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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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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씩 참 공교롭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는 자그마한 인문/사회 독서 모임을 하는데 다음 달에 읽을 인물 혹은 책에 대해 의논하다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혹은 <1984> 혹은 <나는 왜 쓰는가>를 읽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었다. 평소 나는 문학 작품을 그렇게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조지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었고 그곳에서 겪은 이야기를 수필로 쓴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지 오웰의 글을 한 번 읽어 보기를 소망했었다. 모든 남자가 그렇듯이 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고 특히 기존 전쟁과 다른 양상을 보인 스페인 내전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소망이 있었다.

 일단 조지 오웰의 수필을 모은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간단히 [스페인 내전]에 대해 설명하고 넘어가는 순리인듯 싶다. 모든 글이 그렇듯이 시대 상황이나 배경을 미리 알아야 이해하기 쉬운 법이다. 스페인 내전은 기존의 전쟁과 양상이 다른 전쟁이었다. 적법한 선거에 의해 세워진 좌파 정부와 우파 군부 반란군 사이에 의해 일어난 전쟁으로 각국이 참전하여 제 2차 세계대전 전초전 성격을 띄었으며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이 군부 반란군에 대항하여 정부 편에서 총을 들었다. 많은 지식인들은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조지 오웰처럼 총을 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파블로 피카소처럼 게르니카 학살에 대한 분노로 <게르니카>라는 명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앤터니 비비가 쓴 <스페인 내전>이라는 책을 읽어보기를 강력 추천하는 바이다. 감히 말하건대 국내에 소개된 책 중에서는 가장 스페인 내전에 대해 객관적으로 잘 분석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책을 살펴보면 조지 오웰의 수필 중에서 29편을 뽑아 소개한 책이다. 사실 조금 안타까운 점은 조지 오웰의 모든 수필을 전부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옮긴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29편을 선정하여 [편역]한 것이라는 점이다. 어찌되었건 총 29편의 에세이는 각각 독립적인 것이므로 인상깊었던 <과학이란 무엇인가?>, <정치와 영어>, <어느 서평자의 고백>, <나는 왜 쓰는가> 이렇게 총 4편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나갈까 한다. 

 먼저 <과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조지 오웰은 일반 대중에게 좀 더 많은 과학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J. 스튜어트 쿡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물론 조지 오웰이 말한 대로 협소한 의미의 '과학자'가 비과학적인 문제에 대해여 남들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길 근거는 빈약한 점이 사실이다.(p.217) 또한 우생학으로 대표되는 '인종 과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인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그러면서 조지 오웰은 "대중에 대한 과학 교육이 결국 문학이나 역사를 희생해가며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등을 더 가르치는 것이 될 경우,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아주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p.218)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 과학 교육을 받은 나는 이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이는 인문/사회 과학이 자연 과학보다 높은 수준의 것이라는 편견이 들어간 주장이며 이에 대한 반론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다. 인문/사회 과학을 주로 배운 사람들 중에 악인이 없는가? 조지 오웰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오히려 이런 주장은 인문/사회학과 자연과학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전인 교육, <통섭> 등을 통해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가 사라지는 현 시대에는 이렇게 구분 지어 하나 만을 강조하는 교육은 반쪽 인간을 만들어 내는데 불과할 것이다.  

 이어서 <정치와 영어>라는 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1.익히 바왔던 비유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2.짧은 단어를 쓸 수 있을 때는 절대 긴 단어를 쓰지 않는다. 3.빼도 지장이 없는 단어가 있을 경우네는 반드시 뺀다. 3.능동태를 쓸 수 있는데도 수동태를 쓰는 경우는 절대 없도록 한다. 5.외래어나 과학 용어나 전문 용어는 그에 대응하는 일상어가 있다면 절대 쓰지 않는다. 6.너무 황당한 표현을 하게 되느니 이상의 원칙을 깬다. 라는 자신이 글을 쓰면서 6가지의 규칙을 소개하고 있다. 즉 그는 지금의 정치 혼란이 언어의 타락과 결부되어 있으며, 언어 문제부터 건드림으로써 상황을 개선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바(p.275) 오늘날 아무나 '정의', '공정'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우리 나라 현실에서 한 번 곱씹어볼 가치가 있는 글쓴이의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서평자의 고백>은 바로 나의 고백이라고 봐도 옳겠다. 나 역시 1년에 100여권의 서평을 써 왔다. 처음에는 그저 내가 책을 읽고 정리하기 위해 서평을 써 왔지만 시간이 흐르니 일종의 직업과 같이 되어 버려 진짜 제대로 된 서평을 쓰려면 책을 읽고 나서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후 써야 하지만 읽어야 할 책이 많은데다가 아무래도 공짜로 책을 제공받고 서평을 쓰는 입장에서는 나쁜 말을 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런 상황 하에서도 되도록 정당한 평가를 하고 단순히 책 내용을 요약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담을 수 있는 서평을 쓸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할 따름이다.

  <나는 왜 쓰는가>는 가장 유명한 수필로 여겨진다. 내가 이 서평의 제목을 이와 대구를 이루어 <나는 왜 읽는가>로 적은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조지 오웰은 이 수필에서 지난 1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며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부터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이른바 순수한 문학 작품을 싫어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저 현실과 격리되어 <아름다움>만을 논하는 문학을 볼 때면 과거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제국주의 하에 고통 받고 있을 때 현실을 회피하여 궁극적으로 제국주의를 방조한 여러 작가들이 떠오른다. 물론 너무 정치적 색깔을 띄는 작품도 역겨운 것이 사실이지만 <아름다움>이라는 '위선' 아래 현실을 외면하는 작품보다는 차라리 솔직해 보이는 것이 나아 보인다.

  결국 이와 비슷한 이유로 해서 <나는 왜 읽는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읽는 것을 통해 불의를 감지하고 '의문'을 품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영화 Matrix의 명대사 "It's the question that drives us."가 바로 내가 책을 읽는 이유라고 하겠다. 

 앞서 살펴본 수필 <어느 서평자의 고백>에서와 같이 나 역시 냉철히 이 책을 평가하건데 비록 편역이나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던 많은 조지 오웰의 수필을 최초로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식상한 표현이지만 강력 추천한다는 말 외에는 다른 단어를 찾기 힘들다. 뭐… 6번째 규칙에 너무 황당한 표현을 하게 된다면 위의 원칙들을 과감히 깬다는 규칙이 있는 바 조지 오웰이 무덤에서 일어나 내 서평을 읽는다고 해도 이런 표현에 대해 뭐라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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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개인주의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0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훈 옮김 / 책세상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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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저번에 <루쉰>을 읽은 후 루쉰과 동시대의 동아시아 3국의 근대 문학 작가를 만나기로 결정한 후 일본의 근대 문학 작가로 나쓰메 소세키를 정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 역시 문학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나쓰메 소세키란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다만 근대, 특히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후반 사이의 동아시아 3국의 근대 문학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통해 당시 시대상을 자세히 알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특히 이 책에서는 이른바 <타인본위>에 반대되는 <자기본위>라는 나쓰메 소세키의 중심 사상이 잘 담겨 있는 강연집이다. 다른 유명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서는 이런 <자기본위> 사상을 잘 알기 힘들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나쓰메 소세키는 왜 자신이 자기본위라는 사상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려주고 있다. 이런 자기본위 사상은 국가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있던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굉장히 충격적인 생각이었다. 물론 나쓰세 소세키의 다른 글에 보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무비판과 함께 일본의 침략에 의해 고생받던 식민지 국민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으나 오늘날까지도 가장 위대한 일본 근대 문학 작가로 칭송받는 만큼 꼭 그를 읽어볼 필요가 있었다.

 

 이 정도로 이 책과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 아래 글은 내가 독서모임에서 발표하기 위한 글로 서평과 관계 없는 글이니 그냥 가볍게 무시해주면 될 것이다.

 

 

 

 

 연구자 입장에서는 일반 독자가 보통 소설을 읽듯 그냥 그대로 지나치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 작가가 그 작품을 창작하게 되었는가', '그 작품을 통해 무엇을 얘기하려고 했는가' 정도는 이해하기를 바라게 된다. (p.7)

 

 여기서 '연구자'라는 단어를 '수능 출제위원'으로, '일반 독자'를 '수험생'으로 바꾸어 보자. 왠지 묘하게 말이 되지 않는가? 학교 수업과 수능에 있어서는 이런 관점이 더 작품 감상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 같다. 물론 옮긴이 역시 외부에서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작품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상적인 것이고 실제로는 어느 정도 작가와 작품에 대한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한 작품 이해가 필요한 것 역시 사실이다. 흔히 우리는 위 두 가지 작품 감상 방법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를 조화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 즉 먼저 배경지식이나 해설 없이 작품을 읽고 스스로 작품을 읽고 느낀 후에 다시 배경지식이나 해설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되지 않을까? 나는 비록 문학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책을 읽고 서평 쓸 때 먼저 내 생각을 충분히 담은 서평을 쓴 다음에 다른 사람의 서평을 읽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잘 쓴 서평을 읽고 책을 읽은 경우에는 그 사람의 생각에 몰입되어 나만의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한 줄기 빛이 비치지 않을까 기대하며 희망을 품기보다는 내 쪽에서 탐조등을 사용해서 오직 한 줄기 빛이라도 좋으니 끝까지 밝게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중략… 나는 '내 손에 단 한 자루의 송곳만 있으면 어딘가 한 군데 뚫어 보여주고 싶은데'하며 조바심쳤지만 공교롭게 그 송곳은 남이 전해주지도 않았고 또 자신이 발견할 수 없어서 그저 마음속으로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하며 사람들 몰래 우울한 날을 보냈습니다…중략… 이때 나는 비로소 '문학이란 어떤 것일까'하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자력으로 만들어내는 것 외에는 나를 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p.50~51)

 

 그나마 '문학이란 어떤 것일까'라는 화두를 잡은 나쓰메 소세키는 축복 받은 사람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줄기 빛조차 찾지 못한 상황이며 더 나아가 한 줄기 빛을 찾기 위해 나쓰메 소세키가 찾은 송곳(나쓰메 소세키에게 있어서는 '문학이란 어떤 것일까')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더 비관적인 것은 한 줄기 빛조차 없는 상태를 당연해 하는 것이다. 그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서 대기업 혹은 공무원이 되는 안정적인 삶을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 역시 초, 중,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대학교 가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나의 삶이 지표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교 역시 취직 전쟁, 학점 전쟁, 스펙 전쟁일 뿐 이런 근본적인 물음을 덜질 여유를 찾을 수 없었다.(물론 내가 게을러서 책이나 경험보다는 농구에 빠져 지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현재 나는 변리사 합격하면 '돈으로부터의 자유'를 넘어 '돈으로 인한 자유'를 얻어 나에게 맞는 '송곳'을 찾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 기대는 좌절될 것 같아 두렵지만 반드시 나 역시 '송곳'을 찾아 한 줄기가 아닌 태양을 밝게 보고 말 것이다.

 

 

 

 

  타인본위라는 것은 자신의 술을 타인에게 마시게 하여 품평을 듣고 이치에 맞건 안 맞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른바 남 흉내 내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p.52)

 

 여기서 나쓰메 소세키는 술을 예로 들어 문학에 대해 이야기 하였지만 나는 술(특히 와인)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고 싶다. 와인의 경우 유명한 와인 평론가인 로버트 파커의 점수(이른바 파커 포인트)에 의해 가격과 판매량이 변한다고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다만 나는 이런 상황이 '로버트 파커의 입맛대로 획일화'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맛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류 공통의 기준이 있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글 대로 자신의 술을 타인에게 마시게 하여 품평을 듣고 이치에 맞건 안 맞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이런 타인본위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학 뿐만 아니라 술, 특히 와인에 있어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거나, 좋아하거나 혹은 자신의 성질에 맞는 일을 만나게 되면 다른 이를 권력 혹은 금력으로 유혹하여 자신의 맘에 들게 변화시키려 합니다.…중략…"나는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데 저 친구가 왼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괘씸하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p.61)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이 오른쪽인데 친구가 왼쪽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고 그저 가만히 있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에 '권력'과 '금력'으로 친구를 오른쪽으로 걷게 강요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서로 토론하고 이야기하여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결정하여 내가 태도를 바꾸거나 친구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일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오늘날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사회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어떤 길이 옳은 길인지 토론하여 바른 길로 걷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는 이른바 권력을 가진 자가 누구 생각이 옳은지 토론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국민을 권력과 금력으로 변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토론이 전제가 된 타인이나 나의 변화는 바람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권력은 자신의 개성을 타인의 머리 위에 강요하는 도구이고 금력은 개성을 확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유용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지극히 유용한 것으로 만일 인격이 없는 자가 무턱대고 개성을 발전시키려고 한다면 타인을 방해하게 되고, 권력을 사용하려 하면 남용으로 흐르게 되고, 금력을 사용하려 하면 사회 부패를 초래합니다.(p.61, 65)

 

 먼저 여기서는 번역에 대해 이야기를 간략히 해야 겠다. 권력과 운을 맞추기 위해 금력이란 말을 썼을지도 모르겠지만 금력 보다는 '돈'으로 번역하는 것이 좀 더 매끄러웠을 것 같고 '개성을 발전시킨다'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직역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좀 더 부드럽게 의역하는 점이 독자의 이해를 돕는 길이 아닐까 한다. 각설하고 여기서 나쓰메 소세키는 '인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나 역시 인격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과연 권력 남용과 사회 부패가 개인의 인격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비록 인격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는 경우 권력 남용을 견제하고 사회 부패를 줄일 수 있는 것 아닐까? 내 생각에는 권력 남용과 사회 부패의 경우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위험해지면 개인의 자유가 축소되고 국가가 태평하면 개인의 자유가 확장된다는 말은 당연합니다. 적어도 인격이 존재하는 이상, 상황을 잘못 판단하여 국가가 위급한 상태에 처해 있는데도 단지 개성의 발전만을 겨냥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p.71)

 

나쓰메 소세키의 말에 따르면 나는 인격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경우 개인주의를 취하면서도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서는 개인의 자유가 축소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개인주의를 관철하고자 한다. 일부 사람들은 국가를 마치 살아있는 생물로 취급하고 개인보다 국가를 더 우선시하고 있다. 그러나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자연 상태'에 대한 추론으로부터 '사람들이 스스로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국가를 만들어내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홉스는 절대 권력으로 거듭난 '국가'를 무작정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른바 '자연권'이란 것을 통해 개인의 생명과 이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이는 절대적인 권리로서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한 침범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나 역시 국가는 계약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그 누구도 계약에 개인의 생명과 이익을 국가에게 넘기겠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서도 개인의 생명과 이익을 침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 발 양보해서 설혹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서 개인의 자유를 억제할 수 있다고 해도 국가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국가와 모국어를 선택한 적이 없고 우연히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게 되었고 의무 교육을 받음으로써 한글을 내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나의 의지 혹은 선택과는 무관한 국가가 위급한 상황이라고 나의 자유를 축소시키는 것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또한 국가가 위급한 경우에는 국민을 헌신짝 처럼 버리는 것을 나는 우리 나라 역사를 통해 많이 보아 왔다. 임진왜란 때 이른바 사직을 보전하기 위해 한양에서 의주로 도망치고 중국으로 향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던 선조나 근래에는 한국전쟁 초기에 절대 수도 서울을 버리지 않겠다고 라디오 방송까지 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다음날 도망치면서 한강 다리를 폭파하여 한강 다리를 건너던 수백 명의 국민을 몰살시킨 것이 채 100년도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 말 했듯이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은바 국가가 위험해지면 자진해서 개인의 자유를 내놓을 것이 아니라 일단 도망쳐서 한 몸 부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인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나쓰메 소세키의 비판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와 달리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서라도 개인주의를 관철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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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지음, 박규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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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름지기 어떤 새로운 분야를 접하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를 잘 설명해 놓은 개론서나 혹은 이른바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을 통해 해당 분야를 접하는 것이 정석일 것이다.(물론 어떤 프랑스 철학자는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 고전이라고 자괴감에 빠진 말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일본'을 접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이 무엇일까?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국화와 칼]을 일본을 소개하는 책으로 가장 먼저 꼽게 될 것이다.

 

 다만 이 책이 일본을 소개하는 가장 좋은 개론서 혹은 고전인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붙는다.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인이 직접 쓴 책이 아니라 미국인이 쓴 책이라는 점이고 당시 태평양 전쟁 중이라 현지 조사를 할 수 없어 재미 일본인과의 면담을 통해 쓰여진 간접적 책이며 이 책은 미국 '전시정보국'을 위해 수행된 정책 연구를 기초로 발간된 책으로 러미스(C. Douglas Lummis) 같은 경우 이 책에 대해 하나의 정치적 문학이나 정치적 논문 혹은 기껏해야 미술 평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하기도 한다.(p.41) 이런 비판에 대해서는 본문 내용을 살피기 전에 먼저 아래에서 하나씩 살펴볼 것이다.

 

 일단 일본인이 쓴 책이 아닌데 일본 문화론의 고전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은 마치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를 보는 듯 하다. 미국인인 브루스 커밍스가 쓴 이 책은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반드시 넘어야만 하는 큰 산이었다. 마치 미국인인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이 일본 문화 분석에 있거 아주 기본적인 준거가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일본인이 아닌 미국인이 쓴 책이므로 어쩔 수 없이 편견, 특히 미국적인 가치('개인'과 '자유'라는 가치)가 일본적인 가치(집단주의적 가치)보다 우월하다는 신념은 책 속에 내포될 수 밖에 없다.(p.406~407) 그래도 그나마 외국인에 의한 일본 연구 중에서는 실로 편견이 적은 편이라는 점은 많은 학자가 인정하고 있다.(p.38)

 

 이어서 이 책에서 사용한 방법론에 대한 비판(문화상대주의적 관점, 유형 분석, 비교 방법, 원격지 조사 방법 등에 입각한 문화인류학적 방법론)은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글쓴이는 일본의 역사적 측면을 도외하여 당시 봉건 사회에서 근대 시민 사회로 급격히 변하던 일본 사회를 동일 평면 위에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둘째, 글쓴이가 사용하는 '일본인'은 균질적인 인간의 총체로 전제되어 다양한 계층, 지역, 직업, 연령 등의 구체적 차이가 간과되어 글쓴이는 가변적이고 동적인 측면을 무시한 채, 불변적이고 정적인 것에 매달렸다는 것이다.(p.139), 셋째, 글쓴이가 구상하는 일본 문화의 유형은 너무 정적이고 통일적이며 넷째, 글쓴이가 선택한 인터뷰 대상자들이 대부분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 전에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한 후 미국 내에서도 주로 일본인 집단 내에서만 생활하여 메이지 유신 전후 일본 문화의 변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다.(p.39, 43) 이런 방법론에 대한 비판은 타당하다. 다만, 전시 상황에서 일본 문화 연구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며 기존에 디딤돌이 되어줄 연구가 없는 상황에서 수월한 조사 및 연구를 위해 일본 문화의 유형을 정적이고 통일적으로 여길 수 밖에 없었던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러미스(C. Douglas Lummis)는 이 책이 인류학자에 의한 전쟁 관여라는 점에서 [국화와 칼]이 [문화의 패턴]에 비해 '문화의 상대성'이라는 '자기 비판적 정신'을 완전히 상실하고 '자신감에 찬 정복자의 태도', 즉, '관용의 정신'이 표면에 나타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p.41) 이에 대해 이 책은 비교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책이라는 반론과 함께 많은 이들은 인류학을 순수하게 객관적인 과학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많은 부분 정치적 개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과학과 정치와의 관계는 문제가 되어 왔다. 개인적으로는 과학에 정치가 관여하여 탄생한 최악의 과학(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은 우생학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우생학으로 얼마나 많은 차별이 있어 왔는가? 또한 문화인류학이 과거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로 사용된 역사도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과학과 정치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지배층·금력 의존적이며 위계 질서적인 세계 학계의 내부 구조가 바뀌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책은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비판이 있지만 일본 문화의 핵심적 요소들, 특히 일본인의 에토스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가령 일본인의 계층적 위계질서 의식, 하지와 명예 관념, 기리, 닌죠, 온 개념 등)을 최초로 명확하게 분석해내어 차후 일본 문화 분석에 있어 아주 기본적인 준거가 되었다는 점(p.35)은 이 책을 일본 문화의 개론서, 혹은 고전으로 높게 평가받게 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이 책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반론을 살펴 보았는바 이제 이 책에서 나타난 여러 개념을 먼저 살펴볼까 한다.

 

 가장 먼저 '온(恩)'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글쓴이는 5장과 6장에서 일본 사회에서의 지배 종속 관계가 자기에게 주어진 온에 대한 온가에시(

 



 

 이어서 이 책에서 좀 더 생각할 것을 찾아보면 글쓴이는 일본인은 지도처럼 정밀하게 미리 정해진 세계, 각자의 사회적 지위가 고정된 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지만 이런 계층적 위계질서가 고정되지 않고 유연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p.103~105) 즉, 고리대금업자나 상인들이 자신의 아들을 사무라이 집안에 데릴사위로 보내는 '무코요시(壻養子)'를 통해 상류 계급 신분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에서는 각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끼리 혼인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세 유럽에서처럼 봉건제도를 붕괴시킬 강력한 중산 계급이 발생하지 않았고 상인과 하층 사무라이 간의 동맹 관계가 이루어진 것이며 이런 동맹 관계가 봉건 질서를 가진 막부를 무너뜨린 동맹이 되었다는 점을 글쓴이는 지적하고 있다.(p.106) 사실 나는 유럽에서는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가 봉건 신분 제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혁명을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당시 일본에서는 유연한 신분 질서가 있었고 상인과 하층 사무라이 간의 동맹 관계로 강력한 중산 계급이 발생하지 않았는데 왜, 그리고 어떻게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는 명확하게 알려주지는 않는 것 같다. 또한 메이지 유신 당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기치를 내걸었던 존왕파가 승리하여 1868년 왕정복고가 일어났으므로 당연히 지독하게 보수적인 고립주의 정책을 실시할 것이라고 예상되는데 왜 오히려 반대로 개항과 개혁을 했는지는 역시 명확하지 않다. 이렇게 궁금한 점은 다른 책을 통해 채워야 할 듯 하다.

 

 또한 글쓴이는 유럽이나 아시아 어느 나라든 향후 10년간 군비 지출을 하지 않는 나라는 군비를 지출하는 나라를 증가할 가능성이 있으며 일본이 군국화를 국가 예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경제적 번영의 기틀을 마련해 아시아의 통상에서 중심적인 나라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p.400~401)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일본이 천문학적인 국방비를 소비하지 않고 경제 발전에 투자하였기 때문에 세계에서 손 꼽히는 경제 대국이 되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찌 되었건 경제 강대국이 된 것은 분명한 바 글쓴이의 통찰력이 놀랍다. 이에 대해 좀 더 첨언하자면 우리 나라는 미국, 일본으로 대표되는 해양 국가와 중국, 러시아로 대표되는 대륙 국가 사이에 있는 나라로 우리 나라의 국력을 감안했을 때 국방비를 근처 4대 강국보다 많이 투자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붇기를 하는 것 보다는 천문학적 국방비를 경제/문화 발전과 동아시아 평화 정착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 국가 발전에 오히려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닐까?

 

 결국 이 책은 비록 방법론에 있어서는 비판을 받지만 최초로 일본 문화의 핵심적 요소를 명확하게 분석해 놓았다는 점에서 일본 문화 이해의 고전이라고 평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안에 농밀하게 스며 있는 일본 컴플렉스(우월감과 열등감의 미묘한 조합)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일본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사족을 달자면 이 책은 나름 '고전'이라 수많은 번역본이 존재하고 대다수는 을유문화사의 책을 읽는 것 같으나 문예출판사의 책이 역주가 더 충실하고 역주에 다른 학자들의 의견도 틈틈히 들어가 있는 것이 좀 더 좋은 번역본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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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의 신 택리지 : 살고 싶은 곳 - 두 발로 쓴 대한민국 국토 교과서 신정일의 신 택리지 1
신정일 지음 / 타임북스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어떤 책을 읽어볼까 하고 살펴보고 있으면 가끔 '이 책만은 반드시 읽고 소장하고 싶다'라는 책을 발견하게 된다. 나에게 있어서는 바로 이 책이 꼭 읽고 싶은 책이었다. 그 이유는 박원순 희망제작소 소장과 김지하 시인의 추천사 뿐만 아니라 이중환의 [택리지]를 '지금의 택리지'로 다시 쓰고자 하는 글쓴이의 태도와 노력을 환영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이는 정약전의 [현산어보]를 다시 '오늘날의 현산어보'로 다시 쓴 이태원 선생님의 역작 [현산어보를 찾아서]와 같았다.

 

 흔히 우리는 정약전의 현산어보나 이중환의 택리지에 대해 '시대에 뒤쳐져 졌다'고 생각한다. 정약전이 현산어보를 썼을 때나 이중환이 택리지를 썼을 당시와 비교하여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오늘날 그 의미가 많이 퇴색한 것도 사실이다. 누가 오늘날 [현산어보]나 [택지리]를 읽고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오늘날 변화된 환경에 맞게 우리의 고전을 재해색하고 다시 찾아 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의 글쓴이는 20년간 우리 나라 산하를 두 발로 뛰어 다니며 이중환의 [택리지]를 현대적 관점에서 다시 쓰는데 성공하였다. 바로 이런 글쓴이의 노력과 옛 것을 현대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후손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글쓴이의 태도를 나는 환영하는 것이다.

 

 이 책은 총 10권으로 예정된 책 중에서 첫번째 것으로 일종의 <총론>에 해당하는바 글쓴이는 이중헌의 [택리지]에서 이중헌이 말한 사람이 살 만한 곳에 대한 일반론을 소개해주고 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명을 오늘날 지명에 맞추어 소개해 주고 있는 점과 그 지역의 역사와 살았던 인물, 그리고 인문, 풍수지리학적 관점에서 풍부하게 배경지식을 설명해 주고 있어 [택리지] 그 이상의 오늘날의 [택리지]를 쓰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글쓴이가 이야기하는 <풍수지리>에 대해서는 글쓴이의 생각과 다르다. 나는 자연과학 교육을 받았고 실증주의를 추종하기 때문에 과학적 근거가 빈약한 풍수지리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다. 지금은 덜하지만 과거에는 이른바 음덕(陰德)이라고 하여 부모의 묏자리에 대한 풍수지리를 많이 따졌기 때문에 폐단이 심하여 정약용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이 이에 대한 비판을 하였었다. 나 역시 과학적 근거가 빈약한 풍수지리설에 대해서는 이른바 <유사 과학>으로 일견 과학적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비과학적인 학설이라고 여기고 있다. 글쓴이의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국토의 무분멸한 개발에 대한 반대는 나 역시 동감하는 바이나 풍수지리에 대한 글쓴이의 입장에는 찬동할 수 없다.

 

 또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지도를 같이 첨부해줬으면 하는 점이다. 서울을 벗어나기가 힘든 대다수 독자에게는 이 책에서 나오는 수 많은 지명은 일종의 암호에 불과하다. 지도에 그 위치를 표시하여 독자의 편의를 고려해 주는 것은 어땠을까? 하나 덧 붙이자면 글쓴이가 2004년에 출판된 [다시 쓰는 택리지]와 과연 무엇이 다른지도 궁금하다. 단순히 제목만 바뀌어서 낸 책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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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 수첩 - 내 취향에 딱 맞는 125가지 위스키 구르메 수첩 6
성중용 지음 / 우듬지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사실 우리 나라의 위스키 음주 문화는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 있다. '즐기기 위한 술'이 아니라 '취하기 위한 술'을 마시는 우리 나라에서는 알콜 도수가 40% 이상 되는 위스키는 취하기에 매우 좋은 술로서 우리 나라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이른바 '폭탄주' 만드는데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상황이 아닌가 싶다. 이는 나 역시도 마찬가지인데 알콜도수 20% 이상의 독주는 거의 마시지 못하는 나로서는 위스키 같은 독한 술을 왜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마 와인의 경우에는 심장병 예방에 도움이 되지만 위스키 같은 증류주의 경우에는 그런 효과를 얻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간질환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위스키는 '비싼 술'이라는 선입견이 있어 누구를 접대할 때 필수적으로 포함되는 술이기는 하나 취하기 위한 술로서 고급술임에도 불구하고 와인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 역시 최초로 위스키를 마셔본 것은 대학교 1학년 시절 [조니 워커 블랙라벨]이었는데 선배가 가져온 것을 그냥 길거리에서 호기심에 한 모금 마셔본 것에 불과하였다. 당시에 든 생각은 이렇게 독한 술을 왜 마시는 거지라는 생각이었는데 역시 술 역시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이 책에서는 본격적으로 위스키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위스키에 대한 역사 및 간략한 설명을 하고 있다. 위스키는 보리를 증류한 것으로 위스키 특유의 거칠고 연기 냄새가 나는 듯한 맛과 향은 이른바 피트(Peat)를 이용하여 보리를 증류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피트라 함은 우리 나라 말로 이탄인데 석탄의 일종인 이탄을 이용하여 증류하기 때문에 위스키 특유의 향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약 40여 종의 위스키를 설명하고 있는데 주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스카치 위스키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현재 가장 많은 생산량을 자랑하는 곳이 스코틀랜드인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스코틀랜드가 가장 먼저 위스키를 제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피트가 풍부하여 위스키 제조에 좋은 지리적 요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오늘날 최고의 위스키로 스카치 위스키를 꼽는다. 그 중에서도 <발렌타인 30년 산>을 가장 높게 치는데 블렌디드 위스키로 현재 최고의 위스키로 꼽히고 있다. 다만 일본에서도 좋은 위스키가 생산된다는 점이 놀랍고 한 때 우리 나라에서도 위스키를 제조하려고 하였으나 오랜 숙성 기간에 따른 재정 압박 때문에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위스키를 제조하지 않고 스코틀랜드에서 제조된 위스키를 블렌디드하여 수입하는 것만 이루어 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윈저><임페리얼>이 이렇게 생산되 위스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각 위스키 마다 구체적인 별점을 매기던지 혹은 가격을 표시해 주었으면 좀 더 유용한 책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은 아쉬운 점이다. 그래도 이렇게 '취하기 위한 술'로 대접받는 위스키를 좀 더 잘 알아갈 수 있는 얇고도 충실한 책임에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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