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도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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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초판 제목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는 개정 복간되면서 <원도>로 바뀌었다.

초반 몇 페이지를 읽다가 생각했다. 초판 제목이 더 잘 어울리는데.

이 생각은 책을 읽는 도중에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나서도 여전히 변함없다.

편집장의 결정이 아쉽고 선선히 동의한 작가의 결정도 아쉽다.


고집이 세고 예민한 아이였던 원도는 아버지의 사망 후 줄곧 자신에게 질문한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상실과 결핍은 원도를 이루는 근원이다. 상실은 갖고 있던 걸 빼앗긴(잃어버린) 것이고, 결핍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원도는 상실의 공포와 결핍의 외로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한다.

나는 왜 죽지 않고 사는가.


원도의 상실과 결핍은 원도와 함께 성장한다.


(작가가 의도한 구도이겠지만) 원도에게 상실의 주체는 남성, 결핍의 주체는 여성이 역할을 양분하고 있다.

죽은 아버지와 산 아버지, 장민석, 야똘은 원도에게 책임과 선택이라는 질문을 던지는 동성이고 어머니, 유경이, 그녀, 아내는 원도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는가 질문하게 하는 이성이다.

이들 중 원도에게 최초로 상실과 결핍을 심은 두 사람은 어린 원도의 눈 앞에서 죽어간 죽은 아버지와 보육원 봉사 때문에 어린 원도를 방치한 어머니다. 그리하여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원도의 질문은 존재의 근원으로 뻗어간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나는 왜 살아있나.

나는 왜 죽지 않고 사는가.


대단원의 끝자락에 작가가 불쑥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런 인물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은가?' (p.239)

개인 감상이지만,

원도의 결말에 같이 책임져달라는 회피로 보여 작가가 비겁하다고 생각했던 한 줄이었다.


-


형식은 카프카, 내용은 다자이 오사무를 떠올리게 하는 <원도>는 가능한 한 호흡에 읽는 게 좋다. 아마도 사십 후반에서 오십 초반 쯤일 원도는 중증의 간경화를 앓고 있는데 경찰과 빚쟁이에게 쫓기는 병든 원도의 몸은 의식과 무의식을 끊임없이 불러들인다. 그런데 이 과정이 연속 불연속의 연장이라 꽤 집중을 요한다. 실제로 소설 초반부를 읽을 때 가장 지배적인 감상은 '끝말잇기를 읽는 것 같다'였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져라'(p.58)는 소설 전체에 걸쳐 강박적으로 등장한다. 산 아버지, 장민석, 야똘의 입을 통해 원도에게 박혀드는 이 말의 원조는 산 아버지이지만 매번 원도를 극단으로 몰고가는 인물은 장민석이다. 소설에서 원도가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인물도 장민석이다.


왜 하필 장민석일까.


소설에서 장민석은 원도에게 상실과 결핍을 모두 자극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한편 원도에게 지향점이기도 한 장민석에 대한 원도의 감정은 애증에 가깝다. 이상형인 상대가 무형이었던 상실과 결핍을 매번 실체적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두 사람의 결말이 비극인 건 운명이다.


소설은 건너뛰지만 아마도 장민석을 해친 인물은 원도일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정황 요소는 '야구 배트'. 사고가 벌어진 그 순간 장민석은 원도에게 장민석이면서 산 아버지이면서 어머니이면서 그녀였을 것이다. 상상하기로, 아마도 그 순간의 원도는 아주 잠깐이지만 자신의 내면 깊숙이 뿌리를 내린 상실과 결핍을 부수는 희열을 느끼지 않았을까.


-


작중에도 작가 후기에도 등장하지 않는 화자의 이름 '원도'가 궁금하여 검색해보니 여러 검색 결과 중에 한유의 원도(原道)가 눈에 띈다. 이어령비어령이라고 그렇게 보니 그럴싸하다. 각설하고.

작가의 의도는 모르겠으나 <원도>는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읽힌다. 하나는 종교적 방식, 다른 하나는 신화적 방식인데 종교적인 관점의 원도는 원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나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자가 된 카인을 연상케하고(이때 장민석은 아벨이다),신화적 관점의 원도는 출생의 비밀과 직면하자 '태어나지 않는 게 가장 좋다'고 절규하며 스스로 두 눈을 찌르지만 결국 삶을 선택했던 오이디푸스를 연상케한다.


사실 나는 카인과 오이디푸스에게 연민을 느끼는 쪽인데 그들의 비극이 신에게 떠밀려 선택과 책임을 강요받은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도도 그들과 처지가 다르지 않다. 원도의 인생을 시궁창에 밀어넣은 상실과 결핍은 애초에 원도의 부모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정작 원도는 한번도 동의한 적 없는 자유, 선택, 책임이라는 명분에 내몰려 원도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방치된다. 하물며 원도의 상실과 결핍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어머니는 결정적인 순간 원도가 최초로 던진 질문에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


개인적으로 좀 의외로웠던 일... 사실 완독 직후에 나는 원도에게 일말의 동정도 연민도 느끼지 않았는데 리뷰를 쓰면서 원도를 향한 감정이 조금 바뀌었다. 누군가(아마도 신이겠지) 미리 값을 설정해둔 시스템에 던져져 좌우 뒤를 돌아볼 생각도 못하고 앞으로 앞으로, 그 끝이 절벽인지도 모르고 성실하게 걸어갔구나 싶은 것이다.


아직 언어를 배우기 전 예민하고 사나운 원도의 기질에 소설 속 자아임에도 질리는 기분이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원도가 떼를 쓰고 울고 고집을 부리는 매순간이 나를 버리지 마라, 나를 봐달라 호소하는 간절함이었겠구다 싶다.


어떤 인간에겐 삶과 죽음의 중간 과정이 그 자체로 불가항력일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 다른 시기, 다른 상황, 다른 나일 때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그때는 원도를 좀 더 넓게 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여담_

책을 읽는 도중에 불현듯 뜬금포 'M은 이 소설을 절대로 안 읽겠구나' 했다. M은 원래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책의 형태를 한 것이면 그게 뭐든 안 읽지만 새삼스레 100% 확신을 했다. 아울러 순문학은 읽는 독자가 대단하고, 장르문학은 쓰는 작가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담2_

공부 못한다고 아이를 벌 세우지 마라. 학습능력이 떨어지고 암기력이 떨어지는 아이도 있는 거다. 그림 못 그리고, 노래 못 한다고 아이를 벌 세우지는 않지 않는가. 도대체가 국영수는 뭐가 다른가. 이해가 안 되고, 암기가 안 되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뭔가가 나를 뚫고 지나갔어.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확 지나가버렸는데 여기 구멍이 있어.여기로 자꾸 아픈 바람이 불어와.여기 있어야 할 게 없어.내 몸에 이게,이게 대체 뭐야 엄마.원도가 운다.무서워서 운다.

(p.67)

자살은 죽음의 형식일 뿐 내용이 아니다.내용에 대해서는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p.78)

원도가 운다.

목 놓아 운다.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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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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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이후 두 번째로 만나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 재미보다 의미로 읽는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고. 오래 고민했는데 구입하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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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 펭귄클래식 7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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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셰익스피어 극 세계를 대표하는 한 단어를 꼽자면 '막장'이다. 여기에 사감으로 수사를 붙이면 '고급진 막장', 그중에서도 막장 오브 막장의 대향연이 『리어 왕』이다.


2.

『리어 왕』의 줄거리를 견인하는 축은 크게 두 개이며 매우 심플하다. 

여기 두 노부가 있다. 한 노부는 딸 셋을 가진 홀아비이며, 다른 노부는 아들 둘을 가진 홀아비이다. 두 노부는 믿었던 자식에게 배신당하고 광야로 쫓겨난다. 가산과 가신을 뺏기고 맨 몸으로 쫓겨난 딸 셋의 노부는 광인이 되고, 두 눈을 잃고 혈혈단신 쫓겨난 아들 둘의 노부는 광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한다. 


딸 셋의 노부는 리어 왕, 아들 둘의 노부는 글로스터 백작이다.


3.

『리어 왕』은 등장인물들 각자가 가진 정의와 악의의 대비가 의심할 바 없이 선명하며 각자의 정의와 악의는 각자의 운명을 '사필귀정', '인과응보'로 이끈다. 

사실 희곡을 읽으면서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는데 셰익스피어가 매우 엄혹하고 차가운 셈법을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공정한 셈법'이 아니라 '차가운 셈법'이라고 한 이유는 셰익스피어식 응징 엔딩이 이를테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를 바늘 끝처럼 한 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저울 눈금 위에 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베니스 상인』의 재판 장면에서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희비극을 갈랐던 '1파운드 살'이 단순히 소재가 아니라 셰익스피어식 '사필귀정', '인과응보'를 대변하는 레토릭의 핵심일 수도 있겠다고 느꼈던 대목.


3+α

리어 왕과 세 딸(고너릴, 리건, 코딜리어), 글로스터 백작과 두 아들(에드가, 에드먼드), 켄트 백작과 (고너릴의)시종 오스왈드, 콘월 공작과 올버니 공작은 모두 각자의 정의와 의지로 자기 운명의 엔딩을 준비하는데 선과 악의 결말이 흥미롭다. 단순계산으로는 선은 승리하고 악은 패배해야 하지만 문제는 등장인물 모두 선하기만 한 것도 악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정의와 선의로 한 행동이라도 상대에겐 불의와 악의가 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벌어진 결과의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코딜리어와 글로스터 백작인데, 코딜리어는 굳이 애정을 확인하고 싶은 아버지의 심경을 알면서도 끝까지 자기 결백을 고집하고(예.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하옵는데), 글로스터 백작은 자신의 출생에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차남 에드문드를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모욕한다. 두 사람 모두 악의는 없었으나 문제는 둘의 태도가 상대에겐 악의로 작용했다는 거다. 결국 나의 선의는 결백하며 그것이 정의라는 두 사람의 오만과 무지가 이 모든 막장과 파국의 단초가 된다.


리어 왕의 어긋난 선의도 마찬가지.

권력과 재산을 나눠주면서 그 김에 딸들의 애정도 확인하고 공치사도 좀 하고 싶었던 것 뿐인데 정작 가장 아끼고 믿었던 막내딸이 입바른 소리만 늘어놓으니 그만 마음이 상할대로 상한다. 여기서 리어의 치명적인 잘못은 코딜리어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코딜리어의 몫까지 다른 두 딸에게 줘버렸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리어 왕'의 비극은 나의 선의가 상대에겐 악의가 되는 역설이 빚어낸 파국이다. 한편 나의 선의와 너의 악의가 빚어낸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자들의 장송곡이기도 하다.


4.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전개를 보며 '파국이다 파국!' 가슴 졸이다 보면 한순간 인물들의 서사가 충돌하며 빚어낸 비극의 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이 막장의 비극은 산 자와 죽은 자로 정리된다. 살아남은 자는 당연히 나의 선의와 타인의 악의로부터 한 걸음 비켜간 자다.


5. 

셰익스피어 비극을 구성하는 핵심은 이분법적인 선악 대결 구도에 있다. 이 선명한 선악 구도가 등장인물들의 다층적인 서사와 맞물려 굴러가는 것인데, 즉 나쁜 놈도 할 말이 있다. 그리고 예의 셰익스피어의 차가운 셈법이 모든 인물들에게 '1파운드 살'의 저울을 들이댄다.



리어

너의 신분을 이토록 심히 착각하고, 너를 이곳에 묶어놓은 놈이 누구냐?

켄트

놈과 년입니다. 폐하의 사위와 딸입니다.

리어

아니야.

켄트

맞습니다.

리어

아니라고 했다.

켄트

맞다니까요?

리어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켄트

아니요, 그들이 그랬습니다.

리어

주피터에게 걸고 맹세하건대, 아니다.

켄트

주노에 맹세하건대, 맞습니다.



p.174 (펭귄)





파국의 발단 

*발췌 중 '(…)'는 내가 임의로 중략한 것임


LEAR (…)What can you say to draw A third more opulent than your sister? Speak!

CORDELIA Nothing, my lord.

LEAR Nothing?

CORDELIA Nothing.

LEAR

Nothing will come of nothing. Speak again.

CORDELIA 

Unhappy that I am, I cannot heave

My heart into my mouth. I love your majesty

According to my bond, no more nor less.

LEAR

How, how, Cordelia! Mend your speech a little

Lest you may mar your fortunes.


p.597-598 (펭귄 원서)


'Nothing, no more nor less' 라니...

코딜리어의 매정한 애정표현에 'How, how,' 되뇌는 리어의 심정이란. 이쯤되면 'Nothing bird' 코딜리어의 고고한 결백에 망할년 소리가 절로 나올만도 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샤일록의 딸한테도 비슷한 욕을 했던 것 같은데)


딸- 거너릴의 배신과 최초로 맞닥뜨린 직후 리어의 한탄은 운율의 결을 느낄 수 있는 원문이 보다 절절하고 가슴 아프다.


LEAR

Does any here know me? This is not Lear.

Does Lear walk thus, speak thus? Where are his eyes?

Either his notion weakens, his discernings

Are lethargied - Ha! Waking? 'Tis not so!

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


p.632 (펭귄 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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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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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는 일찍 죽었다. 물론 그의 시는 훌륭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은 영원히 젊은 기형도에 대한 시기심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봄날이 가고 일상의 권태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더욱 그에게 몰두할 것이다. 남들은 젠더시스템+연령주의 사회에서 이미 아웃된 나의 남근 선망(penis envy) 혹은 히스테리라고 진단하겠지만, 이유야 어떻든 간에, 솔직히 말해서 나는 기형도 같은 '젊은' '남성'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다.

중산층(비장애인, 좋은 학벌 등등……) 남성에 한정되겠지만 남성이고 젊다는 것은 계급과 자원 그 이상의 것이다. 그들은 문화적, 심리적 차원에서 사람들이 욕망하는 그 무엇을 노력 없이 가진 자들이다. 그들의 자원이 자원일 수 있는 것은 성별 사회, 연령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그들의 묘한 우월감, 거들먹거림, 나르시시즘, 삶에 시달리지 않은 근육, 고통이나 죽음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쿨'한 척에 나는 욕지기를 느꼈다.


pp.142-143,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쌤'에게 누군가는 질문을 해야 한다. "기형도를 아세요?"

그리고 '정희진쌤'은 이에 대답해야 한다.


알라딘서재에 간간히 등장하는 '정희진쌤'이 궁금했다. 그리하여 그의 책 중 진입장벽이 낮을 것 같아서 고른 『혼자서 본 영화』를 읽는 동안 '젠더가 생계수단'이라고 말하는 저자에게 먹고사니즘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쯤일까, 내내 궁금했다. 


나의 주장이 곧 정의라는 태도는 위험하다. 무덤 속에서 머리채 잡혀 끌려나온 시인 기형도에게 애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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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 - 예술과 철학의 질문들
백민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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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백민석이 미학에세이를 쓰면 이런 글이 나오는구나.

백민석의 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관하여 백민석이 하고 싶은 얘기에 쉽게 진입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실사화가 여러모로 화제였는데 화제의 중심은 역시 '에리얼 캐스팅'이었다. 결론적으로 '흑인 인어공주'는 화제성에선 성공했으나 중요한 흥행은 재미를 못 보면서 인종차별, 외모차별을 전가의 보도처럼 앞세운 디즈니의 PC주의가 대중을 설득하는데 실패했음을 확인시켜줬다.


'미(美)'를 정의하는 건 쉽다. 고금을 막론하고 '미인'의 정의는 균형과 비율의 범위를 벗어난 적이 없다. 반면 '추(醜)'는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먼저 질문을 해보자. 아름답지 않으면 추한가? 그렇지 않다. 누구의 '추'가 다른 누구에겐 '추가 아닌 것'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미'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아름답다'의 반대는 '추하다'가 아니라 '아름답지 않다'고 해야 한다.

세상에 보편적인 의미의 '아름다운' 기준은 있어도 '추한' 기준은 없다. 달리 말하면 미는 추가 될 수 없어도, 추는 미가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런 잣대로 내게 추상(抽象) 미술은 '아름답지 않은(=불균형)' 것에서 잉태된 표현 예술이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다른 무엇'을 증명하기 위한 표현 문법이랄지. 그리하여 같은 맥락으로 이 책의 제목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가리키는 것도 결국 '추상미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해할 수 없으니 '추상'이오, 그럼에도 아름다우니 '미술(美術)'인 것이다.


저자가 백민석이다. 그의 소설만큼은 아니지만 이 책에는 심신이 미약한 사람이라면 권하고 싶지 않은 시각 자료가 점프스퀘어마냥 등장하는데, 나는 이미지가 주는 공포에 몹시 취약한 편이라 어떤 사진 자료는 책갈피로 가리고 텍스트를 읽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했다. 이를테면 초장에 등장하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살인마 잭의 집'이 이에 해당한다. 영화의 한 장면인 살인마 잭이 '시체들로 지은 집'은 지면임에도 불구하고 시각적 충격이 한동안 지속될 정도로 끔찍했다.


*원제는 'The House that Jack Built'다. 의미가 있고 없고 떠나서 제목에 스포를 하다니...--



한때 나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꽤 잘 봤는데 따져보니 <킹덤 2> 이후 그러니까 도그마95 선언 이후부터 이 감독의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그마95 리스트에 오른 감독이나 시놉이 불호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그러니까 '싫진 않아, 하지만 보진 않겠어' 인 거지. 의외였던 건 국내 영화 <인터뷰>가 도그마95 리스트에 있다는 사실이다. 리스트에서 <인터뷰>를 발견하고 왜 이 영화가? 싶었는데 변혁 감독이 <상류사회>에서 보여준 괴랄하고 괴랄했던 25금 씬을 떠올리니 아~ 싶기도 하다.

역시 사족이지만, '킹덤'은 공포물 수작이다. 이 영화는 심야영화관에서 봐야 영화를 구성하는 공포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미국 드라마 버전도 있다는데 각색한 내용을 보니 원작만 못한 것 같다.


시각 자료 중 박미경 <Deep Dark Fantasy>가 흥미로웠고(실물이 궁금했고), 백민석이 보고 있으면 마음에 온기가 돈다고 극찬한(물론 본인의 취향이라고 바로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서도), 김순임 <비둘기 소년>은 작가의 호감과 반대로 나는 좀 많이 불편했다. 이러한 감상의 차이는 백민석이 작품의 재료로 쓰인 펠트의 질감과 성질에 감상의 방점을 찍었다면, 나는 소년의 몸짓과 표정에 방점을 찍은 데서 비롯한다. 종이를 활용한 이 설치미술이, 만든 사람의 의도야 어떻든, 내 눈엔 불행에 박제된 소년의 체념으로 느껴졌다. 유사한 예로 '성냥팔이 소녀'가 떠오른다.


가볍게 펼쳤지만 페이지가 무겁게 넘어간 에세이였다.



예술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소비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예술은 작품을 소비하면서 작품의 의미까지 사유하게 하며, 사유의 과정을 통해 소비자를 윤리적 판단에 이르게 한다. 

-p.17


가난은 추상이 아니다. 가난은 <소공녀>가 보여주듯 삶의 가장 디테일한 부분까지 옭아맨다.

-p.48


F.스콧 피츠제럴드(1896~1940)는 소설가지만 재즈 음악하면 꼭 떠오르는 인물이다. 그는 1922년 『재즈 시대의 이야기』란 단편집을 내고 이어질 '재즈 시대'를 이끌기도 했다. 그가 유행시킨 '재즈 시대'라는 말은, 재즈 음악이 크게 융성한 1920년에서 1930년 사이를 일컫는다. 재즈 시대를 그는 마치 자신을 위한 시대인 양 마음껏 누렸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고, 사랑하는 연인 젤다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젋고 건강했던 그에겐 돈과 창작욕이 흘러넘쳤다.


자전적 에세이 『재즈 시대의 메아리』에서 피츠제럴드는 재즈를 이렇게 정의한다. "재즈라는 단어는(…) 원래는 섹스를 의미하는 단어였고 그다음에는 춤, 이어서 음악을 가리키게 되었다. 말하자면 불안하거나 흥분된 자극의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로 ……."


피츠제럴드는 재즈처럼 감각적인 소설들을 썼고, 젤다와 함께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의 호텔들을 옮겨 다니며 재즈처럼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하지만 재즈 시대가 저물면서 그의 호시절도 저문다. 

-pp.141-142


추상회화는 그래서 가사 없이 연주로만 이뤄진 음악과 같다. 우리는 차이코프스키나 쇼스타코비치의 합주협주곡을 굳이 문자 언어로 옮기려 하지 않는다. 그 일이 아마도 가능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라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사 없는 연주 음악 역시 이미지도 언어도 아닌, 추상적인 어떤 것이다.

-p.245


인용글의 <소공녀>는 2017년 개봉작 한국영화임.

인용글 중 '피츠제럴드' 부분은 저자가 인용한 책 『재즈 시대의 메아리』이 절판된 이유로 좀 길게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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