 엉덩이에 손을 댄 남자들은 수두룩했다.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려고 나는 내 엉덩이에 내 두 손을 가져다대곤 했다. 지하철 안에서는 한 남자가 내리려는 내게 달려와 내 성기를 꽉 쥔 적도 있다. 그 손을 얼른 쳐냈지만 내리고나서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길을 걷다가는 한 아저씨가 내 앞에 떡 서서 내가 가는 방향으로 자꾸만 길을 막았던 적이 있다. 내 친구는 화장실에서 문을 열고 나오자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낯선 남자를 맞닥뜨렸던 적이 있다. 비켜주세요 말해도 비키지 않아 비켜요, 라고 말하고 그를 밀치고 뛰어나왔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내내 목소리가 떨렸더랬다. 또 한 친구는 나와 지하철에 타 나란히 앉았는데 한 할아버지에게 옷차림을 지적당했다. 기집애가 그렇게 야하게 입고 다니면 어쩌냐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더라. 우리는 운좋게 살아남았다. 그들 중 누구라도 칼을 들고 있었으면 나와 내 친구가 어떻게 됐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생각 같아서는 남자들에게 버스도 타지 말고 지하철도 타지 말고 비행기도 타지 말라고 하고 싶다. 길에 걸어가지도 말고 술도 마시지 말라고 하고 싶다. 교회도 다니지 말고 절에도 다니지 말라고 하고 싶다. 학교도 다니지 말고 회사도 다니지 말라고 하고 싶다. 



'마르셀 서루'는 자신의 책 『먼 북쪽』에서 이렇게 말했다.


상상해보라. 3만의 도시 인구 중 이제 여자 둘과 태아 하나만 남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지금이 훨씬 더 좋다는 사실이다. (p.37)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여자만 남는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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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9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9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9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9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몬스터 2016-05-19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스를 찾아 봤습니다. 이런 미친 일이 있었군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 평소 의식하면서 살지는 않아도 ( 옳든 그르든 이런 상황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듯 합니다만 ) 저도 늘 조심하면서 사는 것 같습니다. 밤에 혼자 길을 걷는 일은 절대 없고 , 밀폐된 공간 안에 낯선 남자 사람과 둘이 있게 되는 상황은 피할려고 하고 , 잘 알지 못하는 남자 사람이 데이트하자고 해도 믿지 못해서 거절하는 편입니다. 무섭거든요.

말씀하신대로 , 남자사람들은 여자사람을 상대로 이렇게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을 거라 거의 확신합니다. 모든 남자사람들은 여자사람들의 몸을 빌려 태어났는데 , 어째서 세상은 남자사람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지.. 저도 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음 세대는 좀 나아지면 좋겠습니다. 학습하고 , 교육하고 받고 그래야 변하겠죠.

다락방 2016-05-20 08:35   좋아요 0 | URL
네, 몬스터님. 이런 미친 일이 있었습니다. 저 역시 늘 긴장하고 두려워하며 사는 것 같아요. 사실 처음 만난 남자사람과 술을 마실 때는 화장실 가기도 꺼려져요. 혹여라도 술에다 약타진 않았나.. 사귀는 남자라면 바싹 긴장하죠. 혹시 이 남자에게 폭력적인 성향이 숨겨져 있진 않은가. 이런 세상을 살고 있어요. 택시 타는 것도 너무나 무섭고요 깜깜한 골목길도 무섭죠. 건물 바깥의 화장실도 무섭고요. 이렇게 무서운 게 많은 게 정상은 아닌 것 같아요. 택시기사도, 골목길도, 화장실도, 남성들에겐 무섭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확실히 이건 문제가 있다 싶어요.

공부를 하기 시작하니 보이는 게 너무 많아지고, 보이는 게 많아지니 더 처참해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을까 싶을 정도로 비참합니다. 그래도 알아야 고칠 수 있으니까요. 문제점을 아는 건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계속 공부하고 계속 생각하고 계속 얘기해야 겠어요. 제가 그리고 몬스터님이 그리고 다른 분들이 한 분 두 분 공부해서 얘기하고 하다보면 조금씩 변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감은빛 2016-05-20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에게 저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저 역시 끔찍합니다.

우리 동네에는 여자 화장실만 실내에 있고, 남자 화장실은 밖에 있는 술집이 몇 곳 있습니다.
술을 마시다보면 밖에 있는 화장실에 가는 일이 불편하지만,
그래도 이게 당연한 일이라 여기고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제가 당연하다고 여긴 막연한 이유보다 더 구체적이고 중요한 이유가 많았다는 것을
이번 사건을 계기로 깨닫습니다.
이런 술집이 더 많아야 한다고,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성과 남성이 함께 이 문제를 고민하고 풀어가는 것이겠지요.
저도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다락방 2016-05-23 16:31   좋아요 0 | URL
네 궁극적으로는 화장실이 밖에 있어도, 남녀가 함께 쓰는 화장실이어도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요. 그러나 지금의 현실로는 너무나 먼 일로 느껴져요. SNS상에서 보면 그나마, 여자친구들의 끊임없는 설득으로 조금씩 생각이 바뀌고 있는 남자들도 보이더라고요. 그동안 살아온 환경이 있으니 남자들도 훈장질을, 당연한듯한 비하를 고치기가 쉽지 않은것 같아요. 함께 노력하자는 말씀이 힘이 됩니다. 네, 그래요, 함께 노력해봐요, 감은빛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