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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평점 :
1. 그녀의 이야기
금요일 밤이면 춘천으로 향한다. 고속도로의 끝자락을 타고 내려가다보면 왼쪽 운전자석 너머로 가로등이 춘천을 수놓고 있다. 어떤 가로등은 다리 위를 밝혀주고 어떤 가로등은 복숭아 밭에 피어나며 어떤 가로등은 내가 가는 길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매번 보는 똑같은 풍경이지만, 이번주에 <이런 이야기>를 읽고 나니, 그 불빛들이 사람같았다. 저 불빛들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하고 남자에게 묻는다. 운전을 하는 남자는 글쎄, 라며 건성건성 대답을 하지만 불빛에 취한 나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다.
제목부터 낯선 <이런 이야기> 춤을 추고 있는 저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고 저런 이야기도 있어, 라고 말하는 듯하다. 각 장마다 화자가 달라지는 이 책은 각각의 소리를 내면서도 함께 어우러지는 책이다. 울티모는 다른 이의 이야기에서는 금빛 그늘을 가진 조연이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에서 그는 빛나는 주연이다. 자동차에 심취했던 아버지와 달리 그는 길에 매혹되고 만다. 자동차가 달리는 길을 만들겠다, 어린 울티모의 꿈이었다.
자동차의 시대가 올거라 믿었던 울티모의 아버지. 자동차 경주에 빠진 담브로시오 백작. 그리고 그 자동차가 달리는 길을 꿈꾸었던 울티모. 울티모가 만든 길을 달리는 엘리자베타. 읽으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한 시대를 함께 숨쉬어도 각기 다른 꿈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간다.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여기서 쿵! 하고 노래의 시작을 알리는 저쪽에서 짝!하고 이쪽에서 따라라 노래를 부르는 듯한 이 짜임새. 어찌 보면 우리네 삶과 닮아 있다.
초등학교 때 꾸던 꿈은 대부분 선생님, 대통령, 미스코리아, 소방관, 경찰관, 의사이다. 여기에 빠진 몇몇 꿈들을 다 더해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직업만큼 다양하진 못할 것이다. 어릴 적엔 손발가락으로 다 셀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면서도 일관적이던 꿈들을 지켜가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각각 삶의 다양한 굽이길을 지나다보면 우리 모두는 다들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마치 영수는 자동차를 고치고, 철수는 자동차를 타고, 영희는 길을 닦고, 미숙이는 철수 옆에 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닮아 있지만, 모두 다른 곳을 비추는 고속도로 아래 저 가로등처럼, 우리의 삶을 다양하게 이야기하는 <이런 이야기>가 너무나 재미있었다는 생각을 또 한다. 춘천에 도착하면 남자에게도 <이런 이야기> 줄거리를 말하면서 읽어보라고 해야겠다. 아, 춘천 도착했다. 울티모가 닦은 길을 따라 나도 다른 이의 불빛 속으로 뛰어든다.
2. 그의 이야기
와이프는 참도 잘 조잘거린다. 거의 하루종일 입을 쉬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 기억력은 형편없어서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 얘기 이미 들었어."하면 삐진다. 그래서 늘 그래, 응, 그렇구나, 하고 적당히 맞장구쳐 줘야한다. 오늘도 벌써 그렇다. 그 책 얘기가 벌써 며칠 째 인지 기억을 못하고 있다. 와이프가 요즘 한참 빠져있는 책은 <이런 이야기>라는 책이다. 하도 들어서인지, 작가도 외우고 있다. 알렉산드로 바리코, 이탈리아 작가란다.
영화감독이며 음악학자, 문예창작과 교수라는 그는 참 다재다능한 것 같다. 요즘 하나도 잘 되는 일이 없어 그런지 더욱 부러운 느낌이다. 게다가 까칠하기 그지없는 와이프가 이렇게까지나 칭송하는 걸 보면, 괜찮은 책인가보다. 아마 이 사람은, 자기 와이프한테도 잘할 거 같다. 이탈리아 사람이니까 말이다. 아, 축구도 잘하겠구만. 아, 젤라또도 잘 먹을거야. 그건, 나도 참 잘할 수 있는데 말이지.
주인공 남자는 자동차가 달리는 길을 만들고 싶어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자동차의 시대가 올 것을 예견하고 소를 팔아 정비소를 차렸다고 한다. 새옹지마라 했던가. 잘나가던 그의 아버지와 백작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주인공의 인생은 포화 속 전쟁으로 길을 옮기게 된다. 그 길에서 전우애도, 배신도, 사랑과 이별도 마주친다. 계속 설명하는 와이프에게 말한다. "나도 요새 힘들어. 힘든 길을 걷는 거 같아." 와이프는 잠깐 기다리라며 뭘 주섬주섬 꺼내더니
"내가 할 일은 그저 내 인생의 폐허에서 매일매일 그것을(내 인생의 길) 파내는 것뿐이라는 사실"
이라는 글귀를 읽어준다. 그러게, 나는 지금 어느 길을 파내고 있는지 그걸 잘 모르는 것 뿐이겠지. 그래서 힘든 건가보다. 하고 넘긴다. 주인공처럼 자신이 가야할 길을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고 누가 그랬던가. 하루하루 열심히 길을 닦고 있는데, 그게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도 모른채 살아가는 기분이다. 주인공 남자가 참 부러워진다. 지금은 그저, 춘천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을 뿐이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와이프가 말한다. "저 불빛들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글쎄, 라고 건성건성 대답을 했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밟고 있는 이 길은 누구의 이야기일까, 이 길을 닦은 사람은 자신이 이 길을 닦기 위해 태어났고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꼈을까. 그는 이 길을 달리며 이 길을 닦았던 시기를 추억하고 있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을까. 나는 어떤 것의 주인공일까. 이런 이야기일까, 아니면 저런 이야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