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으로부터 - 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위해
오스카 와일드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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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의 글을 읽게 되면 대개 두 종류의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오스카와 사랑에 빠지던가, 오스카 그게 뭐? 하던가.

동성 스캔들로 2년 실형을 받고 감옥에서 연인 더글러스에게 쓴 서간문『심연으로부터』의 첫 페이지를 열 때, 내게 오스카 와일드는 그저 <행복한 왕자>를 쓴 동화작가였으나 책을 절반쯤 읽었을 때 이런 첫인상은 완전히 전복된다. 이토록 예민하고 감성충만하며 나르시시즘 덩어리인 작가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만 이 '좋아해'는 좀 복합적인 감정이어서 '좋아서 미치겠어'가 아니라 연민, 동정, 호감, 비호감 등등을 단서로 달고있는 '좋아해'다.

 

육체적 죽음이든, 사회적 매장이든 작가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은 언제나 비극적이다. 그 순간이야말로 작가의 재능이 스러지는 현장이기 때문.

 

 

문학은 언제나 삶을 앞지르지. 삶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빚는 거야. - p.9

 

책을 읽다 보면 유미주의자이며 자타공인 나르시시스트였던 그가 현실의 삶과 문학 속 삶을 혼동한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드문 일은 아니지만 오스카의 경우는 불행히도 혼동에서 나아가 현실의 삶이 가상의 세계에 매몰되어 현실 세계가 파탄에 이르게 된다. 재능에 대한 대가랄까, 피그말리온의 비극은 예술가들의 숙명인가 싶기도 하고. 여하튼 그런 관점으로 보면 오스카의 생애 마지막 5년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문학적이다. 사랑과 배신과 용서와 우정으로 점철된 마지막 시기는 참으로 드라마틱해서 그러한 불행조차도 오스카가 스스로 조탁한 문학의 한 방식이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 정도.

  

 

어느 날, 와일드의 어머니의 친구였던 애나 드 브레몽 백작 부인이 그에게 왜 더이상 글을 쓰지 않는지 묻자(그녀는 전날 그를 모른체 했던 것을 미안해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난 이미 글로 쓸 수 있는 것을 다 썼습니다. 나는 삶이 무너지는 의미를 모를 때 글을 썼지요. 이젠 그 의미를 알기 때문에 더이상 쓸 게 없습니다. 삶은 글로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살아내는 것입니다. 나는 삶을 살아냈습니다." (p.32)

 

읽으면서 가장 슬펐던 일화인데, 이는 오스카 스스로 자신의 작가적 생명이 끝났음을 인정하는 장면이기 때문.

자신의 작가적 정체성에 스스로 사망 선고를 내린 오스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예술가인 자신이 예술가의 삶을 사는 것이었는데, 인간을 포함해 지상의 모든 것 위에 존재했던 예술이 지상으로 내려와 지상의 것들과 섞이자 단 한 줄도 못 쓰게 된 것이다.

예술은 대중의 사랑을 자양분으로 삼는데 애초에 사랑을 못 받았으면 모를까 성공의 가장 정점에서 추문과 함께 끌어내려진 오스카는 아마 실형을 받고 레딩 감옥에 입소할 때까지도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 기소 전과 선고 직후 해외로 달아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를 거부했던 것일 거고.

아주 어려서부터 문학적인 시각으로, 문학적 틀 안에서, 문학적인 삶을 지향했던 오스카는 감옥에서 그 어떤 것보다 냉엄하고 엄혹한 현실과 직면했을 것이고 그 경험은 오스카를 비로소 가상세계에서 현실세계에 발 딛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지상에 발을 딛은 그는 더 이상 예술의 허구를 끌어안지 못했을 것이다. 원래 가짜가 진짜의 흉내를 더 잘 내는 법이다.

그리하여 2년 형기를 마치고 출옥할 때 작가 오스카는 이미 인간 오스카가 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오스카는 자신이 다시 작가로서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 같다. 그리고 레딩 교도소장의 예언보다 조금 더 살긴 했지만 불과 3년을 못 넘기고 사망한다. 그의 육체적 사망을 연장했던 것도, 앞당겼던 것도 아마 소설에 대한 열망이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 삶에서 사소한 일이나 큰일 같은 건 없어. 모든 게 다 똑같은 가치와 똑같은 크기로 이루어졌지. 모든 것에서 당신에게 굴복하는 내 습관ㅡ 처음에는 대부분 무관심에서 비롯된ㅡ은 서서히 진정한 내 본성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만 거야. 내가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러한 습관은 나의 기질을 영구적이고 치명적인 한 가지 성격으로 고착시키고 만 거라고. (p.56)

 

'Dear Bosie'로 시작하는 옥중 서간『심연으로부터』가 더글러스에게 보내는 장렬한 구애이며, 로비(로버트 로스)를 통해 전하게 한 건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함이라는 장정일의 해석에 동의하기 힘든 것은, 오스카가 더글러스를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 때문이다. 오스카는 언제나 더글러스를 내려다 봤다.

연민은, 츠바이크에 의하면 양날의 검이다. 오스카는 악덕, 위악, 경박, 천박, 즉물성으로 다져진 더글러스의 모든 단점을 제법 객관적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것을 연민하고 때로 동정하며 가련한 한 인생을 자신이 구원할 수 있으리라 자신한다.

감히 자신이 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신의 흉내를 냈던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가 거듭 말하는 것처럼 그는 실제로 더글러스에 대해 더글라스 본인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지는 모르나,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그의 불운이었다. 그런 이유로 오스카의 통렬한 자기순애보적 고백, 자기참회는 동성 스캔들로 인해 야기된 현실적인 문제보다 왜 삶은 문학을 모방할 수 없는가를 향한 비탄으로 읽힌다.

오스카는 무신론자였으나 형기를 마치고 나왔을 때 가톨릭 영세를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가톨릭은 그의 회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안타깝게도 그의 바람이 이루어진 건 사후였다.

 

신들은 참 이상해. 우리를 벌줄 때 우리의 악덕을 그 도구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우리 안의 선하고 다정하고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이용해 우리를 파멸로 이끄니 말이야. - p.80

 

난 이제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뿐 아니라 자신의 선행 때문에도 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해. 나는 그러는 것이 정당하다고 굳게 믿고 있어. -p145-146

 

11장은 이전 장에 비해 오스카의 종교적인 태도가 뚜렷해진 차이가 확실히 느껴진다.

 

 

"당신은 이야기를 눈으로 듣는군요. 그래서 당신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려 합니다. 나르키소스가 죽자, 들판의 꽃들은 몹시 슬퍼하면서 강물에게 그를 애도하기 위한 물방울을 달라고 요구했어요. 그러자 강물은 이렇게 대답했죠. '그럴 수 없어요. 내 물방울들이 모두 눈물이 된다면 내가 나르키소스를 애도하는 데 필요한 물이 부족해질 거예요. 난 그를 사랑했어요.' 그러자 들판의 꽃들이 말했어요. '오! 어떻게 나르키소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렇게 아름다운 청년을 말이에요.' '그가 아름다웠나요?' 강물이 물었어요. '누가 그걸 당신보다 더 잘 알 수 있겠을까요? 그는 매일 당신의 기슭에서 몸을 숙여 당신 물속에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춰보았는걸요…….'"

와일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 말했다.

"그러자 강물이 대답했어요. '내가 그를 사랑했던 것은, 그가 내 위로 몸을 숙일 때마다 그의 눈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와일드는 야릇한 웃음을 터뜨리고는 거드름을 피우면서 덧붙였다.

"이 이야기의 제목은 「제자」입니다."

 

-pp.251-252,「오스카 와일드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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