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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쿠스 크레페 라비올리
개브리엘 해밀턴 지음, 승영조.이시아 옮김 / 돋을새김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음식도 사람도 웃음도 가득한 어린 시절
책을 덮고 문득 상상해본다. 백여명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맛있는 음식을 함께 하는 장면을. 아버지는 모닥불에 느긋하게 앉아 찾아오는 손님들을 따뜻한 불가로 이끌고, 어제부터 만든 버섯 샐러드, 쇼트케이크가 산더미처럼 쌓여 사람들을 기다리는 모습. 음식 냄새 가득한 엄마는 어디가고 늘씬한 하이힐에 꼿꼿한 자세로 샴페인을 권하는 엄마. 남자들은 커다랗고 잘 구워진 양고기를 꼬치째 들고 여자들은 하하 호호 웃으면서 함께 음식을 들러 가는 모습. 그리고 어린 여자 아이는 사람들 사이를 오가면서 시냇물에 차갑게 식힌 맥주를 날라주는 그런 모습 말이다.
요리사가 이야기를 하는 법
<쿠스쿠스 크레페 라비올리>의 저자 개브리엘 해밀턴은 어린 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음식과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즐겁게 행복하게 보낸 어린 시절을 가슴 깊이 추억한다. 실제 뉴욕 유명 레스토랑의 셰프인 그녀는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세 가지 음식, 쿠스쿠스와 크레페, 라비올리에 담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쿠스쿠스, 너무나 좋아하는 크레페와 라비올리의 이름을 듣자마자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그녀는, 요리가 아닌 이야기로, 나의 허기진 배에 풍족함을 불어 넣었다.
쉐프의 책이라 그런가, 챕터를 나누는 방법도 신기하였다. 첫번째 장은 피(blood), 두번째 장은 뼈(bones), 세번째 장은 버터이다. 책 제목도 음식, 챕터 제목도 음식의 재료. 그녀는 정말 타고난 요리사이구나, 싶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자전적인 이 에세이는 그녀가 요리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쓴 여정기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너무나 험난했다. 부모의 갑작스러운 이혼으로 방황하게 된 그녀는 하지말라는 일은 다 하고 살았다. 어린 나이에 마약에도 손을 대고 나이를 속이고 야간 클럽에서 술을 팔기도 한다. 누구도 그녀를 잡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 또한 누군가가 그래주기를 바랐다고 고백하였지만, 그녀는 늘 혼자였다. 개브리엘, 이라고 멋진 프랑스 이름을 지어준 엄마와 아빠도, 함께 만찬을 즐기던 형제자매들도.
그런 주인공에게 항상 힘이 되었던 것은 한그릇의 음식이었다. 요리사가 되려고 한 적은 없었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 다 함께 먹던 그 양고기 파티와 같이 즐거운 추억에서 벗어나 산더미 같이 치미창가를 튀기고 서빙을 하다보니, 어느샌가 요리사가 되어 있었다. 너무나 행복해서 버리고 싶은 유년시절의 기억이 그녀를 싱크대로 이끈 것이다. 그렇게 케이터링 쉐프에서 자신만의 가게를 낸 오너가 된다. 삶은 참 신기하다. 어떤 길을 가야할지 모를 때에도 우리를 길 위로 이끈다. 바로 어린시절을 통해서 말이다. 우리네 명절을 연상케하는 어린 시절의 파티들을 통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요리사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말한다.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늘 살피세요. 그 일을 평생 하게 될 테니까요."
쿠스쿠스, 어머니의 음식
쿠스쿠스는 무엇일까, 처음 책을 받고 가장 낯설었던 이름이었다. 생긴 것은 꼭 좁쌀 같았는데, 알고보니 밀로 만든 파스타라고 한다. 정말 작은 파스타. 그녀 어머니의 추억이 깃든 음식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린 개브리엘에게는 세상 그 자체였다. 이혼 후 어째서인지 모를, 분명하지 않은 이유로 멀어진다. 무뚝뚝하고 욕도 잘하는 그녀는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욕을 한다. 그럼에도 쿠스쿠스 샐러드는 잊혀지지 않는다. 20년 후 재회하게 된 어머니를 보며, 내가 왜 두려워했을까 생각한다. 밥 같이 생긴 쿠스쿠스. 먹으면 든든해질 것 같은 이 음식은 그녀를 있게 한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인 것이다.
크레페, 두번째 어머니.
레즈비언이었던 그녀는 식당의 단골인 미켈레와 결혼을 한다. 어쩐지 요리사답게 이탈리아사람과 결혼을 한다. 그녀가 미켈레의 어머니를 만나러 간 날, 그의 어머니는 크레페를 대접한다. 계량도 장갑도 심지어 반지를 빼지도 않고 밀과 물만으로 파스타를 만드는 그의 어머니를 그녀는 사랑하게 된다. 그녀가 사랑하는 음식은 그런 것이다. 스스로 토끼 가죽을 벗겨내고 맛있게 숙성시킨 토끼 고기를 먹고, 양념도 듬뿍 그렇지만 계량은 하지 않는다. 분자음식이니 채식이니 그런 것은 요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저 듬뿍 담뿍 저 크레페처럼 나누어 먹기 위한 진정한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 즉 시어머니는 그런 음식을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음식들을, 그의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었다. 단순한 크레페로 말이다. 이탈리어와 영어 사이의 간격이나 멀었던 그들은 크레페로 가족이 된다.
라비올리. 결혼의 맛.
우리나라 만두 같은 이것은 파스타의 일종이다. 난 이걸 처음 같이 먹은 남자랑 결혼했다. 처음 먹어본 라비올리 맛이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그랬는지, 라비올리를 반 잘라 입에 넣어주는 남자의 정성이 애틋해서였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안에 약간의 채소와 치즈를 넣은 라비올리는 정말 맛있다. 나처럼 라비올리를 좋아하는 그녀도, 그녀에게 수제 라비올리를 만들어준 남자와 결혼을 한다. 맛이 있었어야 하는데, 짜고 덜 익고.. ㅋㅋ 나중에 그녀는 회상한다. 그 때 알아봤어야 했다고. 이 결혼 생활을 말이다.
반은 진심으로 반은 농담으로 시작한 그들의 결혼 생활은 위태위태하다. 겉보기에만 멋졌던 그의 라비올리처럼, 그녀는 늘 그에게 실망한다. 다같이 모이는 파티를 열자고 해도 싫다, 로마에 가서 트레비 분수를 보자고 해도 싫다, 여름휴가 때 도쿄에 가서 문어를 먹고 싶다는 소망도 싫다. 결혼은 정말 현실이다. 깔끔하게 카트를 끌고 조리된 음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가서 콩나물 한 봉다리에 얼마인지, 단 돈 백원이라도 깎아야 하는게 결혼이다. 실상 결혼은, 상대와의 끝임없는 타협이다. 위태위태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건 그녀뿐만은 아니겠지. 라비올리에 담긴 애정들은 어디가고 짠 맛 덜익은 맛만 입속 가득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결혼을 유지한다. 배가 고파 미칠 것 같은 이 유명 쉐프가 정말 미치기 직전에 멋진 이탈리아 샌드위치 가게를 찾아내는 남자는 미켈레뿐이다. 그런 반짝이는 한 순간이 길고 긴 결혼을 유지하게 하는 것 같다. 한 입 먹고 우물우물, 그리고 또 한 입. 그렇게 그녀의 결혼이야기도 이 책에 가득 담겨 있다.
젖먹이 아이를 키우다보니, 저런 이탈리안 음식들은 언제 맛보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입안 가득 라비올리를 물고 있다가 달콤한 크레페를 씹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내 안의 잊혀진 맛들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책. 아마 그녀는 알파벳을 가지고도 요리를 하나 보다. 너무나 맛있는 요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