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일 퇴근 후에 뮤지컬은 괜히 예매해놔 가지고 어제 가는 길부터 너무 피곤하고 짜증이났다. 게다가 파운드케익이 너무 먹고 싶어지는 바람에 가는 길에 제과점에 들러 파운드케익도 샀어. 공연 끝나고 사면 가벼운 발걸음이었겠지만, 공연 끝나면 거의 열한시가 될텐데 문 여는 제과점은 어디에 있을 것이며, 있다한들 빵이 남아 있을 것인가... 생각하니, 퇴근 하면서 사는 게 정답이다. 제가 이렇게 계획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아무튼 파운드 케익과 맥주 오백미리 두 캔이 든 쇼핑백까지 들고나니(맥주는 사정이 있어서 들고갈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까지 쓰면 너무 길어지니까 패쓰), 한 손엔 책이 들어있는 가방과 한 손엔 파운드케익, 맥주 들어있는 쇼핑백... 아오... 개힘들어 ㅠㅠ 그렇게 나는 공연을 보러 간 것이다.


글을 쓰기에 앞서,

가기 싫다고 징징대는 제게 가라고, 가면 좋을 거라고 얘기해주셨던 트위터와 알라딘의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복받으실 거예요. 가길 정말 잘했거든요. 아이쿠야 좋구먼... 인터미션에 언제껄로 '또' 예매할까, 들여다볼 지경이었어요. 그간 제가 봤던 뮤지컬들중 최고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가라고 해주셨던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일단 원작을 진작에 읽어두고 가길 잘했다. 만약 원작을 읽지 않고 뮤지컬을 보았다면, 책의 내용도 그런 줄 알고 몹시 실망할 뻔 했어.

그렇다. 내용적으로는 별로였다.

왜 굳이 원작에 없던 로맨스를 끼워넣었을까, 왜 선과 악의 대비를 여자 캐릭터를 통하여 표현하고자 했을까.

선한 지킬 박사가 사랑하는 귀족 '엠마'가 있고 악한 하이드가 선택하는 거리의 여자 '루시'가 있다. 너무나 전형적인 캐릭터이며 심지어 굉장히 납작한데, 엠마는 지고지순하며 언제나 지킬을 사랑하고 기다리고 ... 루시는 거리의 여자로 살다가 지킬이 자신을 구원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 하아- 왜, 지킬로부터 구원받는가, 구원받길 원하는가. 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원해주는 서사가 진짜 너무 싫다. 연인으로부터 구원받는 것도 너무 싫고 상대가 누가 됐든 구원받는 서사 너무 싫어. 특히 구원을 바라는 건 더 싫어. 루시는 선한 지킬을 만나고 나서는 '내가 진작에 저 사람을 만났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텐데' 부터 시작해서 '지킬박사가 나에게 새 삶을 가능하게 해줬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가능하다.

한 사람이 다수를 구원하는 일도 가능하고. 그런 일은 없는 게 아니다.

그러나 '저 사람이 나를 구원해줬다'라고 생각을 하는 순간, 혹은 '저 사람은 나를 구원해줄거야' 하는 순간, 우리는 상대에게 짐을 지움과 동시에 상대에게 얽매이게 된다. 평등한 일대일의 관계가 되기 어려운 것. 구원을 바라고 구원이라 생각한 순간 우리는 상대에게 사랑이 아닐지도 모르는 사랑까지 품게 되고, 상대의 힘이 절대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가장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는 구원의 탈을 쓰고 오는 법. 가스라이팅과 구원 역시 가깝게 붙어다닌다. 나는 특히나 남녀 사이에서 구원 운운하는 걸 진짜 싫어한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서도 루시는 다른 남자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지킬로부터 치유하게 되는건데, 하아- 그만하자.


아마도 원작에 없는 로맨스 얘기를 굳이 껴넣은 건 뮤지컬이라는 극의 특성상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따로 부르는 노래에서도 같이 부르는 노래에서도 여성들의 목소리가 합쳐져야 했던 게 아닐까. 특히나 결말의 결혼식 부분은 뭐랄까, 가도 너무 갔다 싶고 ㅋㅋㅋㅋ 아무튼.



그러나 뮤지컬은 정말 좋았다. 지킬이 하이드로 변할 때 와- 진짜 너무 좋았어서, 보러 오길 잘했다고 계속 생각했다. 무대도 좋았고 배우의 연기도 좋았다. 마지막에 홀로 무대에서 지킬과 하이드의 싸움을 연기하는 건 압권이었어. 뮤지컬 배우라면 누구나 이 배역을 탐내겠구나 싶은 거다. 뮤지컬 배우로 태어났으면 지킬 과 하이드 연기 한 번쯤은 해봐야지! 뭐 이런 기분? 그 에너지가 활활 타오르는 게 전해져서, 저 배우는 오늘 집에 가서 뻗겠구나... 싶었다. 기절하겠어...


나는 힘을 느끼는 게 좋다. 고대하던 <지금 이 순간>을 들을 때, 역시나 나는 ㅋㅋㅋㅋㅋㅋㅋㅋ제일 처음 들은게 콘서트에서 임태경이 부른 걸 들어서인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임태경이 제일 좋다고 여전히 생각하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어제 배우가 지금 이순간 부르면서 팔에 힘을 똭 주고 휘두를 때, 그 힘이 느껴지면서 엄청 매력적인 거다. 힘.. 힘 너무 좋아. 내가 힘을 좋아해서 근육을 좋아하는 것인가보다... 힘이여, 근육이여...... 난 뭔가 그런 약간 짐승 같은 느낌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일전에 영화 《트와일라잇》에서도 뱀파이어 가족이 다같이 으르렁- 할 때 자지러지게 좋아했더랬다. 으르렁은 너무 좋아. (아, 아이돌의 으르렁은 안좋아합니다) 뭔가 스읍- 으르렁- 크릉- 하는 거 너무 좋아. 나는 부끄럽지만, 솔직히, 으르렁 로망도 있다. 더 쓰면 19금 이므로 여기까지만..



악으로만 이루어진 '하이드'는 살인을 저지르고 다닌다. 아니, 근데.. 왜죠... 왜 통쾌한 살인을 넣죠. 나는 살인을 저지르는 악인 하이드를 보아야 하는데, 악을 처단하는 하이드를 본다. 명색이 '주교'이지만 '미성년자 성매매'를 하는, 미성년자에게 변태행위를 하는 지저분한 놈을 하이드가 처단하는 거다. '화요일에 저 아이의 첫남자가 되겠다'는 욕망에 눈이 먼 주교를 하이드가 죽여버리는데, 와, 나는 너무 좋았어? 그래, 죽여라, 죽여버려!! 이 세상에 수많은 성범죄자들중에 한 명 죽은 거라면 너무 적다. 나는 성범죄자만 찾아가서 엄벌을 내리는 여성영웅이 나오는 영화를 원한다. 그 영화가 흥행하고 시리즈로 만들어지고 비슷한 작품이 계속 나와서, 저절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성범죄 저질렀다가 죽을 수도 있지' 같은 거 좀 알게 됐으면 좋겠어. 자, 다시 지킬 앤 하이드로 넘어가서.



지킬은 점점 통제할 수 없게 되는 악의 힘에 고통스러워한다. 결국 그 악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도 없어져야 한다는 걸 알고 죽음을 택하는데, 죽어가는 지킬을 품에 안고 그의 약혼녀 엠마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편히 쉬세요."



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편히 쉬세요, 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뭘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대입해 봤다. 나는 그가 죽어가는 와중에 편히 쉬세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뮤지컬에서 그러한 것처럼,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스스로의 문제로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어했다면, 살아있는 것이 괴로웠다면, 내내 스스로와의 싸움으로 지쳐있었다면.... 그렇다면 그가 죽음을 택했다고 해서 내가 원망할 순 없는게 아닌가 싶어지는 거다. 어쩌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도 '편히 쉬세요'가 아닐까. 당신 여기에서 너무 괴롭고 힘들었지, 고통스러웠지. 이제 그 곳에서 편히 쉬어요.



그러나, 그 다음은? 그 후의 엠마는?



나는 알고 있다. 그가 고통스러웠음을. 그에게 죽음이 오히려 더 편할 수 있음을. 그래서 그에게 편히 쉬라고 작별인사 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고통의 순간들이 끝나고 나에게 다시 오기를 기다려왔는데, 그런 그를 믿고 여전히 그의 옆에 있기를 선택했는데, 그렇게나 사랑했는데, 그런데 그가 이제 이 세상에 없다면.... 그가 다른 세상에서 편히 쉴 거라는 생각에 안도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내 마음은? 그가 없는 나는? 나는 어떻게 될것인가... 나의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될것인가. 불쑥불쑥 외로움과 그리움이 치밀 때마다, '괜찮아, 그는 저 세상에서 편안할 테니까' 하며 나를 다독이는 게 가능할까? 그게 될까? 엉엉 울다가 눈물이 마를 때쯤 그리움과 외로움도 옅어지게 될까? 그 후의 엠마는, 그 후의 나는... 어떡하지?




뮤지컬이 끝나고 극장 밖으로 나오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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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1-17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밤 8시부터 우리집은 <지킬앤하이드> 무대가 된듯 ..... 박은태, 홍광호, 조승우, 임태경, 카이의 <지금이순간>을 감상하고, 달뜬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신이 나를 버리고 저주하여도!!!를 열창하고 말았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스토리보다 노래에만 집중해서 그랬는지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지킬과 하이드가 오가며 노래하는 그 장면만 또렷합니다.
저도 어제 인터파크 들어가서 전수 조사해보았으나 홍광호 표를 구할수 없어 마구 실망했다고 합니다.

다락방 2019-01-17 11:48   좋아요 0 | URL
아이참 단발머리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그 부분 좋아해요. 당신이 나를 버리고 저주하여도!! 물론 제일 좋은 부분은 ‘신이여, 허락하소서!‘ 입니다. 그 부분에서는 저도 모르게 간절한 마음이 되어 항상 허락해달라고 같이 외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원작을 읽고갔던 게 너무 좋았어요. 뮤지컬을 먼저 봤어도 원작을 읽었겠지만 말예요.

저 어제 박은태로 처음 지킬앤하이드 를 만났는데, 이 사람 너무 잘하는 거예요!! 너무 멋있어요. 선과 악을 오가면서 노래하는 클라이막스에서 진짜 너무 멋있어서. 에너지 완전 파워뿜뿜. 그래서 다른 사람은 어떻게 표현할까 싶어 보고싶기도 하지만, 처음본 박은태만 할까 싶어서 다시 박은태로 보고 싶기도 하고... 엄마랑 같이 보고 싶은데 엄마는 박은태 보여드리려고요. 같이 가서 봐야징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19-01-17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쓰면 19금 이라는 부분에서 눈을 번쩍 뜬 저는.. ㅋㅋ
박은태 좋죠 그쵸~~
이야기와 노래와 춤과 볼거리들을 다 담아야 하는 뮤지컬의 특성상 남주인공 서사에서는 여성캐릭터가 납작해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레베카>와 <엘리자벳> 강추합니다~ 옥주현으로 보세요 옥주현 짱짱

다락방 2019-01-17 13:32   좋아요 0 | URL
박은태 좋더라고요! 저 오전에 또 예매했어요. 엄마랑 둘이 보러 가려고요. 박은태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본 걸 그대로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후훗. 엄마는 그전에 뮤지컬 보신 적이 없어서 엄청 신기해하실 것 같아요. 같이 볼 생각에 설레이네요!

저도 지킬앤하이드 의 여주들이 남주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역할이라 생각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뭐랄까, 너무나 전형적인 여자들이 되어버렸다고 할까요. 극의 재미를 위해 여주를 그렇게 납작하게 만드는 게 한계라면, 그걸 좀 바꿔나갈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지킬은 너무 멋진 캐릭터지만 상대적으로 여자들은... 그 점이 너무 아쉽더라고요.

<레베카>는 책으로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뮤지컬도 기대되기는 해요. 레베카도 꼭 보러가야겠어요. 저는 <파리의 노트르담>도 보고 싶더라고요! 아아, 보고싶은 건 왜이렇게 많은지요?!

독서괭 2019-01-17 13:42   좋아요 0 | URL
전 레베카는 책보다 뮤지컬이 더 재밌고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